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9화.
한참 신나게 탕수육을 튀기고 있던 최만수가 주머니에서 울어대는 핸드폰을 들어 잠시 확인했다.
“어, 유 부장이네.”
[지금은 요리 중이니 잠시 후 연락드릴게요.]
요리하느라 바쁜 최만수는 우선 손녀딸이 만들어준 거절 메시지를 보냈다.
“요게 아주 유용하단 말이야.”
씩 웃어 보이며 탕수육 소스에 심혈을 기울였다.
요리 완성을 알리고 옆에서 짜장면을 만들고 있던 박 주방장에게 주방을 맡기고 잠시 밖으로 나와 전화를 걸었다.
“날세, 유 부장.”
“안녕하세요, 회장님. 요리는 완성하셨습니까?”
“그럼, 끝내주는 탕수육을 선사해주고 나왔지. 여기서 내 요리 인기가 굉장하다니까.”
유재철의 웃음소리가 잠시 들려왔다.
“나한테 전화를 했다는 건 뭔가 알아냈다는 얘기인데…맞나?”
“네, 회장님. 안상훈 셰프에게 달려든 오토바이를 누가 운전했는지, 또 그 배후에는 어떤 인물이 있는지 알아냈습니다.”
“[만가복] 김형식인가?”
대답이 바로 나오지 않았다.
“회장님. 이미 짐작하시고 일을 맡기신 겁니까?”
“그랬네. 아니길 바랐지만… 증거는?”
“오토바이는 도난 신고되어있는 거였습니다. 강기태라는 30대 남자가 직접 운전해서 범행을 저질렀습니다.”
최만수가 오른손으로 관자놀이 부분을 꾹꾹 누르고 있었다.
“경찰 쪽에 넘기면 승산이 있겠나?”
“지금쯤이면 김형식 회장도 뭔가 손을 쓰고 있을 겁니다. 확실한 증거로 조사받게 해야죠.”
“강기태라는 그자가 맘을 바꿀 수도 있지 않나?”
“두 딸이 있습니다. 그 두 딸을 두고 협박을 받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이런 몹쓸 인간 같으니라고.”
최만수의 표정이 심하게 일그러졌다.
“뒷 일은 걱정하지 말고 자네가 할 수 있는 방법 뭐든 이용하게. 사람을 함부로 대하는 못된 짓을 더는 못하게 만들어 버리자고.”
“네, 명심하겠습니다. 그리고, 회장님.”
유재철이 짧은 숨을 내쉬고 다시 말을 이었다.
“지난번 회장님도 참여하셨던 요리대회 때도 이 강기태라는 자가 개입된 것 같습니다.”
“뭐? 그때라면…이미 마영준 셰프와 관련된 비리를 들었네. 그게 말고 다른 게 있다는 건가?”
“혹시 마지막 결승전에 투입된 시청자 심사단을 기억하십니까?”
최만수가 마지막까지 서인우를 응원하며 재미있게 지켜봤던 최고의 고수를 뽑는 결승전을 떠올렸다.
평가의 공정성을 위해 시청자 심사단을 특별히 초대했던 건 확실히 기억했다.
“그 심사과정에서도 장난을 친 건가?”
“지난번 백화점 입점 심사 때처럼 사람을 심어놨었다고 합니다. 서인우를 떨어트리기 위해서요.”
“이번 기회에 제대로 조사해서 낱낱이 공개해줘야겠어. 어디 꿈틀거려 보라지.”
통화를 마치고 한참 고개를 들어 하늘을 쳐다본 최만수가 씁쓸한 한숨을 내쉬었다.
* * *
처음엔 그냥 눈물만 흘리기 시작했었다.
그러다 점점 어깨를 들썩이며 오열하기 시작했다.
“언니, 갑자기 왜 그래?”
“아빠 유품 얘기 꺼내서 그래요? 엄마!”
서인우가 심하게 울고 있는 엄마 이지희를 두 팔을 크게 벌려 꼭 끌어안았다.
그렇게 한참을 있었다.
누구도 한마디 하지 않았다.
잠시 후 엄마 이지희가 조금 진정이 됐는지 눈가를 닦으며 숨을 고르기 시작했다.
“우선 커피 한잔하자. 그리고, 점심도 맛있게 먹고.”
마치 유품 가방에 있는 뭔가를 보고 나면 밥도 먹지 못할 것처럼 엄마 이지희가 서둘렀다.
“그래, 어제 내가 구운 쿠기랑 커피 한잔하자.”
“좋아요, 이모. 오랜만에 커피는 제가 내릴게요.”
“어머, 그럼 오늘 우리 서인우 셰프가 직접 내려준 핸드드립 커피 마시는 거야?”
“네, 원두만 꺼내 주세요.”
“그래. 신난다.”
평상시도 텐션이 높은 이모가 갑작스러운 언니의 울음 때문인지 더 텐션을 높이며 웃었다.
묵직한 바디감이 일품인 과테말라 원두를 갈자 주방에서부터 퍼진 커피 향이 거실까지 번지는 듯했다.
“흠, 커피 향 너무 좋다.”
엄마 이지희의 아직 붉은 기가 남아있는 눈가에 작은 미소가 자리 잡았다.
“이모, 요즘 쿠키 다시 만드세요?”
“응. 날씨가 쌀쌀해지니까 쿠키랑 커피가 너무 땅겨서.”
“이제 잘 만들어져요?”
“말도 마. 난 왜 빵을 만들면 떡이 되고, 쿠키를 만들면 빵이 되는지….”
“그럼 떡을 만들어요. 혹시 쿠키가 될지 어떻게 알아?”
“서인우. 너 지금 이모 놀리는 거지?”
인우 이모가 서인우를 잠시 노려보다 다시 깔깔 소리를 내며 웃었다.
“진짜 그럴 수도 있을까? 저녁에 떡 만들어 볼게 먹고 갈래?”
“점심 먹고 가야죠. 성공하면 문자로 알려주세요.”
깔끔하게 내려진 커피와 이모 말대로 빵의 식감을 보유한 쿠키로 불리는 정체불명의 그것으로 모처럼 만의 휴식을 즐겼다.
햇살 좋은 초가을에 사랑하는 엄마와 고마운 이모, 향이 끝내주는 커피… 정말이지 이보다 더 좋을 수는 없었다.
다들 속으로는 뭔지 모르게 스멀스멀 올라오는 불안함을 안고 있었지만, 티 내지 않으려 애썼다.
“엄마는 요즘 뭐하며 지내? 이모랑 같이 쿠키나 베이킹 이런 거 배워봐요.”
“안 그래도 나랑 언니랑 일주일에 두 번 문화센터 다녀.”
“그래요? 지영이가 아무 말 안 하던데?”
“지영이 그년은 뭐가 그리 바쁜지 연락도 잘 안 해. 살아는 있지?”
어쩜 이렇게 모녀 사이가 일관되는지.
“우리 가게에서 가장 큰 역할을 하고 있어요. 캐나다 가는 것만 아니면 확 붙잡고 싶은데...”
“무슨 자격증을 딴다고 해외까지 나가? 한국에서도 길바닥에 차이는 게 자격증 이구만.”
서인우가 대답 대신 작은 미소를 보였다.
이 타이밍에 잘못 말 꺼내면 그 후폭풍을 감당할 자신이 없었다.
“그래서 엄마랑 뭐 배우시는 건데요?”
“아, 내 정신 좀 봐. 지영이 그년 얘기하다가 또 딴 길로 샜네. 요즘은 자꾸 대화하다 딴 길로 새. 인우야, 나 혹시 치매 오나?”
치매는 아닌 것 같은데, 지금 또 딴 길로 새고 있는 건 맞습니다!
라고 직접 말을 할 수는 없었다.
“이모처럼 젊고 즐겁게 사는 사람이 무슨 치매에요? 그런 생각은 하지도 마세요.”
“그런가? 우리 서인우 사장님이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이제 백화점 중식당 사장님이네. 기분이 어때?”
오늘 안에 둘이 뭘 배우고 있는지 듣기는 힘들 것 같았다.
둘이 이런저런 대화가 오가는 동안 엄마 이지희는 한마디도 하지 않고 그저 미소만 짓고 있었다.
간간이 커피만 마시면서.
아빠 얘기를 꺼내서 그런가?
지난번에 왔을 때는 확실히 좋아진 것 같았는데, 오늘은 영 기운도 없어 보이고 우울해 보였다.
“점심은 은행 근처 가서 이모부한테 사달라고 할까?”
“아니에요. 나 엄마가 해주는 김치밥이 너무 먹고 싶은데….”
“김치밥? 여기까지 와서 고작 그거?”
“어려서부터 우리 인우가 워낙 김치밥을 좋아했어.”
드디어 엄마 이지희가 한마디 거들었다.
“그럼 오늘 점심은 언니가 해야겠네. 나한테는 한 번도 안 해준 것 같은데…나는 자신 없어.”
“그래, 내가 금방 만들어 줄게. 간단하니까 조금만 기다려. 어제 산 다진고기 냉장고에 있지?”
“내가 찾아줄게.”
이지희가 김치를 잘게 송송 썰어서 물기를 뺀 후 접시에 올려놓고, 다진 고기를 양념해 달달 볶았다.
밥솥에 쌀을 씻어 넣은 후 볶은 고기와 송송 썰어둔 김치를 올리고 마지막에 참기름을 한 방울 똑 떨어트리고 취사 버튼을 눌렀다.
“뭐야? 이게 다야?”
“아주 간단한 건데, 인우랑 동수씨가 워낙 좋아해서 주말 별식으로 자주 해 먹었어.”
“그럼 내가 계란국 하나 끓일게.”
옆에서 듣고 있던 서인우가 이모를 툭툭 치며 뒤로 빠지라는 눈짓을 보냈다.
“지금 중식 계란탕 전문가인 나를 두고 설마 이모가 만드신다는 건 아니겠죠?”
“에이, 오늘이라도 쉬어. 이모표 계란국 먹자.”
“그래, 오늘 하루만이라도 요리하지 말고 쉬어.”
이모와 엄마의 강한 만류로 다시 소파로 돌아온 서인우는 사실 점심 식사를 잘 할 수 있을지 자신 없었다.
뭔가 태풍 전야 같은 불안함이 계속 가슴 속 깊은 어딘가부터 조금씩 피어오르는 것 같았다.
온 집안에 고소한 참기름 냄새와 칼칼한 김치 냄새가 섞여 심하게 식욕을 자극했다.
“언니, 이거 냄새가 너무 좋은데? 밥이 다 되면 그릇에 담아 먹으면 되는 거지?”
“양념장 만들어야지.”
“양념장에 비벼 먹는 거였어?”
“응, 그래야 더 맛있어.”
이지희가 작은 그릇에 파를 다져서 넣고 간장과 고춧가루, 볶은 깨와 참기름을 듬뿍 넣어 양념장을 만들었다.
밥솥에서 맛있는 밥이 완성되었다는 기계음이 들렸다.
큰 그릇에 밥을 잘 섞어서 푸고, 계란국도 그릇에 담아 그 옆에 놓았다.
잘 익은 김장김치와 지난달에 담았다는 시원한 물김치, 쇠고기 장조림 등 밑반찬을 꺼내놓자 근사한 한 상이 완성되었다.
“아, 고소한 냄새. 정말 참기 힘드네. 엄마.”
“얼른 먹어.”
“네, 잘 먹겠습니다.”
간단하지만 어릴 적 추억을 불러일으키는 김치밥을 배불리 먹고 이지희가 직접 담았다는 모과차를 앞에 놓은 채 다 같이 소파에 앉았다.
조금 전부터 부쩍 더 불안해 보이는 인우 엄마 이지희가 연신 손톱 옆에 삐죽 나온 살을 쥐어뜯고 있었다.
그런 엄마의 손을 말없이 잡은 서인우가 지긋이 눈을 바라보았다.
“엄마, 나는 어떤 상황도 받아들일 수 있어요. 이제 엄마 혼자 힘들어하지 말고 나한테 다 알려주세요.”
“언니, 뭐 특별한 게 있는 건 아니지? 언니만 알고 있는 무슨 비밀 같은 게 있는 거야?”
한참 눈을 감고 있던 이지희가 크게 숨을 한 번 쉬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잠시만.”
조용히 방으로 사라지는 이지희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는 남은 두 명의 눈빛에 긴장한 빛이 역력했다.
인우 이모가 마른침을 꼴깍 삼키며 오른쪽 다리를 심하게 떠는 게 보였다.
“이모, 설마 진짜 뭔가 있는 건 아니겠지?”
“그럴 리가 없어. 내가 형부 그렇게 되시고 엄마랑 벌써 4년이 넘었다. 뭔가 의심스러운 말도 한 적이 없었어.”
순간 방에서 작은 가방을 손에 들고 이지희가 모습을 나타냈다.
“언니. 그, 그게 뭐야? 난 한 번도 본 적 없는 가방인데….”
“이 안에 동수 씨 유품이 들어있어.”
어깨며 하얀 손을 심하게 떨고 있는 엄마를 단숨에 달려가 안은 서인우가 천천히 등을 토닥거렸다.
“엄마, 이제 괜찮아. 나 그때의 철부지 서인우가 아니에요. 그러니, 그만 힘들었으면 좋겠어.”
소파 앞 테이블에 작은 가방을 내려놓은 이지희가 결심한 듯이 입을 꾹 다문 채 가운데에 달린 가방 지퍼를 양쪽으로 열었다.
모든 것이 멈춘 것 같았다.
째깍째깍 초침 소리까지 들릴 만큼 잔뜩 예민해진 상태로 가방을 여는 모습을 묵묵히 지켜보고 있었다.
아빠가 평상시에 좋아하던 시집 두 권과 마지막 날까지 입었던 셰프복을 꺼낸 엄마가 다시 한번 크게 심호흡을 했다.
“이거 형부 셰프복이네?”
항상 큰 소리로 웃던 이모 마저도 뒷말을 잇지 못했다.
그리고 가방 가장 아래쪽에서 뭔가를 꺼낸 이지희가 시선을 올려 서인우의 눈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엄마, 그게 뭔데?”
“이거...아빠 일기장이야.”
“아빠 일기장? 우리 아빠가 일기를 쓰셨나?”
“아빠가...”
다시 흐느끼기 시작한 이지희가 일기장을 잡은 두 손에 힘을 더 주었다.
“아빠가 죽기 전에 가끔씩 적었던 기록 같은 거야.”
아빠의 일기장을 가져가 펼쳐보려는 서인우의 손을 급하게 잡은 이지희가 물었다.
“인우야. 너 정말 어떤 내용이 나와도 감당할 자신 있는 거지?”
이지희의 심하게 흔들리는 검고 커다란 눈동자 속에 비친 서인우는 이미 첫 페이지를 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