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4화.
최민기는 알 수 없는 아버지 최만수의 말에 두 접시에 놓인 음식을 한없이 노려보고만 있었다.
절대 시간 안에 만들어 낼 수 없는 요리라….
직원이 치즈 치킨밥을 작게 잘라 각각 앞접시에 올려 주었다.
또 다른 직원은 구운 오겹살을 앞접시에 올려 주고 뒤로 물러났다.
“보시다시피 메인 음식 옆에 곁들여 먹을 요리가 같이 준비되어 있습니다. 그냥도 맛보시고, 곁들여서도 맛봐 주세요. 그리고 냉정하게 평가해주시길 바랍니다.”
구본석이 빨리 맛보고 싶어 말하는 내내 군침을 삼키고 있었다.
“어머, 이 안에 밥이 들어있어요.”
“이 연꽃도 칠리소스입니다. 이 치즈밥을 떠서 이 소스에 찍어 먹으면 정말 끝내줍니다.”
“이거 분명 먹어본 맛이에요. 삼겹살 같은데 너무 고소하고 고기 냄새가 하나도 안 납니다. 정말이지 겉은 바삭하고 속은 육즙이 쫙 퍼지네요.”
“같이 나온 이 매콤한 채소볶음이랑 환상의 궁합입니다.”
심사단의 평이 결과를 예측하기 어려웠다.
누구 하나 최선을 다하지 않은 사람은 없었다.
메뉴 선정부터 지금의 이 레시피가 나올 때까지 며칠을 밤낮으로 연습하고 또 연습했다.
“평가 방법은 1차 심사 때 했던 방식과 같습니다. 시식을 마치신 분은 테이블에 있는 스티커를 더 맛있다고 생각하는 메뉴의 접시에 붙이시면 됩니다.”
“이거 너무 어려운데...그냥 기권하면 안 될까요?”
“이해합니다. 두 요리 모두 최고의 셰프님들이 만든 요리입니다. 오늘 심사에서 탈락하는 메뉴는 맛이 없어서가 아니라 그야말로 상대방 메뉴가 더 맛있기 때문입니다.”
“맞아요. 둘 다 너무 맛있어요.”
“그러니 조금이라도 더 맛있게 느껴지거나, 아이디어가 좋은 메뉴, 혹은 다음에 또 먹고 싶은 메뉴에 스티커를 붙여 주시면 됩니다.”
설명하는 내내 음식 접시가 비어가는 걸 보며 구본석이 식은땀을 흘리고 있었다.
저 신기하고 먹음직스러운 음식을 앞에 두고 맛도 보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이 믿기 어려웠다.
접시를 노려보는 구본석의 눈빛이 너무 티가 나서였을까?
최만수가 씩 웃으며 구본석을 가리켰다.
“이 메뉴들 지금 아니면 어디서도 맛보지 못할걸세. 이리 와서 맛을 한 번 보도록 해.”
구본석이 이렇게 빨리 움직일 수 있는 사람이라는 걸 미처 알지 못했다.
잠시 광풍이 일더니 그새 의자에 궁둥이를 붙이고 앉아 치즈 치킨밥을 입에 넣고 있었다.
눈을 감고 맛을 음미하는 그의 모습이 마치 세상 모든 시련을 다 해탈한 사람처럼 밝아 보였다.
아쉬운 듯 입맛을 다시고는 옆 접시에 놓인 구운 오겹살을 입에 넣었다.
첫입에 콰삭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바로 쫄깃한 식감이 그대로 전해질만큼 씹는 소리가 크게 들렸다.
구본석 또한 두 메뉴 중 하나를 고르기 어려워 보였다.
다시 중앙으로 나간 구본석이 여전히 아쉬운 듯한 입을 열었다.
“시식을 마치신 분들은 신중하게 스티커를 붙여 주시길 바랍니다. 정말 우열을 가리기 어려운 요리입니다.”
사람들이 하나둘 평가를 시작했다.
“그럼 이런 환상적인 요리를 만들어주신 셰프님들을 자리로 모시겠습니다.”
구본석의 말에 따라 요리를 마친 서인우와 안상훈, 김원상, 차은석이 나오자 박수 소리가 요란하게 들렸다.
손뼉을 치고 있던 최만수와 최민기가 동시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셰프님. 안에서 무슨 사고가 있었습니까?”
조금 전 안상훈이 들어오는 모습을 보지 못한 최민기가 놀라 소리를 지르며 가까이 다가갔다.
최만수 또한 심하게 놀랐는지 서인우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옆에 있던 다른 직원이 자초지종을 설명해 주자 최민기가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
“죄송합니다. 저는 나가 있겠습니다.”
시선이 집중되자 안상훈이 식은땀을 흘리기 시작했다.
“잠시만 기다려요.”
“그냥 저 혼자 병원에 가면...”
그때 안으로 급하게 들어오는 말끔한 정장을 빼입은 남자가 보였다.
“오비서. 여기 이분 모시고 주차장으로 가면 의무실 직원이 기다리고 있을 겁니다. 같이 병원에 가서 치료를 돕도록 하세요.”
이준형이 안상훈을 따라 밖으로 나가자 혼자남은 정다운이 서인우를 향해 힘내라는 응원의 눈빛을 보냈다.
“저런 상태로 끝까지 요리해주다니…. 정말 프로정신을 느낄 수 있는 귀한 시간입니다. 오늘 여기 계신 셰프님들 모두 최선을 다해주셨습니다. 그러니... 신중 또 신중하게 평가해주시길 바랍니다.”
구본석이 원래 저렇게 여린 남자였던가?
감정이 북받쳐 오르는지 몇 번을 쉬어가며 간신히 말을 끝낸 구본석이 한참을 뒤돌아 서 있었다.
요리하는 내내 안상훈이 걱정됐던 서인우도 이제야 안심하고 심사 결과를 기다릴 수 있었다.
심사단으로 앉아있는 사람들 모두 누가 만든 건지 전혀 알 수 없는 상태에서 오로지 맛과 아이디어, 식감 등을 고려해서 신중하게 스티커를 붙였다.
“자, 이제 시식을 마치고 결과를 확인해야 하는 순간이 왔습니다. 얼핏 보기에는 스티커가 비슷하게 붙어 있는데요. 그럼 지금 바로 확인하도록 하겠습니다.”
구본석이 손짓하자 직원 둘이 테이블로 다가와 그릇에 붙은 스티커의 개수를 세고 있었다.
“그럼 바로 발표하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오겹살구이를 선택한 사람은 몇 명입니까?”
조금 전 개수를 센 직원이 심사단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오겹살구이는 총 열 개의 스티커를 받았습니다.”
김원상과 차은석의 표정이 복잡하게 변했다.
총 스무 명의 심사단을 소개받았지만, 요리하는 도중 최만수와 최민기, 장비서가 합류했다.
그들이 심사에 참여해서 스티커를 붙였는지 현재로는 알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렇다면, 서인우의 요리에 몇 개의 스티커가 붙었는지에 따라 또 동점이던지, [만가복]의 패배였다.
김원상이 들리지는 않았지만, 작게 한숨을 내뱉었다.
“다음으로 치즈 밥을 선택한 사람은 몇 명인가요?”
“치즈 밥에는 총 열세 개의 스티커가 붙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2차 심사에서 우승한 요리는 바로 치즈 밥입니다. 치즈 밥을 만들어준 셰프님은 여기로 나와 주시기 바랍니다.”
서인우가 중앙으로 걸어가자 여기저기서 환호성이 들렸다.
“역시 [서풍]이었네.”
“그럼 좀 전에 다친 셰프가 같이 한 요리라는 거네요?”
구본석이 소란을 잠재우며 말을 이었다.
“여러분이 선택해준 스페셜 메뉴는 [서풍 TWO]의 서인우 셰프와 좀 전에 자리를 비운 안상훈 셰프의 작품이었습니다.”
우렁찬 박수 소리를 들으며 서인우가 허리 숙여 인사했다.
“서인우 셰프. 오늘 선보인 스페셜 메뉴에 관해 설명 부탁드립니다.”
“안녕하십니까? [서풍TWO]의 서인우입니다. 오늘 저와 안상훈 셰프가 같이 선보인 요리는 치즈 치킨밥입니다.”
“아, 고소한 고기가 치킨이었습니다. 어떻게 요리하신 건가요?”
“저희가 중식 밥 종류는 보통 볶음밥이나 덮밥을 생각합니다. 말 그대로 스페셜한 메뉴를 선보이고 싶어서 고민 끝에 찾아낸 메뉴입니다.”
심사단이 서인우가 요리하는 장면을 보지 못해 아쉬워하는 눈치였다.
“닭고기와 각종 채소를 잘게 다져 볶은 후 불린 찹쌀과 함께 쪄서 그 밥 위에 소스를 바르고 다시 치즈를 올려 오븐에 구운 요리입니다.”
“그럼 그 시간 안에 채소를 저렇게 잘게 다지고 찹쌀을 찌고, 거기다 오븐에 굽기까지 했다는 겁니까?”
심사단에 앉아있던 40대쯤으로 보이는 여자가 물었다.
“중식의 생명은 속도니까요. 같이 나온 청경채 버섯볶음과 연꽃은 안상훈 세프님 솜씨입니다.”
심사단에서 또 한 번 감탄하는 소리가 들렸다.
연신 웃고 있던 최만수의 얼굴에 더 큰 미소가 자리 잡았다.
“연꽃은 정말 찍어 먹기 아까울 정도로 너무 예뻤습니다. 마치 미술 작품 같았어요.”
또 다른 사람이 흥분한 듯 큰소리로 외쳤다.
“감사합니다.”
서인우가 살짝 뒤로 물러나자 구본석이 김원상 쪽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오늘 아쉽게 가장 많은 표를 얻지는 못했지만, 정말 훌륭한 요리를 선보여 준 [만가복] 팀의 김원상 셰프님 요리의 설명을 들어보도록 하겠습니다.”
뭔가 딴생각에 빠져 있던 김원상을 차은석이 툭 쳐주었다.
중앙으로 나간 김원상이 애써 밝은 표정을 지어 보였다.
“안녕하십니까? [만가복]의 김원상입니다. 오늘 저와 차은석 셰프가 선보인 요리 이름은 겉바속촉입니다.”
“아, 맞아요. 겉은 바삭바삭하고 속은 촉촉한 게 정말 맛있었습니다. 어떻게 만드신 건가요?”
“중국식 수육은 다들 동파육만 알고 있을 겁니다. 오늘 선보인 요리는 오겹살을 잡내 없이 삶아 겉면에 소금을 바른 후 오븐에 구워 겉을 바삭하게 만들면서 육즙을 꽉 잡은 요리입니다.”
여기저기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고기 잡내도 전혀 없고, 정말 재미있는 식감이었어요.”
“같이 곁들인 요리는 차은석 셰프가 만든 매콤한 사천식 청경채 볶음이었습니다. 자칫 고기에서 주는 느끼함을 잡아 주는 메뉴였습니다.”
사람들이 고개를 끄덕이며 김원상의 설명에 귀를 기울였다.
“여러분들의 신중한 판단을 겸허히 받아들이겠습니다. 아무래도 좀 더 화려한 메뉴에 더 눈이 가는 법이니까요.”
정다운의 눈이 흰자위를 뽐내며 김원상을 노려보고 있었다.
“사장님, 저 사람 뭐라는 거에요? 우리 메뉴가 화려해서 시선을 뺏겼다는 거 아니에요? 치사하게, 졌으면 깨끗이 인정하지.”
“[만가복]자존심에 바로 인정하기는 힘들겠지.”
분위기를 살피던 구본석이 정리에 들어갔다.
“그럼 오늘 2차 심사에서 [서풍 TWO]가 더 많은 표를 얻음으로써 여기 MS 백화점 중식당 입점을 결정하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심사단이 하나둘 자리를 뜨기 시작하자 최만수가 김원상과 서인우 앞으로 다가왔다.
“오늘 요리 아주 인상적이었습니다. 수고 많았어요.”
“감사합니다.”
“그런데, [서풍]의 그 셰프 이름이...?”
“안상훈 셰프입니다.”
“안 셰프는 어떻게 된 일입니까?”
김원상과 차은석도 궁금한지 자리를 뜨지 않고 듣고 있었다.
“저도 자세히는 모르겠습니다. 여기 오는 길에 사고가 있었다는데...우선 심사에 집중하자고 나중에 말씀해주신다고 했습니다.”
“크게 다친 건 아니어야 할 텐데...”
최만수가 말을 마치고 막 돌아서려 할 때였다.
서인우의 핸드폰 진동이 정신없이 울어댔다.
“여보세요. 준형아. 안 셰프님은 어때?”
-팔은 피를 많이 흘렸지만, 찰과상이라 며칠 치료하면 된다는데...
이준형이 잠시 말을 멈췄다가 다시 천천히 입을 열었다.
-다친 상태로 너무 무리해서 오른쪽 발목이 심하게 골절된 상태라서 지금 피 뽑고 깁스를 하고 있다.
“뭐? 깁스까지?”
-이미 병원에 도착했을 때 발목이 허벅지만큼 퍼렇게 부어있었어. 저 상태로 어떻게 그곳까지 간 건지..
다들 안상훈의 상태를 본 사람들이라 누구 하나 자리를 뜨지 않고 숨죽이고 듣고 있었다.
“알았어. 어느 병원인지 문자 보내줘. 내가 지금 바로 갈게.”
-그런데, 인우야.
“왜 그래? 또 무슨 문제라도 있어?”
서인우의 목소리가 살짝 떨려왔다.
그 소리를 들은 정다운의 얼굴 또한 하얗게 질려 있었다.
자리를 뜨려 몇 걸음 내디딘 최만수가 순간 걸음을 멈추고 서인우의 통화내용에 귀를 기울였다.
그의 눈빛이 1차 심사 때처럼 다시 매섭게 변해 있었다.
최민기와 장비서가 걱정스러운 눈으로 최만수와 서인우를 번갈아 보고 있던 그때 서인우의 입에서 뜻밖의 소리가 흘러나왔다.
“뭐? 누가 일부러 사고를 냈다는 말이야?”
쥐 죽은 듯 조용한 홀 안에 서인우의 목소리가 울렸다.
낮게 치뜬 눈이 서서히 김원상을 바라봤다.
순간 그 눈빛에 주위 사람들 모두 숨을 죽이고 있었다.
서인우의 눈이 완전히 뒤집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