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1화.
시무룩해진 안상훈이 딸 유진이의 눈을 한참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안유진. 너 아빠랑 결혼한다면서?”
“에이. 그건 아빠 기분 좋아지라고 한 거지. 이 오빠가 내 이상이야.”
“뭐? 이상?”
“응, 내가 좋아하는 이상.”
아무래도 이상형을 말하는 것 같았다.
아직 발음도 정확히 안 되는 여섯 살짜리 딸 아이를 두고 직장 동료와 연적이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한숨을 푹 내쉬는 안상훈의 손을 잡은 아내 박은선이 눈가에 웃음을 가득 담은 채 그를 쳐다봤다.
“자기는 내 이상형이니까 너무 속상해하지 마.”
그 말에 조금은 누그러진 안상훈이 치즈 치킨밥을 접시에 덜어 주었다.
“이거 먹어보고 솔직하게 평을 해줘. 유진아, 유진이도 이거 먹어봐.”
호호 불어 뜨거운 치즈를 식힌 안상훈이 작은 수저에 절반도 안 되는 양을 담아 유진의 입에 넣어주었다.
“어때? 맛있어?”
“아뜨. 아빠. 아직 입에 있어. 삼키야 맛을 알지.”
마음이 급했었나 보다.
아직 유진의 입에서 입김이 솔솔 나오고 있었다.
작은 입술을 모으고 후 뜨거운 김을 내뿜은 유진이 마치 아기 공룡 같았다.
“상훈씨. 이거 너무 맛있는데? 처음에 겉모습을 보고 빵인줄 알았어요. 그런데, 안에 쫄깃한 밥이 씹히네. 고소하고 짭조름한 게 정말 처음 먹어보는 맛이에요.”
유진이 치즈 치킨밥을 다시 떠서 입에 넣었다.
“우리 유진이 맛있어?”
“응. 대빵 맛있어. 피자보다 더 맛있어.”
“그럼 엄마랑 천천히 먹고 있어. 아빠랑 삼촌이랑 유진이 좋아하는 짜장면하고 탕수육 만들어 줄게.”
“알았어, 그리고 삼촌 아니고 오빠.”
끝까지 그냥 넘어가지 않는 안유진이 너무 귀여웠다.
요리를 하기 위해 주방으로 향하는 서인우 앞에 손님 한 명이 다가왔다.
“저...지금 저 꼬마가 먹는 메뉴 이름이 뭔가요?”
“네?”
“우리도 저거 시키려고 하는데...”
“죄송합니다, 손님. 저 메뉴는 [서풍 TWO]의 새 메뉴로 내놓으려고 준비 중인 메뉴입니다.”
“그래요? 그러면 여기 메뉴에는 없는 건가요?”
“네, 손님. 우선 다른 메뉴 주문하시면 제가 특별히 만들어 보겠습니다.”
조용히 앉아서 듣고 있던 여자가 손뼉을 치며 좋아했다.
자리로 돌아가는 남자 어깨가 한 뼘은 올라온 것 같았다.
조용히 듣고 있다 주방으로 따라 들어온 마영준이 서인우와 안상훈을 번갈아 쳐다봤다.
“돈 많이 벌어서 나중에 우리 셋이 같이 요리하면 정말 재미있겠다.”
“그렇게 할 겁니다. 그리고, 그리 오래 걸리지도 않을 겁니다.”
“그래, 뭐. 꿈은 크게 가져야지.”
“전에 제가 말씀드린 적 있죠? 우린 이제 항상 함께할 식구들이라고요.”
안상훈이 채소를 다듬다 잠시 멈칫했다.
뭔지 모를 뜨거운 것이 속에서 훅 올라오는 것 같았다.
“탕수육 만들어야지? 내가 고기 튀길 테니까 서 셰프는 소스 만들고 있어요.”
“네. 감사합니다.”
-중화요리 최고의 고수 서인우, 퓨전 요리의 대가 마영준, 그리고 내 친구 서동수의 수제자 안상훈. 이렇게 셋이 함께 요리한다?
‘정말 멋지지 않아?’
-이건 대한민국 국민에게 주는 축복이지. 맛있는 걸 먹는 행복. 그야말로 소.확.행이지.
‘사부, 그런 말도 할 줄 알아?’
-내가 입이 무거워서 조용히 있는 거지, 아는 걸 다 말하려면 24시간이 모자라.
‘입이 무거운지는 잘 모르겠지만, 이 중식도는 좀 무겁긴 해.’
중식도와 대화하느라 잠시 멍때리고 있던 서인우를 안상훈이 유심히 쳐다보고 있었다.
“요리하면서 뭐 재미있는 생각이라도 하고 있나요?”
순간 입 밖으로 소리를 내보냈나 하고 놀란 서인우가 일부러 더 크게 리액션을 했다.
“갑자기 유진이 얼굴이 떠올라서요. 조금 전에 뜨거운 입김을 내보내는 표정이 너무 귀여웠어요.”
“내 딸이지만, 나를 전혀 닮지 않아서 너무 감사하고 행복합니다.”
“네? 보통 부모들은 자기와 닮아서 더 이뻐하는 거 아닌가요?”
“난 우리 애도 나처럼 사람 눈을 잘 못 쳐다보고 피하게 될까 봐 정말 걱정 많이 했거든요.”
사람이 사람을 보며 느끼는 공포는 과연 어떤 것일까?
너무나 당연하다 생각했던 부분을 힘들게 버텨냈을 안상훈의 패인 얼굴이 안쓰럽게 생각됐다.
“사랑의 힘, 특히 가족의 힘은 참 대단한 것 같아요. 조금 전 아내분이랑 나누는 대화에서 서로를 얼마나 아끼는지 느껴졌거든요.”
살며시 미소를 띤 안상훈이 완성된 음식을 쟁반에 담았다.
“이건 내가 가지고 나가도 될까요?”
“그럼요. 아빠가, 그리고 남편이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만든 요리니까요.”
윤기가 자르르 흐르는 탕수육과 짜장면을 담은 쟁반을 들고 가족이 기다리는 곳으로 가는 안상훈은 분명 그들과 눈을 마주치고 있었다.
그것도 깊고 진한 사랑이 듬뿍 담긴 강렬한 눈빛이었다.
* * *
박정원을 따라나선 이준형이 조수석에 앉자마자 가방에서 노트북을 꺼냈다.
“미리 알았으면 ppt라도 만들어 오는 건데...아쉽네요.”
“오늘 MS 백화점 회장하고는 간단히 제품 설명을 하고 인사하는 자리라고 생각하자고. 서인우 말대로 입점은 정식 절차를 거쳐야지.”
“네, 저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오늘은 회장님이 먼저 요리 대회에서 알게 되신 인우의 새우면이 궁금하시다고 부르신 겁니다.”
이준형이 뭔가 확실한 설명이 필요하다 느꼈는지 자세를 고쳐 앉으며 말을 이었다.
“정말이라니까요. 나는 그냥 지금 서인우의 새우면이 시판용으로 나왔다는 것까지만 말했어요.”
“나 아무 말 안 했어. 안물안궁.”
“그게...하여튼 지금은 회장님이 불러서 가는 겁니다.”
“알았다니까.”
박정원이 계속해서 실실 웃었다.
백화점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1층 로비로 올라가 최만수에게 전화를 걸었다.
통화를 마치자마자 어디서 나왔는지 양복을 입은 남자가 다가왔다.
“회장님께 모시겠습니다.”
이준형은 갑자기 받는 특급 대우에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남자를 따라갔다.
도착한 곳에는 최만수 뿐 아니라, 이미 익숙한 구본석과 다른 직원 둘, 장비서의 얼굴도 보였다.
생각보다 많은 사람이 기다리고 있자 경험이 많은 박정원과 다르게 이준형의 눈빛이 불안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안녕하십니까? 회장님.”
“어서 와요.”
박정원이 최만수 곁으로 다가가 고개를 숙였다.
“오랜만입니다. 최만수 참가자.”
“으하하. 그러네요, 박정원 심사위원님.”
최만수 또한 반갑게 인사하며 악수를 권했다.
“여기 이 친구한테 회장님 얘기 전해 듣고 깜짝 놀랐습니다. 완전 베일에 싸인 인물이시네요.”
“내가 좀 그런 매력이 있어요.”
옆에 서 있던 장비서가 환한 미소를 보였다.
“그럼 회포는 다음에 풀 기회를 만들도록 하고, 오늘은 일 얘기를 좀 해볼까요?”
“네, 전화로 말씀드린 서인우의 새우면 입니다. 전에 요리 경연대회에서 선보였던 밀가루를 못 먹는 사람들을 위한 면입니다.”
이준형이 박스를 테이블 위에 올리자 박정원이 그 안에서 두 종류의 새우면을 꺼내 펼쳤다.
“이건 꼭 우동사리처럼 생겼네요?”
“네, 우동이나 라면 사리 대신 넣어 만들어 먹을 수 있게 했습니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서풍]의 백 짬뽕을 그대로 재현한 밀키트입니다.”
“난 이 백짬뽕이 너무 궁금해서 당장 와보라고 했습니다. 구 과장. 이리 와서 자세히 살펴보게.”
“네, 회장님.”
구본석이 우선 겉표지의 설명과 성분표 등을 꼼꼼히 살핀 후 봉투를 뜯어 내용물을 꺼내 보았다.
“이건 만들어서 먹어봐야 확실한 판단을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렇지? 박 대표, 그리고 이준형 사장.”
“네. 말씀하십시오.”
“이렇게 합시다. 우선 오늘 가져온 샘플들을 여기 관련 부서 직원들과 시식을 해본 후 결정하는 거로 하죠.”
이준형이 박정원을 흘낏 쳐다보자, 여유 있는 미소를 지어 보인 박정원이 대답했다.
“그렇게 하시죠.”
구본석 옆에 있던 직원 하나가 누군가와 통화를 하더니 바로 최만수 앞으로 다가왔다.
“회장님. 지금 직원 식당에서 시식 가능하다고 합니다.”
“그래? 그럼 같이 가볼까? 시간 끌 필요 없이 오늘 시식해 보고 결정하도록 합시다.”
5G급 진행 속도에 이준형이 반쯤 얼이 빠진 듯 보였다.
다시 박스를 주섬주섬 챙기자, 조금 전 이준형과 박정원을 안내했던 양복 입은 남자가 박스를 챙겨 그들 뒤에 서서 움직이기를 기다렸다.
“그럼 잠시 이동 하실까요?”
엘리베이터에서 막 내리는 데 최만수의 핸드폰이 울렸다.
“지금? 나 중요한 일이 있는데?”
-어디신데요?
“안 그래도 장비서한테 너 좀 찾아오라고 하려 했다. 직원 식당에서 보자.”
한 발 물러서 있던 장비서가 통화내용을 알겠다는 듯이 피식 웃었다.
“그래서 지금 오신답니까?”
“이렇게 중요한 결정을 하는데, 와야지.”
“해당 부서 직원들 다 있는데, 굳이 최민기 사장까지 부르실 필요가...”
“그래야 내 판단에 객관성을 실어주지. 안 그런가?”
“네.”
“하긴 구과장이 있으니까 제대로 평가 하겠지. 맛의 본좌신데...”
최만수의 뒤를 따르던 직원들이 픽픽 웃음을 흘렸다.
깔끔하게 정리된 식당에 유니폼을 입은 직원 둘이 나와 깍듯하게 허리를 깊게 숙여 인사했다.
구본석이 박스를 들어 두 가지 새우면을 내밀었다.
“이 면사리로는 뭐든 요리를 하나 해주시면 되고, 밀키트는 적혀있는 요리법대로 해서 가져오시면 됩니다.”
“아무 요리나요?”
“네, 알아서 이 면과 어울릴만한 요리면 됩니다. 빠르고 간단하면서 맛있는 요리.”
안 그래도 잔뜩 긴장한 듯한 식당 직원의 얼굴이 점점 빨개지기 시작했다.
갑자기 연락 해서 요리를 하라고 하질 않나?
게다가 다른 사람도 아닌 처음 보는 회장님이 그 요리를 시식한다고 하니 당장에라도 도망가고 싶은 심정일 거다.
거기에...
문을 열고 들어오는 사람이 하나 더 있었으니, 다름 아닌 최민기 사장이었다.
“안녕하십니까?”
여기저기서 인사하느라 바빴다.
박정원과 이준형이 동시에 일어난 순간 최만수가 직접 그들을 소개하기 시작했다.
“최사장. 여기 이분은 지난 번 요리 경연대회...”
“안녕하십니까? 박정원 대표님 이시죠?”
최민기가 먼저 알아보고 인사를 했다.
뭔가 기회를 놓친 듯 아쉬움에 쩝하는 입소리만 내던 최만수가 다시 이준형을 가리켰다.
“여기는 이준형 사장. [서풍] 서인우 사장의 사업 파트너라네.”
날씨 때문인지, 긴장해서인지 손에 땀이 잔뜩 찬 이준형이 급하게 손바닥을 바지에 슥슥 문지른 후 최민기가 내민 손을 잡았다.
그야말로 일이 천파만파 커졌다.
서인우를 통해 알게 돼서 전화번호를 주고받은 사람이 바로 MS 백화점 회장이다.
그 결과가 바로 지금 이 백화점 사장까지 와있는 시식회가 되어 버렸다.
서인우의 요리를 인정해주고 좋아하는 최만수 회장에게 살짝 얘기해놓으면 관련 부서 직원 하나 정도는 소개해줄 수 있겠지 하는 계산을 안 한 건 아니었다.
이준형의 계산은 딱 거기까지였다.
최만수의 스케일에 놀란 이준형은 여전히 어리바리한 모습을 보였다.
“이준형 사장.”
“네? 네. 회장님.”
“내가 동네 작은 가게마다 일일이 찾아다니며 영업 할때는 자네보다 훨씬 어렸었네. 그러니, 아직 어리다 생각하지 말고 적극적으로 부딪쳐.”
“네, 명심하겠습니다. 회장님.”
“그래서 서인우는 요리에만 전념할 수 있게 해주게. 그 타고난 실력을 맘껏 발휘하게 말이야. 그렇게 공조하면서 [서풍]을 키워보라고.”
이준형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잠시나마 다시 어딘가에 이력서를 내야 하나 고민했던 자신을 들여다보는 것 같았다.
조금씩 바람이 새어 나가는 가슴을 꽉 틀어막아 준 최만수의 주름진 얼굴을 평생 잊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참 감상에 빠져 있던 이준형을 화들짝 정신 차리게 하는 말이 들렸다.
“그럼 서인우가 아니어도 만들 수 있다는 [서풍]의 백 짬뽕을 한 번 먹어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