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0화.
이준형의 말이 끝나고도 한참 눈만 깜빡이고 있던 서인우가 다시 물었다.
“너 회장님 전화번호를 알고 있었던 거야?”
“야, 내가 [서풍 TWO]의 전반적인 영업을 맡은 브레인이라고 했지? 넌 가끔 나를 회 뜨듯이 보더라.”
“뭐? 회 뜨듯이?”
“띄엄띄엄 본다고, 인마. 어제 오셨을 때 이미 서로 전화번호 주고받았어. 서인우 옆에 회장님이 계신다는 사실 잊지 말라고 하셨잖아. 회장님도 네 성격 이미 파악하신 거지.”
박정원이 이준형에게 어서 준비하라는 눈빛을 보냈다.
“뭐해? 서인우는 여기서 내일 있을 심사 준비하고 이사장 나랑 백화점 영업하러 가자고.”
“아, 네. 알겠습니다. 박 대표님.”
언제부터 저렇게 둘이 죽이 잘 맞게 됐는지.
“언제 네 연락처 한번 봐야겠다. 나도 모르는 번호들도 잔뜩 있는 거 아니야?”
“확실한 건 요리만 빠져 사는 서인우 보다는 몇 배는 많긴 할 거다.”
박정원이 말하며 연신 실실 웃음을 흘렸다.
“저 선배님. 일어나시기 전에 내일 심사에 나갈 메뉴 맛 좀 봐주세요.”
“그래? 나야 뭐 맛보고 평가하는 게 일이라서 얼마든지.”
잠시 주방으로 향한 서인우는 잘 쪄진 두 가지 버전의 찹쌀밥에 치즈를 골고루 올려 오븐에 넣었다.
그 옆에서 안상훈이 말없이 청경채 버섯볶음을 만들고 있었다.
여전히 말수는 적었지만, 서인우가 시키지 않아도 항상 먼저 알아서 해주는 안상훈이 정말 고맙고 든든했다.
두 개의 접시를 쟁반에 담아 다가오는 서인우가 보이자 마음이 급한 박정원이 자리에서 일어나 메뉴를 뚫어져라 쳐다봤다.
“이거 중식 맞는 거지? 퓨전 요리인가?”
“네, 우선 드셔 보세요.”
서인우가 나이프를 들어 치즈 치킨밥을 피자 모양으로 잘라 한 조각씩 앞접시에 옮겨 담았다.
“이건 뭐 그냥 예술 작품인데... 흠, 우선 향은 합격이고, 그럼 맛을 볼까?”
쭉 늘어나는 치즈를 포크에 돌돌 감아 치킨밥과 함께 입에 넣은 박정원의 눈이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을 만큼 최대한으로 커졌다.
“이거 닭고기가 들어간 밥이군. 이 비쥬얼에 속이 밥으로 차 있을 거라고는 생각 못 했는데...아주 매력적인 맛이야.”
“그리고요?”
“자칫 느끼할 수 있는데, 안에 발라놓은 소스가 또 상큼함을 주기도 하고, 이 환상적인 연꽃 소스에 찍어 먹으면 또 매콤함이 입안에 퍼지면서….”
잠시 말을 멈춘 박정원이 이준형에게 따로 눈빛을 보냈다.
“혹시 말인데, 이 레시피는 욕심내면 안 되는 거겠지?”
“죄송합니다. 만약 저희가 이번 MS 백화점 입점에 성공하면 먹물 만두와 함께 대표 메뉴로 밀어볼 생각입니다.”
“화려한 백화점과 아주 잘 어울리는 메뉴야. 젊은 층이 특히 좋아하겠어. 그런데, 왜 똑같은 걸 두 개나 만들어 왔나?”
서인우가 이번에는 표고 향이 많이 나는 치즈 치킨밥을 박정원 앞으로 잘라 주었다.
“치킨밥을 살짝 다르게 만들어 봤습니다. 이것도 한 번 맛봐 주십시오.”
“그래? 어디...”
왠지 신이 난 듯 보이는 박정원이 특유의 눈웃음을 지으며 또 다른 치킨밥을 입에 가득 넣었다.
마지막 한 톨까지 삼키고는 박정원이 고개를 끄덕이며 웃어 보였다.
“지금 특별한 향으로 갈 거냐, 아니면 대중적인 맛으로 갈 거냐 그게 고민인 거지?”
“네, 맞습니다.”
이준형과 안상훈이 살짝 놀란 듯 서로 눈을 마주쳤다.
역시 전국을 돌아다니며 맛집을 찾아 소개해주고, 최고의 맛을 위해 레시피를 알려주는 사람답게 그들의 고민을 한 번에 알아봤다.
“고민할 것 없어. 대상을 젊은 층으로 할 거면 첫 번째 버전으로 하는 게 무난할 거야. 난 이 표고 향이 강한 게 좋은데, 자칫하면 이 향을 좋아하는 사람들만 찾는 메뉴가 될 수 있을 것 같은데.”
“아, 저도 그게 고민이라서요.”
“이건 어디까지 내 개인피셜이네. 참고만 하라고. 그럼 나는 바빠서 이만. 이준형 사장 얼른 튀어와.”
다시 박스를 주섬주섬 챙긴 이준형이 뒤도 돌아보지 않고 박정원을 따라나섰다.
잠시 멍해진 서인우를 보고 있던 마영준이 피식 웃음을 보였다.
“파트너를 아주 잘 골랐네.”
“그런...건가요?”
“그건 그렇고, 치즈 치킨밥은 어떻게 할거야?”
서인우가 안상훈을 바라보며 답을 요하는 눈빛을 보냈다.
“저도 박정원 대표님 얘기 들어보니 무난한 게 나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다시 한 번 만들어 먹어볼까요?”
“안 그래도 그럴 생각이었습니다.”
“그걸 또 만든다고? 지겹지도 않아? 이 둘도 환상의 파트너네.”
말 없는 안상훈이 슬그머니 미소를 지어 보였다.
잠시 접었던 요리에 대한 열정이 조금씩 살아나는 것 같았다.
“만약에 우리 딸 유진이를 준다면 표고를 빼고 만들었을 겁니다. 버섯을 잘 못 먹거든요.”
주방으로 걸어가면서 건네는 안상훈의 말에 더 확신이 생겼다.
치즈가 덮여있어서 아이들이 좋아할 메뉴인데, 표고버섯 때문에 못 먹는다면, 레시피를 바꾸는 게 맞는다는 결론이었다.
문득 걸음을 멈춘 서인우가 앞에서 걸어가고 있던 안상훈을 불렀다.
“안 셰프님. 지금 유진이는 뭐 하는 시간입니까?”
“유진이요? 이 시간이면 유치원에서 와서 한참 놀고 있을 시간인데요?”
“유진이를 여기로 초대해 주실 수 있나요? 유진이의 입맛에 맞는 레시피로 만들고 싶어서요.”
“네?”
당황한 듯한 안상훈이 머리를 두어 번 긁적거리더니 핸드폰을 들고 잠시 밖으로 나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들어온 안상훈의 얼굴이 조금 전보다 더 큰 미소로 가득 차 있었다.
“유진이가 엄마랑 같이 온다고 하네요. 아빠가 만든 요리 먹어보고 싶다고...”
“잘됐습니다. 제가 마 셰프님께 말씀드리고 올게요.”
“네.”
오후 장사를 위해 직원과 함께 홀을 정리하고 있던 마영준에게 다가간 서인우가 테이블 하나를 예약했다.
“안유진이 누군데 심사 준비하다 말고 갑자기 예약해달라고 그래?”
“내일 심사의 당락을 좌우할 중요한 분이십니다.”
“그렇다면 제일 좋은 자리로 빼놔야겠네.”
“네, 부탁드립니다.”
아직 5시도 되지 않았는데, [셰프의 주방×서풍]에 손님이 하나둘 들어오기 시작했다.
서인우와 안상훈이 마영준을 도와 재료를 손질해주니 요리 속도가 훨씬 빨라졌다.
덕분에 만족해하는 손님들을 보며 마영준도 기분이 좋아졌다.
“어서 오세요.”
직원의 소리에 가게문을 바라본 마영준은 동그란 눈에 핑크빛 리본이 달린 머리띠를 한 여자아이에게 시선을 뺏겼다.
“예약하셨나요? 여기 꼬마 숙녀분은 이름이 어떻게 되나?”
“꼬마면 꼬마지 숭내분은 또 뭐에요? 그리고, 처음 보는 사람이 이름은 왜 물어봐요?”
“풉!”
옆에서 듣고 있던 여직원이 웃음이 나오려는 걸 간신히 참는듯했다.
“유진아, 어른한테 그렇게 말하면 안 된다고 했지? 정말 죄송합니다.”
“아, 혹시 안유진 양?”
“아저씨 뭐예요? 내 이름을 어떻게 알아요?”
“여기로 모시겠습니다. 안유진 이름으로 예약되어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유진 엄마 박은선이 계속해서 뭐라 중얼거리고 있는 유진이를 데리고 마영준 뒤를 따라갔다.
“엄마, 아빠는 어디 있어? 우리 아빠는 왜 안 보여?”
“글쎄. 안에서 유진이 맛있는 거 해주려고 준비하고 있나 본데?”
“안 셰프님께 오셨다고 말씀드리겠습니다. 잠시만 앉아서 메뉴 보고 계세요.”
“네, 감사합니다.”
마영준에게 안유진과 박은선이 왔다는 얘기를 전해 들은 서인우와 안상훈이 홀로 나오자 식사를 하고 있던 손님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방송에 나왔던 서인우씨를 여기서 봤다더니... 맞네.”
“웬일이니? 실물이 더 잘생겼잖아? 저 얼굴로 왜 주방에만 박혀 있는 거야? 손님들과 직원 복지를 위해 밖에서 보이는 곳에 있어야지. 호호.”
친구인 듯 보이는 여자 셋이 상대방 팔을 쳐가며 웃느라 정신이 없었다.
꽤 아플텐데...친 곳만 계속 치네...
“안녕하세요. 지난번 통화했던 서인우라고 합니다.”
“아, 안녕하세요. 여기 안상훈 씨 아내 되는 박은선이라고 합니다.”
조금 전까지 쫑알거리던 안유진이 입을 동그랗게 모은 채 큰 눈을 깜빡이며 서인우만 쳐다보고 있었다.
“유진아, 인사해야지?”
“네가 유진이구나? 우리 전화 통화는 한 번 했지?”
안유진이 여전히 한마디도 하지 않고 서인우만 응시했다.
“얘가 왜 이러지? 평상시 인사 잘하는데? 유진아! 아빠랑 같이 일하는 삼촌이야.”
“왜 삼촌이야? 나 삼촌 없는데?”
“그냥 삼촌이라고 부르면 돼.”
“싫어.”
안상훈과 박은선은 평상시 같지 않은 딸 유진의 모습에 당황하고 있었다.
그때였다.
안유진이 하얀 인형 같은 작은 손을 내밀며 말했다.
“유진이에요. 오빠라고 불러도 되죠?”
“뭐?”
“어머, 얘가 왜 이래?”
서인우가 안유진의 눈높이를 맞추기 위해 바닥에 무릎을 대고 앉아 고사리 같은 손을 잡아 주었다.
“그럼, 유진이가 편하게 부르면 돼.”
“좋았어.”
유진이는 발그스름해진 볼에 웃음이 가득한데, 옆에 서 있던 안상훈의 얼굴에 먹구름이 몰아쳤다.
급하게 안상훈을 끌고 주방으로 들어온 서인우가 오븐에 넣은 치즈 치킨밥이 완성되기를 기다리며 서 있었다.
“안 셰프님. 사모님과 따님이 드실 거니까 더 신경 써서 만들어 주세요.”
“손님들도 다 가족 같은 마음으로 대합니다. 절대 다르게 대하면 안 된다고 서동수 셰프님께 배웠습니다.”
“아, 네.”
갑자기 퉁명스러워진 안상훈의 말에 그저 눈치만 보고 있었다.
“여기 꼬마 아가씨 주문이요.”
직원이 가져온 주문지에는 역시나 아이들이 가장 좋아하는 메뉴인 짜장면과 탕수육이 적혀있었다.
“안 셰프님. 따님을 위한 짜장면을 만들어 주세요. 제가 탕수육 만들겠습니다. 그리고, 그전에 치즈 치킨밥부터 내가도록 하겠습니다.”
“알았어요.”
뭔가 화난 사람처럼 뾰로통한 표정의 안상훈이 [서풍]의 짜장면을 만들기 시작했다.
서인우 또한 고기를 준비하기 위해 중식도를 들었다.
-저 친구 제대로 심통이 났구만.
‘갑자기 왜 그런지 모르겠어. 안 셰프 가족들에게 안심시켜 주려고 초대했는데...’
-넌 거울 안 보냐?
‘뜬금없이 무슨 소리야?’
-와이프랑 딸 앞에서는 가장 멋진 남자이고 싶은데, 네 비쥬얼이 그냥 민폐라는 얘기야.
‘무슨 싱거운 소리를 하고 있어?’
-싱거운 소리 아니고 팩트인데?
서인우는 설마 하는 눈으로 안상훈을 흘낏 다시 쳐다봤다.
웍을 잡은 손에 유독 힘이 꽉 들어가 있었다.
‘띵’ 소리와 함께 치즈 치킨 밥이 완성되자 긴 접시에 담았다.
그 옆에 안상훈이 정성 들여 만든 청경채 버섯볶음을 올리고 칠리소스로 화려한 연꽃을 피웠다.
안상훈이 직접 접시를 들고 나가고, 서인우가 조용히 그의 뒤를 따랐다.
“우와, 아빠! 이거 아빠가 만든 거야? 꽃도 아빠가 그린 거고?”
안유진의 눈이 초롱초롱 빛나고 있었다.
“여기 채소볶음하고 꽃은 아빠 작품이고, 이 치즈가 올라간 음식은 여기 이 삼촌 작품이야. 뜨거우니까 조심해서 먹어야 해.”
“아아니. 삼촌 아니고 오빠.”
조금 전 눈에서 꿀이 뚝뚝 떨어지던 안상훈이 미간을 찡그리며 물었다.
“유진아. 왜 삼촌이 아니고 오빠야?”
“아빠는 그것도 몰라? 삼촌은 가족이잖아?”
“아, 그런 거지? 가족도 아닌데 삼촌이라 부르면 안 된다는 뜻이지?”
“아아니.”
안유진이 너무 당연한 걸 묻는다는 표정으로 안상훈을 쳐다봤다.
“삼촌하고는 결혼 못 하니까.”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똑 부러지게 말하는 안유진의 말에 그곳에 있는 사람 모두 소리 내 웃었다.
단 한 사람 안상훈만 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