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4화.
한참 신나게 장사 준비를 하고 있는데, 이준형의 목소리가 들렸다.
“서인우. 우리 왔다.”
손을 씻고 주방에서 나와보니 목발을 짚은 안상훈과 이준형이 어딘지 상기된 듯한 얼굴로 다가왔다.
“아직 9시도 안 됐는데, 왜 이렇게 일찍 나오셨어요?”
“말도 마라. 내가 8시 20분까지 도착하게 간다고 했는데 8시부터 밖에 나와서 기다리고 계시더라.”
“이 사장님도 20분 빨리 오셨잖아요?”
“저는 혹시라도 나와서 기다리실까봐...”
서인우가 둘의 얼굴을 번갈아 쳐다보며 환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서로 배려하다 보니 이렇게 일찍 도착하셨네요. 그런데, 준형이 네 손에 있는 건 뭐냐?”
“맞다. 너 아직 아침 전이지?”
“응. 안 그래도 일하다 보니 배고파서 샌드위치라도 하나 사 먹을까 하고 있었다.”
“어디 샌드위치를...든든한 밥을 먹어야지.”
“응?”
이준형이 들고 있던 쇼핑백에서 하늘색 드레스를 입은 긴 머리 공주가 그려져 있는 도시락을 꺼냈다.
“이거...?”
“네, 맞습니다. 겨울왕국 엘사.”
아무래도 안유진의 도시락인 듯 보였다.
이준형이 뚜껑을 열자 그 안에는 여러 가지 색깔 채소와 달걀, 참치까지 들어있는 김밥이 참기름 냄새를 솔솔 풍기고 있었다.
“와! 김밥이네요?”
“우리 와이프가 오늘 힘내서 오픈 잘하시라고 새벽부터 쌌습니다. 도시락이 좀 웃기기는 하는데...유진이가 꼭 여기에다 싸서 전해주라고 했다고...”
“벌써 침이 고이는데요? 도시락도 우리 유진이처럼 이쁩니다.”
안상훈이 헛기침을 두 번 하더니 말을 이었다.
“우리 유진이는 좀...그냥 유진이라고 해 주세요.”
여섯 살 딸내미가 관심 좀 가졌기로서는 이렇게까지 경계할 건 아닌 듯 한데...
딸바보 아빠 심정을 이해하기 힘든 서인우와 이준형이 잠시 눈을 맞추며 빙긋 웃었다.
“네, 사모님과 안 셰프님 따님께 감사 인사 꼭 전해주세요. 그리고, 여기...”
서인우가 살짝 걸쳐 앉아 다리를 뻗을 수 있는 의자를 가까이 가져왔다.
“장사 준비를 위한 재료 손질은 이미 거의 다 해놨습니다.”
“벌써요? 아니 언제 그걸 다...매번 느끼는 거지만, 정말 손이 빠르네요.”
-아, 이거 분명 내 칭찬인데...나설 수도 없고.
‘사부의 능력인 거 내가 알아. 그러면 된 거 아니야?’
-그래, 뭐 성에 차지는 않지만, 너로 만족해주지.
‘내가 알고 우리 아빠가 알아. 그럼 됐지?’
잠시 중식도와 짧은 대화를 나누고 난 서인우가 말을 이었다.
“여기 화구 앞에 안 셰프님 전용 웍과 조리도구들을 가장 동선을 짧게 해서 준비해놨으니, 딱 이곳에서만 요리해주시면 됩니다. 절대 무리는 하시지 말고요.”
“네. 감사합니다. 빨리 낫는 게 도와주는 거니까 무리는 하지 않을 겁니다. 걱정하지 마세요.”
“그럼...요거 좀 먹어도 되겠습니까? 참기름 냄새에 배에서 꼬르륵 소리까지..”
“그럼요. 그건 서인우 사장님 혼자 드시랍니다.”
도시락이 그리 크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이준형도 분명 아침을 먹지 않았을 텐데...
“이거 같이 드시죠? 준형아, 같이 먹자.”
이준형의 얼굴이 떨떠름하게 바뀌어 있었다.
쇼핑백에 손을 넣어 투명하고 파란 뚜껑이 덮힌 흔한 밀폐용기를 꺼내 보였다.
“안 셰프님은 드시고 오셨대. 그리고, 이건 내꺼.”
“둘이 먹을 걸 굳이 따로...”
“그만, 거기까지. 여기서 더 길어지면 나 삐친다.”
“왜?”
“푸흡!”
순간 나오는 웃음을 손으로 막은 안상훈이 이준형을 슬쩍 쳐다봤다.
심통이 난 얼굴로 김밥을 입에 한가득 넣은 채 볼이 미어터져라 먹고 있었다.
“내 딸 유진이가 자기 공주 도시락에 있는 김밥은 오빠주고, 다른 아저씨는 아무 통에나 넣어 주라고...”
서인우가 간신히 웃음을 참으며 김밥을 입에 넣었다.
“여기 오는 길에 유진이가 전화를 거는 바람에 통화 내용을 들어나 봅니다.”
잠시 장난기가 발동했는지 뾰로통한 표정을 지어 보였던 이준형의 얼굴이 금세 바뀌었다.
“이 김밥 예술인데요? 정말 맛있어요. 우리 엄마 김밥 하고는 비교도 안 되는 최고의 맛입니다.”
“내 아내가 요리를 잘해요. 특히 아는 언니네 김밥집에서 오래 일을 해서 김밥 전문입니다.”
“와씨. 집에서도 이런 김밥을 만들 수 있는 거구나. 우리 엄마가 처음 유치원 체험학습 때 김밥 싸준 거 내 첫사랑 짝꿍이 먹다가 토했잖아.”
“정말? 그런 재주가 있으신지 몰랐다.”
실실 웃으며 말하는 서인우를 이준형이 잠시 노려봤다.
“너 오늘 우리 엄마 온다. 내가 이를 거다. 딱 기다려.”
이건 무슨 초딩들 대화도 아니고, 이 자리에 유진이가 있었다면 유치하다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을 것 같았다.
“사모님 김밥 정말 맛있습니다. 꼭 말씀 전해주세요.”
“네, 우리 와이프 목표가 커피와 함께 파는 김밥집을 내는 겁니다. 자기는 김밥도 탄산보다 커피랑 먹는 게 더 맛있다고...”
“사모님이 커피도 잘하시나요? 혹시...자격증이라도 가지고 계신 건가요?”
안상훈이 손을 크게 저었다.
“아니에요. 바리스타 자격증을 꼭 따고 싶었다는데…. 먹고 살기 바빠 김밥집에서 일하느라 기회가 없었죠.”
“아, 그랬군요. 분명 좋은 일 있을 겁니다. 우리 모두 파이팅 합시다.”
벌써 김밥 통을 다 비워버린 이준형이 서인우를 툭툭 쳤다.
“정말 김밥 먹으니까 커피 생각난다. 우리 커피 석 잔 부탁해!”
“넌, 요리도 못해, 커피도 못 만들어...좀 배워볼 생각 없냐?”
“아니, 난 요리 잘하고 커피도 잘 만드는 놈하고 평생 같이 일할 거라 그럴 생각 없는데?”
어이가 없어서….
크게 한 번 웃어 보이고는 진하고 쌉싸름한 아이스 커피를 석 잔 만들어 잠시 휴식을 즐겼다.
아니, 잠시 휴식을 즐기려 했다.
하지만, 그 꿈은 나란히 입장하신 윤지영과 정다운의 잔소리로 깨지고 말았다.
“지금 다들 한가하게 놀고 있는 거야?”
윤지영의 시작이...
“설마 지금 내가 와서 시킬 때까지 기다리고 있었던 건 아니죠?”
정다운으로 이어졌다.
“아니, 우리 이제 막 아침 먹고 커피만 딱 한 잔...”
“오늘이 얼마나 중요한 날인데, 커피까지 마셔가면서 말이야. 내가 다 긴장돼서 잠도 설쳤구만.”
그새 두 손을 가지런히 모으고 서 있는 이준형의 표정이 전날 윤지영의 합류를 반겼던 걸 후회하는 모습이었다.
“이거 마시면서 바로 정리할 생각이었어요. 그, 그렇지?”
쭈뼛쭈뼛 일어서려는 안상훈을 향해 성큼성큼 다가온 윤지영이 고개를 숙였다.
“안녕하세요. 서인우 사장님 사촌 윤지영입니다. 오빠한테 안 셰프님 얘기는 많이 들었습니다.”
“안녕하세요. 안상훈입니다.”
“그런데, 정말 출근하셔도 괜찮으신 건가요?”
대답 대신 미소만 짓고 있는 안상훈한테 처음 보는 윤지영과의 긴 대화는 여전히 힘들 듯 보였다.
백화점 오픈 시간이 다가가면서 각개전투가 시작됐다.
카운터 주변 정리 및 시스템 정비는 윤지영이, 테이블 정리 및 냅킨 정리는 정다운이 맡았다.
가게 바닥 청소 및 안상훈을 위해 주방 바닥 물기 제거는 이준형이 맡아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히도록 열심히 청소했다.
서인우는 오전에 하던 먹물 만두를 마무리했고, 안상훈은 서인우가 전해준 고기를 밑간하는 작업을 한 후 먹물 만두 마무리를 도왔다.
누구 하나 할 거 없이 내 일처럼 열심이었다.
드디어 백화점 오픈 시간이 되었다.
아직 점심시간으로 좀 이른 시간인데도 마치 백화점 문 열기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손님이 들어왔다.
“어서 오세요. 서풍입니다.”
홀에 대기하고 있던 이준형, 정다운, 윤지영이 마치 미리 준비해 둔 아이돌 인사처럼 동시에 외쳤다.
“어머, 우리가 첫 손님 맞죠?”
“네, MS 백화점 [서풍 TWO]의 첫 번째 손님이십니다.”
젊은 여자 셋이 손뼉을 치며 좋아했다.
정다운이 자리를 안내하려 하자 사진 먼저 찍고 오겠다며 포토존으로 달려갔다.
“여기서도 저 포토존이 열일하네요.”
열심히 사진을 찍고 있는 손님들을 보며 이준형이 신기하다는 듯 웃었다.
“아저씨. 저 언니들이 찍은 사진이 우리 가게 최고의 홍보가 된다니까요.”
“아! 그렇지. 많이 찍으시라 해.”
물론 이준형의 말을 듣고 그런 건 아니겠지만, 정말 이 사람들이 작품 사진을 하는 사람인가 싶을 정도로 한참을 찍더니 자리로 돌아왔다.
“우리 백짬뽕 하나, 짜장면 하나 그리고 볶음밥 하나 주세요. 그리고, 여기서도 먹물 만두 먹을 수 있어요?”
“네, 이전하고 똑같이 한정 메뉴입니다.”
“거봐, 내가 그래서 빨리 가야 한다고 했잖아.”
앞머리가 눈의 반을 가리고 있는 여자가 옆에 앉은 친구의 팔을 치며 말했다.
“그럼 우리 먹물 만두도 하나 ...너무 각각 시켜서 죄송해요.”
“아니에요. 골고루 드셔보셔야죠. 바로 만들어 올리겠습니다.”
메뉴를 찍자 주방에 있는 모니터에 메뉴가 바로 떴다.
“안 셰프님. 드디어 첫 주문입니다.”
“네, 물 올렸습니다.”
서인우는 바로 백짬뽕을 준비하고, 안상훈이 짜장면을 준비했다.
-자, 이제 시작인 거냐?
‘응, 사부 솜씨 한 번 발휘해봐. 볶음밥 재료 좀 다져볼까?’
칼날이 보이지 않을 정도의 속도로 각종 채소를 다져놓은 서인우를 안상훈이 놀란 듯 바라보고 있었다.
-저 표정 봐라. 놀라 뒤로 넘어가겠다.
‘아빠가 요리 할 때도 봤을 텐데...사부의 능력을 말이야.’
-그건…. 모르지.
‘응? 뭐가?’
-저 셰프가 봤는지 모른다고, 뭐해? 빨리 만두 건져야지.
살짝 당황한 듯한 사부가 이상했지만, 지금은 손님에게 가장 맛있는 온도의 요리를 제공할 때였다.
띵!
벨 소리가 경쾌하게 울렸다.
윤지영이 먹물 만두를 가져가는 사이 주방 모니터에는 또다른 메뉴가 반짝이고 있었다.
“안 셰프님. 정말 속도전입니다.”
“걱정하지 마세요. 사장님만큼 빨리는 못 해도 잘 따라가 보겠습니다.”
띵!
백 짬뽕과 볶음밥, 짜장면이 동시에 완성되었다.
“우와, 너무 맛있겠다.”
하면서 이 여자들은 음식을 눈으로 먹나 보다.
젓가락 대신 핸드폰을 집어 든 여자 셋이 또 정신없이 사진을 찍어댔다.
만약 서인우의 음식들이 살아있었으면 분명 초상권 운운하며 따졌을 것이다.
“사장님의 양장피를 선보일 시간이네요.”
“네, 지금 바로 요리 들어갑니다.”
착착착착.
각종 해물과 채소를 순식간에 손질하고 있는 서인우를 여전히 넋을 잃고 보던 안상훈이 동시에 주문 들어온 탕수육을 하기 위해 밑간해둔 고기를 튀길 반죽을 만들었다.
재료를 순서대로 볶아 접시에 가지런히 담으며 동시에 소스를 만들어낸 서인우가 완성된 양장피를 들고 밖으로 나왔다.
“서인우다!”
“맞네, 중화요리 최고의 고수.”
“정말 잘생겼다. 저 얼굴 보려면 매일같이 양장피만 시켜야겠네.”
테이블에 앉아 있던 사람들이 수군거렸다.
알아보는 사람들에게 가볍게 인사를 하며 양장피를 주문한 테이블로 다가갔다.
“주문하신 양장피 나왔습니다.”
동시에 소스를 부어 쓱싹 비벼주자 주위 사람들까지 시선을 뺏긴 채 심지어 손뼉까지 치고 있었다.
그 모습을 이준형이 부러운 듯 쳐다보고 있었다.
“다운 씨, 이제 익숙해질 때도 됐는데, 나는 왜 아직도 이렇게 배 아프지?”
“부러우면 지는 건데...”
“나 아무래도 진 것 같아.”
왠지 쑥스러워진 서인우가 고개를 깍듯하게 숙인 후 다시 주방으로 들어왔다.
그새 또 새로운 주문이 들어와 있었다.
서인우와 안상훈 모두 쉴 새 없이 요리했다.
“안 셰프님. 좀 앉아서 쉬세요. 제가 할 수 있습니다.”
“알아요. 사장님이라면 분명히 하실 수 있다는 거. 그러니, 정말 힘들면 알아서 쉴게요.”
“네, 꼭 그러셔야 합니다. 다리 더 안 좋아지면 안유진 어린이한테 저 맞을 수도 있습니다.”
“그건 좀 괜찮은 것도 같고...”
피식 웃는 안상훈을 한참 멍하니 쳐다봤다.
이제는 이런 농담까지 건네다니...
처음 봤을 때 느낀 불안함과 어색함이 전혀 생각나지 않는 모습이었다.
서인우와 안상훈 둘 다 정신없이 요리하고 있을 때였다.
-서인우. 빨리 밖으로 나가봐라. 신기 명기다.
‘응?’
-와! 진짜! 여자 이준형이 나타났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