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3화.
정다운이 다가와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사장님.”
“도착은 아까 한 것 같은데, 이제 내가 보이나 보네.”
“너무 기쁜 소식을 들어서요. 우리 오늘 2차 심사 잘해서 여기 입점하게 되면 정말 대박 아니에요?”
정다운이 구름 위를 걷듯이 가벼운 걸음을 통통거리며 물었다.
“이렇게 큰 백화점에서 우리 [서풍 TWO]를 새롭게 열어 장사할 생각 하면 잠이 안 와요. 그런데 거기다 새우면 판매까지 하게 된다니.”
“물론 나는 최선을 다하겠지만, 아직 [서풍 TWO] 입점은 어떻게 될지 모르는 일이고, 새우면도 판매 실적이 어떨지는 모르는 일이지.”
“대박.”
갑자기 이준형이 서인우에게 엄지척을 해 보였다.
“응? 뭐가?”
“초치는 수준이 대박이라고. 어쩌면 이렇게 신난 정다운 씨한테 찬물을 쓰나미 급으로 퍼붓냐?”
“어? 정다운 씨 내가 그랬어?”
“네. 사장님은 그냥 요리만 하세요. 영업은 여기 이준형 사장님이 타고 나신 것 같으니까요.”
이준형 사장님... 이라고 했다.
항상 서인우는 사장님인데 자기만 아저씨로 불러서 이제는 그냥 익숙해져 버린 호칭이었는데...
정다운이 처음으로 사장님이라고 부르자 이준형의 입이 귀에 걸리다 못해 조커가 되었다.
“다운 씨, 다시 한번 불러봐. 나 누구라고?”
“네?”
“방금 이준형 뭐라고 불렀어?”
“뭐래? 아저씨 정신없으니까 가만히 있어요. 오늘 2차 심사 정말 중요한 거 알죠?”
“인우야, 너 들었지? 방금 정다운 씨가 나를 뭐라고 불렀는지. 분명히 들었지? 맞지?”
이준형이 정신없이 떠드는 사이 김원상과 차은석이 모습을 나타냈다.
“뻔뻔스럽게 지난번 비리가 다 밝혀졌는데도 2차 심사에 나타나네요.”
정다운이 노골적으로 들으라는 듯이 큰 소리로 말했다.
그 소리가 들려서인지, 그냥 여러 가지로 불편해서인지 고개를 까딱해 보이고는 바로 식당 안으로 들어갔다.
“안셰프님이 늦으시네. 전화 한번 해볼게.”
이준형이 핸드폰으로 시간을 확인하고는 바로 안상훈의 이름을 찾아 통화버튼을 눌렀다.
“인우야, 신호는 가는데 전화를 못 받는다. 아마 뛰어오고 있나 본데?”
긴장해서 잠을 설쳤나 보다.
서인우 역시 온갖 걱정으로 잠을 설쳤으니까.
“그래, 우리 먼저 안으로 들어가자.”
식당 안으로 들어간 서인우 일행은 지난번보다 왠지 더 엄숙해진 분위기를 느끼고 모여있는 사람들을 살펴봤다.
심사단인 듯 보이는 사람 중 1차 심사에 참여했던 사람은 거의 없는듯했다.
“왠지 분위기가 회의하는 것 같다. 심사단이 다 바뀐 거지?”
“그런 것 같아. 익숙한 얼굴이 전혀 없네.”
이준형과 작은 소리로 대화를 나누고 있는데, 누군가와 얘기를 나누고 있던 구본석이 서인우 곁으로 다가왔다.
“안녕하십니까? 준비는 잘하셨죠?”
“물론입니다.”
“다른 셰프님이 안 보이는데요?”
“지금 오고 있을 겁니다.”
시간이 10분도 채 남지 않은 지금까지 도착 전인 안상훈을 찾는듯했다.
[만가복]팀으로 자리를 옮긴 구본석이 똑같이 인사를 나누고는 다시 중앙으로 나와 2차 심사에 대한 설명을 시작했다.
“잠시 후 11시부터 2차 심사를 하도록 하겠습니다. 아시겠지만, 1차 심사가 정확히 동점으로 나왔기 때문에 오늘 결과로 MS 백화점 중식당에 과연 어느 업체가 입점하게 될지 정해질 것입니다.”
어디선가 땅이 꺼질듯한 한숨 소리가 들렸다.
이준형이었다.
“아저씨, 청심환 안 먹었어요?”
“백화점 앞에서 다운씨 만나서 새우면 얘기하느라 약 사는 거 잊어버렸어. 아씨, 떨려 죽겠네.”
“참 극과극을 넘나드는 재주가 있네요. 어제는 그렇게 중요한 일을 해내고 오늘은 자기가 요리하는 것도 아닌데 이렇게 떨고 있으니.”
서인우의 얼굴색 또한 좋지 않았다.
“사장님, 사장님도 떨려요? 제가 지금이라도 나가서 청심환 사 올까요?”
“아니, 안 셰프님. 왜 오지 않으시지?”
“그러네요. 이제 10분도 안 남았는데...”
긴장해서 핸드폰을 만지는 동안 구본석의 설명이 이어졌다.
“지난번 1차 심사에 불미스러운 일이 있었다는 건 다들 아실 겁니다. 그래서 오늘 모신 20명의 심사단은 1시간 전에 통보를 받고 여기 모이게 된 분들입니다.”
정장을 잘 차려입은 나이가 제법 있는듯한 남자 몇 명과 백화점 유니폼을 입은 젊은 여자들 그리고 편한 복장을 한 사람들까지 한 데 섞여 있었다.
“우리 백화점 최민기 사장님께서 직접 선정하신 심사단이니까 오늘은 그 어떤 비리도 있을 수 없다고 확실하게 말씀드리겠습니다.”
한쪽에서 묵묵히 듣고 있던 김원상의 얼굴이 점점 어두워졌다.
양심상 입점을 포기하겠다는 김원상의 뜻이 김형식의 벼락과 같은 호통과 최만수의 설득으로 꺾여 이 자리에 오게 되었다.
차은석또한 불편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처음부터 MS 백화점 입점은 관심 밖이었던 차은석은 서인우가 요리하는 모습을 가까이서 지켜본 이후 대결에 대한 의욕이 꺾인 상태였다.
그런 그에게 사람을 매수해 승부 조작까지 하려 했던 사실은 요리사로서 자존심을 바닥까지 떨어트려 버렸다.
이틀 전 1차 심사에서 김형식이 한 짓을 알게 됐을 때 봤던 김원상의 눈빛.
처참하고 좌절에 빠진 그 눈빛을 봤기에 오늘 이 자리에 나올 수밖에 없었다.
지금 옆에 서 있는 김원상의 얼굴이 너무 불쌍해 보였다.
“우리 오늘은 정당하게 [서풍]을 이겨봅시다. 할 수 있죠?”
“그럼요. 지금까지 해온 게 있는데 얼마든지 덤벼보라고.”
김원상이 주먹을 내밀며 작게 파이팅을 외쳤다.
“이제 곧 2차 심사가 시작됩니다. [서풍TWO]와 [만가복]에서 준비한 스페셜 메뉴로 대결하게 될 겁니다. 그럼 주방 안으로 들어가 준비를 해주시길 바랍니다.”
불안해 보이는 서인우에게 다가온 이준형의 입술이 하얗게 말라 있었다.
“인우야. 안 셰프님 계속 전화 연결이 안 된다. 무슨 사고라도 생긴 건 아니겠지?”
“그건 아닐 거야. 아니, 아니어야 해. 우선은 들어가서 심사 준비 할테니까 너는 계속 연락해봐.”
“그래, 우선 혼자 준비하고 있어.”
부산한 움직임을 느낀 구본석이 그들 곁으로 다가왔다.
“보조 셰프님은 아직 오지 않으신 겁니까?”
“네. 아직...”
“그러면 서인우 씨 혼자 심사를 치러야 하는데요? 그건 너무 불리합니다. 누구 다른 분이 대신하실 수 없을까요?”
“아니요, 안 셰프님 꼭 오실 겁니다. 그리고, 누구도 대신 할 수 없습니다.”
서인우의 강인한 눈빛과 말투에 더는 다른 말을 보태지 못한 구본석이 조용히 자리를 피했다.
드디어 2차 심사가 시작되었다.
[서풍TWO]와 [만가복]에서 준비한 스페셜 메뉴에 거는 기대가 큰 듯 사람들의 눈망울이 초롱초롱 빛났다.
결국 시작 시각까지 모습을 나타내지 않는 안상훈이 걱정됐지만, 서인우는 혼자라도 이 심사를 잘 마쳐야 했다.
-정신 차리고 잘하자.
‘그래, 사부. 잘 부탁해.’
중식도가 닭 다리 살과 닭 날개, 표고버섯, 당근, 양파 등의 재료를 작게 잘라 준비했다.
웍에 기름을 두르고 표고버섯과 양파, 당근을 볶다가 같은 크기로 손질해놓은 닭고기를 넣고 굴 소스와 간장을 첨가해 볶았다.
미리 씻어놓은 연잎에 불린 찹쌀을 넣고 그 위에 볶은 재료를 올린 후 다시 찹쌀을 얇게 펴서 올렸다.
반대편에서는 김원상이 두툼한 오겹살을 각종 향신료를 넣어 삶고 있었다.
-저 인간 설마 또 동파육을 하지는 않겠지?
‘그건 이제 스페셜 메뉴가 아닌데?’
-분명 저걸 삶아서 뭔가 다른 걸 할 것 같은데...어떤 요리를 들고 나왔을지 궁금하긴 하군.
‘[만가복]의 최고 실력자 둘이 만났으니, 뭔가 특별한 요리가...’
서인우가 속으로 중식도와 대화를 나누고 있던 그 순간 중식도의 다급한 외침이 들렸다.
-인우야!
‘갑자기 왜 그래? 사부!’
-안 셰프 왔다. 놀라지 마라. 몰골이...
순간 주방에까지 들릴 정도로 밖이 소란스러워졌다.
무슨 일인지 미치도록 궁금하고 걱정됐지만, 지금은 이 스페셜 메뉴에 집중해야만 했다.
잠시 후.
팔꿈치와 다리에서 피를 철철 흘리며 안상훈이 주방으로 들어왔다.
“안셰프님. 이게 어떻게 된 일입니까?”
“사고가 있었습니다. 설명은 나중에 하도록 하고...빨리 심사에 집중합시다.”
놀라서 뛰어 들어온 구본석이 안상훈의 상태를 살폈다.
“병원부터 갑시다. 지금 이 상태로 요리하는 건 무리입니다.”
“아니요, 할 수 있습니다. 다행히 손은 멀쩡합니다. 제가 마무리 할 수 있게 부탁드립니다.”
구본석이 어쩔 줄 몰라 하며 서인우를 바라봤다.
서인우가 고개를 끄덕이자 안상훈의 상처를 슬쩍 한 번 더 쳐다본 후 한마디 더 했다.
“그럼 요리만 완성하고 바로 병원에 가는 겁니다. 그건 약속해 주셔야 이 심사 진행할 겁니다.”
“요리 완성하는 즉시 병원에 가겠습니다. 기회를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잠시 안상훈과 눈을 마주친 서인우는 그의 손을 꾹 잡았다가 놓고는 바로 요리를 이어갔다.
연잎으로 꼼꼼하게 싼 재료를 찜기에 올려 찹쌀이 다 익을 때까지 기다렸다.
기다리는 내내 안상훈의 상처가 신경 쓰였지만, 그런 그의 시선이 무색할 정도로 안상훈은 평상시처럼 손질한 청경채와 표고버섯을 먹음직스럽게 볶고 있었다.
서인우 역시 잘 쪄진 치킨 찹쌀밥에 샐러드 소스를 얇게 펴 바른 후 모짜렐라 치즈와 체다 치즈를 섞어 골고루 덮어주었다.
“안 셰프님. 이제 오븐에 굽기만 하면 완성입니다.”
예열된 오븐에 치즈 치킨 밥을 넣고 치즈가 녹아 흘러내리는 걸 지켜보고 있었다.
한편, 김원상도 만들어 놓은 오겹살 수육에 앞뒤로 소금을 묻혀 껍데기 부분이 위로 올라가게 해 오븐에 구웠다.
그 옆에서 차은석이 청경채와 표고버섯, 죽순, 홍고추 등을 끓는 물에 재빨리 데쳤다.
그리고는 웍에 기름을 두르고 다진 마늘을 볶다가 데친 채소들을 넣어 간장, 두반장, 굴 소스 등을 가미해 센 불에 볶았다.
매운맛을 더하기 위해 고추기름도 약간 추가했다.
한편에서는 고소한 치즈 향이 퍼져 가고 있었고, 다른 편에서는 매콤한 두반장 소스 향과 표고버섯 향이 어우러졌다.
맛있는 냄새가 온 주방에 퍼졌다.
거의 요리가 완성되어 갈 때 최만수와 장비서, 그리고 최민기가 도착했다.
심사단으로 앉아 있던 사람들이 인사하느라 잠시 소란스러워졌다.
“아직 심사 전이지?”
“네, 회장님.”
“오늘은 요리하는 장면도 안 보여주는 건가?”
“네, 서로 다른 메뉴로 대결을 해야 하니까요. 누가 만들었는지 선입견 없이 오로지 아이디어와 맛으로만 평가해주시길 바랍니다.”
“정말 재미있겠군.”
최만수가 실실 웃으며 음식이 다 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주방에서는 고소한 향이 코를 찌를 때 오븐이 다 됐다는 소리를 내뱉었다.
연습했던 대로 기다란 접시에 치즈가 녹아내린 치즈 치킨밥을 올렸다.
그리고, 그 옆에 청경채 표고버섯볶음을 올린 안상훈이 칠리소스로 지금까지 보다 더 멋지고 화려한 연꽃을 피워냈다.
김원상 또한 오븐에서 잘 구워진 오겹살을 꺼냈다.
갈색으로 바싹하게 구워진 부분을 위로 올라 오게 잘라 커다란 접시 한쪽으로 담고, 그 옆에 차은석이 만든 사천식 청경채 볶음을 올렸다.
그렇게 완성된 음식을 네 세트씩 준비한 두 팀이 끝을 알리는 벨을 울렸다.
그러자, 옆에서 지켜보고 서 있던 직원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며 완성된 음식을 가지고 밖으로 나갔다.
“드디어 오늘의 스페셜 메뉴가 완성됐습니다.”
구본석이 눈이 휘둥그레져서 설명을 이어갔다.
“확실한 건 저는 처음 보는 메뉴입니다. 그럼 직원들이 시식을 위해 테이블에 음식을, 아니 작품을 올려놓도록 하겠습니다.”
다섯 명씩 앉아 있는 테이블당 [만가복]과 [서풍 TWO]의 요리접시가 하나씩 올려졌다.
“이야, 이건 정말 작품이 맞네요. 아까워서 이걸 어떻게 먹죠?”
“이건 바삭한 수육 같기도 하고, 정말 신기한 요리입니다.”
여기저기서 음식에 대한 찬사가 이어졌다.
최만수의 눈빛도 예리하게 번뜩이고 있었다.
과연 서인우가 만든 요리는 어떤 걸까 한참을 들여다본 최만수가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그 모습을 본 최민기가 귓속말로 물었다.
“뭐가 [서풍]의 요리입니까?”
“잘 봐봐. 그러면 보인단 말이지. 절대 이 시간 안에 만들어 낼 수 없는 요리를 해내는 사람. 그게 바로 서인우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