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6화.
갑자기 들리는 제시카라는 이름에 이준형의 자동 반사 신경이 순식간에 작동했다.
잽싸게 달려와 서인우의 핸드폰 가까이 귀를 갖다 댔다.
“오늘 저녁 아무 때나 좀 만날 수 있을까요?”
-네. 지금 당장도 가능합니다.
“그럼 다 같이 상의해야 할 일이라 저희 있는 곳으로 오시겠어요?”
-그럴게요. 어디로 가면 될까요?
서인우가 잠시 망설이듯 입술을 꾹 붙였다가 대답했다.
“여기 한국 병원입니다. 도착하면 전화 주세요.”
-네? 누가 다쳤어요?
“그것도 만나서 얘기하도록 합시다. 그럼 연락 기다리겠습니다.”
종료 버튼을 누르는 걸 확인하자마자 이준형이 바짝 달라붙어 물었다.
“제시카 씨랑 정말 같이 일하려고?”
“더워 인마. 좀 떨어져.”
“에어컨 빵빵하게 나오는데 뭐가 더워? 그래서, 어떻게 할 생각인데?”
두 여자가 꽐라된 날 정이라도 들었는지 정다운이 딴지를 걸지는 않았다.
“둘 생각은? 누구라도 반대하면 다른 사람 알아보고.”
안상훈이 무슨 얘기인지 궁금한 듯 보였지만, 티 내지 않고 묵묵히 대화를 듣고만 있었다.
제시카를 만나게 된 일부터 그녀의 이름이 김서원이라는 것까지 얘기할 때는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김서원이 [만가복] 김형식의 딸이라는 사실을 내뱉는 순간 안상훈의 표정이 심각하게 변해 버렸다.
한참 말없이 병실 바닥만 내려다보고 있던 안상훈이 서서히 고개를 들었다.
“모두 그 여자를 믿습니까?”
“네, 김서원이 아니라 제시카로 살고 싶어 했습니다. 우리와는 이제 영원히 제시카로 지낼 겁니다.”
“알겠습니다.”
안상훈은 더 이상 어떤 질문도 하지 않았다.
서인우를 믿어주는 그 마음이 그저 고마울 뿐이었다.
“이제는 집에 연락해야 하지 않을까요?”
정다운이 시간을 확인하며 물었다.
“전화해서 바꿔주세요. 최대한 놀라시지 않게 잘 말씀드리겠습니다.”
안상훈이 잠시 망설이다 핸드폰 키패드의 0번을 눌렀다.
“여보, 난데...”
-심사 결과 나왔어요? 당연히 우승 했겠지?
“응, 우리 [서풍]이 MS 백화점에 입점하게 됐어.”
-정말? 와! 자기 정말 애썼어. 축하해요. 유진아, 아빠...응...일등했대.
일등?
하긴 이제 여섯 살짜리 아이한테 심사니, 경쟁이니 이런 설명을 할 수는 없었을 거였다.
저렇게 좋아하는데….
안상훈이 자신의 팔과 다리를 심란한 눈으로 쳐다봤다.
“전화 바꿔주세요.”
서인우가 눈치껏 손을 내밀자 안상훈이 통화를 이어갔다.
“그런데, 여보. 좀 일이 생겼는데…. 잠깐만.”
핸드폰을 건네받은 서인우가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안녕하십니까? 서인우입니다.”
-아, 네. 안녕하세요. 오늘 심사 우승 진심으로 축하드려요.
“이게 다 안상훈 셰프님 덕분입니다.”
-그렇게 말씀해주셔서 너무 감사합니다. 오늘 이이랑 맥주라도 한잔해야겠네요.
당분간 맥주는 안될 것 같은데...
서인우가 잠시 난처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저... 말씀드릴 게 있습니다. 우선 놀라시지 마시고 제 얘기 들어주세요.”
-네? 왜요? 우리 남편 짤려요?
“네? 그럴 리가요? 안셰프님이 저와 함께해주신다는 결정해주셔서 정말 얼마나 감사한지 모릅니다. 오늘도 이 심사를 위해 너무 많이 애써 주셨어요.”
-그럼. 무슨 얘기인데 놀라지 말라고...
짧게 숨을 들이마신 서인우가 말을 이어갔다.
“오늘 심사를 위해 백화점으로 오는 길에 작은 사고가 있었습니다.”
-네? 사고요? 상훈씨가 다쳤나요? 많이 다쳤어요? 어떡해...지금 상태는...아니, 어느 병원이에요?
아무리 놀라지 말아달라 부탁했지만, 사고라는 단어에 평정심을 잃은 듯 보였다.
“발목을 다쳐서 지금 치료 중입니다. 의사 말로는 수술은 안 해도 될 것 같다고 했으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아, 알겠어요. 어느 병원인지 알려주세요. 당장 가서 봐야겠어요.
“바로 문자 보내겠습니다. 그리고, 안 셰프님 다시 바꿔 드리겠습니다.”
-네.
“저...안셰프님 덕분에 오늘 대결 우승할 수 있었습니다. 그 말씀 꼭 드리고 싶었습니다. 그럼...”
전화를 돌려받은 안상훈이 일부러 웃어가며 아내 박은선을 달래고 있었다.
중간중간 유진이가 전화를 바꿨는지, 아픈 것도 잊어버린 듯 환한 미소를 지었다.
딸 유진이와 박은선이 붕대로 칭칭 감은 팔과 발부터 무릎 아래까지 감아놓은 반깁스를 보면 어떤 반응을 보일지 벌써 걱정이 앞섰다.
자연스럽게 안상훈의 병실이 회의장으로 변해 버렸다.
테이블 위에 노트북을 펼친 이준형과 나란히 앉은 정다운.침대 옆에 서 있는 서인우, 그리고 침대에 비스듬히 기대고 앉아있는 안상훈.
[서풍 TWO] 의 주역들이 머리를 맞대고 앞으로의 일정을 의논하고 있는 모습이 그 어느 때보다 생기있고 희망차 보였다.
서로 의지하고 서로에게 감사하며 내일을 꿈꾸고 있었다.
* * *
가게로 돌아온 김원상과 차은석은 서로 약속이라도 한 듯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궁금하고 반가워 뛰어온 오승연 매니저가 눈치 빠르게 모여드는 다른 직원들을 해산시켰다.
가져간 짐들을 들고 주방으로 들어가는 차은석을 오승연 매니저와 김지호 보조셰프가 눈치를 보며 졸졸 따라다녔다.
“눈치 보지 말고 말해요. 결과가 궁금해서 따라다니는 거죠?”
“네, 두 분 분위기 보니까 탈락인 것 같은데...어떻게 된 건지 궁금해서요.”
차은석이 허탈한 듯한 웃음을 웃어 보였다.
“말씀하신 대로 탈락 맞습니다. MS 백화점은 이제 잊어버리고 여기에서 열심히 합시다.”
“그럼 [서풍 TWO]가 들어가는 건가요?”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인 차은석이 벽에 걸린 시계를 쳐다보며 물었다.
“저녁 예약이 몇 시부터 있습니까?”
오승연 매니저가 손에 들고 있던 테블릿을 보고는 대답했다.
“여섯 시에 첫 예약이니 좀 쉬셔도 될 것 같아요.”
대답이 나오자마자 냉장고에서 재료를 찾아 든 차은석이 중식도를 꺼내 들었다.
“뭐 하시려고요?”
김지호가 의아한 표정으로 각종 채소를 씻고 있는 차은석을 쳐다봤다.
“오늘 서인우가 만든 요리를 해보려고.”
벽에 붙어있는 타이머를 누른 후 당근과 양파등 채소를 다지기 시작했다.
갑자기 생각난 듯 찹쌀을 가져와 물에 불려 놓았다.
“무슨 밥 요리인가 보네요?”
“치즈 치킨밥이라고 하던데...우리는 만들기만 했지, 서로 상대방 요리를 맛볼 수는 없으니까 궁금해서 말이야.”
“그렇게 말씀하시니까 저도 궁금하기는 하네요. 제가 뭘 도우면 되겠습니까?”
“청경채 표고버섯볶음을 만들어 줘. 그걸 사이드로 내세웠더군.”
“네.”
짧게 대답한 김지호가 냉장고 안에서 싱싱한 청경채와 표고버섯을 꺼냈다.
이정복 대가의 수제자답게 곁눈질로 본 서인우의 요리를 제법 비슷하게 만들어 냈다.
마지막으로 잘 쪄진 치킨 밥에 치즈를 골고루 뿌린 차은석이 그걸 오븐에 넣는 과정을 지켜보던 김지호가 놀란 듯 눈을 크게 뜨고 물었다.
“지금 이 요리가 중식이 맞긴 합니까? 무슨 피자 같기도 하고, 빵 같기도 한데요?”
“맞아. 그래서 지금 만들어 보는 거야. 그 맛이 상상이 되질 않아서.”
주방에서 나는 요란한 소리를 들어서인지 김원상이 여전히 어두운 얼굴을 한 채 들어왔다.
“곧 저녁 장사 준비해야 하는데, 좀 쉬지 뭐 하고 있는 겁니까?”
고소한 냄새에 끌려 오븐을 쳐다본 김원상의 놀란 눈이 차은석을 응시했다.
“저 요리는...”
“네, 오늘 우리를 꺾고 승리한 서인우의 요리가 너무 궁금해서요. 곧 완성이니까 잠시만 기다리세요.”
큰 접시에 완성된 치즈 치킨밥을 놓고, 김지호가 만든 청경채 표고 볶음을 옆에 얹었다.
그리고는 안상훈처럼 화려한 연꽃을 만들지는 못했지만, 접시 한 쪽에 칠리소스를 살짝 올렸다.
“이게 [서풍]의 요리 였습니까?”
“맛을 보지 못해서 정확히는 모르지만, 대략 이런 모습이었어. 다들 먹어보고 다시 얘기 합시다.”
“이거 정말 예쁘네요, 맛도 너무 궁금하고요. 이 요리를 보고 안에 밥이 있을거라고 생각한 사람은 전혀 없을 것 같아요.”
오승연이 화려한 모습에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작은 접시에 담아 치즈 치킨밥을 맛보기 시작한 김원상의 복잡한 시선이 차은석과 맞닿았다.
놀라움과 부러움, 당황스러움과 시샘...
말 그대로 복잡한 감정이 고스란히 담긴 눈빛이었다.
“이거 너무 맛있는데요? 사이드로 나온 음식을 올려 먹으면 바로 중식밥이 되고, 칠리소스를 찍어 먹으면 양식과 중식의 중간 어디쯤 되는 것 같아요.”
오승연이 너무 솔직했나 싶은 늦은 후회를 하는 듯 말을 끝내자마자 입술을 쏙 집어넣었다.
“맛있기는 한데, 이렇게 하나만 만들기는 괜찮지만, 만약 여러 개를 동시에 만들어야 한다면 시간이 너무 걸리는 메뉴입니다. 그저 화려하게 오늘 심사만을 위한...”
눈치를 보며 애써 위로하는 김지호의 말을 김원상이 뚝 잘라 버렸다.
“아니, 우리랑 같이 주어진 시간에 이걸 똑같이 네 세트나 만들어 보이더군. 게다가 칠리소스로 화려한 연꽃까지 그려 냈단 말이야.”
“네? 그건 정말 쉽지 않은데...”
“결국 우리는 아이디어에서도 기술에서도 다 밀린 겁니다. 이걸 맛보고 나니 정말 할 말이 없군.”
김원상이 두 손으로 마른세수를 하며 벌게진 얼굴로 말을 이었다.
“나는.. 서인우가 이 메뉴를 위해 얼마나 연구하고 노력했는지 알 것 같아서 더 화가 납니다.”
“차 셰프 말은 내가 좀 더 메뉴를 고민하고 연구해야 했다는 말로 들리는데?”
차은석이 기분 나쁜 티를 숨기지 않았다.
“처음부터 메뉴를 같이 의논해서 만들었으면, 오늘 결과가 달라지지 않았을까요?”
“그럼 차셰프가 다른 메뉴를 제안했으면 됐을 거 아닙니까?”
분위기가 점점 살벌해지자 맛있게 먹고 있던 손을 내려놓고는 오승연과 김지호가 자리를 떴다.
“점장님!”
차은석의 목소리가 낮게 깔렸다.
“1차 심사 때 우리는 이미 진 겁니다. 모르겠습니까? 회장님의 그 욕심이 점장님과 우리 모두의 노력을 수포로 만든 거라고요.”
김원상의 얼굴이 까맣게 변해 있었다.
이미 알고 있는 일이었지만, 애써 외면하고 있던 일을 듣고 있는 지금 자신의 존재가 너무 하찮게 느껴져 미치게 화가 났다.
“나도 이런 내 처지가 너무 싫습니다. 내 능력으로 보란 듯이 보여주고 싶었다고요. 이렇게 처참하게 또 밟혀버렸지만….”
김원상의 생기가 사라진 듯한 눈이 허공에 둥둥 떠다녔다.
그런 그의 눈을 말없이 바라본 차은석이 더는 어떤 말도 덧붙이지 못했다.
* * *
5시가 조금 넘어 병실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모습을 나타낸 사람은 다름 아닌 제시카, 김서원이었다.
“제시카 씨. 잘 찾아오셨네요?”
“안녕하세요? 아니, 병원에서 만나 안녕하냐고 묻는 건 아닌 것 같고...왜 다들 여기에 계신 거예요?”
“우선 소개할 사람이 있습니다. 여기 계신 분은 예전 [서풍] 서동수 셰프님의 수제자셨던 안상훈 셰프님입니다.”
“안 셰프님. 이분이 좀 전에 말씀드린 우리 인테리어를 맡아 해줄 제시카 씨입니다.”
안상훈의 낯빛이 그다지 좋지 않았다.
서인우의 말대로 믿어보려 노력해야겠지만, 김형식이라는 이름이 자꾸만 따라붙는 것 같아 영 기분이 내키지 않았다.
“제가 지금 몰골이 이래서 인사는 다음에 정식으로 하도록 합시다.”
김서원이 가져온 시원한 아이스 커피를 내밀었다.
“네. 어쩌다가 이렇게 다치셨는지 여쭤봐도 될까요?”
서인우와 이준형이 당황해 서로 시선을 교환했다.
“그것보다 지금 우리 [서풍 TWO]의 상황을 말씀드리려고 뵙자 했습니다.”
갑자기 갈증이 느껴졌는지 아이스 커피를 크게 쭉 들이켠 김서원이 들을 준비가 됐다는 듯 눈을 크게 뜨고 입을 꾹 닫고 있었다.
“제시카 씨. 우리...”
“언니, 우리 MS 백화점에 들어갈 수 있게 됐어요.”
이준형이 목소리를 멋지게 다듬어 막 얘기를 시작하려 할 때 정다운이 먼저 오늘의 기쁜 소식을 알렸다.
뭔지 모를 서운함에 정다운을 노려보고 있던 이준형의 눈이 갑자기 반달이 되어 웃고 있었다.
기쁜 소식을 듣고 엉겁결에 김서원이 정다운과 이준형의 손을 잡고 방방 뛰고 있었다.
분명 동료애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듯한 스킨십이었건만...
이준형의 눈에 하트가 그려졌다.
그때 병실 문이 열리며 서늘한 기운이 아랫동네에 퍼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