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2화.
직원이 가져온 그릇에는 뽀얀 국물에 오동통한 새우 면이 담겨 있었다.
“어디 국물 먼저.”
최만수가 작은 그릇에 담긴 백 짬뽕 국물을 들이마셨다.
“다들 뭐하고 서 있어? 어서들 먹어보게. 이건 그냥 서인우가 만든 그 백 짬뽕 국물 맛인데?”
“정말 그렇습니까?”
덩치가 큰 구본석 과장이 작은 그릇을 들고 국물을 쭉 들이켰다.
분명 국물만 마시는 걸로 봤는데, 그가 내려놓은 그릇이 깨끗하게 비어있었다.
“어떤가? 국물이 끝내주지? 그럼 면의 식감을...이보게, 구과장. 면이 어디갔나?”
“그게 분명 국물만 마시려고 했는데, 면이 탱글탱글 부드러워서 단숨에 쭉.”
“으하하.”
최만수가 호탕하게 웃자 옆에 있던 직원들까지 소리내서 웃기 시작했다.
“이게 정말 밀가루가 전혀 들어가지 않은 면이라는 거죠? 식감이 너무 좋은데요? 새우향도 은근히 나고요.”
마켓팅부 과장이 믿기지 않는지 연신 면을 먹어가며 물었다.
“겉표지 성분표에 나와 있는 것처럼 밀가루는 전혀 들어있지 않습니다. 위장장애가 있으시거나, 글루텐 프리를 찾는 손님들을 만족시켜 드릴 자신 있습니다.”
이준형이 망설임 없이 설명하자 최만수가 말을 덧붙였다.
“내가 요리대회 때 직접 만드는 걸 보지 않았습니까? 정말 신기하고 건강한 면입니다.”
최만수가 남은 국물을 쭉 들이켜고는 장비서를 향해 손짓을 했다.
“장비서, 우리는 이제 자리를 비켜줍시다. 나머지는 실무진들과 협의 하세요.”
장비서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최만수 옆으로 움직였다.
“회장님, 조금 있다가 같이 들어가시죠?”
“최사장은 알아서 볼일 보시게. 나는 좀 바빠서 이만.”
최민기 사장이 못 말린다는 표정을 지어 보이자, 구본석을 비롯한 직원들이 고개를 돌리며 작게 웃었다.
“박대표, 이준형 사장. 여기 실무진들이 꼼꼼하게 따져보고 결정할 겁니다. 결정은 이 사람들이 하는 일이니 좋은 결과 기대합니다.”
“이렇게 빨리 미팅을 주선해 주셔서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최만수와 장비서가 자리를 비우자 본격적인 MS 백화점 입점을 위한 새우면의 평가가 이어졌다.
실무진들의 눈이 날카롭게 변해 있었다.
* * *
[만가복] 본사 10층에 도착한 박진상 부장이 크게 심호흡을 한 뒤 회장실을 향했다.
“안녕하십니까?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김형식 회장님 좀 만나러 왔습니다.”
“약속은 하셨나요? 곧 외부 미팅이 있으신데...”
“약속? 급한 일이라 바로 왔습니다. 회장님 계시면 지금 MS 백화점 박진상 부장이 찾아왔다고 전해주세요.”
회장실에 들어간 비서가 금세 박진상 앞으로 돌아왔다.
“곧 미팅이 있으셔서 10분 안에 일어나셔야 합니다. 괜찮으십니까?”
“뭐? 10분?”
잠시 인상을 썼던 박진상이 포기한 듯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알았어요.”
비서가 노크를 하고 문을 열어주었다.
화려한 회장실에 앉아있던 김형식이 돋보기를 벗어 책상 위에 놓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서 와요, 박 부장.”
“안녕하세요, 회장님. 전화 여러번 드렸었는데...”
“그랬나? 내가 요즘 워낙 바빴어요. 그런데, 무슨 일로...”
박진상은 이번 백화점 입점 심사에 대해 전혀 알지도 못하고 관심도 없다는 듯한 김형식의 말투에 순간 당황했다.
심사 전에는 전화하면 바로 연결 됐었는데...
“이번 1차 심사에 대해서 아무 얘기 못 들었습니까?”
“내가 업무가 얼마나 바쁜데, 그런 자잘한 것 까지 다 알고 있을 만큼 한가하지 않아요.”
이 일로 자기한테 어떤 일이 벌어졌는데, 그걸 자잘한 것이라고 표현하는 김형식에게 불쑥 화가 났지만 애써 참았다.
감정이 먼저 앞서서 될 일은 아니었다.
“이번 심사에서 회장님이 사람 심어놓은 일이 문제가 됐습니다. 결국 우리 백화점 회장님까지 알게 돼서...”
“사람을 심어요? 누가 요즘 같은 세상에 그런 일을 합니까?”
“네? 회장님!”
갑자기 얼굴을 바꿔버리는 김형식의 발언에 놀라 소리를 지른 박진상이 벌게지기 시작한 얼굴에 두 손으로 마른세수를 했다.
“갑자기 왜 이러십니까? 분명 저한테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심사 날 그릇에 작은 표시를 해달라고 말입니다. 그러면, 회장님이 미리 심어놓은 사람이 ...”
“이봐요! 박 부장. 어디서 그런... 우리 [만가복] 마포점장 김원상을 뭐로 보고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지껄어요?”
박진상의 눈 밑이 파르르 떨렸다.
분명 김형식이 자기를 믿고 한 번만 눈 딱 감아달라 했는데...
이제 와서 자기는 전혀 모르는 일이라고 발뺌을 하고 있다.
발뺌 정도가 아니라 오히려 박진상을 이상한 사람 취급하고 있었다.
“그때 분명히..아니 제가 정확히 기억합니다. 심사 바로 3일 전이었습니다. 기억 안나십니까?”
“안 그래도 바쁜데 어디서 그런 헛소리를 지껄이고 말이야. 나는 이제 미팅이 있어서 나가봐야 합니다.”
자리를 박차고 일어난 김형식이 얼이 반쯤 나가 있는 박진상을 내려보며 매서운 눈빛을 번득였다.
“다시 말하지만, 우리 [만가복]이 뭐가 아쉬워서 그런 허접한 짓을 한다는 말입니까? 오늘은 그냥 넘어가지만, 앞으로 이런 얘기 한 번 더 들리면 나도 참고 있지는 않을거요. 알겠습니까?”
천천히 자리로 돌아온 김형식이 책상 위에 놓인 내선 전화를 들었다.
“여기 차 한잔 내와요.”
미팅이 있어서 나간다는 김형식이 갑자기 비서에게 차를 주문하자 박진상의 얼굴이 점점 가라앉기 시작했다.
그럼 그렇지.
그동안 통화하면서 한 얘기들이 있는데...모른 척 하지는 않겠지.
실실 나오는 웃음을 참고 있던 박진상 얼굴 가까이 다가온 김형식이 한마디 툭 던졌다.
“약속도 없이 불쑥 들이닥쳐서 차 한잔도 못 줬네요. 혼자 차 잘 마시고 정신 좀 차려지면 기어나가도록 해!”
회장실 문이 열렸다가 금세 다시 닫혔다.
당황스럽고 화가 난 박진상이 어쩔 줄 몰라 하며 씩씩거리고 있는데 다시 회장실 문이 열렸다.
차를 들고 온 비서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테이블 위에 차를 올려놓고 나갔다.
테이블 위 덩그러니 올려진 차를 멍하니 쳐다봤다.
회사에서 해고당하고 급한 마음에 찾아온 김형식한테 이런 대우를 받게 될 줄 꿈에도 생각 못 했다.
생각하자, 생각하자.
아무리 생각해도 지금 이 상황을 다시 돌이킬 방법은 없었다.
그렇게 앉아 에어컨 바람에 식어가는 차만 하염없이 바라보다 회장실을 나왔다.
* * *
한바탕 저녁 장사를 마쳤을 때 돌아온 이준형이 서인우와 마영준, 안상훈을 앞에 앉혀 놓고 침을 꼴깍 삼키고 있었다.
“무슨 얘기인데, 혼자 긴장해서 난리냐? 나 빨리 가서 다시 음식 해야 해.”
“알았어요. 다들 놀라지 말고 잘 들어요.”
서인우가 다른 날보다 유독 더 긴장한 이준형을 바라보며 환한 미소를 날려 주었다.
그 미소에 같은 남자지만 심쿵한 이준형이 도리어 화를 냈다.
“나 안 그래도 지금 흥분해서 심장 떨리는데, 인우 너 자꾸 나보고 그런 살인미소 날리지 마! 인마.”
아무 말 없이 듣고 있던 안상훈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우리가 만든 새우면 다음 달부터 MS 백화점 식품매장에 들어가기로 최종 결정 났습니다.”
“정말이야? 다른 곳도 아니고 MS 백화점에?”
“네. 게다가 처음 일주일간 식품관 입구 쪽에 크게 팝업 스토어도 열 수 있게 해주는 걸로 협의가 이루어졌어요.”
“대박. 그러면 우리 상품 광고가 대대적으로 되겠네?”
“그럼요, 광고뿐인가요? 판매도 훨씬 잘될 겁니다.”
다들 흥분하고 좋아하는 속에서 서인우의 얼굴이 그다지 밝지 않았다.
“인우야. 너 신나지 않냐?”
“나도 너무 좋아. 정말 수고했다, 이준형.”
“그런데, 표정이 별로인데?”
“미안, 난 당장 내일 있을 2차 심사 잘 해내서 거기 입점해야 한다는 생각뿐이어서...”
이준형이 자기 가슴을 툭툭 쳤다.
“새우면 영업은 내 영역이니까 나한테 맡겨. 다행히 박정원 대표님이랑 같이하니까 너는 지금처럼 요리에만 전념해라.”
“그래. 그런 의미에서... 치즈 치킨밥 한 번만 더 먹어볼래?”
“또?”
이준형과 마영준이 동시에 소리를 질렀다.
“오늘 마지막으로다가….”
벌써 일어나 주방으로 향하는 안상훈을 보고 마영준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저 사람 말은 없어도 눈치는 짱이다. 서인우를 완전히 파악했네.”
“눈치가 아니라 정말 성실하고 요리에 열정이 대단하세요. 안셰프님을 소개 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주방으로 다시 들어온 서인우는 내일 있을 2차 심사가 이들의 운명을 어떻게 바꿔놓을지 잘 알기에 더욱 긴장됐다.
-내일 잘할 거니까 너무 긴장하지 마라.
‘정말 잘해야 하는데…. 저 안 셰프님과 준형이, 정다운 씨의 앞날이 걸린 문제야.’
-[만가복] 물론 만만치 않아. 그래도 나와 서인우가 함께 한다면 뭐든 자신이 있지. 안 그래?
‘맞아, 사부. 내일 잘 부탁해.’
재료 손질부터 특별히 더 정성을 다하며 늦게까지 연습하고 또 연습했다.
늦은 밤 침대에 누운 서인우는 손목도 아프고 어깨도 아팠지만, 쉬이 잠이 오지 않았다.
열심히 연습했고, 내일 최선을 다할 거지만, 만약 MS 백화점 입점에 실패하게 되면 그만큼 새로 시작하는 시간이 늦어진다.
그를 믿고 기다리고 있는 정다운의 얼굴이 떠올랐다.
또, 아빠의 요리를 먹으며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미소를 지어 보여준 유진이와 안상훈의 얼굴도.
그들과 함께할 내일을 생각하며 뒤척이다 간신히 잠이 들었다.
드디어 2차 심사가 있는 오전 10시.
11시부터 있을 심사 준비를 위해 일찍 도착한 서인우는 중식당이 있는 MS 백화점 9층을 둘러보고 있었다.
“오늘도 역시 일찍 나왔구만.”
익숙한 목소리에 고개를 돌려보니 최만수가 곁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안녕하십니까? 회장님.”
“여전히 부지런하군. 오늘 심사는 잘 준비했나?”
“열심히 했습니다. 스페셜 메뉴라는 과제가 더 어렵네요.”
“나도 궁금해서 참을 수가 있어야지. 지난번 대회에서 보여준 자네 필살기를 잊을 수가 없었거든.”
심사를 앞두고 최만수와 대화를 나누다 보니 정말 같이 요리대회에서 경쟁했던 그때의 그 어르신 같았다.
이렇게 큰 백화점의 오너에게서 보이는 권위적인 모습은 전혀 느껴지지 않아 고마웠다.
“어제 새우면 입점 얘기 들었습니다. 회장님이 좋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하지만, 정정당당하게 입점 심사 거쳐서...”
“뭔가 오해가 있나보군.”
“네?”
“어제 이준형 사장과 통화하다 새우면 얘기를 듣고 궁금해서 가져와 보라고 한 건 나지만, 입점을 위한 절차는 관련 부서에서 정확하게 진행된 거네.”
서인우는 뭔가 최만수의 빽으로 이루어진 결과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래서, 어제 이준형의 얘기에 솔직히 더 기뻐하지 못했었다.
“물론 내가 심사를 위한 미팅 시간을 단축하게 해주긴 했지. 그야 내가 더 궁금했으니까.”
최만수가 어제 심사과정을 다시 떠올리며 픽 웃어 보였다.
“서인우가 새우면을 만드는 걸 바로 옆애서 지켜본 사람 아닌가? 그 새우면을 누구나 쉽게 먹을 수 있는 제품이 나왔다는데 기다릴 수가 있어야지.”
서인우가 작은 미소로 답헀다.
“그래서 담당 직원들에게 급히 미팅 약속을 잡긴 했지. 내가 한 건 그것뿐 나머지는 그들이 원래 절차대로 다 해서 결정한 거야. 그 부분은 오해 없길 바라네.”
“감사합니다. 오늘 있을 심사도 최선을 다할 겁니다. 그래서 제가 할 스페셜 메뉴도 끝까지 비밀입니다.”
“내 그럴 줄 알았네. 서인우 아닌가? 그럼 기대하지.”
큰 소리로 웃고 난 최만수는 어딘가를 향해 사라졌다.
‘띵’
엘리베이터 도착음과 함께 이준형과 정다운이 도착하자 갑자기 소란스러워졌다.
“그래서요? 그럼 당장 다음 달부터 바로 여기 이 백화점 식품관에서 우리 새우면을 팔게 된다는 거예요?”
“그렇다니까. 바로 내가 여기 회장님과 사장님, 관련 부서 직원들을 앞에 놓고 유창한 설명과 뛰어난 영업 실력으로 따낸 거라니까.”
“아저씨, 대박이네요. 이런 능력자인 줄 몰랐어요.”
“내가 안 보여줘서 그러지, 사실 나 능력 쩔어.”
자기 입으로 저건 아니지 싶다.
하지만, 어제부터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하고 떠들어대는 이준형이 오랜만에 무지 행복해 보여서 다행이었다.
옆에서 듣고 있는 정다운의 얼굴도 새로운 희망이 마구마구 샘솟는 듯 보였다.
“안 셰프님은?”
“아직…. 같이 안 왔어?”
항상 일찍 도착해 말없이 준비하고 있던 안상훈이 아직 도착하지 않았다.
심사 시작까지 채 30분이 남지 않은 지금까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