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0화.
시작은 정확히 7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갔다.
7년 전 기나긴 장마가 끝나고 불볕더위가 한창인 8월 2일이었다.
[이틀을 꼬박 밤을 새웠다.
젊은 시절 중국에서 처음 요리를 가르쳐 준 리우 사부가 선보인 최고의 요리를 흉내 내보고 싶었다.
루차이(魯菜)라 불리는 중국 산둥 요리의 숨겨진 고수라는 리우 사부가 만든 요리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그때의 그 맛을 정확하게 기억한다.
어떻게든 그 요리를 완성하고 싶었다.
올해를 넘기기 힘들다는 단골손님인 장영균 어르신을 위해 장사를 마치고 밤을 새우며 연구하고 또 연구했다.
더 맛있는 최고의 요리를 만들기 위해….
삼 일째 밤이 되자 코피가 뚝뚝 떨어지기 시작했다.
그래도, 마음에 드는 완벽한 맛을 찾지 못했다.
열흘 동안 장사하는 사이사이 그리고 잠을 줄이고, 심지어는 밤을 새워가며 연습하고 또 연습했다.
드디어 휴무 날인 오늘이 장영균 어르신을 초대한 날이다.
리우 사부가 선보였던 대창 요리인 지우좐따창 (九转大肠)과 생선 요리 탕추리위(糖醋鲤鱼), 육즙이 가득한 만두 콴탕바오(灌湯包) 마지막으로 해삼 요리인 총사오하이선(葱烧海参) 까지 완성했다.
나는 최선을 다하고 싶었고, 후회 없이 내 모든 능력을 쏟아부었다.
감동이었다.
까맣게 변한 앙상한 얼굴에 연신 행복한 미소를 지어 보이던 장영균 어르신이 조용히 내 손을 잡아 주었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붉어진 눈시울을 보며 느낄 수 있었다.
그거면 충분했다.
그거면….
어르신이 두 아들의 손을 잡고 가게를 나간 것까지는 기억이 났다.
극도의 피로감이 몰려오며 나는 그만 가게 바닥에 쓰러지고 말았다.]
그렇게 첫 페이지가 시작되었다.
서인우도 옆에서 읽고 있던 인우 이모도 말이 없었다.
먹먹한 가슴에 오른손을 올리고 조용히 눈물짓고 있는 엄마 이지희와 잠시 눈을 마주쳤다.
거실에는 여전히 째깍거리는 시계 소리 외에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잠시 일어나 엄마의 눈물을 닦아주며 가슴 깊이 안아준 서인우는 다시 자리로 돌아와 다음 장을 읽어내려갔다.
[생각지도 못한 귀한 친구가 나에게 찾아왔다.
내 나이가 벌써 50이 다 되어가는데, 이런 행운이 찾아오다니….
내 인생을 되돌아보게 된다.
이 친구는 분명 나에게 주는 선물이었다.]
무슨 매직아이라도 하는 줄 알았다.
눈을 동그랗게 뜨고 보면 뭐 다른 게 보이기라도 하는 듯이 인우 이모의 눈이 극한으로 커졌다.
“언니, 이 친구가 누군지 알아? 형부한테 귀한 친구라면 누구지?”
“나도 지금까지 그게 궁금한데, 동수 씨가 만나는 친구들은 같이 산악회를 하는 친구가 전부야. 그중에서 가장 친한 친구는 너도 아는 김형식 씨랑 [양자강] 사장인 최영만 씨 둘이지.”
서인우는 그 친구가 누구를 말하는지 알 것 같았다.
중식도와 수많은 대화를 나누면서 제일 궁금해했던 아빠와 중식도의 첫 만남이었다.
빨리 집으로 돌아가 사부에게 이 소식을 전하고 싶었다.
그때의 기억이 전혀 나지 않는다는 사부에게 여기 아빠가 적어놓은 내용을 말해주면 혹시 잃어버린 기억이 돌아오지 않을까?
그렇게 하나하나 기억하다 보면 아빠의 죽음에 관해서도 뭔가를 기억해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서인우를 재촉했다.
“엄마, 그리고 이모. 저 이 일기장 가져가서 천천히 읽어봐도 될까요? 너무 두껍고 내용이 많아서 지금 다 읽지는 못하겠어요.”
인우 이모의 얼굴에 아쉬움이 그대로 묻어났다.
“나도 너무 궁금한데, 인우 네가 먼저 읽어보는 게 맞을 것 같다. 언니, 괜찮지?”
“내가 그동안 이 일기장, 아니 아빠의 기록을 꼭꼭 숨겨놨던 이유가 이 안에 다 들어있어.”
“그러니까 더 궁금하긴 하네.”
인우 이모가 여차하면 뺏을 기세로 서인우가 손에 들고 있는 일기장을 집요하게 쳐다봤다.
“인우야, 그거 잠깐 줘봐.”
엄마 이지희가 일기장을 눈으로 가리켰다.
무슨 이유인지 궁금해하는 인우 이모와 서인우가 잠시 눈을 마주치고는 일기장을 건넸다.
말없이 일기장을 넘기고 있던 이지희가 한참 뒤쪽으로 페이지를 넘기다가 갑자기 손을 멈췄다.
“놀라지 말고, 여기 이 부분은 내 앞에서 보고 가라. 그래야, 내가 안심할 수 있을 것 같아.”
“뭐, 뭔데?”
궁금한 마음에 말이 빨라진 인우 이모가 이지희를 쳐다봤다.
그 어느 때보다 차분히 가라앉은 눈빛을 보이며 이지희가 고개를 가로저어 보였다.
이지희가 펼쳐놓은 페이지를 그대로 펼친 채 가까이 가져온 서인우의 손끝이 미세하게 떨렸다.
[친구에게 간절히 부탁했다.
내 사랑하는 아들 인우를….
내 아들이 간절히 원하는 무언가가 생기면 그때 꼭 우리 인우 옆에서 꿈을 이룰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부디…내 아들 곁에서 오래오래 있어 달라고.
내가 바라는 건 오직 그거 하나뿐이라고 말했다.
세상에서 가장 감사하고 사랑하는 친구에게 그렇게 간곡하게 내 마음을 전했다.]
뜨거운 눈물이 뚝 뚝 일기장 위로 떨어졌다.
그 눈물은 절대 눈에서 나오는 것 같지는 않았다.
* * *
저녁 장사를 마치고 주방 정리를 하고 있던 차은석의 얼굴이 심하게 굳어 있었다.
뭔가 화가 난 사람처럼 미간을 찡그린 차은석이 김지호 보조 셰프에게 다가갔다.
“미안한데 나 점장님하고 얘기 좀 해야겠다. 이거 마무리 좀 해줘.”
“마무리는 얼마든지 합니다. 그런데, 점장님하고는 말씀 더 안 하시는 게 낫지 않을까요?”
“당장 내일부터 메뉴에 올린다는 게 말이 돼? 이건 내 자존심이 받아들일 수 없다고.”
차은석의 단호한 표정에 더는 어쩌지 못한 김지호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 신경 쓰지 마시고 나가 보세요.”
김지호의 어깨를 툭 치며 앞치마를 벗어들고 주방을 빠져나갔다.
“오 매니저님, 점장님은 어디 가셨습니까?”
“먼저 퇴근 하신다고 방금 나가셨어요. 아직 출발 안 하셨을 텐데, 왜요?”
대답 대신 재빨리 핸드폰의 통화버튼을 눌렀다.
“차은석입니다. 지금 어디십니까?”
-가게 앞 주차장인데, 무슨 일입니까?
“잠시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제가 차로 갈까요?”
-아니, 내가 다시 들어갈게요.
가방은 차 안에 둔 채 차 키만 들고 가게로 다시 들어온 김원상이 차은석의 표정을 슬쩍 보고는 오승연에게 다가갔다.
“오 매니저, 이제 퇴근하세요.”
“네. 이것만 정리하고 가겠습니다.”
카운터에 놓여있는 종이들을 잽싸게 정리하고 난 오승연이 앞치마를 벗고 바로 퇴근 준비를 했다.
“그럼 먼저 가보겠습니다.”
오승연이 나가는 모습을 잠시 지켜본 김원상이 옆에 있는 테이블을 턱으로 가리켰다.
“여기 앉아서 얘기합시다.”
“네.”
“아직도 치즈 치킨밥 때문에 이러는 겁니까?”
차은석이 긴 한숨을 몰아쉬었다.
그것도 들으라는 듯이 크게.
“정말 서인우의 그 메뉴를 우리 [만가복] 메뉴로 올리겠다는 겁니까?”
“내가 말하지 않았습니까? 이건 분명히 [만가복]의 새 메뉴라고요.”
“양심에 손을 얹고 이건 서인우의 레시피입니다.”
“그 말은 마치 내가 양심이 없다는 말로 들리는데….”
“그렇다면 제대로 들으신 거 맞습니다.”
“뭐?”
김원상의 목소리가 커졌다.
“안에 아직 김지호 셰프 있습니다. 조심하십시오.”
“내가 뭘 조심해야 합니까? 없는 말을 한 것도 아니고, 누구 욕을 한 것도 아닌데 말입니다.”
“정말 내일부터 메뉴에 올릴 생각입니까?”
차은석을 향해 눈을 치켜뜬 김원상이 입꼬리를 살짝 비틀며 작게 웃었다.
“내가 지금 장난하는 걸로 보여요? 잔말 말고 내일부터 메뉴에 올릴 테니까 주문 들어오면 그냥 맛있게 만들기만 하면 된다고…”
차은석의 대답이 들리지 않았다.
“저기 벽 쪽에 이미 새 메뉴라고 광고도 딱 붙어 있잖아. 그냥 여기서는 내가 시키는 대로 하라고. 나중에 독립할 능력이 되면 그때 네 맘대로 하란 말이야.”
이번에는 차은석이 작게 웃음소리를 내보였다.
“내가 이 일을 그만두겠다면요?”
“그만두지 못할 텐데… 처음 내가 여기로 데리고 올 때 했던 계약을 잊어버리지는 않았을 거 아닙니까?”
김원상이 자리에서 일어나 구겨진 바지를 툭툭 털어내며 주름을 다시 잡았다.
“내가 며칠 전에 다시 확인해봤는데 말이야, 계약 기간이 아직 1년 하고도 5개월이나 남았더군. 그동안에는 내가 하라는 대로 해줬으면 좋겠다고. 알아들었습니까?”
아랫입술을 꽉 깨물고 있는 차은석의 눈이 테이블에 미세하게 남아있는 행주 자국만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불끈 쥐고 있는 두 주먹에 힘을 더 꾹 준 채로.
* * *
스카프를 담았던 쇼핑백에 아빠 서동수의 두꺼운 일기장을 넣어 차 조수석에 놓고 서울로 향했다.
빨리 집으로 돌아가서 중식도를 만날 생각에 이모 집을 나선 서인우는 다시금 눈시울이 붉어졌다.
엄마와 이모 앞에서 한참을 울었다.
누군가는 참았어야 한다고 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서인우는 참지 않고 울었다.
어린아이가 된 것처럼 소리 내서.
아빠의 갑작스러운 죽음 이후 이렇게 소리 내서 울어보지 못했다.
엄마 이지희를 지켜야 했으니까.
엄마의 슬픔에 그의 슬픔까지 더할 수는 없었으니까.
그냥 애써 태연한 척 묵묵히 세월을 버텼다.
집 앞 빽빽하게 세워진 차들 사이에 차를 간신히 주차하고 집으로 걸어 올라갔다.
계단 한층 한층 중식도와 가까워질수록 심장이 쿵쿵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사부, 얘기 좀 해.”
-뭐냐? 집에 갔다 오자마자 이렇게 급하게 나를 찾는 걸 보니 엄청나게 내가 보고 싶었나 보네. 아, 이놈의 인기는 어디를 가나 사그라지지 않네.
사부의 농담이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사부!”
-인우 너 오늘 낯설다. 왜 그래?
“엄마가 아빠의 일기장을 전해줬어. 유품 가방에 숨겨 놓으셨던 아빠의 기록.”
-내 친구 서동수의 기록?
서인우가 쇼핑백에서 아빠의 일기장을 꺼내 첫 페이지를 읽었다.
-자, 잠깐만. 천천히 얘기해봐. 그러니까, 서동수가 요리 고수 사부한테 배운 요리를 밤새워가며 연습했다는 거지?
“응, 그렇게 꼬박 열흘을 연습해서 생을 정리하고 계신 어르신에게 대접을 해드렸던 거지.”
-그리고서 서동수는 기절했고.
“맞아, 그 때 사부가 아빠의 중식도에 깃들었던 거고.”
-아! 이런 스토리가 있었던 거였어? 내가 그렇게 해서 최선을 다해 요리하고 쓰러진 서동수의 이 중식도 속으로 들어간 거란 말이지?
중식도가 허공에 둥둥 떠 말을 걸었다.
“사부, 이 일기 내용 듣고 뭐 기억나는 거 없어?”
-응, 전혀 없어. 혹시 나도 그건가?
“뭐?”
-내 머릿속에 지우개…?
“지금 농담이 나와?”
-너 지금 거울 좀 봐. 한마디만 던지면 터져버릴 것같이 잔뜩 긴장해서, 그래서 내가 일부러 농담 한건데… 내 이 깊은 속을 네가 어찌 알겠냐?
중식도가 빙그르르 돌더니 다시 멈췄다.
-분명 루차이(魯菜)라고 쓰여 있었지?
“응, 중국 산둥지역 요리를 말하는 거지?”
-그렇지, 정확히는 중국의 예전 궁중요리지. 서동수의 사부라는 자는 분명 숨은 고수는 맞는 것 같다. 그럼 나는 뭐였을까?
“그게 너무 궁금해서 달려왔는데, 저 일기 내용을 듣고도 전혀 기억이 안 나는 거야?”
-응, 아무것도.
서인우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천천히 기억나면 나한테 꼭 얘기해줘. 그것보다 물어보고 싶은 게 있었어.”
-이번에는 또 뭐냐? 너 지금 꼭 시한폭탄 같아. 언제든 터져 버릴 것 같다고.
서인우가 작은 신음을 뱉으며 마른세수를 했다.
살짝 붉어진 얼굴로 중식도를 바라봤다.
“사부!”
-말해. 뭔데 그래?
“우리 아빠가 사부한테 나를 부탁했던 거야? 그래서 우리가 만나게 된 거냐고?”
서인우가 급하게 일기장을 넘겨 이모네 집에서 봤던 페이지를 다시 읽기 시작했다.
[친구에게 간절히 부탁했다.
내 사랑하는 아들 인우를….
내 아들이 간절히 원하는 무언가가 생기면 그때 꼭 우리 인우 옆에서 꿈을 이룰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부디…내 아들 곁에서 오래오래 있어 달라고.
내가 바라는 건 오직 그거 하나뿐이라고 말했다.
세상에서 가장 감사하고 사랑하는 친구에게 그렇게 간곡하게 내 마음을 전했다.]
정적을 뚫고 중식도의 낮은 소리가 들려왔다.
-흠… 이제는 때가 된 것 같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