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1화.
주먹을 꽉 쥔 채 온몸을 부들부들 떨고 있는 김원상에게 비서 하나가 급하게 달려왔다.
“회장님께 오셨다고 말씀드리겠습니다.”
“아니, 됐어요. 다른 일이 있어서...다음에 다시 오겠습니다.”
그대로 뒤도 돌아보지 않고 엘리베이터를 타고 주차장으로 향했다.
시동도 켜지 않은 채 운전석에 멍하니 앉아 있었다.
지금 이 상태로 운전하다가는 뭐 하나는 박아 버릴 것 같았다.
“내 아들 김원상. 그놈은 절대 서인우 한테 안돼. 서인우가...그 서인우가 내 아들로 태어났어야지.”
조금 전 아버지 김형식이 한 말이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았다.
눈을 감은 채 양손으로 머리를 움켜쥐고 소리를 질렀다.
“왜? 나는 왜 안된다는 거야? 왜? 왜?”
똑똑.
갑자기 차창을 두드리는 소리에 화들짝 놀라 눈을 떠보니 김서원이 걱정스러운 눈으로 바라보고 서 있었다.
“오빠, 왜 그래? 무슨 일이야?”
이런 제길.
하필 이 상황에 김서원을 마주치다니.
안 그래도 열받는데 동생 김서원의 얼굴을 보니 짜증이 확 밀려왔다.
“알 거 없어. 넌 여기 왜 나타난 거야?”
“난 근처에서 일 마치고 곧 저녁 시간이라 잠시 들렀어. ”
“아버지랑 둘이 저녁이라도 먹게?”지금 심정이 그대로 묻어나서인지 말이 곱게 나가지 않았다.
“한동안 들르지도 않았더니 뭐라 하셔서...나도 뭐 그냥 생존 신고 같은 거지.”
생존 신고?
살아있으면 기뻐하기나 할까?
아니, 죽었다고 하면 슬퍼 나 할까?
이런 거지 같은 부모 자식 사이가 있기는 할지...처참한 기분이 들었다.
김원상의 표정이 심상치 않아 보였는지, 갑자기 차 문을 열고 김서원이 바로 조수석에 앉았다.
“뭐 하는 거야?”
“오랜만에 어디 가서 술이나 한잔해.”
“됐어. 너까지 나를 동정하는 거야?”
김서원이 불안하게 흔들리는 김원상의 눈을 잠시 쳐다봤다.
“잘 나가는 [만가복] 마포점 점장에 곧 이 회사가 자기 것이 될 오빠를 동정할 사람이 있을까? 그냥 오늘은 남들처럼 평범한 남매 흉내나 내보자는 거야.”
“남매 흉내?”
하긴.
세상에 단 둘뿐인데 왜 그렇게 미워하고 살았는지...
무엇 때문에 동생 김서원 얘기만 나오면 그렇게 촉각을 곤두세우고 예민하게 굴었는지 모르겠다.
생각해 보면 딱히 김원상에게 잘못한 것도 없는 동생이었는데….
“아버지는?”
“생존 신고야 다음에 하면 되는 거고...더운데 빨리 가자.”
동생 김서원의 옆얼굴을 잠시 쳐다본 후 주차장을 빠져나왔다.
김원상의 차가 도착한 곳은 회원제로 운영되는 고급 바였다.
“오빠, 난 이런 곳은 별로인데? 좀 푸짐하고 맛있는 곳, 사람 사는 정이 느껴지는 그런 곳 없어?”
“다른 곳은 복잡하고 시끄럽잖아.”
김서원이 내비게이션에 주소를 찍고는 김원상의 팔을 툭 쳤다.
“뭐해? 출발!”
잠시 망설이던 김원상이 다시 액셀러레이터를 밟아 내비게이션이 안내해주는 길로 가기 시작했다.
도착했다는 안내음이 나왔지만, 김원상이 내리지 않고 계속 창문 너머로 밖을 살폈다.
“여기 뭐 없는데? 네가 가자는 곳이 여기 맞긴 맞아?”
“맞아. 내가 가려는 곳에 주차장이 없어서 여기 주차하고 좀 걸어가면 돼.”
“무슨 주차장도 없는 곳을 가자고 그래? 날씨도 더운데?”
“들어가면 시원하니까 조금만 참아.”
김서원이 안내한 곳은 작은 건물 2층에 있는 [청춘 포차]라는 이름의 술집이었다.
[서풍 TWO] 사람들과 처음으로 갔던 서인우의 단골집.
사장님이 일식집을 운영하다 접고 그 자리에 차린 술집이라 특히 어묵탕이 일품이라고 소개받은 곳이었다.
“어서 오세요.”
문을 열고 들어가자 이번에도 역시 달짝지근한 어묵탕의 냄새와 잘 튀겨진 치킨 냄새, 코끝을 찌르는 듯한 매콤한 불향이 섞여 식욕을 자극했다.
벽 쪽 조용한 곳으로 가서 자리를 잡자 김원상이 내키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어정쩡하게 들어와 앉았다.
“매운 거. 아니면 순한 거?”
“뭐가?”
“여기 어묵탕이 끝내주는 데 매운 거로 시킬지 순한 거로 시킬지 고르라고.”
“아직 더워 죽겠는데 무슨 뜨거운 어묵탕이냐?”
“이열치열 몰라. 이거 한번 먹어보면 속이 뻥 뚫리는 시원함이 어떤 건지 알게 될 거야.”투덜대며 메뉴판을 보고 있는 김원상을 향해 픽 웃음을 던진 김서원이 물었다.
“그럼 내 맘대로 시킨다?”
“매운 거.”
그래.
스트레스에는 매운 걸 좀 먹어줘야지.
“사장님, 저희 주문할게요.”
“네, 뭐로 드릴까요?”
“매운 어묵탕 하나랑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후라이드 치킨, 그리고 머리 깨지게 겁나 시원한 생맥주 두 잔이요.”
“네.”
머리에 두건을 쓰고 있는 사장이 웃으며 우렁차게 답을 하고 돌아섰다.
“아주 단골인가 보다?”
“내가 아니고 아는 사람이 단골이라 소개해줬어.”
“자, 우선 머리 깨지게 차가운 생맥주 왔습니다. 119 불러 놨으니 걱정하지 말고 시원하게 마셔요.”
“네, 감사합니다.”
깔깔거리며 가게 주인과 농담을 주고받는 김서원이 낯설게 느껴졌다.
항상 말없이 공부만 하다가 어느 날 갑자기 독일로 날아가 5년간 한 번도 들어오지 않았던 독한 계집애.
그 동생이 지금 앞에서 깔깔거리며 농담하고 행복해하는 저 여자가 맞나 의심스러울 정도였다.
“너 많이 변했다?”
“아니, 나 원래 이런 사람이었어. 우리 집이, 아니 특히 아빠가 내 성격을 있는 대로 표현하며 살게 놔두지 않았으니까….”
김원상은 자기와 별다를 게 없이 자란 김서원이 조금은 안쓰럽게 느껴졌다.
시원한 생맥주를 쭉 들이키고 잔을 내려놓았다.
“하나만 묻자. 5년 전 왜 갑자기 독일 유학을 결정한 거냐?”
“응?”
김서원이 대답 대신 다시 잔에 입을 가져갔다.
말없이 맥주를 크게 들이키고 난 김서원이 고개를 들어 김원상의 눈을 응시했다.
“오빠 때문에.”
“뭐? 나 때문에?”
“내가 아빠 눈앞에서 사라져야 [만가복]이 오롯이 오빠 꺼가 될 거니까.”
김원상의 눈동자가 심하게 흔들렸다.
동생 김서원이 지금 무슨 소리를 떠들고 있는 건지 갑자기 온 세상의 소음이 뚝 끊긴 것처럼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것 같았다.
“너. 너도 후계자 자리를 욕심내고 있었던 거 아니었어?”
“그래서 우리가 친한 남매가 아니라 남매 흉내를 내는 중이라는 거야. 오빠는 나에 대해 아무것도 몰라.”
어묵탕을 들고 다가오다 심각한 분위기에 잠시 멈칫했던 가게 주인이 어색하게 웃으며 어묵탕을 내려놓았다.
탁!
버너에 불을 켜서 작게 줄이고는 말없이 사라졌다.
“우선 이거 먹어봐. 정말 속이 뻥 뚫릴 거야.”생각보다 국물 색이 빨갛지 않았다.
빨간 고추가 군데군데 보이는 옅은 붉은 빛의 국물에 오동통한 각종 어묵이 꽉 들어차 있었다.
큼직한 무와 표고버섯, 작게 잘라놓은 꽃게가 국물 맛을 내는 듯 보였다.
“컥, 커헉.”
숟가락으로 국물을 한 숟가락 입에 넣은 김원상이 기침을 하기 시작했다.
“이거 안 매워 보이는데 엄청 칼칼하네.”
김서원이 씩 웃으며 국물 위에 둥둥 떠 있는 빨간 색 고추를 집어 보였다.
“요게 아주 맛있게 매운맛을 내주거든. 어때? 속이 뻥 뚫리지?”
같은 요리를 하는 사람으로서 국물 맛을 어떻게 냈는지 궁금할 정도로 과히 시원하기는 했다.
“어묵도 먹어봐. 여기 사장님이 전에 일식집 하실 때부터 거래하던 어묵이라는데 정말 쫄깃하고 고급스러운 맛이야.”
“도대체 누구 단골집이길래 이렇게 잘 알아?”
“응...서인우.”
“뭐? 그 자식 단골집이야?”
갑자기 젓가락을 소리 나게 내려놓으며 김원상이 소리를 질렀다.
사장이 놀란 눈으로 잠시 쳐다보다 다시 시선을 돌렸다.
“왜 이렇게 흥분하고 그래? 서인우 씨랑 그냥 서로 경쟁하는 사이 아니야?”
조금 전 무슨 소리를 듣고 왔는지, 아니 최근에 MS 백화점 입점 경쟁에서 누구 때문에 패배했는지….
아무것도 알지 못하는 김서원이 내뱉은 말에 다시금 입맛이 뚝 떨어져 버렸다.
“너 요즘에도 그 자식 만나는 거야?”
“말 함부로 하지 마. 나랑 거래하는 사장님이야.”
“거래? 무슨 거래? 네가 말한 그 꼴 같지 않은 인테리어 사업?”
김원상을 노려보는 김서원의 눈이 잠시 파르르 하게 떨려왔다.
좌절에 빠진 듯한 모습이 너무 힘들어 보여 오래간만에 대화해보려 시도한 자신이 후회스러웠다.
“내 힘으로 죽어라 하고 노력하고 있어. 그 노력을 하찮게 만들지 마.”
“그래 좋아. 네 사업은 그렇다 치고. 왜 하필 서인우 그 자식인데?”
“그 사람은 꿈이 있어. 자기와 인연을 같이 하는 사람들과 함께 이뤄가고 싶은 꿈이.”
김원상이 남은 맥주를 단숨에 비워버렸다.
“그놈이 도대체 뭔데? 뭐가 그렇게 특별해서 너도 아버지도 나 같은 놈은 안된다는 소리를 하는 거냐고?”
그거였구나!
오빠 김원상의 눈에 희망을 다 뺏어버린 이유.
날카로운 무언가로 가슴을 후벼팠을 한마디.
그런 소리를 들었을 오빠를 생각하니 김서원의 가슴 한켠이 몹시도 시려왔다.
* * *
MS 백화점에서 새우면을 판매하기 시작한 지 오늘이 삼 일째 되는 날이다.
첫날 사간 손님이 다시 찾아와 더 많은 양의 새우면을 사가고, 입소문을 듣고 사러 왔다는 사람이 하나둘 생기기 시작했다.
9층 식당 인테리어도 조금씩 윤곽이 잡혀가고 있었다.
-최고의 중식당 [서풍TWO]가 여러분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9월 1일 오픈.
인테리어를 위해 막아놓은 가벽에 적힌 문구였다.
큼지막한 문구를 쳐다보고 있는 서인우 앞에 커다란 그림자가 드리웠다.
“구 과장님.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사장님. 진행 상황 좀 체크하러 왔습니다.”
“오픈까지 이제 꼬박 나흘 남았네요. 인테리어는 그 전에 다 끝날 것 같습니다.”
한참 벽 장식을 손보고 있던 김서원이 다가오는 두 남자를 보며 사다리에서 내려왔다.
“이런 위험한 일까지 직접 하시는 겁니까? 다른 분들 시키시지...”
“원래 이 일이 노가다예요. 그래서 내가 많이 먹는답니다. 밥심으로 일하거든요.”
구본석이 삐져나온 와이셔츠를 정리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안녕하십니까? MS 백화점 식품부 구본석입니다.”
“안녕하세요. 여기 인테리어를 맡은 [바램 인테리어] 대표 김서원입니다.”
“지난번 가게 느낌을 많이 살리셨네요? 분위기 좋은데요?”
“아무래도 [서풍 TWO]의 상징이죠. 여기 입구에도 그 전처럼 포토존을 만들었습니다.”
구본석이 레트로 느낌의 천막과 노란 조명등을 꼼꼼히 살폈다.
“지금까지 다른 중식당들 인테리어 컨셉하고는 아주 다른데, 매력 있습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네,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서풍]의 성공이 바로 제 성공이거든요.”
“네?”
구본석이 뭔가 설명을 해달라는 표정을 지으며 서인우를 쳐다봤다.
“여기 김서원 씨도 우리와 함께 꿈을 키워갈 내 식구입니다. 앞으로 끝까지 같이 할 겁니다.”
“아, 그 말은 전국에 이 컨셉의 인테리어가 판을 치게 될거라는 말씀인 거죠?”
“네. 아직 희망 사항입니다. 하지만, 꼭 그렇게 되도록 할 겁니다.”
“좋습니다. 저는 무조건 파이팅입니다.”
구본석이 특유의 힘찬 목소리로 파이팅을 외쳤다.
좀 더 내부를 둘러보고 홀을 막 나가려던 구본석이 다시 돌아서 서인우를 향했다.
“참, 안상훈 셰프는 어떻습니까?”
“아, 다행히 비수술적 치료를 하게 돼서 오픈 전까지 푹 쉬시라고 했습니다.”
“정말 다행입니다. 그래도 그 다리로 다 나아도 종일 서서 요리하려면 매우 힘드실 텐데요?”
“네. 저도 걱정입니다. 제가 더 열심히 해야겠죠.”
“그 사고...정말 [만가복]에서 고의로 저지른 게 맞습니까?”
[만가복]이라는 커다란 소리에 김서원의 몸이 그대로 굳어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