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7화.
“오빠, 이 아줌마 누구야?”
카랑카랑한 여자아이의 목소리가 병실에 가득했다.
그곳에 있던 사람들 모두 동시에 병실 입구로 고개를 돌리자, 팔짱을 끼고 노려보는 안유진이 보였다.
가히 정다운을 이길 만한 흰자위를 내보이며 살벌한 기운을 내뿜고 있었다.
“상훈 씨. 이게 어떻게 된 일이야? 다리는? 당신 못 걷는 거야?”
그제야 아빠가 보이기 시작했는지...
“으앙!”
안유진이 울음을 터트렸다.
“누가 우리 아빠 다리를 저렇게 똑 부러트렸어? 으앙!”
당황한 안상훈이 어쩔 줄 몰라 하며 딸을 달래려 팔을 벌린 순간이었다.
후다닥!
그 짧은 다리로 어느새 달려가 서인우의 품에 폭 안긴 안유진이 눈에 들어왔다.
“여, 여보. 원래 사랑은 움직이는 거야. 당신은 환자니까.”
애써 위로하는 박은선이 무색할 만큼 안상훈의 얼굴이 점점 시뻘게지며 코를 벌름거리고 있었다.
당황한 서인우가 안유진을 품에 안고 머리를 쓰다듬어 주며 울음을 달래주었다.
“유진아, 울지마. 아빠 다리를 좀 다쳤지만, 예쁜 유진이가 호 해주면 금방 나을 거야.”
“오빠, 호 해준다고 낫지 않는 거 다 알아. 전채 몇 주야?”
“응?”
“아빠 치료가 전채 몇 주냐고?”
전치 몇 주냐고 묻는 건가 보다.
요즘 유치원생들은 이런 것까지 아는 걸까?
이준형과 정다운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 있었다.
이제는 됐다 싶은지 아빠에게로 달려간 안유진이 다시 울음을 터트렸다.
“으앙!”
“유진아, 아빠 괜찮아. 금방 나을 거야.”
“팔이랑 다리랑 피 났어? 그럼 아빠 바퀴 달린 큰 의자 타고 다녀야 해?”
“응? 휠체어? 아마 당분간은 타야 할 수도 있을 것 같은데...”
“으앙!”
안상훈이 땀을 뻘뻘 흘렸다.
“또 왜?”
“나 너무 작아서 그거 운전 못 해. 나 너무 힘들오.”
“푸흡!”
유진의 말을 듣고 있던 김서원이 귀여워 죽겠다는 눈빛을 보이며 픽 웃었다.
그때부터 시작이었다.
안유진이 갑자기 팔짱을 끼더니 김서원을 향한 일종의 심문이 시작됐다.
“아줌마, 왜 웃어요?”
“미안, 너무 귀여워서.”
“그건 나도 알아요. 그런데, 아줌마는 여기 누구랑 친구예요? 우리 오빠랑 무슨 사이에요?”
김서원이 도와달라는 눈빛을 보냈지만, 이 구역 일인자인 안유진 눈에 찍히면 절대 안 된다는 걸 알기에 다들 시선을 피했다.
“오빠? 누구를 말하는 건지...”
“딱 보면 몰라요? 여기서 오빠는 저 오빠밖에 없잖아요?”
안유진이 작은 손가락을 하나 펴서 서인우를 가리켰다.
“그럼 나는?”
당황한 이준형이 억울하다는 듯 작게 내뱉었다.
이준형의 의문이 일 패였다.
김서원이 자세를 낮춰 안유진과 눈을 맞췄다.
“나는 김서원이라고 해. 저 오빠와 여기 언니, 그리고 저기 있는 오빠와 같이 일하는 사람이야. 가게를 꾸미는 일을 해.”
안유진과 눈높이를 맞춰 자상하게 얘기하는 김서원의 모습을 빤히 지켜보던 안상훈의 얼굴은 조금 전보다는 편해 보였다.
그 곁에서 헤벌쭉하게 침을 질질 흘리며 웃고 있는 이준형이 보였다.
아마도 방금 김서원이 말한 오빠라는 단어 때문인듯했다.
뭐든 자기 좋을 대로 해석해서 행복해하는 이준형이 그저 신기하고 재미있어 서인우도 미소를 지었다.
“오빠, 저 아줌마 보고 웃지 마요.”
“어? 그, 그래.”
남편의 손을 꼭 잡고 걱정스럽게 눈을 마주치고 있는 안상훈의 아내 박은선이 이제야 좀 진정이 되는지 딸 유진과 함께 터진 눈물을 닦았다.
“그런데, 여기 병실이 왜 이렇게 커요? 우리 형편에 여기는...”
하루아침에 다리를 다친 것도 적응하기 힘든데, 없는 살림에 남편이 그냥 일인실도 아닌 VIP 병실에 입원해 있는 상황이 더 걱정인 듯 보였다.
다리 상태를 자세히 보고 안심이 되자마자 병원비가 걱정된 박은선의 표정이 다시 어두워졌다.
그런 삶의 무게가 느껴진 서인우가 바로 지금까지 상황을 설명해 주었다.
“다시 말해서 오늘 2차 심사는 안상훈 셰프님 덕분에 성공했습니다. 그래서, MS 백화점 측에서 이런 훌륭한 셰프님을 놓치지 않기 위해 특별 대우를 해주고 있는 거고요.”
서인우의 설명에 박은선뿐 아니라 김서원도 적잖이 놀란 듯 보였다.
아무리 백화점 심사를 위해 오다가 사고를 당했다고 해도 이렇게까지 특급 대우를 해주는 일은 거의 없기 때문이었다.
김서원에게도 MS 백화점 최만수 회장과 서인우와의 인연을 빨리 설명해 줘야겠다 느끼는 순간이었다.
병실에는 안상훈 가족을 남겨두고 카페로 나온 서인우 일행은 본격적인 [서풍 TWO]의 앞날을 구체적으로 의논하기 시작했다.
커다란 테이블에 둘러앉아 이준형이 펼쳐놓은 노트북에 시선을 모았다.
“우선 당장 낼 모레 주말부터 바로 우리 새우면 팝업 스토어가 열릴 겁니다.”
이준형의 설명이 이어졌다.
“새우면 팝업 스토어와 식품매장 판매 관련한 모든 일들은 나와 정다운씨가 책임지고 진행 하도록 하겠습니다. 정다운 씨 괜찮지?”
“저야 뭐든 일할 수 있으면 좋죠.”
그 뒤로는 서인우가 바로 바통터치를 했다.
“동시에 9층 중식당 인테리어 작업을 할 겁니다. 내부 시설은 이미 완비되어 있으니, 이전 [서풍TWO]의 이미지를 그대로 살릴 수 있는 인테리어면 될 것 같습니다.”
제시카가 열심히 노트하며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인테리어 기간은 얼마나 잡고 있나요?”
“그건 전문가의 의견을 따라야죠. 물론 백화점 측에서는 빨리 시작하길 바라죠. 내일 오전에 구본석 과장이랑 통화하고 결정하는 대로 연락하겠습니다.”
“대략 일주일 정도로 계획해서 인테리어 컨셉을 잡아보도록 할게요. 이전 레트로 분위기를 그대로 살리는 게 좋겠죠?”
“네, 아무래도 지나가다 누가 봐도 [서풍 TWO]라는 걸 알 수 있으면 합니다.”
잠시 하던 말을 멈추고 김서원을 바라보던 서인우가 물었다.
“우리와 함께 일하는 거 정말 괜찮기는 한 겁니까? 아버지나 김원상 씨가 알게 돼도 상관없는지 걱정돼서요.”
“[바램 인테리어]는 독립적인 내 사업체입니다. 그런 걱정은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리고...”
김서원이 갑자기 눈시울을 붉혔다.
“제가 함께 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될 거라고 정말 생각 못 했어요.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열심히 해볼게요. 진짜 진짜 최선을 다할 거예요.”
항상 꼬리표처럼 따라다니는 김형식이나 [만가복]이라는 이름 때문에 이 좋은 사람들과의 인연도 끝이라고 생각하고 있던 김서원은 지금 이런 상황이 꿈만 같았다.
계속 놔두면 혈서라도 쓸 기세로 흥분해 강한 다짐을 보이는 김서원의 진심이 느껴졌다.
“곧 저녁 시간인데, 내가 저녁 쏠게요. 어때요?”
김서원이 기분 좋은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나는 뭐 좀 사서 병실로 돌아갈 생각입니다. 셋이 편하게 먹고 와요.”
“사장님, 저도 같이 갈래요. 유진이랑 같이 먹고 싶어요.”
정다운이 자연스럽게 서인우 옆으로 자리를 옮기자 이준형이 웃음 나오는 걸 참느라 입을 실룩거리고 있었다.
“이준형 씨는 어때요? 그럼 같이...”
“저야 당연히 좋습니다. 뭐 먹을까요?”
“잘됐네요. 병실도 크고 좋은데, 맛있는 거 많이 사서 같이 먹어요.”
“네?”
아무래도 사소한 오해가 생긴듯하다.
김서원은 이준형의 반응에 눈을 깜빡이고 있고, 이준형은 김서원의 말을 이해 못 해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었다.
이래서 다들 나이 먹을수록 자기가 듣고 싶은 대로 듣는 게 문제라니까.
김서원이 말하는 같이는 여기 모인 사람 다같이라는 뜻이었나 보다.
순식간에 김이 팍 새어버린 이준형이 괜히 바닥만 발로 툭툭 치고 있었다.
이것저것 유진이가 좋아할 만한 거로 잔뜩 사서 다시 병실을 찾았을 때는 유진이 아빠 품에 폭 안겨 잠들어 있었다.
잠든 아이의 사랑스러운 모습을 두 부부가 손을 꼭 잡고 지켜보고 있었다.
분명 잠들어 있었는데….
“음...피자냄새.”
귀신같이 냄새를 맡고 안유진이 고개를 치켜들었다.
그 모습에 병실에 있던 모든 사람, 정확히 서인우와 한솥밥을 먹게 된 식구들이 모두 크게 웃었다.
안쪽으로 놓여 있는 기다란 식탁 위에 피자와 김밥, 샌드위치 등을 거나하게 차려놓고 다 같이 웃으며 저녁을 먹었다.
물론 거동이 불편한 안상훈과 그의 아내 박은선은 침대에 딸린 간이 테이블을 이용해 서로 거리는 조금 있었지만, 분명 한 공간에서 정을 나누며 맛있는 식사를 함께했다.
안상훈네 가족만 남겨 놓고 집으로 돌아온 서인우는 불 꺼진 방에 우두커니 서서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비록 다리를 다쳐 놀라고 걱정되긴 했지만, 서로 챙겨주며 사랑하는 눈빛을 주고받는 그들이 부러웠다.
그래서였을까?
오늘따라 엄마의 목소리가 너무 듣고 싶었다.
신호가 세 번쯤 울렸을 때 엄마의 그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엄마.”
-어, 인우야. 요즘 아주 바쁘지?
“자주 연락도 못 하고 죄송해요. 건강은 좀 어때?”
-엄마야 항상 똑같지. 여긴 별일 없다.
이상했다.
엄마의 목소리가 전보다 1도쯤 올라간 느낌이었다.
기분 탓일까?
아니면, 그렇게 믿고 싶었던 걸까?
“엄마!”
-왜? 엄마가 서울 한 번 갈까?
“내가 내일 내려갈게요. 아무래도 엄마 얼굴 한 번 보고 와야 더 기운이 날 것 같아서. 그리고, 좋은 소식도 전해줄게요.”
-그래. 와서 밥이라도 먹고 가라.
“네. 내일 봐요. 엄마.”
액정은 이미 깜깜해졌는데, 핸드폰을 내려놓지 못하고 있었다.
항상 소녀처럼 깔깔거리며 웃던 엄마가 웃음을 잃고 무뚝뚝하게 변한 지 벌써 몇 년째였다.
세상에 남편과 아들밖에 모르고 살던 엄마가 하나밖에 없는 아들을 봐도 그 눈은 아무것도 담기지 않고 텅 비어있었다.
자기도 모르게 길게 한숨을 늘어트리고 어두운 방에 불을 켰다.
-답답한데, 가방에서 좀 빼주지.
들어와서 문 앞에 내려놓은 가방 속에서 중식도의 소리가 들렸다.
문득 중식도와 처음 만나게 된 그 날이 떠올라 피식 웃음이 나왔다.
그때도 무지 더운 여름 이었는데...
벌써 일 년이 되어가고 있었다.
가방에서 나온 중식도가 서인우 눈앞에서 빙글빙글 돌았다.
-갑자기 엄마 보고 싶냐?
“응, 지금 엄마도 좋지만, 항상 내 눈만 바라보고 내 말에 귀 기울여주던 그때의 엄마가 너무 보고 싶네.”
-내 친구 서동수도 항상 네 걱정뿐이었는데….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놈인가 보다.
“맞아, 나는 정말 많은 사랑을 받고 자랐는데...그때는 그걸 전혀 알지 못했어. 왜 그렇게 어리석었을까?”
중식도가 갑자기 소리를 낮게 깔았다.
-이런…. 어리석은 중생이여. 하지만, 나 같은 대단한 존재를 만났으니 인생 로또 맞은 거지.
“로또? 우리 이모도 항상 이모부한테 그랬어. 당신은 로또라고.”
-그래? 이모부가 그렇게 능력이 쩔어?
서인우가 한참을 소리 내 웃었다.
-왜? 이모부가 엄청 부자냐?
“징그럽게 안 맞는다고. 로또처럼.”
-뭐? 아! 키키키.
“사부, 웃음소리가 그게 뭐야?”
-재미있어서. 나도 어디 써먹어야 하는데...이건 남들 앞에 나설 수도 없고. 아쉽구만.
“빨리 자고 일어나서 엄마랑 로또 부부랑 보고 와야겠다. 사부도 오늘 수고 많았어. 내 로또! 푹 쉬어.”
갈아입을 옷을 챙겨 욕실에 막 들어가려 할 때였다.
-인우야!
중식도의 낮은 소리가 귓가에 맴돌았다.
-있잖아...네 아빠 서동수한테는 내가 로또가 아니었어. 오히려, 내 인생에 네 아빠가 로또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