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2화.
1월 14일.
유독 추웠던 그 날.
겨울 바다를 보자고 친구들과 떠난 3박 4일 부산 여행의 둘째 날이었다.
겨울 한파보다 더 가슴 시렸던 치열한 입시를 같이한 친구 세 명과 호기롭게 떠난 여행에서 듣게 된 아빠의 사고 소식.
“평생 같이할 수 있는 친구가 있다는 건 정말 행복한 일이다. 너한테 그런 친구가 생긴다면 아빠는 더 바랄 게 없어.”
“이번에 친구들하고 가서 맛집 많이 알아놓을게요. 다음에는 엄마랑 우리 가족 셋이 함께 가요.”
“네 아빠가 그렇게 오래 쉴 수나 있는 줄 아니? 일하고 결혼한 사람인데…. 당신 그러다가 왕따 되는 수가 있어. 조심해!”
여행 전날 나눈 대화가 마지막이었다.
“사부, 지금 생각해 보니까 그때 아빠의 눈이 무척 슬퍼 보였던 것 같아.”
문을 나서는 아들을 다시 불러 꼭 안아주었던 그 모습을 서인우는 기억했다.
부산에서 어떻게 서울로 올라왔는지 잘 생각나지는 않았지만, 정신없이 병원으로 달려갔을 땐 아빠는 이미 서늘하게 식어가고 있었다.
분명 혼자 산에 갔다가 실족사했다고 들었는데…
그게 아니라면?
“사부, 자세히 얘기해봐. 아빠가 돌아가신 날 분명히 혼자 산에 가셨던 게 아니라는 말이야?”
-처음부터 같이 간 건지, 아니면 가서 만난 건지는 모르지만, 확실한 건 서동수가 죽는 그 순간에 분명 옆에 누가 있었어.
“그, 그게 누군데?”
-얼굴이 보이지 않아서 나도 누군지는 몰라. 친한 사이처럼 보였는데.
“무슨 말이라도 한 건 없었어? 단서가 될만한 게 있을지도 몰라. 잘 생각해봐!”
중식도가 빙그르르 돌다가 다시 뚝 멈춰 섰다.
-인제 와서 알게 되면 뭐가 달라지는데?
“달라지지. 누군지 내가 절대 용서하지 않을 거니까.”
-그렇다고 죽은 내 친구가 살아 돌아오나?
“그래도…난 절대 용서할 수 없어. 그러니 잘 생각해봐. 분명 김형식 그 인간일 거야. 맞지?”
-얼굴이 안 보였다니까. 누군지 정말 몰라.
“으윽. 제발 누군지 알 방법이 있는지 기억을 좀 떠올려봐, 사부. 이렇게 부탁할게.”
서인우가 두 손을 모으며 간절한 눈빛을 보냈다.
-미안하다. 정말 얼굴을 보지 못했어. 날 살려준 친구한테 죽을죄를 지었다는 말을 얼핏 들은 것 같은데…진짜 누군지 몰라.
순간 서인우의 얼굴이 하얗게 변해버렸다.
“사부, 옆에 있었다던 그 사람이 뭐라 했다고? 날 살려준 친구라고 했단 말이지? 확실해?”
-서동수가 죽는 장면이 보일 때 동시에 들렸어. 너 자꾸 무섭게 왜 그래? 나도 잘 몰라. 그러니, 너도 잊어버려.
“그럴 리는 없는데…혹시 아빠가 김형식이 죽을 뻔한 걸 살려준 적이 있는 걸까?”
-너는 김형식이 네 아빠를 죽였을 수도 있다고 믿는구나. 그 인간 나도 마음에 들지는 않지만, 그렇게 사람을 무조건 의심하면 안 되는 거야.
서인우가 계속 고개를 젓고 있었다.
-왜? 너 혹시 짚이는 사람이 있는 거야?
“전에 들은 적이 있어. 산에서 다리를 다친 아저씨를 아빠가 업고 병원까지 갔었다고. 아빠 아니면 정말 죽을 뻔했다고….”
-누가? 지금 누구 얘기하는 건데?
“그럴 리는 없는데….”
-너 나 숨 막혀 죽는 꼴 보고 싶어서 그래? 누구 말하는 거냐고?
“아빠 친구 최영만 아저씨한테 들었어.”
-그 친구는 너를 가장 많이 도와줬다고 하지 않았어? 지금까지 연락하고 지내는 그 사람?
서인우는 얼이 나간 사람처럼 계속 고개를 저었다.
절대 최영만 아저씨는 아닐 거다.
단지 비슷한 스토리를 가지고 있을 뿐.
“그 아저씨는 절대 아니야. 나를 얼마나 많이 아끼고 도와줬는데….”
-그래, 사람 함부로 의심하고 그러는 거 아니다.
“좀 알아봐야겠어. 분명 뭔가 있을 거야.”
잠시 깊은 생각에 빠진 듯 보이던 서인우가 순간 고개를 높이 쳐들었다.
터질 듯 시뻘게진 눈으로 중식도를 뚫어지게 쳐다봤다.
“사부!”
-왜 또? 네가 부를 때마다 내가 아주 경기를 일으키겠다. 이번에는 뭔데?
“그러면, 사부가 본 장면을 아빠한테 얘기해줬다는 거잖아?”
-내가 며칠을 끙끙대다가 서동수한테 말했어. 나는 어떻게 해서든 내 친구의 죽음을 막고 싶었으니까.
“그러니까 이상하잖아. 미리 알고 있었는데, 왜 막지 못한 거야? 아니, 산에서 굴러떨어진다고 했는데, 뭣 때문에 순순히 산에 간 거냐고?”
-모르겠냐?
“뭐가?”
-서동수의 행운을 아들인 너한테 다 주고 싶다고 했다니까. 이 운명을 받아들여야 네가 그 행운을 전부 가져갈 수 있을 거라고 굳게 믿었어.
“으윽! 왜? 내가 뭐라고?”
서인우가 포효하듯 소리를 질러댔다.
이미 말라 갈라진 목에서 거친 소리가 튀어나왔다.
한동안 방안에 오열하는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 * *
오랜만에 아빠를 만나러 [만가복] 본사에 도착한 김서원이 지하 주차장에서 엘리베이터를 기다리고 있었다.
띵!
엘리베이터 도착음과 함께 문이 열리고 내리려던 차성철 팀장이 김서원을 보고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십니까?”
“아, 안녕하세요. 그럼.”
“회장님 만나러 오신 겁니까?”
“네. 너무 오래 발길을 끊었더니 어찌나 역정을 내시는지…얼굴도장 찍으러 왔습니다.”
씩 웃는 차성철을 보자 아차 하는 후회가 되었다.
‘저 인간 아빠 오른팔인데, 별소리를 다 했네.’
“그럼 각자 가던 길 가는 거로.”
대충 얼버무리며 엘리베이터 10층을 누르고 막 문이 닫히려는데, 차성철이 다시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뭐 잊으신 거라도 있나 보네요.”
역시 그냥 웃고 있는 차성철에게서 시선을 떼고 정면만 바라봤다.
엘리베이터 좁은 공간에 남자든 여자든 단둘이 있는 상황이 썩 편하지는 않았다.
“몇 층…?”
깜빡했는지 층수를 누르지 않고 있는 차성철에게 어색함을 덜기 위해 던진 질문이었다.
“저도 회장님이 잠시 들르라고 하신 말씀이 기억나셔요.”
“아, 네.”
라고 대답은 아무렇지 않게 했지만, 왜 굳이, 지금인지 알 수 없었다.
그런 김서원의 속마음을 마치 읽고 있다는 듯 연신 미소를 지으며 쳐다보고 있는 차성철의 시선을 애써 피하며 습관처럼 다리를 떨고 서 있었다.
띵!
평상시에는 층층이 서기도 하던 엘리베이터가 오늘따라 아무도 없이 단둘이 10층에 도착했다.
“안녕하세요. 두 분 같이 회장님과 약속이 된 건가요?”
“아니에요.”
“네.”
비서가 난처한 듯 한 번 웃더니 회장실을 노크하며 둘의 도착을 알렸다.
“아빠!”
“살아 있었던 거냐?”
“아빠는…좀 바빴어요.”
“그놈 가게 인테리어 해준다고?”
아무렇지 않게 인사하고 들어와 옆에 앉아있는 차성철을 힐끗 쳐다본 김서원이 얼굴을 붉혔다.
“차 팀장. 오전 회의 때 말한 마포점에 관한 얘기 좀 자세히 해봐.”
차성철이 김서원을 살짝 바라보자 김형식이 괜찮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회의 때 말씀드린 대로 최근 들어 마포점 직원들 컴플레인이 점점 심해졌습니다.”
“이유는?”
“점장의 괴팍한 성격이 이유인 듯합니다.”
“뭐? 괴팍한 성격?”
김형식과 동시에 차성철을 노려본 김서원이 제대로 된 설명을 기다리고 있었다.
“지난달부터 툭하면 화를 내고 심지어 욕설까지 하는 바람에 홀 직원 하나가 그만둔 상태입니다.”
살짝 미간을 찡그린 김형식이 아무 말 없이 이어지는 얘기를 기다렸다.
“홀 직원이야 바로 구하면 되지만, 중요한 건 차은석 셰프가 퇴직을 희망한다는 연락을 해왔습니다.”
“같은 이유인가?”
“차은석은 그런 이유로 그만둘 사람은 아닌 거로 판단됩니다. 다른 이유가 있을 텐데, 이유를 밝히고 싶어 하지 않았습니다.”
짧은 한숨을 내쉬고 있는 김형식과 달리 김서원은 참지 못하고 물었다.
“그 원인이 차은석 셰프한테 있을 수도 있는 거 아닙니까?”
친하지는 않아도 남들한테 오빠가 욕먹는 걸 듣고 있을 수는 없었다.
“그건 아닐 겁니다.”
“차 팀장님이 어떻게 장담하시죠? 같이 계셨던 것도 아니면서….”
차성철이 아무렇지 않다는 듯이 김서원을 향해 몸을 돌렸다.
“제가 하는 일이 각 매장 매출 원인 파악하고 분석하는 일입니다. 매장별 메인 셰프 성향 분석도 다 마친 상태고요.”
“그래서요? 사람 성향이야 상황 따라 바뀌는 거고, 그 셰프한테 사정이 생겨서 퇴직을 원할 수도 있지 않나요?”
김형식은 재미있다는 듯이 등을 소파에 깊숙이 밀어 넣고 둘의 대화를 듣고 있었다.
“며칠 전에 개인 미팅 했습니다. 퇴직하려는 원인을 구체적으로 말하지는 않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건 김원상 점장의 무리한 요구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무리한 요구?”
“몇 번을 물었지만, 그 내용은 말하고 싶지 않다고 거부했습니다. 그날 차은석 셰프의 표정은 뭔가 소신을 꺾기 싫은 것 같았습니다.”
김서원이 입꼬리를 살짝 비틀어 올리며 웃었다.
“팀장님이 독심술까지 하시는 줄 몰랐네요.”
“독심술은 못 합니다. 하지만, 대화하다 보면 그 사람의 생각을 남들보다 조금 빨리 알아채는 능력이 있기는 합니다.”
“능력이요?”
“네, 저는 그걸 능력이라고 봅니다. 지금 김서원 씨가 오빠 얘기가 나오니까 발끈하지만,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해서 걱정스러운 마음을 가지고 있는 게 보이는 것처럼 말입니다.”
당황한 김서원이 바로 말을 내놓지 못했다.
자신이 알고 있는 오빠 김원상이라면, 특히 지난번 상처받아 삐뚤어질 대로 삐뚤어진 그라면 분명 가능성이 있는 얘기였다.
“그건 내가 알아보면 되겠네. 둘 다 잠시 기다려봐.”
듣고만 있던 김형식이 핸드폰을 꺼내 아들 김원상에게 전화를 걸었다.
“나다. 거기 요즘 왜 이렇게 시끄러운 거냐?”
-갑자기 전화해서 무슨 말씀이세요?
“차은석이 그만두고 싶다고 했다면서? 네가 뭘 요구한 거야? 뭘 하라고 했길래 사표 얘기가 나오는 거냐고?”
-알 거 없습니다. 여기 일은 제가 알아서 한다고 말씀드렸잖아요?
아무런 표정 변화 없이 눈썹만 꿈틀거리던 김형식의 질문이 이어졌다.
“차은석 셰프한테 다른 식당 메뉴를 흉내 내라고 시킨 거냐? 그게 자존심을 건드린 거고?”
-정확하게 말하면 흉내는 아닙니다. 사이드를 다르게 내는 거니까 엄연히 내가 개발한 새 메뉴란 말입니다. 요리 좀 한다고 건방지게 고집만 점점 늘어서…
“어찌 됐든 지금은 차은석 셰프 비위를 맞춰. 뭔가 일을 저지를 거면 대책은 세워놓고 저지르란 말이다. 알아들어?”
대답은 없었다.
“끊는다.”
핸드폰을 내려놓은 김형식이 역시나 하는 표정으로 비웃음을 쏟아냈다.
아버지의 저런 말과 표정에서 얼마나 많은 상처를 받아왔는데….
왜 아직 이겨내지 못하고 있는 걸까?
차성철 말대로 오빠가 한심하고, 걱정됐다.
그런 마음을 읽혔다는 사실 자체도 자존심 상한 김서원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이제 가볼게요. 얼굴도장 찍었으니까 됐죠?”
“앉아있어. 할 얘기가 있다.”
차성철이 재킷을 여미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제가 차은석 셰프를 다시 한번 만나보도록 하겠습니다. 아직 계약 기간이 남아있으니 바로 움직이지는 못할 겁니다.”
“그래야지. 후임이 정해질 때까지는 그 자리를 떠날 생각 못 하도록 확실히 다짐을 받아놔.”
“네. 그럼 가보겠습니다.”
차성철이 자리에서 막 일어나려 할 때였다.
똑똑!
노크 소리와 함께 비서와 낯선 남자 둘이 회장실로 들어왔다.
“회장님. 강남경찰서 신명훈 조사과장입니다. 몇 가지 여쭤볼 일이 있어서 왔습니다.”
“강남경찰서라고요? 무슨 일이신지 비서실장을 통해….”
“잠시면 됩니다.”
차성철의 말이 뚝 잘리며 두 남자가 회의실 안으로 발을 디디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