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8화.
갑자기 떠오른 아빠의 유품 가방.
아빠의 죽음으로 너무 심한 실의에 빠진 엄마가 아무도 모르게 숨겨놨던 아빠의 물건들.
서인우도, 함께 사는 이모네 식구들마저도 한 번도 보지 못했던 것들이었다.
[서풍 TWO]를 오픈할 때 엄마를 통해 전해 받은 아빠의 거래처가 적힌 노트.
그 노트를 받았을 때 처음 알게 된 사실이었다.
아빠가 남겨놓은 물건들이 뭔가 더 있다는 것.
감정을 모두 잃어버린 엄마 이지희를 위해 완전히 금기시되었던 아빠의 죽음에 관련된 이야기들.
이제 그걸 하나씩 꺼내 봐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중식도와 아빠 얘기를 나눈 뒤로 마음이 급해졌다.
당장이라도 이모네로 달려가 엄마와 얘기를 나눠보고 싶었지만, 월요일 휴무일까지는 기다려야 했다.
엄마 이지희가 한 번도 입에 올린 적이 없던 아빠의 유품 가방.
그 속에서 엄마는 무엇을 봤던 걸까?
아빠의 죽음이 남은 사람들에게 엄청난 충격이긴 했지만, 엄마는 한동안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감정이 전혀 들어가지 않은 눈으로 웃지도 않으며 지낸 세월이 벌써 4년이 넘었다.
‘혹시...우리가 모르는 다른 사실을 알고 계셨던 걸까? 그래서 더 마음을 닫고 살게 된 걸까?’
요리하면서도 내내 그 생각에서 헤어나오기 어려웠다.
-서인우. 집중 안 하냐?
‘미안, 자꾸만 딴생각이 들어서….’
-지금은 무조건 맛있게 먹을 손님들만 생각하고 네 성공만 생각해. 그게 네 아빠가 바래는 걸 테니까.
‘알았어. 정신 차리고 할게.’
오래간만에 사부한테 혼나고 나니 정신이 번쩍 들었다.
서인우의 팬클럽 회원이라는 아주머니들이 우르르 일어나면서 끝까지 가게 여기저기 사진을 찍었다.
“이거 우리가 운영하는 팬클럽 사이트에요. 가끔 서인우 셰프 이름으로 봉사도 할 거니까 시간 맞으면 뜻을 함께해요.”
“네,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정말 음식이 하나같이 다 깔끔하고 너무 맛있어요. 자주 올게요.”
나가면서도 서로 웃으며 팔을 치는 아주머니들이 재미있다는 듯 쳐다보고 있던 이준형이 물었다.
“그런데 왜 여자들은 웃으면서 옆 사람을 때려?”
“때리는 게 아니라 공감의 뜻이라고나 할까요?”
“그건 살살치는 사람 말이지. 우리 엄마는 손도 매운데 웃다가 한 번씩 내 등을 때리면 열이 빡 받는다니까.”
윤지영과 정다운이 동시에 눈을 마주치고 웃었다.
말하지 않아도 둘 다 어제 본 이준형 엄마의 얼굴이 떠오른 듯했다.
“그래도 아프다고 화내면 안 돼요. 그러면 기분 확 상하거든요.”
“그러니까…. 처음부터 치지를 말았어야지. 우리 엄마 중고등학생 때 배구 선수였어. 손이 얼마나 매운지….”
순간 정다운과 윤지영의 얼굴이 찡그려졌다.
얼마나 손이 맵고 강도가 셀지 안 봐도 알 것 같았다.
“그나저나 대박 아니냐? 무슨 셰프가 팬클럽까지 있냐? 재수 없는 새끼.”
“그냥 부럽다고 하세요. 얼굴이 아이돌인데 당연한 거 아니겠어요?”
이준형이 계속해서 입을 삐죽거렸다.
“에이 나는 박 대표님하고 통화나 해야겠다. 오늘 오후에 전화 달라고 하셨는데...”
“이준형씨, 지금 새우면 판매는 어때요? 처음처럼 계속 잘나가요?”
“아니요, 처음 같지 않아요.”
“아저씨, 사실이에요? 판매 잘되고 있는 거 아니었어요?”
“처음 같지 않고 처음보다 몇 배는 더 잘나가.”
퍽!
“에이, 깜짝이야.”
윤지영이 분명 애교 섞인 주먹을 날렸을 텐데...순간 갈비뼈가 나가는 줄 알았다.
“지영 씨도 배구 선수였어요?”
“아니요.”
윤지영이 깔깔깔 허리를 꺾으며 웃었다.
“내가 요즘 운동하거든요. 그래서 쨉이 좀 쎄요.”
“무슨 운동 하는데 주먹이 완전 돌땡이...”
“복싱이요. 유산소 운동으로 좋다고 해서, 캐나다 가기 전에 체력 좀 키우려고 시작했어요.”
캐나다에서 뭔 놈 하나 갈비뼈 아작을 낼듯했다.
이준형이 앞으로는 윤지영과 최소한 양팔 길이만큼은 떨어져 있어야겠다는 다짐을 하며 핸드폰을 들고 밖으로 나갔다.
* * *
김형식을 만나고 돌아온 강기태는 하루를 꼬박 나가지 않고 방에만 박혀 있었다.
“딱 한, 두 달만 어디 숨어있어. 사람이 죽은 것도 아니니까 며칠 조사하다가 조용해질 거야. 알아들어?”
“그 후로는 전화도 오지 않았습니다. 이미 더는 관심을 갖지 않는 것 같은데...굳이 가족들과 떨어져서...”
“지금 내 지시를 어기겠다는 거야? 이번에 재수 없게 걸리면 그동안 나와 했던 거래들이 다 수면 위로 올라올 수 있다는 생각은 안 해봤어?”
“죄송합니다. 며칠 내로 사라져 있겠습니다.”
김형식이 알려준 대형마트 사물함 비밀번호가 찍힌 종이를 가만히 들고 있던 강기태가 결심했는지 천천히 현관을 나섰다.
마트에는 저녁 장을 보러 온 사람들이 제법 많아 꽤 북적거렸다.
주위를 잠시 두리번거리던 강기태가 종이에 찍힌 사물함 번호를 찾아 비밀번호를 눌렀다.
사물함의 문이 열리며 화면에 보이는 숫자가 파란색으로 바뀌었다.
그 안에는 작은 비타민 음료 박스가 들어 있었다.
뚜껑을 열어 내용물을 잠시 확인하고는 바로 들고 마트를 빠져나갔다.
두 딸의 하교 시간이 다가오자 급하게 집으로 돌아가던 강기태는 뭔가 싸한 느낌에 자꾸 고개를 돌려 주위를 살폈다.
그러다가 다시 걷기 시작한 순간 서서히 다가오는 남자가 보였다.
“강기태 씨. 잠시 얘기 좀 할까?”
이 목소리.
아주 짧은 통화였지만, 분명 기억에 남아있는 목소리였다.
뭔가 일이 잘못됐다는 예감에 음료수 박스를 더 힘주어 꽉 안고 무조건 걸었다.
“더 걸으면 지수가 아빠를 볼 수도 있는데, 괜찮겠어?”
“다, 당신…. 뭐야?”
“눈치를 보니 내 목소리 기억하고 있구만. 딸내미 눈에 띄기 전에 내 차로 조용히 가자고.”
천하의 강기태 인중에 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유재철이 짧은 웃음소리를 내뱉으며 한쪽에 세워둔 차를 눈짓했다.
“세상 무서울 게 없는 깡패 새끼도 딱 하나 무서운 게 가족이지. 그중에서도 특히 예쁜 딸. 그러니까 어서 움직여.”
강기태는 한 발짝도 움직이지 않고 멈춰 서 있었다.
만약 지금 최고 속도로 튄다면?
눈앞에 보이는 저 사람한테 잡힐 확률, 소리 지르며 따라오는 저 남자를 피해 달리다가 딸 지수나 지영이 눈에 보일 확률. 그리고 마지막으로 가장 바라는 일인 이 남자가 쫓아오지 못하는 곳까지 달려 숨을 확률.
모든 확률을 따져보느라 눈동자가 정신없이 굴러다녔다.
나이는 좀 있어 보이지만, 여기저기 근육에서 뿜어져 오는 탄탄함이 만만치 않아 보였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식은땀만 흘리고 있던 강기태의 눈에 친구들과 웃으며 다가오고 있는 딸 지수의 모습이 보이기 시작했다.
삑!
“저기 오른쪽에 있는 검은색 승용차.”
이미 강기태의 마음을 읽은 듯이 차의 위치를 알려주고 난 유재철이 먼저 차를 향해 걸어갔다.
결국 어쩔 수 없이 차에 탄 강기태가 팔에 꼭 끼고 있던 음료 박스를 두 손으로 감싸고 있었다.
“난 그 돈에는 관심 없으니까 안심하라고.”
“형사입니까?”
“지금은 아니지.”
“그럼… 뭡니까? 내 딸 지수 이름까지 알고…”
유재철이 강기태의 눈을 정면으로 응시하며 아주 잠시 웃었다.
분명 웃었는데, 강기태의 몸이 움찔했다.
깡패 생활 10년이 넘은 강기태를 움츠러들게 만드는 눈빛.
그 눈빛을 쏘아대며 웃고 있는 유재철이 순간 두렵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한테 원하는 게 뭡니까?”
“원하는 거 없어. 난 그냥 사고조사를 맡은 직원일 뿐이야.”
“사고조사? 그렇다면, 지난번 전화로 물었던 안상훈….”
“모르는 사람이라더니 이름은 외웠나 보네. 어차피 너와 [만가복] 김형식 회장과의 관계 다 알고 찾아온 거니까 시간 낭비는 하지 말자.”
차가운 눈빛의 유재철의 입에서 김형식이라는 이름이 나오는 순간 강기태의 얼굴에 핏기가 싹 사라졌다.
지금 강기태가 두려워하는 사람이 눈앞에 있는 유재철인지, 그의 입을 통해 나온 김형식인지는 아무도 알 수 없었다.
“뭐가 알고 싶은 겁니까?”
“이미 다 알고 있다고 했잖나?”
“내가 그런 협박에 넘어갈 거로 생각해? 증거 있어?”
유재철이 재킷 주머니에서 사진을 두 장 꺼내 보였다.
“어제 한강공원에서 내가 직접 찍은 거야. 솜씨 죽이지?”
강기태의 인중에 다시 땀이 맺히기 시작했다.
“나는 더 할 말 없습니다. 이제 돌아가세요.”
“사람을 고의로 쳐놓고 저 돈으로 어디 좀 숨어있으려고 그랬나? 물론 그것도 김형식이 시킨 일이겠지.”
“할 말 없다니까 왜 자꾸 그래? 난 가볼 테니까 신고를 하든지 알아서 하라고.”
문을 막 열고 나가려는 강기태를 붙잡는 한마디가 들렸다.
“예쁜 딸들. 지수와 지영이를 걸고 협박했겠지. 그 애들 우리가 지켜줄 수 있어.”
문고리를 잡은 강기태의 손이 심하게 떨렸다.
“한마디만 더하지. 난 절대 포기하지 않는 사람이야. 끝까지 갈 거라고. 그러면 결국 김형식이 어떤 선택을 할지 잘 생각해 보라고.”
유재철이 그 상태로 꼼짝도 하지 않고 멈춰 있는 강기태의 손을 살짝 밀며 차 문을 열어주었다.
“내 번호 알지? 생각해 보고 전화해. 오래 기다리지는 못할 거다.”
고개를 들어 유재철의 눈을 다시 한번 쳐다본 강기태가 고개를 푹 숙이고는 그대로 한 걸음씩 집을 향해 걸어갔다.
그 모습을 한참 쳐다보고 있던 유재철이 차에 시동을 걸었다.
‘곧 연락이 오겠군.’
* * *
MS 백화점에서 새로 시작하고 첫 휴일인 월요일.
서인우는 밀린 잠을 잔다거나 쇼핑을 한다거나 하는 흔한 계획 같은 건 전혀 없었다.
주말 내내 휴무일만 손꼽아 기다렸다.
아침 운동도 평상시보다 짧게 하고는 간단히 토스트 두 장으로 아침을 대신했다.
쌉싸름한 커피가 들어가니 아직 조금 잠들어 있던 정신이 개운하게 깨는 것 같았다.
어제 잠시 쉬는 동안 1층에서 미리 사둔 엄마와 이모의 가을 스카프가 담긴 쇼핑백을 차 조수석에 놓았다.
아침, 저녁으로 제법 쌀쌀해진 바람이 느껴지자 평상시 기관지가 약해 잔기침을 자주 하던 엄마가 생각났다.
가늘고 하얀 목에 항상 둘려 있던 스카프가 언젠가부터는 엄마의 상징처럼 서인우의 머릿속에 새겨져 있었다.
출발하면서 엄마한테 전화를 걸었다.
“엄마, 저예요. 아침 식사는 하셨어요?”
-응. 방금 간단히 먹었어. 아직 영업 시작 전이지?
“오늘 여기 휴무 날이에요. 그래서 지금 엄마 보러 가고 있어요.”
-쉬는 날인데 피곤하게 뭐하러 또 와? 잠이라도 더 자든지 하지. 왔다 간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엄마한테 뭐 여쭤볼 것도 있고 해서요.”
-뭔데?
궁금했다.
당장 전화로라도 아빠의 유품 가방에 관해 묻고 싶었지만, 그건 안될 일이었다.
얼굴을 마주 보고 하는 대화도 아빠의 죽음이 주제가 된다면 감당하기 힘들 거다.
“나중에 얼굴 보고 얘기해요.”
-알았어. 운전하고 오는 거야?
“네.”
-그래, 운전 조심하고.
“금방 뵐게요. 쉬세요.”
잠깐의 통화에서도 그리움이 밀려왔다.
예전처럼 농담하고, 드라마 보며 웃고 울던 그런 엄마의 모습이 그리웠다.
지난번 조금 좋아진 것 같아서 안심되었지만, 전화로 듣는 엄마의 목소리는 여전히 무미건조했다.
마치 누군가가 작성해놓은 대본을 감정 없이 읽는 것처럼.
쉬지 않고 달려 도착한 이모네 아파트 주차장에 내려 한참을 서 있었다.
서인우 역시 각오가 필요했다.
띵동.
경쾌한 벨 소리와 함께 비디오 폰을 통해 이모의 목소리가 들렸다.
“인우니?”
“네.”
삐리리 삑.
도어락 소리가 들리며 이모가 반가운 얼굴로 문을 열어주었다.
“어서와. 자주 보니까 반갑다. 아침은?”
“일찍 먹고 출발했어요.”
“하긴 곧 점심시간이구나. 언니, 인우 왔어. 나오지 않고 뭐 하고 있어?”
그제야 방에서 천천히 나오는 엄마 이지희의 얼굴이 보였다.
“네 엄마 가을 타나 보다. 요 며칠 부쩍 우울해 보이네.”
“엄마, 나 왔어요.”
“그래. 우리 커피 마실까?”
“좋아요. 우선 이거 받아. 이모도.”
“어머. 이거 뭐야? 혹시 선물이야?”
이미 안에 있는 박스까지 열기 직전인 이모가 한 톤 높아진 목소리로 물었다.
“별거 아니에요. 날씨가 쌀쌀해져서 스카프 하나씩 샀어요.”
스카프를 꺼내 목에 두르는 것과 동시에 현관 거울에 앞으로 옆으로 비춰보며 신나하는 이모와 달리 엄마 이지희는 선물을 꺼내지도 못하고 있었다.
“엄마, 엄마도 꺼내서 해봐.”
“매년 이맘때면 네 아빠가 스카프를 선물했어. 엄마 기침하지 말라고.”
그저 항상 목에 스카프를 하는 모습만 봤지, 그게 다 아빠의 선물이었는지는 전혀 몰랐다.
“엄마. 아빠 얘기 나와서 묻는건데...이제 아빠의 유품 가방을 좀 보면 안 될까요?”
투두둑.
손에 들고 있던 선물 상자를 떨어트린 엄마 이지희가 두 손을 꽉 잡은 채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