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2화.
며칠 전 병원에서 만난 [서풍 TWO]의 새로운 셰프라는 남자.
유진이라는 사랑스럽고 귀여운 딸의 아버지.
그 사람의 다리를 부러트린 범인이 [만가복] 사람이라는 건가?
지금 이 사람들이 하는 얘기가 다 무슨 말인지...
순간 얼어붙은 김서원이 심하게 흔들리는 눈을 들어 서인우를 바라봤다.
“서인우 씨. 지금 그게 무슨 말이에요?”
당황한 서인우가 뭐라 말을 해야 할지 몰라서 바닥만 내려다봤다.
“죄송합니다. 서인우 씨한테만 작게 묻는다는 게...제가 타고난 목소리가 커서...이게 정말 문제입니다. 그냥 잊어주세요.”
김서원이 [만가복] 김형식의 딸이라는 걸 전혀 모르는 구본석이 부주의했다.
“죄송합니다. 서인우 씨. 나중에 다시 얘기해요.”
급하게 자리를 뜨는 구본석을 멍하니 쳐다보고 있던 김서원이 다시 물었다.
“얼마 전 병원에서 만난 [서풍]의 셰프라고 했던 그분 어떻게 다친 건가요? 아니 누가 그런 건가요?”
“그게...심사가 있던 날 집에서 나오다가 오토바이 사고가 있었습니다. 누가 그런 건지는 지금 조사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왜...?”
어쩔 줄 몰라 하는 김서원을 보며 서인우 또한 시선을 피했다.
잠시 후 김서원이 어렵게 다시 말을 꺼냈다.
“아까 오신 구 과장님 말씀이 무슨 뜻인가요? 뭔가 이상하다고 느꼈으니까 그런 얘기가 나오는 거 아니에요?”
입을 꾹 다문 채 김서원의 눈만 응시하고 있던 서인우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안 셰프님이 지하철역으로 향하는 걸 지켜보고 있다가 갑자기 달려들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뭔가 조사가 필요하다고 생각한 거예요. 아직 아무것도 밝혀진 건 없습니다.”
“하나만 약속해 주세요.”
김서원의 얼굴에 핏기가 다 사라진 듯 보였다.
“조사가 끝나고 모든 게 밝혀지면 저한테도 숨기지 말고 알려주세요. 우리…. 식구잖아요?”
“네, 약속하죠. 그러니, 그런 걱정 하지 말고 우리 인테리어만 잘 마무리 해주세요.”
“알겠습니다. 이틀 뒤 조명 들어가면 훨씬 멋지게 변해 있을 겁니다.”
“네, 그러리라 믿어요. 그럼 나는 지하 식품관에 내려가 보겠습니다. 수고하세요.”
인사는 가볍게 나눴지만, 엘리베이터로 향하는 서인우의 발걸음은 그 어느 때보다 무거웠다.
안상훈의 사고가 정말 [만가복] 김형식의 짓이라면, 그 사실을 받아들일 수 있을까?
힘들게 자신이 누구인지 밝히고 지금 이렇게 함께 하는 상황을 누구보다 좋아하고 행복해하는 김서원이었다.
그뿐 아니라 어렵게 마음을 연 이준형이나 정다운 씨는 또 어떨지...
갑자기 머리가 지끈 아파져 왔다.
식품관에 도착해 본 이준형은 말 그대로 물 만난 물고기였다.
원래 영업 체질이었나?
관심을 가져오는 손님들 상대로 환하게 웃어가며 제품 홍보며 판매까지 일당백으로 일하고 있었다.
“힘들지? 좀 쉬어. 내가 할 테니까.”
“야, 저기 가는 남자 손님 있지?”
“응. 왜?”
“방금 새우면을 박스 채 사서 갔어.”
“그래? 유통기한 안에….”
이준형이 또 시작이라는 표정을 지으며 서인우를 노려봤다.
“유통기한 다 확인했고, 저 손님도 어머니가 위암 절제술을 받으셨대. 젊으셨을 때 밀가루를 너무 좋아했었는데, 이제 면은 못 드신다고 속상해하셨다고….”
“그래서 많이 사가신 거구나?”
“응, 수술 후 못 드신 면 요리 실컷 해드린다고.”
“잘됐다.”
서인우는 멀어져가는 남자의 뒷모습에서 할머니를 생각했던 그 당시 아빠의 심정이 느껴졌다.
“사장님. 아무리 생각해도 이 면은 정말 잘 만드신 것 같아요. 장사하면서 단순히 돈 버는 게 아니라 뭔가 좋은 일을 하는 것 같아요.”
“그래. 그런 메뉴 더 고민해서 만들어 볼게.”
계속해서 손님이 들이닥쳐 오래 대화를 이어가지는 못했다.
가게 문을 닫으며 불안해 보였던 이준형과 정다운의 얼굴이 화사한 벚꽃처럼 활짝 피었다.
“감사합니다. 드셔보시고 맛있으면 또 오세요. 인우야. 인테리어는 많이 진행됐냐?”
손님이 뒤돌아서자 이준형이 궁금했던지 잽싸게 물었다.
“응. 이틀 뒤 조명 들어온다니까 그럼 거의 마무리지”
“제시카 씨가 실력이 꽤 있다. 그치? 오늘은 장사 끝나고 다 같이 시원하게 맥주나 한잔하자.”
서인우는 조금 전 김서원의 처참한 얼굴이 떠올랐다.
위로가 필요해 보이기는 했다.
“그래, 오늘은 우리 형님도 부르자.”
“형님? 아! 마셰프님?”
“좋지. 간만에 우리 식구 회동이냐?”
웃음으로 대답을 대신한 서인우는 복잡한 심경을 털어버리며 다가오는 손님을 맞았다.
* * *
치킨과 맥주 등을 팔고 있는 2층짜리 가게 앞에 도착한 유재철이 밖에 세워둔 오토바이를 유심히 살폈다.
상호가 적힌 네모난 빨간 통을 흔들어 보니 오토바이에서 쉽게 떼 놓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이건 떼어버리고 썼다는 얘긴데...이미 계획하고 CCTV에 찍히는 것도 교묘하게 피했어. 분명 전문가 솜씨야.’
계속해서 오토바이를 만지며 근처에 설치해놓은 CCTV 위치를 확인했다.
밖에 수상한 사람이 계속 어물쩍거리는 모습을 본 직원 하나가 급하게 달려 나왔다.
“뭡니까?”
“김진태 씨 계신가요? 여기 가게 주인으로 알고 있는데요.”
“사장님은 아직 출근 전인데요. 무슨 일입니까?”
유재철이 핸드폰에 저장해 놓은 오토바이 사진을 찾아 보였다.
“이 오토바이 여기 꺼 맞죠?”
“어? 이거 지난주에 도둑맞은 건데...이걸 어디서 찾은 겁니까?”
“찾은 건 아니고, 사진만 얻었습니다. 이 오토바이를 훔쳐 간 사람을 확인하고 싶어서 왔습니다.”
“네? 혹시...무슨 사건이 있었습니까?”
“그건 아니고...이 오토바이 분실 경위를 좀 알 수 있을까요?”
직원이 유재철을 다시 힐끗 보더니 안 보이는 곳으로 들어가 핸드폰으로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었다.
잠시 후 다른 직원 하나와 함께 모습을 보였다.
“그날 이 직원이 그 오토바이를 타고 배달 갔었어요.”
“그러면 여기서가 아니고, 배송지에서 분실한 겁니까?”
“네, 치킨 두 마리를 배달하고 나오니까 오토바이가 없어진 상태였어요.”
“거기가 어디였습니까? 정확한 주소 좀 알려주세요.”
그 직원이 날짜와 주소를 알려줬다.
유재철이 그 주소를 찾아가는 곳곳 CCTV의 위치를 파악하며 움직였다.
직원이 알려준 주소는 시장 뒤쪽 허름한 주택가였다.
CCTV가 설치된 가게들도 몇 보이지 않는 뒷골목이었다.
그나마 작은 편의점 하나가 밤이면 그 골목의 유일한 빛일 것 같았다.
요즘같이 배달 천지인 세상에 오토바이 하나 훔치기는 어려운 일이 아닐 거였다.
하지만, 그 범죄 현장이 드러나지 않게 일을 처리할 사람은 많지는 않았다.
“저 뭣 좀 여쭙겠습니다.”
편의점 주인인듯한 나이 많은 남자가 유재철의 한마디에 긴장한 듯 보였다.
별말 하지 않았지만, 눈빛에서 뿜어져 나오는 서늘한 기운이 느껴진 듯 편의점 주인이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네, 네. 무슨 일로...?”
“이주 전부터 오늘까지 CCTV를 좀 볼 수 있을까요?”
“네? 무슨 사고라도 있었습니까?”
“이 근처에서 오토바이가 하나 분실돼서요.”
워낙 음침한 골목이다 보니 더 큰 사고를 예상했었는지, 편의점 주인의 얼굴이 다소 실망스러운 듯 보였다.
“그런데, 이런 건 함부로 보여주고 그러면 안 되는 거로 알고 있는데요.”
“여기서 도난 신고된 오토바이를 이용해 사람의 목숨을 위협하는 일이 발생했습니다. 경찰을 대동해서 올까요?”
“아, 아닙니다. 이리로 와서 보세요.”
꼼꼼하게 CCTV를 살펴봤지만, 배달하러 갔던 집과의 거리가 있어서 오토바이를 훔치는 장면이 찍혀있지는 않았다.
단, 배달을 위해 오토바이가 지나가는 장면은 찾을 수 있었다.
“감사합니다. 많은 도움이 됐습니다.”
편의점을 빠져나온 유재철은 직원이 오토바이를 세워놨다는 그 위치로 서서히 걸어가며 주위를 살폈다.
‘생각보다 꼬리 잡기가 쉽지 않겠군.’
일선에 있을 당시 한 번 잡으면 절대 놓지 않는 것으로 유명했던 거머리 유재철이 이대로 포기할 리는 없었다.
“오토바이를 정차했던 시간이 저녁 8시 50분경이라고 했으니, 그때 다시 와봐야겠군.”
배달했던 지역을 여러 각도로 사진 촬영을 마친 유재철이 날카로운 눈으로 주변을 다시 한번 살핀 후 차를 향해 발걸음을 돌렸다.
* * *
[서풍 TWO]의 오픈 날까지 하루를 남겨두고 있었다.
노란색 포인트 조명과 입구 쪽에 포토존을 만들어 놓아 이전과 비슷한 듯하면서 훨씬 화려한 느낌이었다.
백화점 오픈 시간보다도 훨씬 일찍 나온 서인우는 인테리어까지 완성된 식당을 천천히 둘러본 후 주방으로 향했다.
각종 조리도구를 정리하는 서인우의 눈이 초롱초롱 빛났다.
-좋으냐?
“조금 전에 엄마랑 통화했는데, 엄마가 좋아하는 소리를 들으니까 너무 행복했어.”
-세상 참 오래 살고 볼 일이다.
“무슨 소리야?”
중식도가 빙그르르 한 바퀴 돌다가 우뚝 멈춰 섰다.
-네 아빠 서동수가 죽지 않았다면, 여기서 새로운 역사를 만들었을 텐데...그걸 아들인 네가 하고 있다니 꿈만 같아서 그래.
“나도 오늘은 잠이 오지 않을 것 같아. 아빠 생각도 많이 나고.”
-좀 쑥스럽긴 한데, 그럼 우리 동침을...
“나 일찍 죽기 싫어. 원한 있는 사람도 아니고 무슨 칼을 품고 자라는 소리야?”
중식도가 다시 빙그르르 돌았다.
-너는 나를 그냥 쇳덩이 칼로 대하는 거냐? 그렇게 안 봤는데...섭하다.
피식 웃으며 다시 하던 정리를 이어갔다.
밖이 시끌시끌한 게 이준형이 도착한 듯했다.
“이야, 전보다 더 멋지게 나왔는데? 제시카 씨 정말 능력자네.”
“맞아요, 사장님. 너무 멋있어요. 우리 인테리어 업자를 잘 만난 것 같아요.”
이준형도 정다운도 이제 김서원을 한 식구로 받아들인 것 같았다.
그럴수록 며칠 전 안상훈의 사고에 관해 묻던 김서원의 얼굴이 떠올랐다.
아마 지금도 그 일을 떠올리며 마음고생을 하고 있을텐데...
“제시카 씨는 오늘 안 오나? 우리 내일 오픈 전에 결의대회 같은 거 해야 하는데?”
“며칠 전에 술 한잔했잖아?”
“에이, 그날은 그냥 더워서 한잔한 거고.”
저렇게 매일 술 마실 핑계를 만들어 내는 이준형은 결혼하면 안 될 것 같았다.
결혼해서도 저렇게 기회만 되면 핑계를 만들어 하루가 멀다고 마셔대면 언젠가는 시퍼렇게 멍든 눈으로 찾아오지 싶다.
“안 그래도 오늘 최종 점검 같이하자고 했어. 곧 올 거다.”
“앗싸!”
-저 친구가 도움이 되기는 하는 거냐? 어째 술값만 축내는 것 같은데?
‘이번 새우면 판매의 일등 공신이야. 영업에는 아주 많이 타고났어.’
-뺀질뺀질하고 말 많은 게 영업이 딱이긴 하다.
소리 없이 속으로 웃고 있는 서인우를 묘한 눈으로 바라보던 이준형이 조용히 다가와 물었다.
“뭐냐? 술 얘기할 때는 아닌 척하더니 너도 제시카 씨 올 때 되니까 그렇게 좋냐? 아주 입이 찢어지네.”
입 밖으로 소리를 내지는 않았지만, 중식도와 대화하는 내내 표정 관리까지는 힘들었다.
“그게 아니라 내일부터 이 가게에서 다시 요리를 시작할 생각 하니까 벌써 흥분돼서…. 나 너무 기분 좋다. 준형아!”
“맞아, 나도 너무 좋다. 내일 우리 부모님도 오신다고 했어.”
“정말이에요?”
“그전에는 솔직히 내 일을 인정 안 해줬는데, 여기에서 일하게 됐다고 하니까 좋아하시더라. 설마...”
이준형이 순간 눈동자를 데구루루 굴렸다.
“설마 내 이름으로 백화점 할인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시는 건 아니겠지?”
다 같이 소리 내서 웃고 있는데, 김서원이 쭈뼛쭈뼛 안으로 들어왔다.
“무슨 재미있는 얘기라도 하나 봐요?”
“제시카 씨. 잘 왔어요. 우리 오늘 MS 백화점에서의 멋진 출발을 기원하는 결의대회를 하도록 합시다.”
“네?”
“저녁에 다 같이 똑!”
이준형이 술잔을 꺾는 제스처를 해 보였다.
“아! 똑! 좋죠.”
-에이, 오늘 동침은 물 건너갔네.
‘언젠가 기회가 있겠지?’
-인우야.
순간 중식도의 목소리가 낮게 깔렸다.
-내가 항상 곁에 있을 것 같지?
서인우의 등 쪽에서 한겨울 바람보다 더 차가운 뭔가가 스르륵 스쳐 가는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