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 중식당엔 무언가 특별한 게 있다-105화 (105/200)

제105화.

아무도 먼저 입을 열지 않았다.

마치 폭풍전야처럼 고요함 속에서 서인우의 눈빛이 강렬한 빛을 내뿜고 있었다.

김원상을 바라보는 서인우의 눈빛과 그런 그를 바라보는 최만수의 눈빛이 서로 얽혀 복잡하게 변했다.

“서인우, 우선 병원에 가서 자세한 얘기를 들어보도록 하지. 지금 중요한 건 안 셰프 아닌가?”

“그럼요, 안 셰프님 안위가 가장 중요합니다. 저는...”

서인우가 김원상을 정면으로 응시했다.

“저는 요리하는 내내 부러진 발목이 퍼렇게 변해가는 안 셰프님을 보며 아무것도 해줄 수가 없었습니다. 이제는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할 것입니다. 그게 뭐든 말이죠.”

끝까지 김원상을 향한 시선을 거두지 않으며 의미심장한 말을 던지고 있는 서인우를 최만수가 다독이며 그곳을 빠져나왔다.

“한국 병원이지?”

“네.”

“장비서. 지금 바로 움직입시다.”

“네, 회장님. 서인우 씨 차 가지고 오셨습니까?”

“준형이가 가지고 왔을 겁니다. 차 키가...”

최만수가 서인우의 어깨를 살짝 잡아 가까이 끌어당겼다.

“다 같이 움직이지. 할 얘기도 있고.”

“네. 감사합니다.”

정다운이 어쩔 줄 몰라 잠시 망설이자 서인우가 물었다.

“지금 걱정돼 죽겠다는 얼굴로 집에 돌아가면 아무것도 못 할 거잖아? 안 그래?”

“네, 솔직히 좀 전에 안 셰프님 보고 너무 놀라서 지금도 가슴이 진정이 안 돼요. 오늘 2차 심사 결과도 너무 궁금해하실 텐데...”

“그런데 뭘 망설여? 같이 가서 얼굴 봐야 안심하지.”

“됐죠? 그럼 빨리 가봅시다.”

장비서가 주차장으로 안내했다.

장비서가 운전대를 잡고 그 옆에 정다운이, 뒤쪽에는 서인우와 최만수가 나란히 앉았다.

미끄러지듯 부드럽게 차가 출발하자 최만수가 서인우를 향해 몸을 살짝 비틀었다.

“좀 전에 이준형 사장이랑 통화한 내용 자세히 말해보게.”

“저도 자세한 내용은 가서 들어봐야 알 것 같습니다. 안 셰프님이 집에서 나와서 지하철역으로 향하는데 마치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오토바이 한 대가 그대로 다가왔다고 합니다.”

“오토바이가?”

“네. 오토바이 운전자의 과실로 일어날 수 있는 일인데, 왜 누군가 일부러 한 짓 같다고 말했는지...”

최만수가 꾹 다문 입을 앞으로 뾰족이 내밀고 생각에 잠긴 듯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곧 도착하니 얘기를 들어보면 알겠지.”

“네, 준형이가 그렇게 말할 때는 분명 뭔가 확실한 근거가 있을 거라는 생각입니다.”

그 말에 최만수의 표정이 더 심각하게 변했다.

“1차 심사 때처럼 [만가복] 쪽을 의심하는 건가?”

“확실하지는 않습니다. 매번 몰랐다고는 하지만, 오늘은 김원상이 김형식의 아들이라는 사실이 그저 원망스러웠습니다.”

차 안에 다시 적막이 흘렀다.

아직 아무것도 확인된 것은 없지만, 다들 똑같은 생각을 하는듯했다.

병원에 도착하자 머리가 희끗희끗한 병원장과 여러 과장급 의사들이 줄지어 서 있었다.

“회장님, 오셨습니까?”

갑작스러운 인사에 최만수가 당황한 듯 보였다.

“내 얼굴 아는 사람 거의 없는데, 이렇게 대놓고 광고하는 거 싫다고 했을 텐데요?”

“최민기 사장님 통해 연락받았습니다. 여기서 인사만 살짝 하고 불편하시지 않게 처리하겠습니다.”

서인우와 정다운 또한 당황해 옆으로 비켜섰다.

잠시 잊고 있었던 최만수라는 사람의 위치가 다시금 각인되는 순간이었다.

바로 안내되어 도착한 VIP 병실 입구에 안상훈이라는 이름이 적혀있었다.

“어떡해…. 안 셰프님 입원까지 할 정도로 심각하신가 봐요.”

정다운의 얼굴이 금세 눈물이라도 쏟을 듯이 변해 있었다.

노크를 하고 문을 열자 이준형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어리둥절한 눈으로 최만수와 서인우를 번갈아 쳐다보고만 있었다.

다리에 깁스하고 링거를 꽂고 있던 안상훈이 일어나려 몸을 버둥거리고 있었다.

“그대로 있어요.”

“그냥 깁스하고 집에 가면 되는데, 최민기 사장님께서 이렇게 비싼 병실에 입원까지...”

“우리 백화점 심사에 오다가 사고가 난 거니까 당연히 우리 측에서 치료를 해줘야지.”

서인우가 안상훈의 몸 여기저기를 꼼꼼하게 살피는 것 같았다.

팔에도 넓게 붕대를 감고 있어서 그냥 보기에는 중증 환자처럼 느껴졌다.

“발만 좀 다쳤지, 다른 곳은...”

똑, 똑.

노크 소리와 함께 조금 전 인사했던 병원장과 젊은 의사 한 명이 조용히 병실로 들어왔다.

“회장님, 여기 김 과장이 안상훈 환자 상태를 설명해 드릴 겁니다.”

“고마워요.”

“안상훈 씨가 병원에 도착했을 때 이미 발목이 많이 부어 있었습니다. 50cc짜리 주사기로 피를 세 통이나 뽑았습니다.”

마치 약속이나 한 듯이 최만수와 서인우, 정다운이 동시에 얼굴을 찡그렸다.

“우선 엑스레이와 씨티를 찍었는데, 발목 골절 단면이 비교적 깨끗한 편이라서 비수술적 치료를 고려하고 있습니다.”

“그럼 다른 이상은 없는 건가요?”

“인대 파열이 의심되는 상황이라 MRI 촬영을 이어 했습니다. 우선 지금처럼 반깁스 상태로 있다가 결과 나오는 대로 통깁스만 할지, 인대 재건술을 해야 할지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최만수가 고개 숙여 인사를 하자, 병원장과 김 과장 모두 더 허리를 숙여 인사한 후 병실을 나섰다.

침대에 기대앉은 안상훈 곁으로 다가간 서인우가 붕대로 칭칭 감아놓은 팔을 멍하니 쳐다보고 있었다.

“어떻게 이 몸으로 심사에 참여할 생각을 한 겁니까? 바로 병원으로 갔어야죠.”

“내가 넘어지면서도 손목을 몸 안으로 감쌌어요. 그래서, 요리를 할 수 있으니 얼마나 다행입니까?”

“다행이요? 지금 제 정신이에...요?”

버럭 소리를 지르던 정다운이 순간 최만수를 쳐다보고는 말끝을 흐렸다.

“어떻게 된 겁니까? 자세히 얘기 좀 해주세요.”

“집에서 5분 정도 걸어가면 지하철역이 나옵니다. 여유 있게 집에서 나와 지하철역으로 가고 있는데, 오토바이 한 대가 분명 멈춰 있었어요.”

“그 사람 얼굴은 못 봤습니까?”

“헬멧을 쓰고 있어서 얼굴은 못 봤어요. 그런데, 멀쩡히 서 있던 오토바이가 갑자기 빠른 속도로 다가와서 이렇게 죽는구나 했습니다.”

다들 침을 꼴깍 삼키며 이어지는 얘기를 들었다.

“그런데, 이 사람이 나를 정면으로 치지 않고 옆쪽으로 오길래 그대로 피하면서 이쪽으로 넘어졌어요. 아주 잠깐 정신을 잃었는데, 희미하게 기억이 남아있습니다.”

“무슨 기억이요?”

“그 오토바이 탄 남자가 내 상태를 슬쩍 확인하고는 바로 사라지는 것 같았어요. 그리고는 바로 사람들이 몰려와서….”

서인우의 시선이 이준형을 향했다.

“뭔가 할 말이 있어 보이는데?”

“멈춰 있던 오토바이가 갑자기 달려온 것도 이상하고, 일부러 팔만 부러트릴 작정인 것처럼 오른쪽으로 방향을 틀어서 치고 지나간 것도 이상해.”

“맞아요. 그리고, 실수로 쳤으면 서서 119를 불러야지. 상태만 살피고 바로 도망간 것도 이상하지 않아요?”

정다운이 말하며 눈에 힘을 주고 있었다.

서인우가 안상훈의 손을 살폈다.

“그럼 손목은 전혀 문제없는 겁니까?”

“네. 정말 일도 다치지 않았습니다.”

“보통 넘어지면 손목을 디디는데 그게 닿지 않게 하려니까 발목도 부러지고 팔도 이렇게 다 긁힌 거 아닙니까?”

속상해하는 서인우를 대신해 최만수가 물었다.

“그럼 그곳에서 심사장까지는 어떻게 오신 겁니까?”

“보시다시피 워낙 몰골이 흉측해서인지 택시도 잘 서지 않아서 계속 걷다가 간신히 좋은 기사님을 만나 백화점까지 택시로 이동했습니다. 저, 그런데...”

안상훈이 눈치를 보며 뭔가 물으려 할 때 이준형이 눈을 깜빡거리더니 손뼉을 치며 물었다.

“아, 맞다. 오늘 결과는 어떻게 됐어?”

같은 질문을 하려 했었는지 안상훈 또한 고개를 끄덕이며 침을 꼴깍꼴깍 삼키며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다 안 셰프님 덕분입니다. 이제 우리가 MS 백화점 중식당에 새로운 역사를 쓸 차례입니다.”

“와씨, 정말이야?”

놀란 듯 눈을 크게 뜨고 묻는 이준형의 질문에 최만수가 피식 웃으며 답했다.

“요리 천재 서인우와 이런 책임감을 가지고 있는 안셰프가 함께 했는데 누가 이걸 이기겠습니까? 이건 완전 답정너지.”

“네? 풉!”

“그런 말도 아세요?”

“나 무시하지 말게. 이래 봬도 요즘 신조어 좀 아는 늙은이라고. ”

옆에서 장비서만 무슨 뜻인지 모르는 눈치였다.

“회장님, 답정뭐요? 그런 단어가 새로 생겼습니까?”

“장비서도 내 손녀 현주한테 교육 좀 받아야 겠구만.”

병실에 한바탕 웃음소리가 퍼졌다.

그것도 잠시.

“그런데...우리 집에 아직 연락을 못 했습니다. 내 딸 유진이가 알면 또 잔소리가 쏟아질 텐데...”

최만수가 의아하다는 듯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렇게 큰 딸이 있습니까? 젊어 보이는데...”

서인우가 픽 웃었다.

“아주 똘똘하고 야무진 아가씨가 있습니다.”

“그렇군요. 가족들이 많이 놀라지 않게 자네가 잘 말씀 드려야겠군.”

“네, 오빠가 잘 얘기 해줘야죠.”

“오빠 동생 하는 사이구만?”

여기저기서 픽 픽 웃는 소리가 들리는 가운데, 안상훈만 심술 난 사람처럼 인상을 쓰기 시작했다.

“안셰프. 어디 아픈가요? 갑자기 얼굴색이 안 좋아졌어.”

“아, 아닙니다. 그러면... 언제부터 시작해야 하는 건가요?”

재빨리 화제를 바꾼 안상훈이 조심스레 물었다.

“[서풍] 스타일로 인테리어를 해야겠죠? 우리야 빠를수록 좋을 것이고. 구체적인 내용은 구 과장이 연락할 겁니다. 그쪽이 실무자라서.”

“그럼 앞으로는 회장님을 자주 뵐 수 있는 건가요?”

서인우가 묻자 시선을 장비서에게로 돌린 최만수가 잠시 고민하는 듯 말이 없었다.

“나는 아주 가끔 중요한 회의 때나 회사에 와요. 전에 말했던 서산에 있는 식당에서 요리해야지.”

장비서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내 요리가 거기서 인기가 많아. 내가 없으면 사람들이 실망하고 기다리고 해서...”

“회장님, 지금은 박 주방장이 잘하고 있다니까요. 이제 최민기 사장님이랑 손주분들 그만 걱정 끼치시고 서울로 올라오세요.”

장비서가 걱정스러운 눈으로 최만수를 바라봤다.

“정 걱정되면 자네도 같이 내려가 살자니까?”

“싫습니다. 작년에 태어난 손주 보는 재미에 이렇게 가끔 움직이는 것도 이제 안 하고 싶은 사람입니다.”

껄껄 웃어가며 티격태격하는 둘의 모습이 편안하고 좋아 보였다.

20대의 서인우에게 저렇게 늙어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 만큼.

“그나저나 [서풍] 사람들 모두 아주 바빠지겠군.”

“네, 이제 달려야죠. [서풍]을 기억해주고 기다려 준 사람들을 위해 더 맛있는 요리를 선보이도록 최선을 다할 겁니다.”

“기대하고 있겠네. 우린 이제 가볼 테니 잘들 계획 세워보고...안 셰프!”

“네?”

“내일 사람을 하나 보낼 테니 사고 경위 자세히 알려주시게.”

안상훈이 선뜻 답을 못하고 있자 장비서가 한마디 거들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안셰프님 사고는 우리 백화점에서 책임지고 처리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러니, 우선 아무 걱정 하지 마시고 치료에만 전념하도록 하세요.”

“그래도...이건 너무 과한데요.”

“[서풍]이지 않습니까? 게다가 내가 정말 아끼고 부러워하는 요리 천재 서인우와 함께 중식계에 엄청난 바람을 일으킬 분 아닌가요?”

서인우를 비롯해 안상훈도 이준형, 정다운도 모두 눈시울이 붉어졌다.

“감사합니다.”

서인우는 더 말을 내놓지는 않았다.

직접 보여주는 것으로 대신하고 싶었다.

최만수와 장비서가 병실을 나서는 것을 끝까지 지켜보고 다시 돌아온 서인우가 핸드폰으로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제시카 씨. [서풍]의 앞날에 인생을 걸고 싶다던 그 마음 변하지 않았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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