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7화.
‘[만가복] 김형식 회장?’
걷는 게 아니라 그냥 미끄러지는 것 같았다.
아무 소리도 내지 않고 다시 차로 돌아온 유재철이 카메라에 찍힌 얼굴을 다시 한번 확인했다.
“이거 냄새가 심하게 나는데…. 너무 구려. 오랜만에 재미있겠군.”
둘의 대화가 들리지는 않았다.
하지만, 둘 사이의 스토리를 알아내는 건 유재철에게는 시간문제였다.
둘의 대화는 그리 길게 이어지지는 않았다.
다시 차에서 내린 강기태가 허리를 깊이 숙여 인사를 하자 먼지를 내뿜으며 차가 그곳을 빠져나갔다.
그저 멍하니 서서 차가 사라지는 것을 바라보고 있는 강기태의 얼굴이 부쩍 어두워 보였다.
“강기태. 저 영감한테 뭔가 제대로 잡혔나 보군. 저런 얼굴을 보일 때면 딱 두 가지지. 가족을 건드릴 경우, 아니면 가족과 떨어지게 될 경우.”
유재철은 직감할 수 있었다.
분명 이번이 처음은 아닐 거라는 것을.
“강기태! 지금까지 [만가복] 김형식하고 무슨 일들을 꾸며왔는지 내가 다 밝혀주지. 너희 둘은 잘못 걸린 거야.”
유재철의 날카로운 눈이 순간 반짝 빛을 내뿜고 있었다.
* * *
9월의 첫 주말이다.
오픈날부터 밀려드는 손님으로 정신없는 날들을 보내고 첫 토요일.
남들이 눈 빠지게 기다리는 주말이 백화점에서는 가장 바쁜 날일 거다.
사람들이 아침을 일찍 먹고 오는 건가?
아니면, 흔히들 말하는 아점?
언젠가 방송에 나간 후 대유행이 되는 간헐적 단식을 하는 사람들이 많아서인지 오픈하자마자 이미 우르르 손님이 밀려 들어왔다.
“언니. 아침으로 중식은 좀 아니지 않아요?”
“[서풍 TWO] 직원 1호인 다운 씨가 그렇게 말하니까 너무 웃기다. 내 친구는 불금에 술을 마시면 꼭 토요일 아점으로 짬뽕을 먹던데…. 해장한다고.”
“아! 하긴 우리집 짬뽕이 해장으로 정말 끝내주죠. 하여튼 장사가 잘되니까 좋긴 한데...사장님이랑 안 셰프님이 너무 힘드시겠어요.”
안 그래도 새벽 시장에서 돌아오자마자 장사 준비하고 모닝커피 한잔하고 나면 주방에서 나오지를 못하고 있다.
가끔 양장피 시키는 손님이 있어야 홀에 얼굴을 비추는 상황이니...주방에서 얼마나 바쁘게 움직일지는 안 봐도 알 것 같았다.
정다운과 얘기를 나누다 보니 서인우와 안상훈이 걱정이 된 윤지영이 주방으로 걸어 들어갔다.
“오빠, 아직 오전인데 벌써 주문이 들어왔네. 오늘은 주말이라 더 바쁠 것 같은데...힘들겠다.”
“장사 잘되면 좋지. 안셰프님이 걱정이지 나는 팔팔하니까.”
서인우가 장난스레 두 팔을 올려 보였다.
“안셰프님. 월요일 되야 쉬실 수 있는데...버티실 수 있겠어요? 너무 무리인 것 같은데요.”
“이 다리가 하루하루 더 강해지는 것 같습니다. 이제 적응했는지 훨씬 나아요.”
빈말일지는 모르지만 얼굴은 첫날보다 확실히 편해보이기는 했다.
“그럼 오늘도 파이팅입니다. 홀은 제가 책임지고 문제없이 일하도록 할게요.”
“그래, 내가 안셰프님 강제로라도 중간중간 쉬시게 할테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라.”안상훈이 수줍은 듯 미소를 보냈다.
윤지영과 잠시 짧은 대화를 나누는 사이에도 계속해서 주문 화면이 반짝거렸다.
-오늘 정신없는 하루가 될 것 같다. 각오해라.
‘오전에 준비해놓은 재료로 부족할까 봐 걱정이네.’
-그럼 나중에 좀 한가할 때 내가 실력 발휘 한 번 더 해줄게. 저 양반한테 이 찬란하고 위대하신 칼솜씨를 보게 되는 걸 영광인 줄 알라고 전해라.
‘뭐 한두 번 보나?’
“안 셰프님. 차돌 짬뽕하시는 거죠?”
“네, 제 전공이죠.”
“저는 백짬뽕 만들겠습니다.”
각자 불붙은 화구에 웍을 올리고 기름을 달달 볶다가 준비해놓은 재료들을 넣었다.
동시에 완성되어 가는 짬뽕 때문인지 주방 전체에 매콤한 향이 가득했다.
띵!
정다운과 윤지영이 동시에 다가와 각각 완성된 음식을 손님 테이블에 올려 놓았다.
밤새 술 마시다 그대로 왔는지 다크써클이 무릎까지 내려간 남자 둘이 백 짬뽕이 각각 앞에 놓이자 눈에 생기가 차올랐다.
“아씨, 보기만 해도 술이 확 깨는 것 같네. 겁나 시원해 보인다.”
마주 보고 앉은 둘이 마치 거울에 비치는 것처럼 동시에 그릇을 들어 국물을 들이켰다.
“아! 시원해. 속이 진짜 뻥 뚫리네. 이거지, 이거.”
“내가 한숨 자고 무조건 여기 백화점으로 가야 한다고 했던 말이 무슨 뜻인지 알겠지?”
“어, 백퍼 인정.”
“그런데, 이거 부작용 있어.”
다시 한 번 국물을 쭉 들이켜던 갈색 웨이브가 멋진 남자 하나가 내려오는 앞머리를 넘기며 물었다.
“부작용? 그게 뭔데?”
“우리 아빠가 이전 서풍 단골이셨잖냐. 그런데, 이 백짬뽕 믿고 술을 더 마시게 된다고 맨날 그러셨어.”
“아, 그말도 백퍼 인정.”
“[서풍] 없어졌을 때 우리 아빠가 정말 많이 서운해 하셨는데, 우리 엄마만 진짜 좋아했지. 이제 술 좀 줄이겠다고.”
후루룩.
경쾌하게 면치기를 보여주며 둘의 대화는 이어졌다.
“그런데, 그 아들이 이렇게 똑같은 맛을 내며 [서풍 TWO]를 만든 거 아니냐?”
“그러니까 내 말이.”
벌써 거의 반을 먹어 치운 웨이브 머리 남자가 갑자기 픽 웃었다.
“왜?”
“너희 어머니 [서풍 TWO] 가 다시 생겨서 불만이 많으시겠다?”
“말도 마라. 방송 경연대회를 보고 나서 무슨 ‘인우바라기’인가 뭔가에 가입도 하셨다더라.”
바닥에 남은 국물까지 깨끗이 마셔버린 웨이브 머리 남자가 하마터면 입에 남은 국물을 뿜을뻔했다.“뭐? 뭔 바라기? 그거 팬클럽 아니냐?”
“맞다니까. 여기 셰프이자 오너인 서인우 팬클럽이란다.”
“야씨, 완전 연예인이네. 얼굴 한 번 보면 좋겠구만.”
“양장피 시킬걸. 그러면 직접 나와서 소스 비벼주는 서비스를 해주는데...”
쩝쩝 입소리를 연이어 내던 웨이브 머리 남자가 고개를 저었다.
“이미 배가 만땅이다. 누가 양장피 안 시키나?”
바로 그때.
웨이브 머리 남자 앞 테이블에 40대? 아니면 50대로 보이는 아주머니 넷이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다른 메뉴는 맘대로 시켜도 되는데, 양장피는 꼭 시켜야 해. 알지? 그래야 우리 인우님 얼굴 볼 수 있어.”
“언니, 정말 꽃다발도 줄 거야?”
“그럼. 그 안에 손편지도 넣었는데...내가 거의 20년 만에 펜을 들었다는 거 아니냐. 설레서 잠도 못잤구만.”
깔깔 거리는 소리와 이유는 모르겠지만 마치 전염처럼 각자 옆 사람 팔을 쳐가며 대화를 나누는 소리가 애쓰지 않아도 잘 들렸다.
“너 그거 국물 아직 다 마시지 마.”
“갑자기 왜, 인마. 빨리 먹고 나가서 커피 때려야지.”
“너 뒤쪽에 앉아 있는 아줌마들이 양장피 시켰어. 우리 셰프 얼굴 보고 가자.”
“넌 멀리서 그게 다 들리냐?”
웃으며 말하던 짧은 머리 남자가 무심히 고개를 뒤로 돌리던 바로 그 순간이었다.
“어, 엄마?”
꽃다발을 준비했다던 누가 봐도 대빵으로 보이는 아주머니를 엄마라 부르며 짧은 머리 남자가 벌떡 일어섰다.
“이민규. 너... 어제 친구가 아파서 병간호하느라 집에 못 온다는 놈이 왜 여기서 나와!”
웨이브 머리 남자도 벌떡 일어나 고개를 숙였다.
“아! 안녕하세요. 민규 어머니시구나. 워낙 미인이셔서 제가 어머니인줄도 모르고 뒤돌아서 한 번 보라고...”
“어머, 언니 아들이랑 친구야?”
“둘 다 인물이 좋네.”
“애인은 있어? 대학생이라고 했나?”
아무래도 서인우 얼굴은 다음에 봐야 할 것 같았다.
이대로 10분만 더 앉아 있으면 신상 팍팍 털리고 멘탈까지 다 털릴 게 뻔했다.
“안녕하세요. 처음 뵙습니다. 여기 아름다우신 오여사님 아들 이민규입니다.”
“안녕하세요, 여기 뛰어난 미모의 오여사님 아들 이민규 친구 정찬호입니다.”
“웬일이야? 언니 다들 인물도 좋고 재치도 있고...너무 좋겠다.”
“친구 집에 있는 줄 알았는데 여기는 어떻게...”
“찬호 얘가 감기 몸살기가 있어서 어제 약 사줬어. 엄마 좋아하는 여기 서인우 셰프가 만든 시원한 짬뽕 따뜻하게 먹으면 좋을 것 같아서 내가 데리고 왔어.”
“네, 제가 아팠죠. 네, 많이 아팠습니다. 민규 덕에 다 나았습니다.”
네 명의 의심스러운 눈이 두 남자를 위 아래로 스캔하기 시작했다.
더 이상 버티기 힘들다는 판단과 동시에 막 나가려 인사를 건네려 할때였다.
주방에서부터 퍼져나오는 아우라가.
두 남자에게 쏟아지던 관심과 눈빛은 한순간에 휙 사라지고 없었다.
“꺅! 나왔다, 나왔어. 대박.”
“언니 말대로 실물이 더 짱이네. 사진 찍어달라고 해도 되나?”
“인우님 바쁘니까 단체로 한 장 박자. 핸드폰을...”
이민규 모친 오여사의 눈이 빛보다 빠르게 움직이다 민규에게 딱 꽂혔다.
“민규 네가 바로 사진 찍어.”
“엄마, 우리는 이제 가려고.”
“씁! 몇 초도 안 걸려.”
왜 이민규가 친구와 게임하고 술 마시는 것까지 거짓말을 하나 이해할 수 없던 것들이 다 풀렸다.
온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카리스마가 장난 아니었다.
찍소리 못하고 핸드폰을 전해 받은 이민규가 다른 아주머니 핸드폰을 말없이 친구 정찬호한테 건넸다.
“안녕하세요. 주문하신 양장피입니다.”
서인우가 인사를 하며 큰 접시에 담긴 양장피에 소스를 부어 재빨리 휙 저어주었다.
“안녕하세요. 우리는 서인우셰프 펜클럽 ‘인우바라기’ 회원들이에요.”
“네? 제가 그런 것도 있나요?”
서인우 자신도 금시초문이었다.
옆에서 듣고 있던 이준형 또한 놀라기는 마찬가지였다.
“오늘 못나오셨는데 팬클럽 회장님이 만들어서 지금 계속 회원이 늘고 있어요.”
“정말 몰랐습니다. 감사합니다.”
“인우님은 지금처럼 최고의 요리 해주시면서 가끔 요렇게 얼굴 비춰주시면 됩니다. 우리가 뭐든 봉사할 일 찾아서 서인우셰프 이름으로 뜻깊은 일 하려고 만든 거예요.”
“감사합니다. 그러면 봉사 가실 때 저한테도 연락 주세요. 월요일이 휴무라 가능한 날은 저도 참여하겠습니다.”
무슨 군대 열병식인 줄.
아주머니들이 동시에 기립박수를 보내고 있었다.
“저 바쁘시겠지만 사진 한 장 부탁드려도 될까요?”
기회를 놓치지 않고 한 아주머니가 재빨리 치고 들어왔다.
“그럼요.”
이민규 모친 오여사가 눈빛을 보냈다.
이민규와 정찬호가 동시에 핸드폰으로 사진을 찍었다.
그것도 여러 장을.
“감사합니다. 그럼 저는 들어가 보겠습니다. 맛있게 드세요.”
서인우가 뒤돌자마자 두 남자도 핸드폰을 건네주고 바로 고개를 숙였다.
“저희도 가보겠습니다. 좋은 시간 되세요.”
“그래요. 계산은 하지 말고 가요. 우리 모임에서 낼 테니까.”
“아, 안 그러셔도...”
“어른들이 사줄 때는 그냥 감사합니다만 하면 됩니다.”
서로 눈치를 힐끗 보던 두 남자가 어색하게 인사하며 급하게 가게를 빠져나왔다.
주방으로 다시 돌아온 서인우한테 중식도가 말을 걸어왔다.
-좋겠다. 팬클럽도 있고?
‘어떻게 알았어? 또 보인 거야?’
-아, 이런 건 안 보이는 게 좋은데. 배 아프다고.
‘내가 사부 팬클럽 회장 할게. 됐지?’
-아쭈, 너 그게 더 재수 없어. 내가 기억을 잃어 그렇지 분명 난 범상한 인물이 아니었을 것 같아. 그런 느낌적인 느낌이...
‘혹시 중국 역사에 내려오는 무슨 요리의 신 뭐 이런 거 아니었을까?’
안상훈을 힐끗 쳐다본 후 서인우가 속으로 말을 이어갔다.
‘뭐 전혀 기억나는 게 없어?’
-응, 없어. 어느 날 갑자기 네 아빠 서동수의 손에 들린 이 중식도에 내 영혼이 깃들었을 뿐이야.
‘왜 처음부터도 아니고 어느 날 갑자기 사부가 아빠한테 온 걸까?’
-분명히 이유가 있을 거야. 나를 봉인 해제하게 만든 이유가 말이야.
서인우도 중식도도 그 이유를 전혀 알지 못하는 지금이 너무 답답했다.
-내 친구, 서동수만이 알고 있을텐데... 죽은 자는 말이 없는 법. 정말 안타까울 뿐이다.
순간 서인우의 머리에 불현듯 떠오른 것이 있었다.
엄마가 숨겨놨다는 아빠의 유품 가방.
그 속 어딘가에 아주 작은 실마리라도 찾을 수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