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5화.
중식도가 하는 말을 전혀 이해할 수 없었다.
여자 이준형?
그게 무슨 말인지...
주방에서 홀 쪽으로 나 있는 유리문을 통해 밖을 내다본 서인우는 이제야 사부의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저 웃음밖에는 나오지 않았다.
“엄마, 여기 같이 일하는 정다운 씨. 이쪽은 이번 달만 도와주기로 한 인우 사촌 동생 윤지영 씨.”
이준형의 부모님이 홀에 등장하셨다.
각진 얼굴에 살짝 찢어진 눈의 이준형한테 그냥 긴 퍼머머리 가발을 올려놓은 모습이었다.
정다운과 윤지영이 허벅지를 꼬집으며 웃음을 참는 모습을 다행히 이준형 모자는 보지 못한 것 같았다.
“안녕하세요. 여기 이준형 사장과 공동대표인 서인우입니다.”
“어머, 인우야. 아니...서인우 씨. 너 그렇게 얘기하니까 낯설다. 우리가 얼굴은 처음 보지만, 이름은 알고 지낸 게 벌써 몇 년인데...”
“네, 어머니. 오늘은 내 친구 준형이 아니라 엄연한 사업가 이준형 사장의 어머니, 아버지로 모시겠습니다.”
“안 그래도 되는데...호호호. 호호호.”
옆에 서서 묵묵히 웃고 있는 이준형 아버지와 입이 귀에 걸린 채 허리가 꺾어지게 웃고 있는 이준형 어머니에게 서인우가 고개를 깊이 숙여 인사했다.
“얼마 전 백화점 식품관에서 판매 시작한 새우면도 준형이 덕에 매출이 급상승 중입니다. 제가 정말 인복이 많아요. 어머니, 아버지가 믿어주신 덕분입니다. 감사합니다.”
“처음부터 믿어준 거 아니라니까, 내가 등짝을 얼마나 많이...”
쿡!
다시 봐도 딱 이준형 그대로인 어머니가 준형의 옆구리를 사정없이 찔렀다.
“아파, 엄마.”
이제 어엿한 사업가로 자기 몫을 톡톡히 해내고 있는 이준형도 집에서는 아직 어리광부리는 아들이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는 서인우의 눈에 부러움과 회한이 섞여 있었다.
대학을 입학하는 그 시절에만 해도 서인우 역시 엄마 아빠에게 어리광부리는 철부지 아들이었다.
부모들은 빨리 철드는 자식이 가슴 아픈 법이다.
자식이 철드는 건 나이가 정해져 있는 게 아니라는 걸 알기 때문에...
“여기 메뉴판 보시고 드시고 싶은 메뉴 천천히 골라 주세요. 진작 한 번 모셨어야 했는데...오늘은 어머니, 아버지께 감사하는 마음을 담아 제가 대접해 드리겠습니다.”
“아, 아니네. 오픈이라 팔아주려고 왔어.”
“이미 여기 이준형 사장이 그 이상의 수입을 올려주고 있으니 걱정하지 마시고 제일 맛있고 비싼 음식으로 골라보세요. 그럼 저는 주방이 바빠서 들어가 보겠습니다.”
윤지영과 자연스럽게 바통터치가 되었다.
“평상시 자주 드시는 메뉴 말고, 여기 이쪽에 있는 요리에서 선택해주시기 바랍니다. 우리 오빠 요리 솜씨는 이미 방송에서 보셔서 잘 아시죠?”
“그럼요. 우리도 궁금했었는데…. 이렇게 좋은 기회가 돼서 너무 좋아요. 그런데...”
“네, 편하게 말씀하세요.”
이준형 모친이 윤지영을 바라보는 시선이 심상치 않았다.
“이름이 윤지영 씨?”
“네, 인우 오빠 사촌 동생이니까 말씀 편하게 하세요.”
“혹시 남자 친구 있나?”
“네?”
갑작스러운 질문에 이준형의 얼굴이 순간 빨간 물감을 뒤집어쓴 것처럼 붉어졌다.
“내가 엄마 때문에 못살아. 아빠랑 빨리 식사 하시고 가셔.”
“얘는...방금 못 들었어? 서인우 사장이 대접해 준다잖아?”
“네, 천천히 많이 드시고 가세요. 그리고, 저 남자 친구 없어요.”
“어머나, 그래요? 알았어요.”
“알긴 뭘 알아? 메뉴 다 봤으면 빨리 주문해!”
이제는 귀까지 빨개진 이준형을 보고 찡긋 웃어 보이는 윤지영은 역시 고수였다.
윤지영이 다른 테이블로 가자 이준형 어머니가 아들을 끌어당겨 옆에 앉혔다.
“나 일해야 해, 엄마.”
“저 아가씨가 남자 친구 없다잖아. 네가 싫으면 없어도 있다고 했을텐데...눈매가 야무진 게 똑소리 나겠어.”
똑소리가 아니라 잘못 걸리면 어딘가에서 뚝 소리 날 여자임은 틀림없었다.
“그냥 한 달만 일 도와주러 온 거야. 나 없으면 일 진행 안 돼서 진짜 가봐야 하니까 엄마 아빠 메뉴 천천히 골라봐요.”
“그래그래, 알았어. 이준형 사장.”
이준형 모친의 목소리에 힘이 빡 실렸다.
곧 점심시간이라 그런지 홀에 사람이 꽉 차 있었다.
근처 사무실에서 일하던 직원들까지 몰려들며 결국 대기 줄까지 생기기 시작했다.
정다운이 빈자리가 없는 걸 확인하고는 들어오려던 젊은 커플에게 다가갔다.
“죄송합니다. 지금 자리가 꽉 차서요. 조금 기다리셔야 할 것 같은데...괜찮으시겠어요?”
“그럼요. 여기 [서풍 TWO] 잖아요. 원래 줄 서서 먹는 맛집이라 각오하고 왔어요.”
“맞아, 자기야. 그래도 우리가 1번인가 보다.”
바로 앉지도 못하고 기다려야 한다는 말에도 뭐가 그리 신이 났는지 싱글벙글 웃고 있는 젊은 커플이 고맙고 이뻤다.
싱싱한 전복과 오징어 및 각종 해물과 송이버섯, 청경채등을 아낌없이 넣어 전가복을 완성한 서인우가 이준형 부모님이 앉아계신 자리로 돌아왔다.
“이게 뭔가? 우린 짜장면이나 한 그릇 빨리 먹고 자리 비켜 주려고 했는데...”
이준형 아버지가 말과 달리 눈은 이미 화려한 요리에 꽂힌 채 속으로 침을 삼키고 있었다.
“안 그래도 주문서 받고 빨리 일어나시려고 그러신 것 같아서 준비했습니다. 가족 모두에게 복을 준다는 전가복입니다.”
“이거 너무 맛있게 생겼네...여보, 내가 이걸 먹어 봤었나?”
“전에 준형이 고등학교 입학할 때 먹어봤지. 물론 이렇게 해물이 싱싱하고 많지는 않았지만 말이야.”
“그럼 좋은 시간 되십시오.”
홀에 가득 차 있던 손님들이 서인우의 실물을 보고 한 번 감탄하고 그가 들고 있는 요리를 보고 또 한 번 감탄했다.
여기저기서 웅성거리며 이준형 부모님까지 힐끗힐끗 쳐다보자 기분이 나쁘지 않은지 이준형 똑 닮은 어머니가 환하게 미소 짓고 있었다.
주방으로 돌아와 주문상태를 확인한 서인우가 안상훈 곁으로 다가갔다.
“안 셰프님. 다리 많이 아프시죠?”
“첫날이라 그런지 쉽지는 않네요. 점심 장사 얼추 마무리되면 좀 쉬겠습니다.”
“남은 주문은 저 혼자 할 수 있습니다. 좀 앉아 계세요.”
안상훈이 끙하는 소리와 함께 서인우가 준비해놓은 의자에 다리를 펴고 앉았다.
“의자 편하고 좋네요.”
“오늘 너무 무리하시는 거 아닌가 걱정됩니다.”
“사람 몸은 다 적응하게 되어있습니다. 하루하루 지나면 훨씬 편해질 거예요. 걱정하지 마세요.”
주문이 밀려 계속 안상훈을 걱정하고 있을 수는 없었다.
웍에 불꽃을 피우며 불향 가득한 짬뽕을 만들어내고, 바로 새우를 튀겼다.
또 하나의 웍에 마른 고추와 다진 채소를 넣어 칠리소스를 만들어 재빨리 섞었다.
띵! 띵!
계속해서 요리가 완성됐다는 경쾌한 벨 소리가 온 주방에 울려 퍼졌다.
* * *
정신없이 몰려들었던 점심 장사를 마치고 차은석이 김지호 보조 셰프와 함께 보이차를 마시고 있었다.
“이게 작년에 중국 여행가셔서 사 오신 건가요?”
“응. 사실 이 보이차보다 지난번에 마셨던 차가 더 맛있지 않아?”
“난 중국차는 솔직히 잘 모르겠어요. 그냥 셰프님이 좋은 차라고 그러시면 향이 나는 것 같기도 하고...”
설마 홀에까지 차 향이 나지는 않았을텐데...마치 향에 끌려 오기라도 한 듯 오승연 홀 매니저가 코를 킁킁거리며 주방으로 들어왔다.
“둘만 뭐 좋은 거 마시는 거예요, 지금?”
“이거요? 보이차예요. 오 매니저님은 아까 보니까 커피 마시고 계시던데?”
“커피는 커피고, 보이차는 또 다른 맛이죠.”
“원래 그렇게 차를 좋아합니까?”
“그럼요. 난 커피, 차, 음료수...뭐든 마시는 건 다 좋아해요.”
“술은 왜 빼요?”
“그러네, 제일 중요한 걸 빼먹었네.”
깔깔거리며 웃는 오승연을 따라 차은석과 김지호도 같이 소리 내 웃었다.
“지금 뭐 신나는 일이라도 있어요? 오늘이 무슨 날인지 알고 이렇게 잡담하고 있는 겁니까?”
갑자기 나타나 언성을 높이는 김원상을 차은석이 기분 나쁜 티를 내며 쳐다봤다.
“차 셰프 지금 그 태도가 뭡니까?”
“쉬는 시간에 농담 좀 했습니다. 무슨 문제라도 있습니까?”
차은석 또한 가만히 있지 않았다.
최근 들어 눈에 띄게 짜증이 심해진 김원상을 더는 참아내기 어려운 듯 보였다.
“점장님이야말로 요즘 왜 이렇게 변하셨습니까?”
“뭐요? 내가 변해?”
오승연이 조심스럽게 한마디 거들었다.
“점장님. 요즘 완전 딴사람 같아요. 툭하면 화내고, 좋게 얘기해도 될 일에 윽박지르고….”
“무엇보다 눈빛이 불안해 보입니다.”
차은석이 쐐기를 박았다.
“우리가 들어가려던 MS 백화점 중식당에 서인우 그 자식이 들어갔다고! 오늘이 그 오픈 날인데... 웃음이 나와?”
“그게 우리 잘못입니까? 경쟁해서 깨끗하게 밀려난 겁니다. 사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세요!”
“뭐야? 이 새끼가 건방지게...”
김원상이 선을 넘었다.
차은석의 표정이 순식간에 얼어붙었다.
“점장님. 그만 하세요.”
놀란 오승연이 김원상을 말렸지만, 이미 일은 벌어진 상태였다.
화를 내고 있었지만, 김원상의 눈이 차은석을 응시하고 있지는 않았다.
마치 누구에게 화를 내야 하는지 모르는 듯 허공을 바라보는 눈이 위태위태해 보였다.
“점장님. 이번이 마지막입니다.”
“뭐가 말입니까?”
“점장님을 이해하려고 하는 노력 말입니다.”
김원상의 눈빛이 흔들리고 있었다.
“제가 참는 것도 오늘이 마지막이라는 말입니다. 빨리 자신을 찾으세요.”
“자신을 찾으라고? 나 자신을 찾으면 뭐가 달라지나? 아니, 나는 그냥 김원상 그대로라고. 달라진 건 없어.”
“아니요. 지난번 MS백화점 입점 심사에서 탈락한 뒤부터 달라지셨습니다.”
아니…. 정확히는 그날부터였지.
아버지로부터 내가 아닌 서인우가 아들로 태어났어야 한다는 말을 들은 그날부터.
“여러분들이 착각하고 있나 본데...난 당신네하고 급이 다릅니다. 한동안 좀 편하게 대해줘 보려 했더니...영 거슬려서.”
차은석을 비롯해 김지호, 오승연 모두 기분 나쁜 얼굴을 보이지는 않았다.
그들의 눈에 보이는 김원상은 그냥 안쓰러운 동정의 대상일 뿐이었다.
“저희가 어떻게 하길 바랍니까?”
“몰라서 묻는 겁니까?”
“네, 솔직히 요즘 같아서는 점장님 생각을 모르겠습니다. 정말 [만가복]이 잘되기를 바라는 건지 누군가가 망하기만을 바라는 건지.”
김원상이 비릿하게 웃고 있던 웃음을 순간 멈추고는 차은석을 노려봤다.
“나는 서인우 그 자식이 잘나가는 꼴을 눈 뜨고 봐줄 수가 없어. 그러니까 이렇게 웃고 떠들 시간 있으면 새로운 메뉴를 개발이라도 해보라고.”
차은석은 아무 말도 더하지 않았다.
긴 한숨이 그의 마음을 대신하는 듯 무겁게 가라앉았다.
“서인우가 만들었던 치즈 밥을 다시 한번 만들어 보세요.”
“그건 왜요?”
“내가 하라고 하면 그냥 하면 되는 겁니다.”
서로 강하게 노려보고 있는 김원상과 차은석의 눈빛이 스파크를 일으키는 것 같았다.
더는 있어봤자 좋은 꼴은 보기 힘들겠다 싶은지 오승연이 슬그머니 주방을 빠져나갔다.
“혹시...그 치즈밥을 메뉴로 내세울 생각은 아니겠죠?”
“그건 절대 아닙니다.”
“다 생각이 있어서 그러니까 지금 한 번 만들어 봐요.”
대답 대신 물에 불린 찹쌀을 꺼내놓은 차은석이 말없이 치킨밥을 위한 재료를 손질했다.
김원상의 생각이 훤히 보였지만, 우선은 그의 얘기를 들어보기로 마음먹은듯했다.
지난번보다 더 비슷한 향과 모양의 치즈 치킨밥이 만들어졌다.
“그래, 바로 이거야.”
“분명히 말하지만, 이건 [서풍 TWO]의 메뉴입니다.”
“나도 알아요.”
“그럼 이걸 왜 만들어 보라고 한 겁니까?”
김원상의 눈에 조금 전까지 없던 생기가 차오르기 시작했다.
“지난번 차 셰프가 만들었던 사천식 청경채 볶음, 우리는 그걸 사이드로 내놓으면 되는 거야.”
“그게 무슨...말도 안 됩니다.”
“아니, 이건 엄연히 다른 메뉴야. [만가복]의 새로운 메뉴라고.”
차은석의 눈 밑이 파르르 떨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