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8화.
걸음을 멈춘 서인우는 다시 뒤돌아서서 중식도를 한참 바라봤다.
허공에 가만히 멈춰 있던 중식도가 다시 한 바퀴 빙그르르 돌더니 서인우 앞으로 다가왔다.
“사부. 그게 무슨 말이야? 우리 아빠도 사부를 만나 그만큼 성공했으니, 사부가 아빠의 로또인 셈이지. 아마 평생 감사하며 사셨을 거야.”
-네 아빠는 아주 특별했어.
“뭐가?”
-넌 사실 나를 만나고 더 요리를 좋아하게 되고 세상에 눈을 뜨기 시작한 거잖아?
“그렇긴 하지. 나는 아빠를 닮아 남들보다 예민한 후각과 미각을 가지고 있었지만, 요리할 생각은 안 했었지. 그래서, 대학도 경영학과를 갔던 거였고.”
아예 씻는 걸 미루고 침대 끝에 걸터앉은 서인우가 눈앞에 멈춰 있는 중식도를 뚫어져라 쳐다봤다.
왜 갑자기 이런 소리를 하는 건지 알 수 없었다.
항상 자기 자랑하느라 바쁜 사부가 아빠 얘기를 할 때는 뭔가 다르게 느껴졌다.
-네 아빠는 요리를 위해 태어난 사람처럼 느껴졌어. 매일같이 연구하고 수십 번 수백 번 반복해서 연습하고 그랬지. 아마 그런 아빠의 열정이 나를 깨운 게 아닐까 생각해.
아빠의 요리에 대한 열정이 사부를 이 중식도에 깃들게 했던 걸까?
“사부는 아직도 아빠와 어떻게 만났는지 기억나지 않는 거야?”
-응, 어느 날 내가 네 아빠의 손에 들려있던 이 중식도 속으로 들어왔지. 안타깝게도 그 전은 잘 기억나지 않아.
서인우가 바닥으로 시선을 내린 채 한참 뭔가를 골똘히 생각하다 물었다.
“사부는 그 전에 대체 뭐였을까?”
-그야 뭐, 최소 요리의 신 정도 아니었겠냐?
또 시작이다.
입만 열면 자기 자랑.
아마 전에 잘난 척하다 맞아 죽은 거 아닌가 싶다.
갑작스럽게 중식도가 꺼낸 아빠 얘기가 도화선이 되어 어릴 적 엄마 아빠와 함께했던 행복한 추억이 마구마구 떠올랐다.
아무리 후회해도...그리고, 아무리 몸부림쳐도 다시 돌아가지 못할 그때.
활짝 핀 꽃처럼 웃어주던 엄마와 집에서까지 쉬지 않고 음식을 연구하고 만들었던 아빠.
항상 그들의 눈동자에는 어린 서인우가 들어있었다.
서인우는 행복해 보이는 부모의 모습을 눈 속에 담지 못했던 그때가 뼈저리게 후회됐다.
여름의 한복판에 침대 끝에 걸터앉은 서인우는 가슴이 몹시도 시려왔다.
* * *
오래간만에 푹 자고 일어난 토요일 오전.
오늘은 처음으로 아침 운동을 쨌다.
이유는 없었다.
그냥...조금이라도 빨리 엄마를 보고 싶다는 게 이유라면 이유였다.
아니, 엄마가 해주는 점심을 먹고 싶은 게 이유였다.
새벽 운동을 하고도 충분한 시간이 있었지만, 대전에 다녀와야겠다 맘먹은 순간부터 왠지 모르게 마음이 급해졌다.
지난밤 통화에서 느껴지는 아주 작은 변화 때문일까?
왠지 오늘은 엄마가 먼저 달려와 안아줄 것만 같았다.
새벽 운동 대신 새벽에 일어나 치즈 치킨밥을 준비했다.
잘 쪄진 밥을 유리 밀폐용기에 담아 치즈와 그 밖의 재료를 챙겨 집을 나섰다.
[서풍 TWO]가 MS 백화점에 들어갈 수 있게 만들어 준 일등 공신인 치즈 치킨밥을 엄마와 이모네 식구들에게 선보일 생각이다.
밤에 이준형이 가져다 놓은 자동차에 치즈 치킨밥 재료가 담긴 가방을 내려놓고 막 차 문을 여는데 핸드폰이 울렸다.
액정이 구본석이라는 이름을 벨 소리와 함께 뱉어냈다.
아마도 출근하자마자 하는 전화인 듯했다.
“안녕하세요, 구 과장님.”
-서인우 씨. 구체적인 일정 의논을 위해 전화했습니다.
여전히 쩌렁쩌렁한 목청이 스피커 폰을 눌렀나 착각하게 할 정도였다.
-새우면 팝업 스토어는 이준형 씨와 담당 직원이 상의해서 하기로 했다고 들었습니다. 문제없는 거죠?
“네, 그렇게 진행해주시면 될 것 같습니다.”
-그럼 됐고...
구본석의 혼잣말이 들렸다.
-식당 인테리어는 생각하고 계시는 업체가 있으십니까?
“네, 지난번 가게 인테리어를 맡아줬던 회사에 부탁해둔 상태입니다.”
-아, 거기 인테리어 아주 감각이 좋았어요. 그럼 바로 시작할 수 있겠네요? 우리 백화점 측에서 광고도 들어가야 해서 일정을 정해주셨으면 합니다.
“설비는 그대로 사용할 거라서 대략 일주일 정도 말씀하셨습니다. 다시 구체적인 날짜 정해지는 대로 알려드리겠습니다.”
-알겠습니다. 그렇게 알고 진행하도록 하겠습니다. 인테리어 업체와 날짜 조율해서 바로 알려주세요.
통화를 마치자마자 바로 김서원의 번호로 문자를 보냈다.
[서인우입니다. 어제 말씀드린 MS 백화점 중식당 인테리어 견적을 받고 싶습니다. 편한 시간에 연락해 주세요.]
엄마가 있는 대전 이모네 집으로 출발한 지 채 10분이 되지 않아서 김서원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여보세요. 안녕하세요.”
-네, 안녕하세요. 김서원입니다. 방금 문자 확인했어요. 오늘은 오후에 가능할 것 같고요, 내일은 아무 때나 가능합니다.
“잘됐네요. 저는 오늘 일이 있어서 안 될 것 같고, 이준형 씨한테 연락해 놓을 테니까 MS 백화점 중식당을 직접 보시고 견적 뽑아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알겠습니다. 그럼 연락 주세요.
“네, 잘 부탁드립니다.”
핸드폰으로 확인한 시간이 오전 9시가 조금 넘었다.
출근할 때를 제외하고는 늦잠을 자는 이준형의 라이프 스타일을 잘 아는 서인우가 간단하게 문자를 보내놓았다.
그럴 리가 없는데...
문자를 보내고 30초도 되지 않아 이준형으로부터 전화가 들어왔다.
“여보세요. 너 일어나 있었어?”
-그럼. 지금 몇 시인데 아직 자고 있겠냐?
“출근하는 날도 아니라서, 당연히 한참 잠에 빠져 있을 거로 생각했는데….”
-그런 예전의 모습은 잊어줘라. 이제 어엿한 사업가 이준형으로 다시 태어났다.
사업가?
아무래도 박정원 선배님과 처음 백화점 영업을 하면서 느낀 게 많은 것 같았다.
그러고 보니 어제도 왠지 의젓해진 것 같기도 했다.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더니.
-제시카 씨랑 연락해서 우리가 들어갈 식당 인테리어 견적 받으면 되는 거지?
“응. 오늘 오후에 시간 괜찮다고 해서. 난 엄마랑 이모네 식구들보고 저녁 늦게나 올 것 같다.”
-여기는 아무 걱정하지 말고 오랜만에 가족 상봉 잘하고 와라. 어머니께 안부 전해드리고.
“그래, 부탁할게. 수고해라.”
쨍하고 강한 햇빛이 차창으로 들어왔다.
장마가 끝나고 본격적인 더위가 시작됐지만, 서인우가 느끼는 이번 여름은 불쾌 지수만 높아지는 그런 짜증 나는 여름이 아니었다.
절로 눈이 감길듯한 강한 태양이 그들의 앞날을 비춰주는 응원가처럼 느껴졌다.
중식도를 만나게 된 후 일 년 동안 정말 많은 일이 있었다.
신호에 걸려 잠시 멈춘 서인우는 창밖으로 보이는 하늘을 멍하니 쳐다봤다.
‘아빠. 나 지금 잘하고 있는 거 맞지? 아빠가 피땀 흘려 만들어 놓은 명성 내가 꼭 다시 찾을거야. 그리고...’
어젯밤 중식도와의 대화 이후 아빠를 향한 그리움이 주체할 수 없이 밀려왔다.
‘그리고...엄마도 꼭 예전처럼 환하게 웃게 해드릴 거야. 거기서 꼭 응원해 주고 지켜봐 줘요.’
마치 대답이라도 하듯이 태양이 더 강하게 내리쬐었다.
빠아앙.
신호가 바뀌자 액셀러레이터를 밟으며 앞으로 해야 할 일들을 다시 한번 머릿속으로 정리해 보았다.
* * *
여기저기 아프고 불편해 잠을 설친 안상훈이 벽 쪽에 놓인 침대에 곤히 잠들어 있는 안유진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그 옆에서 병실을 정리하고 있던 박은선이 남편을 새침하게 바라봤다.
“당신 가끔 유진이 쳐다볼 때 나 질투 나는 거 알아?”
“뭐? 자기는 딸을 질투하냐?”
“오죽하면 딸을 질투할까? 그러니까 너무 멜로 눈망울로 유진이 쳐다보지 말라고요.”
환한 미소를 가득 담은 채 남편을 바라보는 박은선의 얼굴이 유독 푸석해 보였다.
“오늘은 유진이 데리고 집으로 들어가. 여기서 잠 설치지 말고.”
“싫은데...여기가 우리집보다 훨씬 좋아.”
“좋아봤자 병원이지. 방 두 칸 이라도 난 내 집이 좋아.”
“그게 우리 집이긴 한가? 엄밀히 말하면 은행꺼지. 전세대출로 얻은 집이니까 뭐. 나도 다시 일자리 찾아야 하는데...”
안상훈이 씁쓸한 미소를 흘렸다.
“우리 부자 놀이나 해볼까?”
“뭐? 부자 놀이?”
“오늘 아침은 갓 구운 빵에 모닝커피 하자. 어때요?”
고작 빵에 모닝커피가 부자 놀이라니...
전세대출 이자에 유진이 유치원비 내느라 세일하지 않으면 콩나물 하나도 팍팍 사지 못하며 사는 박은선다운 말이었다.
“그럼 오늘 아침엔 당신 좋아하는 바닐라 라테 마셔. 싸다고 아메리카노만 마시지 말고.”
“아니야. 단 거 몸에도 안 좋고, 살쪄요.”
박은선이 가방을 어깨에 메고 막 병실을 나서려는데 노크 소리가 들렸다.
병실 문이 열리고 남자 한 명이 들어왔다.
심사 날 MS 백화점에서 병실까지 입원 수속을 도와준 최민기 사장 비서 오민준이었다.
“오 비서님. 안녕하세요. 어떻게 오셨어요?”
“우선 이거 받으세요.”
오민준이 재킷 주머니에서 빳빳한 카드 봉투를 꺼내 안상훈에게 건넸다,
“이게 뭔가요?”
“다리가 불편하셔서 식당 이용이 힘드실 겁니다. 병원 식사는 가족분이 같이 드실 수 있게 3인으로 신청해놨습니다.”
“그럼 이게 식권 같은 건가요?”
박은선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아닙니다. 여기 병원에 있는 커피 카드와 베이커리 카드, 그리고 식당 이용 카드입니다. 간호하시느라 힘드실 텐데 당 충전하시라는 사장님 뜻이니 받아주세요.”
“네? 이렇게나 많이요?”
“저희 회장님이 안셰프님이 일하시는 [서풍 TWO]의 서인우 사장님을 무척 아끼십니다. 안셰프님이 빨리 쾌차하셔서 서인우 사장님을 잘 보필해 달라는 당부 말씀도 전하라고 하셨습니다.”
“정말이요? 너무 감사합니다.”
박은선의 눈이 촉촉하게 젖었다.
“저는 오후에 안셰프님 사고 경위 조사를 해주실 분과 다시 오겠습니다. 그럼 푹 쉬십시오.”
오민준이 병실 밖으로 나가고도 한참을 아무 말 못 하고 있던 안상훈이 작게 웃음소리를 냈다.
“여보, 아무래도 우리 돌아가신 사장님이 나를 서인우씨한테 보내준 것 같다.”
“맞아요. 나 지금 너무 행복해. 당신처럼 근사한 남자랑 결혼한 게 내 인생에서 제일 잘한 일인 것 같아.”
“역시 여자는 뇌물에 약하다더니. 당신 좋아하는 바닐라 라테 실컷 마셔도 되겠다.”
박은선이 입을 가리며 연신 웃었다.
“이게 얼마짜리야? 당신 병원에 한 달 넘게 입원해 있는 거 아니야?”
“악담을 해라. 오늘 MRI 결과 나오면 내일이라도 당장 퇴원할 거야.”
“좋았어. 그럼 부자 놀이 제대로 해보자. 우리 유진이는 제일 좋아하는 딸기라떼 사줘야지.”
“응. 나는 딸기가 좋아.”
언제부터 깨어 있었던건지...유진이가 벌떡 일어나 눈을 비볐다.
“우리 딸 일어났어? 아빠한테 와.”
안상훈이 팔을 크게 벌리자 쪼로록 달려와서 아빠 품에 안겼다.
“아빠 이제 안 아파?”
“응, 안 아파.”
“그래? 음...그럼 안되는데...”
“응? 안 아프면 좋은 건데?”
안상훈 품에 그대로 안긴 채 고개만 살짝 치켜든 안유진이 큰 눈을 깜빡거리며 물었다.
“아빠 안 아프면 집에 가야 하는 거 아니야?”
안유진도 지금 사는 집보다 두 배, 아니 세배는 더 큰 병실이 맘에 드는 모양이다.
“왜? 유진이도 이 병실이 집보다 더 좋아?”
“아니. 여긴 내 미미공주도 없고, 색칠 공부도 없어서 우리 집이 더 좋아.”
“그러면 왜 안 되는데?”
“에이, 뭘 알면서 물어?”
뭣 때문인지 안유진의 볼이 빨간 복숭아처럼 변해 있었다.
“아빠는 잘 모르겠는데?”
“에이. 여기 있어야 오빠를 또 볼 거 아니야? 그런데, 오늘은 왜 아직 안 오지?”
그러면서 욕실로 쪼르륵 달려가 세수를 하고 나오는 안유진의 눈 속에 이미 안상훈이 들어갈 자리는 없어 보였다.
이 서인우 오빠 놈 때문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