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9화.
떨리는 마음으로 이모네 집 초인종을 눌렀다.
민망하리만큼 이모와 이모부 지영이까지 우르르 현관에 나와 서인우를 맞아 주었다.
기대가 컸었나?
그들보다 한 발짝 뒤에 물러서서 서인우가 들어오는 모습을 쳐다보고 있는 엄마 이지희는 작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서인우가 상상했던 일은 결국 일어나지 않았다.
누구보다 먼저 달려와 서인우를 꼭 끌어안고 등을 토닥여줄 거라 상상했는데...
여전히 아무런 감정이 담기지 않은 눈빛으로 서인우를 한 번 쳐다봤다.
“엄마!”
“그래, 어서 와라.”
그래도 전보다 아주 조금 살가워진 것 같은 말투가 느껴졌다.
지금은 그것만으로도 감사했다.
“인우야. 이게 얼마 만에 보는 거냐? 요즘 아주 바쁘지?”
“이모부, 죄송해요. 자주 내려왔어야 했는데...”
“지금 인우 네 나이가 제일 바쁠 때야. 이리 와서 앉자.”
거실에 앉아 있는데 집안에 맛있는 음식 냄새가 가득했다.
“갈비찜 하셨네요? 굴비도 굽고..오늘 오랜만에 포식하겠어요.”
“역시 개코. 귀신이네.”
윤지영이 엄지척을 올리며 웃었다.
“어려서부터 내가 간 보기 힘들면 인우한테 물어봤어. 워낙 입맛이 정확한데다가 부족한 재료를 귀신같이 알아냈지.”
엄마 이지희를 통해 듣는 어릴 적 얘기는 정말 오랜만이었다.
놀라 이모를 쳐다보자 이모의 얼굴이 환하게 밝아졌다.
“우리 언니 요즘 부쩍 옛날얘기 많이 하네. 그때가 그리운가 보다.”
“응, 동수 씨가 매일 새로운 요리 연구해서 맛보라 하고 우리 인우가 그 재료를 다 맞추면 신기해했었던 그때가 자꾸 생각나네.”
옆에 있던 지영이 서인우 곁으로 바짝 다가와 귓속말을 했다.
“이모 요즘 정말 많이 좋아지셨어. 아직 막 표현하고 그러시진 않는데, 예전보다는 가끔 웃고 그래. 지금도 오빠 와서 정말 좋은 걸 거야.”
달려와 안아주지 않아도 옛날얘기 해주는 엄마가 정말 고마웠다.
그 시절을 까맣게 잊고 사는 줄 알았는데...
“저 말씀 드릴 게 있어요.”
이모가 시원한 매실차를 내오자 서인우가 엄마와 이모네 식구들을 한 번씩 쳐다봤다.
“뭔데? 무슨 좋은 일이 있는 거지?”
이모부가 벌써 신이 나서 입이 귀에 걸렸다.
좋은 일?
그 좋은 일을 얘기하려면 그동안 있었던 일을 다 알려야 했다.
“저 곧 MS 백화점 강남점 중식당으로 들어가기로 했어요.”
“뭐? 강남에 있는 MS 백화점? 오빠 대박.”
윤지영을 시작으로 이모와 이모부 모두 놀라 한마디씩 더했다.
“정말이야? 언제부터?”
“이야, 우리 인우 대단하다. 그 백화점 중식당은 정말 아무나 들어가는 곳이 아닌데...그럼 지금 가게는?”
“그게 말이에요...거긴 문 닫았어요.”
“왜? 아직 계약 기간도 안 끝났는데?”
계약 과정부터 같이 알아봐 준 이모부가 기간을 모를 리 없었다.
“사정이 생겨서 거긴 문 닫았어요. 그래서 새로운 가게 알아보다가 운 좋게 MS 백화점 중식당 입점 기회를 얻게 된 거고요.”
이모부의 눈빛이 서늘하게 바뀌었다.
“사정? 인우 너 무슨 일 있었던 거지? 지난번 안상훈 셰프 찾을 때 분명히 가게 확장한다고 하지 않았나?”
“죄송해요, 이모부. 그때는 이모부 걱정하실까 봐 사실대로 말씀드릴 수 없었어요.”
예상했지만 가족들이 걱정하는 얼굴을 보니 마음이 편치 않았다.
“계약기간이 남아있는데 무슨 사정이 생겨 문을 닫아? 누가 다치기라도 했어?”
이모의 목소리가 한 톤 올라갔다.
“사실은 누가 우리 가게를 사버렸어요. 전 주인이 계약 기간이 남아있다고 얘기했는데 위약금까지 줘가면서 가게를 사버리는 바람에...”
“어떤 놈이 상도덕도 모르고 그런 짓을 해? 누구야 대체?”
이모부가 흥분하기 시작하자 이모가 중재에 나섰다.
“결과적으로는 MS 백화점에 입점하게 됐으니 잘된 거지 뭐. 시장하겠다. 점심 먹자.”
“네, 사실 저도 요리하나 선보이고 싶어서 준비해왔어요. 이번에 백화점 중식당 심사에 통과하게 된 스페셜 메뉴에요.”
“그래? 그럼 같이 먹어보자.”
“네, 오븐에 굽기만 하면 됩니다.”
인우가 준비해온 치즈를 잔뜩 올려 오븐에 굽는 동안 청경채 버섯볶음을 재빨리 만들었다.
“자 이제 완성됐습니다. 다들 먹어보고 냉정하게 평가해 주세요.”
이미 이모와 엄마가 준비한 음식으로 식탁이 가득했다.
오랜만에 만난 조카와 아들에게 뭐든 만들어 먹이고 싶어 했을 그들의 마음이 전해지는 것 같았다.
접시에 치즈 치킨밥과 청경채 표고 볶음을 함께 담아내자 이모가 식탁 한가운데 올려놨다.
“이거 너무 근사하다. 퓨전요리인가 보네?”
“네. 한번 드셔보세요. 엄마 내가 덜어줄게요.”
서인우가 이지희의 앞접시에 치즈 치킨밥과 청경채, 표고버섯을 올려 주었다.
“너무 이쁘네. 먹기 아까울 정도로.”
확실히 전보다 미소를 자주 보이는 엄마를 보니 안심이 되었다.
“오빠, 이거 너무 맛있는데? 이 안에 쫄깃한 밥이 들어 있을 거라고는 상상도 못 할 것 같아. 정말 예술이야.”
“그래, 인우야. 이런 모양과 맛이라면 당연히 누구랑 붙어도 이기지, 그럼 당연하지.”
가족이라 팔이 안으로 굽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다들 맛있어하며 한마디씩 해주는 칭찬이 에너지를 팍팍 충전해 주는 것 같았다.
“인우야. 정말 잘됐다. 그럼 언제부터 시작인 거냐?”
“인테리어 작업 끝나는 대로 바로 시작할 것 같아요. 아마 일주일에서 열흘 정도 걸릴 듯하네요.”
“그럼 그동안 좀 쉴 수 있겠네?”
새벽시장부터 종일 쉬지 않고 일해왔던 서인우를 잘 아는 윤지영이 물었다.
“아! 지영아. 전에 내가 요리대회에서 선보인 새우로 만든 면 기억하지?”
“그럼, 이모부가 위가 안 좋으신 할머니를 위해서 개발하셨던 메뉴라면서? 우리 모두 얼마나 감동했는데.”
“그 새우면이 간편식으로 만들어서 시중에 판매될 겁니다. 내일 MS 백화점 식품관에서 팝업 스토어를 시작으로 판매될 거예요.”
다들 놀라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럼 새우면 사업까지 시작하는 거냐?”
“네, 영업은 제 동업자인 친구 이준형이 맡아서 해주기로 했습니다. 오늘도 그 일로 미팅 중일 거예요.”
“대박. 내가 오빠 가게에서 계속 일했어야 했는데...앞으로 잘 나갈 일만 생겼구만. 정다운 씨랑 한 월급 인상 약속도 지킬 수 있겠네?”
서인우가 환한 웃음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가게에서 쫓겨나 앞이 막막했던 순간들.
서인우를 바라보며 인생을 걸었던 이준형과 정다운을 걱정하며 잠 못 들었던 날들.
아빠의 [서풍]을 이어가겠다는 서인우의 꿈을 지지해주던 가족들이 하게 될 실망들.
그런 모든 것들이 한순간에 사라지는 것 같았다.
더없이 행복한 시간이었다.
저녁으로 뭐든 사주고 싶어 안달인 이모부와 간신히 다음 기회를 약속하고 4시가 조금 넘어서 서울로 돌아왔다.
마음 같아서는 저녁까지 같이 먹고 하룻밤이라도 자고 오고 싶었지만, 병실에 누워있는 안상훈이 걱정되어 편히 있을 수가 없었다.
해가 지기 전에 꼭 들러야 할 곳이 있었다.
서인우의 차가 도착한 곳은 안상훈의 집 근처였다.
안전한 곳에 차를 주차하고 심사 날 안상훈의 행적을 따라가 보기로 했다.
집에서 출발해서 지하철역까지 걸어가는 길에서 사고를 당했다.
분명 어딘가에 설치된 CCTV에 사고 현장이 찍혀있을 거였다.
안상훈의 집이 있는 골목은 단독주택과 빌라가 섞여 있는 서민 동네였다.
그래서인지 중간중간 안전용 CCTV가 설치되어 있었다.
지하철 역 근처로 다가가자 편의점과 대용량 저가 커피 매장, 빵집 등이 보였다.
“여기로 오늘 길 어딘가에서 사고를 당했다는 말인데...”
서인우가 시선을 들어 CCTV를 확인하고는 편의점으로 들어갔다.
“저, 말씀 좀 여쭐게요. 혹시 어제 아침 이 근처에서 오토바이 사고 난 거 보신 적 있으신가요?”
“경찰이에요? 아까도 물어보고….”
“누가 또 물어봤습니까?”
“네. 자세히 물어보고 CCTV도 복사해 갔어요.”
순간 어제 최만수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사람을 하나 보내서 사고 경위를 조사한다고 했었는데...
편의점 밖으로 나온 서인우는 안상훈의 번호를 찾아 통화버튼을 눌렀다.
“안셰프님. 좀 어떠세요?”
-치료가 잘 돼서 그런지 아무렇지도 않아요.
“다행입니다. 오늘 사고 경위 조사한다고 누가 왔었나요?”
-네, 어제 병원에 데려다준 오비서님하고 처음 보는 남자 하나가 왔었어요.
아무래도 그 남자가 여기를 조사하고 간듯했다.
“알겠습니다.”
-사장님은 어디 신가요?
“여기 안셰프님 집 근처입니다. 뭐라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해서 왔는데, 이미 누가 조사를 다 하고 갔다고 해서요.”
-어머니 뵈러 갔다고 들었는데...하룻밤이라도 주무시고 오시지...저는 아무렇지 않은데요.
“맛있는 밥도 많이 먹고 얘기도 실컷 하고 왔습니다. 그럼 병원에서 자세한 얘기는 나누도록 해요.”
이렇게까지 신경을 써주다니.
뭐라 감사의 뜻을 표해야 할지 잠시 망설이던 서인우가 차에 앉자마자 최만수에게 전화를 걸었다.
“안녕하세요. 회장님. 서인우입니다.”
-저장해놔서 바로 알았지. 구 과장한테 대충 진행 상황은 들었네.
“지금 안셰프님 사고당한 지역에 와있습니다. 벌써 누가 조사를 다 하고 가셨다고 해서 연락 드렸습니다.”
-아, 내가 개인적으로 잘 아는 사람이야. 일 처리 하나는 끝내주니까 걱정하지 말게.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제가 할 수 있는 약속은 지금보다 열심히 해서 더 맛있는 요리로 보답하겠다는 그 말뿐입니다.”
-그거면 됐네. 내 평생의 꿈인 요리를 뒤늦게 배워서 하고 있지만, 나는 자네처럼 타고난 사람은 아니야. 자네의 능력에 그 성실함이면 뭔들 못하겠나?
“네, 명심하고 열심히 하겠습니다.”
운전대를 잡은 서인우는 뛰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병원으로 향했다.
* * *
져녁 장사를 남겨두고 일찍 집으로 들어온 김원상은 거실 창가에 묵묵히 서서 한강을 바라보고 있었다.
붉게 물들어가는 해 질 녘의 한강은 짜증이 날 정도로 눈부셨다.
자신의 인생이 더없이 초라해져 보일 만큼.
“이런 제길.”
누구에게인지 모를 화가 치밀어 올랐다.
MS 백화점에 입점하지 못하는 현실도 심사 준비에 최선을 다하지 않은 것 같다는 지적도 다 받아들이기 싫었다.
“이게 다 아버지 때문이야. 그 망할 놈의 욕심 때문에 비열한 짓까지 해서...결국 나만 초라하게 만들어 버렸어.”
멋지게만 보이던 노을이 분노에 휩싸여 불타오르는 것처럼 느껴졌다.
“서인우!”
그 이름을 입에 담자마자 속에서부터 더 큰 짜증이 올라왔다.
자신과 전혀 다르지 않은 것 같은 그를 왜 그렇게 특별하다고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요리를 접한 기간으로 보나, 주위 환경으로 보나 서인우는 그에게 비교될만한 인물도 아니었다.
적어도 김원상의 기준으로는 그랬다.
하지만...
지난번 요리대회에서 필살기를 보여줬을 때는 솔직히 많이 놀랐었다.
중식도를 다루는 믿기 어려운 솜씨.
이전 [서풍]의 맛을 똑같이 낼 수 있는 실력.
다 인정하고 싶지 않았지만, 김원상에게 서인우를 두려운 존재로 만들어 버렸다.
이번 기회에 그 기분을 깨끗이 없애버리고 싶었다.
물론 자신도 있었다.
그런데 왜?
무엇 때문에 서인우는 할 수 있는 일을 자신은 하지 못한 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낮에 차은석이 만든 서인우의 치즈 치킨밥을 맛봤을 때는 정말이지 뺏고 싶었다.
서인우의 능력을.
그의 능력을 뺏어 올 수 있다면 뭐라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하! 나도 누구처럼 점점 괴물이 되어 가는 건가?”
자신도 모르게 한숨이 섞인 소리가 튀어나왔다.
“흐... 흐흐!”
어둠이 내려앉은 창문에 비친 김원상의 얼굴에 소름 끼치는 웃음소리가 얹혔다.
그토록 경멸했던 아버지의 그 웃음소리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