제123화.
“잠깐이면 된다니 차 팀장 이 애랑 나가 있게.”
“잠시만요, 무슨 일로 찾아오신 건지 그것만 알려주세요.”
퍽 놀랐는지 평상시 똑 부러지는 말투의 김서원답지 않게 목소리가 가늘게 떨려왔다.
“안상훈 씨 사고 관련해서 조사할 일이 있어서 왔습니다.”
안상훈이라면 [서풍TWO]의 인테리어 건으로 만났던 그 셰프였다.
MS 백화점에서 구본석 과장이 이상한 말을 했던 걸 분명히 들었었는데…바쁜 일상 속에서 잠시 잊고 있었다.
지금 저 사람 말대로라면 안상훈 셰프의 사고가 정말 여기 [만가복]하고 관련이 있다는 말인데?
자리에서 꼼짝하지 않고 생각에 깊이 빠져있는 김서원의 어깨에 커다란 손이 얹혔다.
“김서원 씨, 괜찮으세요?”
“아, 네. 그, 그럼요.”
“그러면 잠시 나가 있도록 합시다. 약속도 없이 들이닥친 거라 오래 있지 않을 겁니다.”
마치 형사들한테 들으라는 듯이 차성철이 또박또박 큰 소리로 말했다.
“네, 몇 가지 조사만 하고 갈 겁니다. 오늘은 말이죠.”
신명훈 조사과장의 매서운 눈이 차성철을 쓱 스캔하고는 다시 김형식에게로 돌아갔다.
김서원과 차성철이 나가며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리자 신명훈이 바로 본론을 꺼내기 시작했다.
“김형식 회장님. 강기태 잘 아시죠?”
“강기태? 우리 회사 직원인가요?”
“그러면, 안상훈 씨는 잘 아시겠죠?”
“안상훈이라…그 이름도 내가 알아야 하는 이름인가? 워낙 직원 수가 많아서 내가 일일이 다 기억하지는 못하는데, 그게 문제가 돼서 찾아온 건 아닐 테고.”
신명훈이 뭐 익히 예상했던 반응이라는 듯 들고 있던 서류 봉투에서 사진을 꺼내 보였다.
“누군지 알아보시겠죠?”
“나하고 좀 비슷해 보이는데, 이 사람이 안상훈인가요?”
엄지손톱으로 눈썹 주위를 긁적이던 신명훈이 테이블 위에 김형식, 안상훈, 강기태의 사진을 나란히 놓았다.
“이건 뭐 고스톱도 아니고, 내가 이렇게 짝을 맞추고 앉아 있네. 여기 이 사진이 앞에 앉아계시는 유명하신 김형식 회장님.”
김형식의 사진을 들어 차 안에 같이 찍힌 김형식과 강기태 사진 옆에 붙여 보였다.
“요렇게 같은 사진 맞죠? 짝하나 맞췄고.”
“그리고, 요게 강기태. 이제 좀 짝이 맞춰지시나요?”
김형식이 지루하다는 듯 고개를 꺾어 한 바퀴 돌렸다.
“자세히 보니 여기는 내가 맞는 것 같고, 옆에 이 남자는 한 번 만난 적 있는 것 같은데, 내가 이런 사람 이름까지 알지는 못하지.”
“네, 이런 어마어마한 기업체 회장님이 어떻게 그 많은 사람 이름을 일일이 다 알고 계시겠습니까?”
입꼬리를 올리며 비릿한 웃음을 내보인 김형식이 매서운 눈을 들어 신명훈을 쳐다봤다.
“시간 끌지 않겠습니다. 여기 사진에 있는 강기태씨가 김형식 회장님과의 모든 거래 내용을 다 밝혔습니다.”
“그자가 나랑 무슨 거래를 했다는 얘기인지 이해가 잘되지 않는군. 감히 그런 사람의 말을 믿고, 다른 사람도 아닌 나를 조사하겠다고 들이닥친 당신들도 우습고 말이야.”
김형식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돌아가요. 이런 무례함은 한 번으로 충분해. 앞으로 나한테 뭘 물어보려거든 정식 절차 밟아서 오도록 하십시오.”
“아, 깜빡했네, 정식 절차. 이 형사. 아직 영장 안 꺼냈나?”
옆에 있던 이 형사라 불리는 남자가 카키색 야상점퍼 안 주머니에서 종이를 꺼내 펼쳐 보였다.
“이제 다시 몇 가지 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김형식의 눈썹이 제대로 꿈틀거렸다.
* * *
중식도를 통해 들은 엄청난 얘기들을 믿기 어려웠다.
무엇보다 아빠가 죽는 순간에 가까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남자, 그가 제발 서인우가 아는 사람이 아니기를 간절히 바랐다.
“사부, 사부가 말한 그 남자 내가 반드시 알아낼 거야. 우리 아빠의 마지막 순간에 어떤 일이 벌어졌던 건지.”
-그냥 잊고 네 인생 살아. 그게 서동수가 바라는 일이라니까.
“알아, 아빠의 사랑에 평생 보답하는 마음으로 나 정말 제대로 멋지게 살아볼 거야.”
조금씩 진정되기 시작한 서인우는 엄마한테 전해 받은 아빠의 일기장을 다시 펼쳐보았다.
[나한테 자꾸만 레시피를 묻는 형식이.
내가 해줄 수 있는 건 하나부터 열까지 요리하는 과정을 공개하는 것밖에는 없었다.
하지만, 그 어떤 것을 보여줘도 계속 불만을 표현하는 그에게 더는 해줄 수 있는 게 없었다.
조금만 욕심을 버리고 살면 인생이 더 행복할 텐데…
언젠가는 그 말을 꼭 해주고 싶다.]
서인우는 자기가 들었던 내용이 기록처럼 적혀 있는 걸 보니 신기하게 느껴졌다.
그렇게 아빠의 기록을 하나하나 꺼내 보며 추억을 곱씹었다.
[사랑하는 내 아들 인우가 처음으로 술을 마시고 들어왔다.
정확히는 인우가 술을 처음 마신 건 아니었다.
우리 부부에게 처음 마신 걸로 공개했던 거지.
고등학교 2학년 겨울 방학에 어디선가 술을 마시고 아닌 척 들어와 얘기하는 인우에게서 껌 냄새와 섞인 술 냄새를 느꼈었다.
물론 우리 인우는 그 사실을 모르겠지만.
공식적으로 처음 술을 마시고 왔고, 나는 그게 너무 귀여워서 다른 날보다 더 시원한 짬뽕을 만들어 주었다.
콧등에 맺힌 땀을 닦으며 내가 만든 짬뽕 국물을 다 먹는 인우를 보고 있자니, 언제 이렇게 컸는지 새삼 세월이 참 빠르다는 걸 느꼈다.
이 모습을 오래오래 보고 싶은데….]
그 뒤에는 아무것도 적혀 있지 않았다.
하지만, 너무나 잘 알겠기에 가슴이 미어져 없어질 것 같았다.
그리움에도 점수를 매길 수 있다면 지금 서인우는 최고점에 도달한 것 같았다.
더 읽어 내려가기 힘들었다.
아빠의 기록을 하루에 다 읽어버리고 싶지도 않았다.
옷걸이에 걸려있는 후드점퍼를 걸쳐 입고 그대로 밖으로 나왔다.
머릿속이 복잡할 때마다 해왔던 습관대로 오후의 거리를 무작정 달렸다.
사람들이 많은 시간대였다.
오가며 부딪히는 사람이 오늘은 그냥 싫었다.
멀리 보이는 학교로 들어가 운동장을 뛰기 시작했다.
마치 육상선수처럼 최고 속력으로.
한참을 달리다 보니 주머니에 넣어 두었던 핸드폰이 정신없이 울어댔다.
-서인우 너 지금 어디야? 왜 이렇게 전화를 안 받냐?
“미안. 운동장 달리고 있었어. 전혀 못 들었다.”
-운동 못 하고 죽은 귀신이 붙었나? 새벽마다 운동하면서 뭔 달리기를 또 하냐? 올림픽이라도 나갈래?
이준형의 농담 섞인 말을 듣고 있자니 반가웠다.
“그런데 넌 어디냐? 시간 되면 술이나….”
-빨리 튀어와. 청춘 포차로.
“알았어. 바로 갈게.”
-안주는 내가 알아서 시킨다.
이럴 때 보면 이준형은 정말 아빠가 보내준 친구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항상 힘들다고 느낄 때마다 이준형이 곁에 있어 주었다.
말하지 않아도 언제나 먼저.
“안녕하세요, 사장님. 잘 지내셨죠?”
들어오면서 먼저 인사를 건네는 서인우를 보며 사장이 고갯짓으로 이준형이 앉은 자리를 가리켰다.
“오랜만에 왔네. 요즘 바쁘지?”
“네, 그런데 앞으로 더 바빠질 것 같습니다. 돈을 좀 쓸어 모아야 해서요.”
“어, 그래? 그런 일로 바쁜 거면 얼마든지 오케이지.”
웃으며 이준형이 앉아있는 테이블로 다가갔다.
“나 안 씻고 바로 왔다. 땀 냄새 많이 나도 참아.”
“괜찮아. 빨리 마시고 취하면 전혀 몰라.”
이준형다운 대답이었다.
“여기 주문한 생맥 두잔. 아! 얼마 전에 그 눈 크고 예쁜 여자분 왔다 갔는데, 오빠랑 같이.”
“제시카씨가 왔었다고요? 언제요? 오빠 확실해요? 아니, 오빠라면 당연히 친오빠겠죠?”
“어? 나도 그건 잘 모르겠는데.”
“죄송합니다.”
당황하는 사장한테 정중히 사과한 서인우가 이준형에게 잔을 가져가 부딪혔다.
“그렇게 반가우면 연락하고 만나, 인마.”
“누가 만난대? 그냥 우리 단골집에 왔었다니까 막 피어오르는 지적 호기심이지.”
“안주는 안 시켰어?”
“어묵탕 먼저 시켰다. 소주 당겨서.”
“그럼 매운 닭발 하나 더 시키자.”
이준형이 서인우의 눈을 가만히 쳐다봤다.
“너 왜 이래? 무슨 일 있어?”
“닭발 시키는 데 무슨 일이 꼭 있어야 하냐?”
“내가 너를 몰라? 요리 시작하고 웬만하면 강한 양념 안 먹는 네가 매운 닭발을 시켰다는 건 분명 속에 뭔가가 타고 있다는 건데.”
둘이 대화하는 사이 연기를 뿜어내며 어묵탕이 테이블에 놓였다.
“사장님, 저희 매운 닭발하고 소주도 한 병 주세요.”
“오늘 좀 마시려나 보네. 돈 쓸어 담으려면 적당히 마셔.”
“네? 뭘 쓸어 담아요?”
“아, 내가 돈 쓸어 담느라 앞으로 바쁠 거라고 했어.”
“이야 정말 오래 살고 볼일이다. 서인우 입에서 그런 소리도 다 들어보고. 진짜 너 오늘 이상한데?”
대답 대신 앞에 놓인 맥주잔을 들어 그대로 쭉 들이켰다.
거의 반이 넘는 양을 단숨에 마셔버렸다.
“인우야, 천천히 마셔. 내일 새벽시장 가야 하잖아.”
“걱정하지 마. 쓰러져도 새벽시장은 꼭 갈 거니까. 어떻게 얻은 행운인데…더 열심히 그리고 더 악착같이 해서 꼭 성공할 거다.”
이준형이 걱정스러운 눈으로 서인우를 빤히 쳐다봤다.
“넌 오늘 박정원 대표님 잘 만나고 왔어?”
“그럼. 대표님 회사 갔더니 정말 근사하더라. 우리랑 급이 달라, 급이.”
“우리도 급이 달라질 거야. 꼭 그렇게 만들 거다.”
고개를 갸웃거리며 맥주를 들이켠 이준형이 어묵을 하나 건져 입에 넣었다.
“이 집 어묵탕은 언제 먹어도 맛있네. 너도 안주 먹으면서 마셔.”
“우리 [서풍 TWO] 음식도 항상 똑같이 맛있게 만들 거야. 내가 만드는 한 절대 변하지 않아.”
“그래, 너는 변함없이 끝내주는 요리를 계속 만들면서 [서풍 TWO]를 키워가고, 나는 우리 새우면 사업을 본격적으로 해보려고.”
멀리서부터 매콤한 냄새가 서인우의 코를 자극했다.
“우리 닭발이 다 됐나 보다.”
“어디? 아직 아닌데?”
이준형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주방에서 나온 사장이 시뻘건 닭발을 담은 철판을 받침에 담아 들고 다가왔다.
“서인우 개코. 여전하네.”
“화끈하게 매우니까 어묵탕이랑 같이 먹어.”
“네, 감사합니다.”
“우선 먹자.”
둘이 매콤한 닭발을 입에 넣고는 만족하는 미소를 지어 보였다.
알싸하게 매운맛과 자꾸 손이 가는 적당한 단맛과 불맛이 섞여 그야말로 일품이었다.
입술이 부르튼 것처럼 벌게진 이준형과 서인우가 서로를 보며 크게 소리 내 웃었다.
“박정원 대표님이 전에 말씀하신 대로 새우면 사업 공동으로 진행하자 하셔서 오늘 너랑 의논하고 계약서 보내려고 해.”
“네가 일이 많아질 텐데, 가능하겠어?”
“그래서 [서풍 TWO] 에 나를 대신할 사람을 하나 더 뽑고, 나는 새우면 사업을 본격적으로 키워볼게. 물론 나를 대신할 사람은 정말….”
“쉽게 구하지. 사실 없어도 딱히 차이도 안 날 것 같긴 해.”
“뭐? 너 그렇게 말하면 섭하지.”
서인우가 이준형의 잔에 소주를 따라 주었다.
“네 일은 누구나 대신 할 수 있어. 하지만, 네 빈자리는 누구도 채울 수 없으니까. 그냥 가끔 들러서 나에게 힘이 돼줘.”
“야, 서인우. 너 벌써 취했냐?”
“나 네가 있어서 너무 다행이야. 정말 좋다. 네가.”
하지만, 그런 이준형에게도 중식도 얘기를 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오늘 들은 얘기도 절대 할 수 없다.
답답한 마음을 술로 꾹꾹 눌러 내리려 했지만, 그게 쉽지 않았다.
“오늘 박정원 대표님 만난 얘기는 다 설명했고, 너 이모네서 무슨 일 있었어? 혹시 어머니 더 안 좋아지셨냐?”
“아니, 우리 엄마 정말 많이 좋아지셨어. 그래서 나 너무 감사해.”
“그런데, 너 오늘 왜 이래? 다른 날하고 정말 달라. 이 표정은 분명 뭔가 있는 거 맞는데…뭐야 도대체?”
“준형아!”
서인우가 착 가라앉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오늘 엄마한테 뭘 받았는지 알아?”
“뭔데? 무슨 일이야 대체?”
“우리 아빠, 돌아가신 우리 아빠의 기록이 담겨 있는 일기장.”
“뭐? 아버지 일기장?”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이며 술잔을 비운 서인우가 순식간에 붉어진 눈으로 이준형을 쳐다봤다.
“그 일기장에 우리 아빠가 세상에서 가장 믿고 좋아하는 친구에게 나를 부탁했다고 적혀 있어.”
“너를 부탁해?”
“내가 간절히 원하는 무언가가 생기면 그때 꼭 내 옆에서 꿈을 이룰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부디…내 곁에서 오래오래 있어 달라고….”
서인우의 목소리가 다시 메어왔다.
‘그리고, 그 친구가 우리 아빠의 죽음에 관한 비밀을 알고 있었어. 나는 그 비밀을 꼭 밝혀낼 거야.’
입 밖으로 내놓지 못하는 말들을 독한 술과 함께 속으로 다시 밀어 넣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