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3화.
갑자기 낮게 깔린 음성으로 묻는 중식도의 질문에 서인우는 아무런 답을 내놓지 못한 채 얼음이 되어있었다.
‘사부! 갑자기 그게 무슨 말이야?’
-말이 그렇다는 거다. 우리도 언젠가는 이별을 하지 않겠냐?
‘난 그럴 생각 전혀 없어!’
-그냥 생각해 본 거야. 앞일은 모르는 거니까.
순식간에 어둡게 변한 서인우의 얼굴을 본 김서원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서인우 씨. 내가 뭐 잘못했나요? 갑자기 표정이...”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지 서인우는 여전히 인상을 쓴 채 굳어 있었다.
“야, 인마. 갑자기 왜 이래?”
이준형이 어깨를 치며 묻는 말에 정신을 차린 서인우가 이 상황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몰라 난처해하고 있었다.
“사장님, 너무 무리하신 거 아니에요? 피곤해 보이는 것도 같고...”
“응? 뭐라고 했어?”
순간 정신을 차린 서인우가 뭐라 변명해야 할지 당황해하고 있었다.
“얼굴색이 안 좋아요. 요 며칠 너무 무리하신 거 아닌가요?”
“아! 미안. 내가 잠깐 딴생각 하느라. 다운 씨 내 체력 몰라? 장사할 때 비하면 요즘은 아주 한가한 거지.”
“놀랐잖아요. 갑자기 얼굴이 심각하게 변해서….”
“내일 오픈이라고 생각하니까 내가 긴장했나 보다.”
대충 얼버무리고 주방 정리를 이어갔다.
손은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지만, 머릿속은 멍한 게 아무것도 정리가 되지 않았다.
빨리 집에 들어가 사부와 단둘이 대화를 나누고 싶었지만, 내일 오픈을 앞두고 설레어 뭔가 의기투합해 보이고 싶은 이준형과 정다운의 마음을 나 몰라라 할 수도 없었다.
“오늘 저녁 오픈 전야제 가능한 거지?”
“오픈 전야제? 그래, 가볍게 한잔하고 일찍 들어가자. 내일부터는 새벽 시장도 다시 다녀야 하니까.”
“좋았어. 그럼 다 같이 속도를 내자고. 내일 지영씨도 다시 도와준다고 했지?”
“응, 다음 달 캐나다 가기 전까지는 알바 해준다고 했어.”
“우리 원조 멤버가 다 모이겠네. 나중에 지영씨도 시간이 되면 나오라고 해.”
“그래, 내가 연락해볼게.”
영혼 없는 대화가 오갔다.
서인우 머릿속을 가득 차지하고 있는 중식도의 말이 쉬이 잊히지 않았다.
‘사부, 혹시 갑자기 사라질 계획인 거야?’
-아까 들은 얘기는 잠시 잊고 정신 바짝 차리고 오픈 준비에나 신경 써.
‘말없이 그냥 사라지는 그런 일은 절대 없을 거라고 약속해. 그래야 안심이 될 것 같아.’
-네가 아직 세상을 많이 안 살아 봐서 모르는 모양인데…. 어떤 일이든 절대라는 건 없어. 노력은 해볼게. 하지만, 장담은 못 한다.
김서원이 여전히 표정이 풀리지 않는 서인우를 걱정스럽게 바라보고 있었다.
-사람들이 걱정하잖냐? 이제 네 주위 사람들, 네가 말하는 네 식구 신경 써라. 난 네 옆에 있을 거니까.
‘그럴 거지? 난 사부와 영원히 함께하고 싶어.’
-너 그거 집착이야. 날 소유하려고 하지 마. 나는 항상 너의 것이면서, 또한 그 누구의 것도 아니야. 뭐 쉽게 말하자면 자유연애주의라고….
‘시끄럽고. 다시는 사라진다 어쩐다는 그런 말 하지 마!’
-정리나 제대로 해. 내가 실력 발휘하기 딱 좋은 상태로 셋팅을 빡 해놓으라고.
‘내일부터는 정말 정신없겠지? 규모가 두 배도 넘게 커졌으니까 진짜 우리 환상의 팀워크를 보여주자고.’
-그야 뭐 두말하면 허기지지. 오래 쉬어서 몸이 간질간질했는데, 내일부터 제대로 달려보자. 너는 오늘 적당히 달리고. 알았냐?
‘예 썰!’
사부와 이어진 대화로 조금은 마음이 누그러졌지만, 왠지 모를 불안함까지 없애주지는 못했다.
넓은 주방에서 안셰프와 함께 새로운 출발을 꿈꿨는데, 시작도 하기 전에 생각지도 못한 돌발상황이 발생했다.
부러진 다리로 일을 하는 건 불가능 할거고, 안상훈을 대신할 사람을 찾는다는 건 더 불가능 할 것 같았다.
긴 한숨이 절로 밀려 나오는 순간이었다.
마치 서인우의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이 안상훈의 이름을 뱉으며 핸드폰이 경쾌하게 울어댔다.
“안녕하세요, 안 셰프님. 몸은 좀 어떠세요?”
-이제 목발 생활도 차츰 익숙해진 것 같고, 아무 문제 없습니다. 단지 당분간 새벽 시장은 같이 못 가겠네요.
“당연하죠. 빨리 나으셔서 출근해 주시는 게 도와주시는 겁니다.”
-그럼 내일 9시까지 가겠습니다.
지금 내일 가게로 오겠다는 얘기?
왜?
“무슨 급한 일이라도 있습니까? 그럼 제가 오늘 댁으로 가면 돼요. 그 몸으로 어떻게...”
작은 웃음소리가 들렸다.
아마도 서인우의 기억에 안상훈의 웃음소리는 처음 듣는 듯했다.
가장 기쁠 때 보여주는 미소가 전부였던 안상훈이 소리를 내며 웃었다.
-내일이 우리 [서풍 TWO] 대망의 오픈 날이지 않습니까? 출근해야죠.
“네? 출근이요?”
-혹시 그새 내 대타를 구한 건 아니겠죠?
“그건 당연히 아니죠. 안 셰프님을 대신해줄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제가 좀 더 부지런하게 움직여 보려 마음 굳게 먹고 있습니다.”
-그럴 줄 알았습니다. 그럼 내일 봅시다.
뚝!
그렇게 통화가 끝이 났다.
다친 몸으로 내일 오픈일에 맞춰 출근할 생각을 하고 있었나보다.
서인우는 생각지도 못한 안상훈의 출근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고민이 되었다.
“준형아!”
“무슨 전화냐? 얼핏 들으니 안셰프님 같던데?”
“응, 안 셰프님이 내일부터 출근하신다고 그러네.”
“정말이요? 벌써 그렇게 움직이셔도 되는 건가요?”
“두 달은 넘게 깁스를 하고 있어야 하는데, 목발 사용도 좀 익숙해졌다고 무조건 내일 나오신다 그랬어.”
말을 하며 김서원을 힐끗 쳐다보니 바닥만 하염없이 내려다보고 있었다.
“내가 새벽시장 다녀오면 대략 7시 정도 되니까...”
“알았어. 내가 안 셰프님 출퇴근 담당할게. 그건 걱정하지 마라.”
“그렇게 해줄 수 있겠어?”
“너 자꾸 착각하나 본데...이 [서풍 TWO]는 우리 둘이 공동으로 운영하는 사업체다. 나도 내 직원 관리 정도는 할 줄 알아, 인마.”
조금 전 가라앉았던 기분이 한순간에 확 사라지는 것 같았다.
“그래, 우리 오늘 한잔하면서 앞으로 [서풍 TWO]의 앞날을 멋지게 계획해 보자.”
“이제야 말이 통하네. 그럼 장소 정해서 내가 예약해놓을게.”
이준형이 신이 난 얼굴로 핸드폰을 귀에 대며 주방을 나섰다.
“사장님, 지영 언니가 도와주는 동안 다른 직원도 하나 찾아야겠네요?”
“그래야지. 면접을 보든지 해야겠지. 아니면, 다운 씨 친구중에 누구 소개해줄 사람 있으면 해도 되고...”
“한번 알아볼게요.”
“그래, 다운 씨처럼 책임감 느끼고 열심히 해주는 친구면 나야 감사하지.”
오전부터 나와 테이블을 닦고 또 닦고, 쉬지 않고 냅킨을 접고 있는 정다운이었다.
식당 한쪽에 서서 각자 할 일을 열심히 하는 이준형과 정다운, 김서원을 바라보고 있는 서인우는 세상을 다 가진 것처럼 든든했다.
* * *
조금 전 날아온 문자를 잠시 쳐다보고 있던 유재철이 그 번호를 꾹 눌러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강기태 씨인가요?”
-맞는데…. 누구십니까?
“유재철이라고 합니다. 안상훈 씨 아시죠?”
아주 잠깐 아무 대답도 넘어오지 않았다.
-안상훈? 나는 모르는 사람인데요.
“안 그래도 잘 모르는 사람일 거로 생각했습니다. 그럼 잘 아는 사람이 시킨 일이겠네요?”
-뭐라는 거야? 끊어!
뚝!
신경질적인 소리가 넘어오더니 바로 전화가 끊겼다.
“강기태. 꼬리는 잡혔고...이제 몸통을 잡아볼까?”
핸드폰을 다시 내려놓으며 차 안에 사놓은 김밥 은박지를 벗겨 두 개를 동시에 입에 넣었다.
우걱우걱 씹으며 아이스 커피를 쭉 들이키다 보니 갑자기 웃음이 나왔다.
젊은 시절 동료들과 매일같이 잠복하며 했던 짓을 나이 오십이 넘어서 하고 있으니 감회가 새로웠다.
세상 무서운 게 없이 수사하고 다니다 억울하게 비리 형사로 내쫓기던 해에 알게 된 최만수 회장.
그의 도움이 없었으면 얼마나 암울한 노년을 맞이하게 됐을지 생각만 해도 끔찍했다.
“억울한가?”
“네, 억울합니다.”
“지금처럼 정의롭게 늙어 죽을 자신이 있나?”
“그렇게 못 살 거면 지금 죽어도 후회 없습니다. 죽을 때까지 정의 편에 서서 싸우다 죽고 싶은 게 제 소원입니다.”
“그럼 나와 함께 일을 해보지 않겠나? 내가 특별한 부와 명예를 안겨줄 수는 없지만, 적어도 일하는 보람은 느끼며 살 게 해줄 수 있는데...”
그렇게 시작한 인연이 올해로 십 년이 다 되어갔다.
MS 백화점에 정식 보안직원들이 많이 있지만, 최만수가 개인적으로 알고 싶어 하는 일들은 모두 유재철의 손을 거쳐 갔다.
백화점 회장보다는 시골 중식당 주방장으로 사는 삶을 더 알리고 자랑하고 다니는 최만수로부터 오랜만에 걸려온 전화였다,
그래서 더 신경이 쓰이는 게 사실이다.
얼핏 보면 아주 가벼운 사고처럼 보이지만...그 사건을 유재철에게 은밀히 부탁했다는 점.
그 점이 차 안에서 며칠째 김밥이나 샌드위치로 끼니를 대신하는 이유였다.
* * *
9월 1일.
드디어 MS 백화점에서 [서풍 TWO]가 새롭게 시작하는 날이다.
무더웠던 여름이 지나가면서 열일했던 태양도 점점 늦게 올라오고 있었다.
어두운 방에 불을 켜고 곧장 욕실로 들어간 서인우는 간단히 세수와 양치만 하고 운동복으로 갈아입었다.
새벽 운동.
그리고, 새벽 시장.
누구와 계약을 한 것도 아니고, 벌금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단지 자기와의 약속일 뿐.
아무리 피곤하고 귀찮아도 해내고 싶은 욕심이기도 했다.
달리며 본 세상은 푸르스름한 새벽이 어둠을 조금씩 갉아먹고 있었다.
지금의 저 푸르스름한 새벽도 금세 환한 태양에 잡아먹히겠지?
30분, 1시간이 지나가며 아주 조금씩 밝아지는 아침이 마치 처음 맞는 것처럼 가슴이 뛰었다.
이제 새벽바람이 제법 선선한 게, 말 그대로 새벽 운동하기 딱 좋은 날씨였다.
집에 들어와 개운하게 샤워를 하고 시장을 향해 나섰다.
“오랜만에 나왔네? 다시 장보기 시작하는 거면 가게를 구한 건가?”
수산시장 오사장이 반가운 심정을 얼굴 가득 드러내며 물었다.
“네, 오늘부터 다시 영업할 수 있게 됐습니다.”
“정말이야? 그거 진짜 잘됐구만.”
“오늘이 오픈 날이니까 특별히 더 싱싱한 놈들로 주셔야 합니다.”
“그건 걱정하지 말게. 우리 집이 여기 시장에서 제일 싱싱하고, 그중에서도 가장 실한 놈들로만 골라 줄테니까.”
입에서 물을 쭉쭉 뿜어내는 해물들을 가리키며 입이 찢어져라 웃고 있는 오사장의 진심이 느껴졌다.
신선한 채소와 싱싱한 해물들을 잔뜩 사서 백화점으로 돌아온 서인우는 첫날이 주는 낯선 느낌을 빨리 떨쳐내고 싶었다.
“사부.”
-왔냐? 오늘 손님이 많이 오겠지? 한참 장사를 안했더니 온몸이 간질간질하네.
“오픈 날이기도 하고, 백화점이라 기본적으로 손님이 많을 거야. 지금 한 말 바로 취소하게 만들어 줄게.”
[서풍 TWO]와 서인우라는 이름이 선명하게 박혀있는 셰프복을 깔끔하게 갈아입은 서인우가 중식도를 손에 쥐었다.
“준비됐습니까? 사부!”
-나는 언제나 스텐바이지 말입니다.
“그럼 우리 양배추부터 달려볼까요?”
-오케바리.
오랜만에 주방 가득 말굽 소리가 경쾌하게 울려 퍼졌다.
“다음은 양파.”
-그래, 한바탕 울어보자고.
산더미같이 쌓여있는 양파를 자르면서 중식도를 처음 익히며 눈물 콧물 쏟아냈던 그 기억이 몽글몽글 피어났다.
행복했다.
그 기억을 오롯이 가지고 있는 자신이.
고마웠다.
그런 소중한 추억을 선물해준 아빠가.
오늘부터 다시 불기 시작할 거다.
[서풍 TWO]의 희망찬 바람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