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6화.
MS 백화점에서의 첫 영업이 어느 정도 마무리되어가고 있었다.
그전 가게와는 달리 백화점 문 닫는 시간이 정해져 있어서, 늦게까지 술을 마시는 손님은 없었다.
“이제 두 테이블 손님들만 일어나면 오늘 장사는 끝난 것 같다. 수고했다.”
주방으로 들어온 이준형이 서인우의 등에 손을 얹으며 웃어 보였다.
“안 셰프님은 잘 도착 하셨고?”
“그럼, 잘 모셔드리고 왔어.”
“너도 바로 퇴근 하라니까...”
“다운 씨랑 지영 씨 보내고 가볍게 맥주나 한잔 하고 들어가자.”
이준형의 얼굴을 보아하니 할 말이 꽤 많아 보였다.
“그래. 난 주방 정리하고 있을게.”
-아무리 생각해도 저 인간은 호프집에 취직했어야 했는데...
이준형이 나가자마자 중식도의 투덜거리는 소리가 바로 이어졌다.
“나한테 정말 큰 힘이 되어주는 친구야.”
-너 혹시 ... 왕따냐?
“왕따?”
대학 들어가기 전까지는 친구들과 제법 잘 지냈었다.
특히, 아빠가 하는 가게에 데려가서 짜장면 한 번 먹여주면 친구들 눈에 하트가 막 생기곤 했다.
갑작스러운 아빠의 죽음이 빠져나오기 힘든 충격으로 다가왔었다.
친구들이 내민 손도 잡고 싶지 않을 만큼.
언젠가부터 속마음을 보이지 않고, 연락도 잘 하지 않으며 굴속에 갇힌 사람처럼 살았다.
평생 곁에서 든든한 산이 되어줄 거라 믿었던 아빠의 갑작스러운 죽음, 그 충격으로 웃음을 잃어버린 엄마.
아빠의 마지막을 함께 하지 못하고, 더 많은 추억을 만들지 못한 자신에 대한 뼈저린 후회...
그렇게 휴학에 군대까지 이어지는 동안 유일하게 기다려 주고 먼저 다가와 준 친구가 이준형 이었다.
-그냥 웃자고 한 말인데...정말 왕따였나보네. 표정보소.
“아빠 돌아가시고 내가 좀 벽을 쌓고 살았어. 그걸 다 기다려 준 친구가 저 친구고.”
-원래 저렇게 생긴 애들이 또 의리는 있어.
“저렇게 생긴 게 뭔데?”
-왜 애가 뭐든 각 잡고 할 것 같이 생겼잖아. 이미 얼굴에 각을 딱 잡아놔서.
중식도와 농담을 주고받다 보니 주방 정리가 완벽하게 끝이 났다.
마지막 손님까지 자리에서 일어나자 백화점 안에 폐점을 알리는 음악 소리가 조금씩 들리기 시작했다.
또다시 시작된 각개전투.
이제는 누가 시키지 않아도, 또 서로에게 미루지도 않고 바로바로 자기가 할 일을 척척 해냈다.
주방 정리를 끝내고 나온 서인우가 아직 가게를 치우고 있는 정다운과 윤지영에게 다가갔다.
“오늘 많이 힘들었지?”
“오빠, 첫날이라 그런지 손님 정말 많은데? 계속 이대로만 되면 좋겠다.”
“사장님. 손님들이 하나같이 음식 맛있다고 너무 좋아하셨어요. 우리 직원 빨리 뽑아야 할 것 같아요. 언니랑 계속 같이하면 좋은데...”
윤지영이 정다운을 엉덩이로 툭 쳤다.
“이참에 공부고 뭐고 때려치우고 다운씨랑 돈이나 벌어볼까?”
윤지영과 얼굴 맞대며 농담하는 정다운을 보니 [만가복] 앞에서 소리를 지르던 앳된 정다운이 떠올랐다.
세상 모든 것이 맘에 안 드는 듯 잔뜩 화난 얼굴에 아침 같이 먹자는 별거 아닌 호의도 받아들이기 힘든 상태였던 어린 소녀.
이제는 적어도 [서풍TWO]의 식구들한테는 경계심을 전혀 보이지 않는 모습이 너무 다행이었다.
“마음 같아서는 내가 둘 다 어깨 안마라도 해주고 싶지만..빨리 들어가서 발 씻고 푹 쉬는 게 더 낫겠지?”
윤지영이 가까이 와 등을 돌렸다.
“아닌데? 안마해줘.”
서인우가 웃으며 어깨에 손을 올렸다.
“농담이야. 새벽 시장부터 시작해서 오늘 제일 힘들었던 건 오빤데...지금 이거 우리한테 안마해달라는 얘긴 거지? 다운 씨. 우리가 눈치 없던 거 맞지?”
정다운이 씩 웃어보였다.
“준형이랑 다시 한 번 점검하고 전원 확인하고 할 테니까 얼른 퇴근해서 쉬어.”
“그래, 다운 씨. 우린 이제 가자. 오늘 정말 열일했어.”
윤지영이 두 팔을 꼬아 자기 어깨에 올렸다.
“이쁜 지영아. 오늘도 애썼어.”
식당을 빠져나가는 둘을 멍하니 쳐다보던 이준형이 고개를 저었다.
“야, 자기애. 쩐다.”
“우리도 나가자.”
“그래, 백화점 뒤에 작은 펍 있더라. 거기서 가볍게 맥주 한 잔씩만 하고 헤어지자.”
분명 한잔씩만 이라고 했는데...
이미 맥주 석 잔을 마시고도 정말 마지막이라며 한 잔을 더 시킨 이준형이 아까부터 계속 움찔거리던 입을 드디어 열었다.
“인우야!”
“너 뭐 할 말 있지? 아까부터 계속 뭔가 말하려는 것 같던데...”
“인우야! 오늘 고마웠다.”
“응? 오늘? 오늘 내가 인사받을 일을 뭐 했지? 기억에 없는데….”
이준형이 새로 나온 맥주를 한 입 들이켜고는 다시 말을 이었다.
“오늘 우리 부모님. 정말 좋아하시더라. 네가 이준형 사장이라고 호칭해주고, 내 칭찬해 주니까 빈말이라도 좋으셨나 봐.”
“사장 맞으니까 사장이라 호칭한 거고, 빈말도 한 적 없다. 나 정말 너한테 감사해하며 일하고 있어.”
서인우를 바라보는 이준형의 눈빛이 오묘하게 빛났다.
“나 요즘 새우면을 어떻게 하면 광고할 수 있을까 고민중이다. 여기에서 조금 입소문이 나면 다른 곳도 하나씩 영업 해보려고.”
“이거 봐. 네가 할 일이 너무 많은데...괜찮겠어?”
“요즘 진짜 살맛 난다. 사실 네가 그 시장통 허름한 가게에서 시작한다고 했을 때는 솔직히 젊은 거 하나만 믿고 뛰어 들었었다.”
서인우가 그때 가게를 둘러보던 이준형의 실망한 눈빛을 기억하며 씁쓸하게 웃었다.
“그런데, 네가 하루도 빠짐없이 새벽 시장에서 장을 봐오고, 아침을 굶고 오는 정다운 씨 신경 쓰는 모습 보면서 사실 감동했다.”
“무슨 감동씩이나?”
“그래서 나도 너처럼 매사에 최선을 다하려고 노력 중이다. 그 중 하나가 새우면 사업이고, 다행히 경험 많은 박 대표님과 함께라 이번 기회에 많이 배우려고.”
서인우가 반쯤 남아있는 맥주잔을 들어 이준형의 잔에 부딪쳤다.
“내일을 위해서 이것만 마시고 일어나자. 그리고, 준형아...”
서인우가 긴 눈을 지긋이 뜨며 이준형을 똑바로 바라봤다.
“네가 내 옆에 같이 있어 준 게 가장 큰 힘이었어. 네가 있어서 난 요리에만 전념할 수 있었던 거고...”
“야, 인마. 너 앞으로 나 그런 눈으로 쳐다보지 마.”
“갑자기 뭔 소리야?”
“나 방금 설레서 지릴 뻔했어. 내가 남자인 걸 다행이라 생각해.”
그건 정말 다행이긴 했다.
오늘 만난 이준형 모친께는 죄송한 말이지만, 이준형 저 얼굴의 여자가 좋아한다고 쫓아다녔으면….
아마도 알 수 없는 분노에 어쩌지 못하고 방황하고 돌아다니지 않았을까 싶다.
“새우면은 계속 잘 팔리고 있는 거냐?”
“그럼, 팝업 스토어 열었을 때, 먹어 본 사람들이 입소문을 내줬는지, 꾸준히 판매되고 있어.”
“잘됐네. 난 지금처럼 요리만 열심히 할게.”
“그래야지. 이번 주말에 박 대표님하고 잠깐 만나기로 했어. 뭐, 사업구상이라고 해야 하나?”
요즘 살맛 난다더니.
정말 이준형의 얼굴에 봄이 온 듯했다.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살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서인우는 오늘 함께했던 서풍 식구들의 표정을 두고두고 기억하리라 맘먹었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오늘처럼 행복한 얼굴로 일할 수 있기를 바라며 가벼운 발걸음으로 집으로 향했다.
* * *
차 안에 김밥, 사발면 등 음식 냄새와 며칠째 씻지 않아 땀 냄새가 섞여 그야말로 시궁창을 방불케 했다.
유재철은 창문을 열어 환기하면서도 강기태의 집을 향한 시선을 한시도 떼지 않았다.
“벌써 사흘이 지났는데, 밖에 나가지 않는 거야 뭐야? 설마 내가 놓친 건가?”
차에서 먹고 자고 벌써 삼 일째다.
허리도 아프고 눈알도 빠질 것 같았지만, 오늘은 왠지 그가 움직일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부장님, 오늘은 집에 좀 들어가면 안 됩니까? 저 이러다가 마누라한테 이혼당하게 생겼다고요.”
형사 일을 그만두면서 최만수 회장 덕분에 새로 시작한 일.
백화점 보안팀 부장직을 맡고 있지만, 평상시는 직원 교육이 전부인 일이었다.
처음부터 개인적인 일을 전담하는 사람으로 아예 쐐기를 박아버린 최만수가 일반 백화점 업무는 일체 신경도 쓰지 않도록 배려해주었다.
그저 버젓한 직장과 꾸준한 수입을 보장받았을 뿐이었다.
이번일 정도는 혼자 얼마든지 처리할 수 있었지만, 아주 사소하지만 큰 문제, 바로 생리현상을 극복할 방법이 없었다.
그 이유로 외근을 부탁한 한성준의 얼굴에 불만이 가득했다.
“오늘이야. 분명 오늘 움직일 거라고.”
“벌써 삼일입니다. 한시도 눈을 뗀 적 없는데... 꼼짝도 하지 않았다고요. 그런데, 오늘이라고 어떻게 장담...어! 어?”
“그래, 그럴 것 같더라니. 오늘은 집에 보내줄게.”
강기태의 차를 천천히 따라붙은 유재철의 눈이 반짝반짝 빛났다.
마치 이런 일을 할 때 살아있음을 느끼는 사람 같았다.
“이 길로 가면 한강공원 아닙니까?”
“사람들이 보지 않는 은밀한 대화 장소가 필요했겠지.”
이미 어두워진 한강은 드문드문 데이트 하는 듯한 연인들을 제외하고는 사람의 움직임을 찾기 어려웠다.
강기태의 차가 서서히 속도를 낮추기 시작했다.
“거의 다 왔나 본데요?”
“지금부터가 제일 중요해.”
“네? 뭐가요?”
“여기서 잠깐 차 세워줄 테니까 얼른 내려서 집으로 들어가요. 괜히 이혼당하지 말고.”
삼일을 꼬박 누군지도 모르는 사람을 기다렸다.
그냥 어떤 남자의 사진 한 장과 차 넘버가 찍힌 사진 한 장, 그렇게 두 장만 건네주고 유재철이 잠시 자리를 비울 때 움직이면 연락하라는 게 전부였다.
무슨 일인지, 왜 이 남자를 며칠 밤을 지새우며 기다리고 있었는지...미치게 궁금했지만, 묻지 않았다.
어차피 물어도 알려주지 않을 거니까.
그런데, 이제 거의 다 왔다고 생각했는데, 집으로 돌아가라니.
“누군지만 확인하고 가면 안 될까요?”
“한성준 씨한테 혹시 문제가 생길까 봐 그래. 내가 개인적으로 하는 일에는 엮이지 않는 게 좋거든.”
그 한마디에 다 이해가 되었다.
평상시 무뚝뚝하고 말은 없지만, 일 처리 하나는 끝내주게 한다는 거, 그리고 절대 남에게 손해를 끼치지 않는다는 건 직원 모두 잘 아는 사실이었다.
“알겠습니다. 살짝 내려서 바람과 같이 사라지겠습니다. 부장님도 몸조심하십시오.”
“정말 고생 많았어. 내가 다음에 소고기 쏜다.”
“약속 지키십시오.”
어디서 본 건 있었는지, 차 문을 열고 몸을 최대한 숙이며 유유히 사라지는 한성준을 잠시 쳐다보다 서서히 출발했다.
유재철의 차가 멈춘 곳에는 다른 차도 사람도 보이지 않았다.
경력 많은 베테랑 형사답게 유재철은 다른 차들이 주차된 사이에 차를 세우고 차 안에 준비해둔 망원 렌즈가 장착된 카메라를 들었다.
“이제 나와보시지. 몸통 양반.”
10분쯤 시간이 흐른 것 같았다.
어둠을 뚫고 강한 라이트가 한강을 바라보고 있는 강기태를 비추며 다가왔다.
아직 차에서는 아무도 내리지 않았다.
유재철은 차 넘버가 잘 보이게 사진을 여러 장 찍고 기다렸다.
드디어 차 문이 열렸지만, 아쉽게 뒷좌석이 아닌 운전석이었다.
잠시 후 강기태가 주변을 두리번거리더니 그 차를 향해 다가갔다.
닫혀있는 차 창문을 향해 허리를 깊이 숙여 인사한 강기태가 차 문을 열고 뒷좌석으로 들어갔다.
“고개 좀 돌려봐. 어이, 몸통! 얼굴 좀 보자고.”
두 남자가 대화를 나누는 모습이 카메라에 잡혔다.
보통 성인 체격의 남자로 보였다.
강기태의 얼굴은 간간이 카메라에 잡혔지만, 유재철이 담고 싶은 남자는 계속해서 등만 보여주고 있었다.
조용히 차에서 내린 유재철이 앉은 자세를 유지하며 강기태가 탄 차 가까이 다가갔다.
운전석에서 내린 남자의 눈에 띄지 않게 반대 방향으로 조심조심.
자세를 잡고 카메라 렌즈를 바꿔가며 한참을 돌리고 땅기고 하던 순간이었다.
드디어 몸통의 얼굴이 카메라에 잡혔다.
이럴 때는 귀신같이 몸이 먼저 반응한다.
연신 카메라 셔터를 눌러대던 유재철이 순간 얼음처럼 멈춰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