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1화.
논현동에 있는 박정원 대표 사무실을 찾아간 이준형이 생각보다 크고 화려한 사무실을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뭐해. 이리 와서 앉아.”
“대표님. 진짜 대표님이셨네요?”
“뭐라는 거야? 그러면 가짜 대표인 줄 알았나?”
“아니, 그게 아니라 워낙 방송에서 많이 봬서 저한테는 방송인 이미지가 더 컸거든요.”
노크 소리와 함께 비서가 차를 가지고 다가왔다.
습관적으로 벌떡 일어나 인사하는 이준형을 보고 박정원이 소리 내며 웃었다.
연한 베이지색 블라우스를 입은 비서 또한 수줍은 듯 미소 지으며 고개를 까딱해 인사를 건넸다.
“커피는 마셨을 것 같아서, 이건 내가 상해 출장 갔을 때 사 온 차로 만든 밀크티야. 먹어봐, 부드럽고 맛이 괜찮을 거야.”
“밀크티면 타피오카 들어간 거 말입니까?”
“여기가 *차 매장이냐? 이건 영국 사람들이 주로 마시는 홍차에 우유 넣은 밀크티라고.”
“에이, 그럴 수도 있지. 뭐 그렇게 큰 소리로…”
지난번 MS 백화점 영업 때부터 부쩍 가까워진 박정원 대표가 이제는 친한 선배처럼 편하게 대해줘서 너무 좋았다.
이준형은 생소한 차를 조금 마셔 보고는 그 맛을 음미했다.
“어때? 부드럽지?”
“네, 부드럽고 맛없습니다.”
“뭐? 컥!”
마시던 밀크티가 목에 걸렸는지 기침을 해대며 박정원이 큰 소리로 웃었다.
“하긴 마시는 거라고는 커피 아니면 술인 사람이 이 고상한 차의 세계를 어떻게 알겠냐? 그냥 냉수나 한 사발 준비하라고 할걸.”
이준형이 온다고 비서에게 특별히 부탁한 모양인데, 제대로 김이 샌듯했다.
“차갑게 해서 그 타피오카…”
“알았어, 일어나. 내가 *차 가서 라지 사이즈로 사줄 테니까.”
이준형도 같이 큰소리로 웃었다.
잠시 목소리를 가다듬은 박정원이 테이블 위쪽에 놓아둔 테블릿을 터치해 화면을 펼쳤다.
“지금 이게 MS백화점에서 우리 새우면 판매량을 도표로 만들어 보내준 거야.”
“이거 저한테는 안 보내줬는데요?”
“우선 내가 오늘 보여 주고, 설명하겠다고 했어. 다음 달부터는 이준형 사장한테도 보내줄 거야.”
순간 당황했던 이준형이 이제야 안심하고 머리를 긁적였다.
“이 표 보면 알겠지만, 새우면 판매를 시작한 지 2주 만에 판매량이 두 배 이상으로 올랐어. 여기 표 보이지?”
한눈에 들어오게 설명이 잘 되어 있는 표를 보자 바로 판매량 차이를 알 수 있었다.
“내가 오늘 자네와 만나려는 목적은 이거 때문이야.”
박정원이 테블릿에서 메일함을 열어 그중 하나의 메일을 클릭해 보여 주었다.
“이건 엠씨백화점 안에 있는 대형 식품매장 팀장이 나한테 보낸 메일이야. 한 번 읽어봐.”
[안녕하십니까. 박정원 대표님.
다름이 아니오라 저희 매장을 찾는 고객분들이 대표님과 서풍의 서인우 셰프가 같이 만든 새우면을 많이 찾고 있습니다. 그래서 지난주 저희 회의 결과 그 새우면을 매장에서 판매하고 싶어서 연락드렸습니다.]
“대표님? 이거 말 그대로 주문 들어온 거네요?”
“그렇지, 쉽게 말하자면 새우면 주문이 들어온 거지.”
“그러면 이제 어떻게 해야 하는 건가요?”
“우선 나는 여기가 워낙 큰 식품매장이라 MS 백화점과는 비교가 안 될 만큼 판매량이 늘어날 거로 생각해.”
“그러면 정말 대박이죠.”
“하지만, 그만큼 실수 없이 물량 조달해야 하고, Audit, 그러니까 제품 상태도 더 꼼꼼하게 검사할 거야. 무슨 말인지 알지?”
이준형이 눈으로는 강한 레이저를 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거야 당연한 거 아닙니까? 우리는 하나를 팔아도 제대로 된 걸 팔아야 하고, 제품도 판매도 다 꼼꼼하게 철저히 관리 해야죠.”
“그래서 내가 오늘 보자고 한 거야. 서인우는 [서풍 TWO]를 맡아 하는 거고, 이 새우면은 이준형 사장이 전담하는 거 맞지?”
“네, 맞습니다. 그래서 저도 오늘 대표님 만나서 의논드릴 게 있었습니다.”
박정원이 지긋이 웃으며 이준형을 쳐다봤다.
“아무래도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나 보군. 먼저 말해봐.”
“아시겠지만, 지금은 제가 [서풍 TWO] 매장에 종일 붙어 있는 상황입니다. 그런데, 앞으로 저와 인우가 완벽히 일을 분리해서 해야 할 때가 온 것 같아서요.”
“왜 서인우가 자네와 동업을 했는지 알겠군. 사업적인 마인드와 감이 있어. 서인우와 달리.”
“그래서 우리가 잘 맞는 부부궁합이죠. 저는 밖에서 돈 벌어오고, 인우는 안에서 요리하고. 말하다 보니 진짜 부부 같은데요?”
이준형 말에 어깨를 움찔해 보인 박정원이 테이블을 툭툭 쳤다.
“서인우가 들으면 질색할 소리 그만하고, 그래서 이준형 사장 계획은?”
“우선 저는 박 대표님과 이 새우면 사업을 더 키워볼 생각입니다. 아마도 이 식품매장에서 판매를 시작하면 공장에서 제품 생산 과정부터 더 꼼꼼하게 관리해야겠죠.”
“그렇지. 역시 감이 있단 말이야.”
칭찬 좋아하는 이준형의 입이 귀에 걸렸다.
“상황 봐서 저를 도와줄 사람들 찾아 같이 해보겠습니다.”
“그래서 내가 지난번에 이걸 공동사업으로 추진하자고 했던 걸세. 서인우는 그냥 판매수익의 지분만 원했지만, 그때는 이준형 사장을 잘 몰랐을 때였으니까.”
“저희야 너무 감사한 일이죠. 박 대표님 덕에 일도 배우고 새우면 판매도 이렇게 잘하고 있으니까 말이에요.”
박정원이 이준형의 어깨를 토닥거렸다.
“나는 이 사업 말고도 신경 쓸 일이 너무 많아. 엄밀히 말하면 이건 서인우의 레시피니까 공동사업으로 가는 게 맞아.”
“최선을 다해서 본격적으로 사업을 시작할 수 있도록 애쓰겠습니다.”
“그럼 내가 계약서 작성해서 보낼 테니까 꼼꼼히 잘 읽어보고 사인하도록 해. 이미 사업은 본격적으로 시작된 거야. 이제 어떻게 키워나가느냐는 이준형 사장 손에 달린 거고.”
이준형이 벅찬 숨을 몰아쉬며 연신 환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 * *
중식도의 음성이 평상시보다 훨씬 낮고 무거웠다.
“때가 되다니? 그게 무슨 뜻이야?”
-네 아빠 서동수와 나와의 약속을 밝힐 때가 됐다고.
“아빠와 사부와의 약속?”
-그래. 우리의 우정을 걸고 한 약속이지.
서인우는 말없이 중식도의 다음 얘기를 기다렸다.
-내 기억이 있었던 후로 서동수는 정말 나를 친구처럼 대했었다. 항상 말 걸어주고, 나한테 가족 얘기며 군대 얘기, 심지어 첫사랑 얘기까지 다 해줬지.
“첫사랑 얘기까지?”
-네 아빠 첫사랑 성공했으면, 너보다 열 살은 더 많은 형이나 누나가 있었을 텐데…그건 좀 아쉽네.
“아빠는 엄마가 첫사랑이라고 했는데?”
-얘가 뭘 모르네. 그래야 여자들이 사랑을 의심 안 하고 좋아하니까.
아빠한테 그런 면이 있었다는 새로운 사실이 흥미로웠다.
“그럼 아빠의 첫사랑은 언제였던 거야?”
-고등학교 막 졸업하고 만났다던데? 그때 네 아빠가 뻐꾸기 좀 날렸다고 하더라.
“풉! 뭘 날려?”
-있어, 그런 게. 중국에서 요리 배우러 가면서 연락이 끊겼다고 들었어. 지금도 그녀는 어디에서 내 생각 하겠지만…. 이런 노래 가사가 막 생각나네.
서인우는 지금까지 듣지 못했던 아빠 얘기를 들으니 신기하고 더 그리웠다.
-서동수가 죽기 전부터 나랑 한 약속이 있었다.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아들 서인우 곁에 있어 달라는 것.
“아빠의 일기장에 적혀 있는 거 말이지?”
-응, 그 속 내용은 나와 서동수만 알고 있지.
“속 내용?”
-그래, 그걸 밝힐 때가 됐다는 거다.
재촉하지는 않았다.
어떤 얘기가 들려도 담담하게 받아들일 마음의 준비만 하고 있었다.
-서동수가 죽기 대략 1년 전쯤부터 내 능력을 거부했어.
“사부 능력을 거부하다니 그게 무슨 소리야?”
-내 능력이 자기한테는 하늘이 준 행운이라고. 그래서, 더는 내 능력을 쓰지 않겠다고…그 행운을 아껴두고 싶다고 했어.
“그 행운을 아껴두다니, 왜?”
-그 행운 대신 소원 하나만 들어달라고…
“소원을?”
-그게 바로 서동수의 일기장에 적힌 그 내용이다. 우리 둘 얘기는 철저히 비밀이었기에 어떤 내용도 적지 않았지만, 자기 아들을 나한테 부탁하기 위한 조건이었어.
아들을 부탁하기 위한 조건?
‘중식도 덕분에 아빠의 뒤를 잇기로 마음먹었는데, 오히려 아빠는 그 능력을 거부하면서까지 훗날의 나를 걱정했었다니…’
서인우는 왜인지 모르게 화가 났다.
뭔지 말로 설명하지 못할 감정이 북받쳐 올라 참아내기 힘들었다.
“내가 언제 나 챙겨달라 그랬어? 사부한테 나를 부탁할 게 아니라, 끝까지 내 옆에 있어 줬어야지. 내가 아빠와 함께 요리하고 성공해가는 모습을 지켜봐 줬어야지…”
-너 왜 안 어울리게 어리광이야? 마음은 그렇지 않으면서 왜 화를 내고 그래?
“아빠가…아빠가 너무 보고 싶어. 나는 아무것도 해주지 못했는데, 아빠는…”
목이 멘 서인우에게서 더는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중식도 또한 이 무거운 분위기를 어쩌지 못하고 항상 그랬듯이 기다렸다.
이제 좀 진정이 됐는지, 서인우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런데, 사부. 왜 그때였던 거지? 마치 아빠가 죽을 걸 미리 알고 있었던 사람처럼 왜 갑자기 죽기 1년 전인 거냐고?”
중식도가 또다시 빙그르르 돌더니 멈춰 섰다.
하지만,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사부, 대답해봐. 분명 아빠는 자신의 운명을 알고 있었던 거야. 맞지?”
여전히 중식도는 멈춰 선 채 답이 없었다.
잠시 후.
-너무 한 번에 많은 걸 알려고 하지 마. 그러다가 다쳐.
서인우의 표정이 무섭게 굳어갔다.
“사부, 다시 한번 말해봐. 내가 알면 안 되는 무슨 비밀이라도 있는 거야?”
-몰라. 그런 거 없어.
“사부!”
서인우가 소리를 버럭 지르자, 중식도가 다시 빙그르르 돌았다.
그리고는, 중식도에게서 낮고 무거운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그날도 서동수와 정말 신나게 요리를 만들고 있었어. 저녁 장사가 거의 마무리 되어 갈 때쯤 누군가한테 전화가 걸려왔었다.
서인우는 꼼짝도 하지 않은 채 더는 마른침도 나오지 않아 미치게 밀려오는 갈증을 애써 참고 있었다.
-그 순간이었어. 갑자기 서동수가 산에서 굴러떨어져 죽는 모습이 번개처럼 스쳐 지나갔어. 옆에서 웃으며 통화를 하는 내 하나밖에 없는 친구가 피투성이가 되어 죽어가는 모습이 보였단 말이다.
“그, 그러면 아빠의 죽음도 미리 보였다는 거야?”
-사실 그랬어. 나도 너무 두려웠다. 그런데, 정말 이상한 건 당장 일어날 일같이 느껴지지 않았어.
“그게 무슨 말이야?”
-그냥 죽는 장면이 스쳐 보였을 뿐이지, 언제인지는 알 수 없었는데…막연히 지금이 아닌 한참 후의 모습이 보이는 것 같았어.
서인우 역시 이상하게 느껴졌다.
가끔 사부가 어떤 장면을 보고 미리 알려주기는 했지만, 그건 그리 먼일이 아니었다.
“사부가 그렇게 믿고 싶었던 거 아닐까? 그런 끔찍한 일이 당장 일어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말이야.”
-나도 처음에는 그런 내 바람 때문에 이렇게 멀게 느껴지는 걸 거로 생각했어. 그런데, 똑같은, 아니 비슷한 장면이 한 번 더 보였었다.
“한 번 더?”
-그 장면에서는 서동수가 친구들에게 하는 말이 분명히 들렸어. 내 아들 인우가 대학생이 됐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는다고. 그때 넌 한참 정신없이 공부하던 고3이었거든.
“그러면 정말 1년 후의 모습이 보였던 거야?”
-그리고, 아무한테도 말 못 하고 나 혼자 끙끙거렸다. 넌 그때 내가 얼마나 무섭고 힘들었는지 상상도 못 할 거다.
만약 어느 순간 누군가의 죽음이 보인다면?
누구도 그 사실을 절대 쉽게 받아들이지 못했을 거다.
-그러다가 깨달았지. 나에게 갑자기 보였던 그 순간이 정확히 일 년 후에 벌어질 일이라는 걸 말이야. 막 새해가 시작된 추운 겨울이었다.
“아빠 기일이 1월 14일이니까, 정말 징그럽게 추운 날이었지. 그래서 더 이해가 안 됐어. 그 추운 날 왜 혼자 산에 가신 건지…”
중식도가 순간 서인우의 눈앞으로 바짝 다가왔다.
-누가 그래? 혼자 갔다고?
“뭐?”
서인우의 눈이 갈 곳을 잃고 허공에 둥둥 떠다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