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9화.
“점장님, 1차 심사 끝나면 가게 나오실 거죠?”
“그럼요, 2차 심사과제 연습도 해야 하고, 더운데 일 끝나고 가볍게 맥주도 한잔합시다.”
오전에 심사를 위해 출발하기 전 오승연 홀 매니저와 나눴던 대화가 머릿속을 괴롭혔다.
[만가복] 마포점 앞에 멈춘 김원상의 차에서 내린 사람은 차은석 하나였다.
“오늘은 직원들한테 잘 좀 말해주세요. 난 머리가 좀 아파서….”
“먼저 들어가서 쉬십시오. 하지만, 내일 일찍 나오셔서 2차 심사 연습 다시 한번 같이하시죠.”
“그렇게 합시다. 그럼.”
김원상은 더는 차은석 얼굴을 볼 수가 없었다.
그대로 차를 몰아 도로 위를 무작정 달렸다.
미치게 화가 났다.
처음에는 아버지 김형식의 추잡한 수작에 화가 났다.
하지만, 김원상이 견디기 힘들게 화가 나는 건 결국 이번에도 서인우를 이기지 못할 거라는 아버지의 확신 때문이었다.
자신 있냐고 물었고, 그렇다고 대답했는데...
아들의 말을 전혀 믿어보려고도 하지 않았다.
잠시 신호에 멈춰 브레이크에 올리고 있던 발을 떼며 거칠게 출발했다.
[만가복] 본사 주차장에 대충 차를 세우고, 엘리베이터로 향했다.
10층 도착 음과 동시에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빠른 걸음으로 회장실로 걸어갔다.
“안녕하십니까?”
비서가 일어나며 인사를 건넸지만, 그 소리가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지금 안에서 회의...”
비서가 뭐라 말하는 듯했지만, 바로 문을 벌컥 열었다.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차성철 팀장과 김형식이 뭔가를 의논하고 있는 듯 보였다.
“매너 없이 지금 뭐 하는 짓이냐?”
김형식의 차가운 뱀 같은 눈이 김원상을 노려보고 있었다.
“지금 내가 뭣 때문에 찾아왔는지 아실 텐데요. 여기 차 팀장이 알아도 상관없으면 같이 앉을까요?”
평상시 같지 않게 낮게 깔린 차분한 김원상의 말투에 잠시 입을 다물고 있던 김형식이 쩝 소리를 내며 다시 입을 열었다.
“차 팀장. 나중에 얘기하지.”
눈치 빠른 차성철 팀장이 테이블 위에 놓인 서류들을 챙겨 회장실을 나갔다.
“뭔데 공사 구분 못 하고 회사에 쳐들어와서 소란이냐?”
“공사 구분이요? 그럼 오늘 심사에서 하신 일은 공과 사 중에 뭐에 해당하는 겁니까?”
“무슨 헛소리를 지껄이는 거야?”
“또 모르신다?”
김원상이 입꼬리를 올리며 비릿한 웃음을 웃어 보였다.
“오늘 심사에 사람 심어놓으신 거 다 들통났습니다. 연기 그만하시고 말씀 좀 해보세요. 도대체 저를 어떻게 생각하시는 겁니까?”
“오늘 심사는 동점으로 끝났다면서? 이기지도 못해놓고 어디서 큰 소리야?”
“그 더러운 돈으로 매수한 사람들한테 벌써 결과까지 전해 들은 겁니까?”
김형식의 매서운 눈이 김원상을 위아래로 쳐다봤다.
“내가 그렇게 하지 않았으면...오늘 결과가 어땠을까? 이렇게 뻔히 보고도 모르는 거냐? 멍청한 놈 같으니라고.”
“해보지 않고 어떻게 압니까? 아버지가 그런 비열한 수작 안 부렸으면 어떤 결과가 나왔을지 모르는 거 아닙니까?”
김형식이 기분 나쁜 소리를 내며 웃었다.
“모자란 거냐, 순진한 거냐?”
기가 막힌 김원상은 아무 말 없이 이어지는 얘기만 기다리고 있었다.
“오늘 심사단으로 간 사람 중 절반이 내가 미리 손 써놓은 거였다. 그 말이 뭘 의미하는지 정말 못 알아듣는 거냐?”
“아니요, 그냥 내가 한 음식을 맛보고 나를 선택했을지도 모를 사람들에게 쓸데없는 짓을 한 건 아버지입니다.”
“미련한...너는 서인우 그놈의 상대가 못 돼!”
“아버지!”
김원상은 오늘 있었던 심사 조작이 아버지 김형식이 벌인 것이라는 사실보다 결국 그가 서인우를 이기지 못한다고 확신하고 있는 아버지가 원망스러웠다.
“뭣 때문에 그렇게 확신 하는 겁니까? 내가 왜 그놈한테 안된다는 거냐고요?”
“목소리 낮춰라. 밖에 다 들려.”
“이제 비서들까지 듣게 될까 봐 쪽팔리십니까?”
김형식이 짧게 한숨을 쉬고는 에어컨 바람에 이미 식어버린 차를 마셨다.
“서인우가 요리하는 모습을 보고도 그런 소리를 지껄이고 있어? 그놈은 그냥 타고난 거다. 내가 제일 싫어하는 놈들, 바로 천부적인 요리 천재라는 말이다.”
“나도 그 정도는 한단 말입니다. 지난번 대회에서는 아깝게 우승을 놓쳤지만, 그딴 놈 이길 수 있다고요!”
“아니, 넌 절대 못 이겨. 서인우 그놈이 죽기 전에는...”
무서웠다.
전에는 그냥 욕심을 위해서는 뭐든 마음대로 하는 아버지가 그저 경멸스러웠었다.
하지만, 조금 전 아버지 김형식의 눈에 살기가 느껴졌다.
“이길 겁니다. 내 실력으로 반드시 이길 거라고요. 그러니까 제발 한 번만 나를 믿어봐 주세요.”
김원상이 소파에서 내려와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마지막으로 한 번만 믿어주세요.”
김형식의 눈빛이 점점 더 무섭게 변하고 있었다.
* * *
2차 심사 준비를 위해 안상훈과 치즈 치킨밥을 만들어 마지막 레시피를 의논하고 있던 서인우의 핸드폰에 반가운 이름이 떠올랐다.
“안녕하세요, 선배님.”
-가게지? 나 10분 후면 도착해.
“지금...가게로 오신다고요?”
-그렇다니까. 새우면 완성품 가지고 가는 중인데, 가게에 있을 시간 아닌가?
“저 사정이 있어서 지금 근처 마영준 셰프님 가게에 있습니다.”
-아, 거기 알아. 그럼 그쪽으로 가지.
통화를 마치고 치즈 치킨밥 시식이 이어졌다.
“안 셰프님, 표고 향이 좀 강하게 느껴지지 않으세요?”
“글쎄요. 난 잘 모르겠는데...”
“표고버섯은 몸에 좋긴 한데 향이 강해 호불호가 있어서요. 표고버섯을 넣지 않고 한번 만들어 보면 어떨까 싶은데요.”
“레시피를 변경하기에는 시간이 너무 없는데...”
서인우는 벌써 표고버섯을 넣지 않은 치킨 밥을 찌고 있었다.
“한번 만들어 보고 결정하도록 해요. 제가 향에 예민하기도 하지만, 대중적인 메뉴로 만들고 싶다는 욕심이 생겨서 그렇습니다.”
“그럼 맛을 보고 결정합시다.”
찹쌀밥이 맛있게 익어가고 있는 그때 박정원이 박스를 손에 들고 가게 문을 열고 들어왔다.
“박정원 셰프님.”
마영준이 반가워하며 다가갔다.
같이 얘기 나누고 있던 이준형도 깍듯하게 인사했다.
“오랜만입니다. 서인우가 여기 있다고 해서 왔어요.”
박정원의 얼굴에 달갑지 않다는 표정이 역력했다.
마영준은 최만수도 박정원도 아마 그를 아는 다른 사람들 누구도 자기를 반기지 않을 거라는 생각에 지난날이 후회스러웠다.
그럴수록 더 김형식에게 화가 났다.
“주방에 있을 겁니다. 제가 가서...”
“선배님, 오셨어요?”
마영준이 막 몸을 돌리려 할 때 서인우와 안상훈이 주방에서 나와 그들에게 다가왔다.
“서인우. 오면서 보니까 가게 문을 닫았던데? 무슨 일이야?”
서인우는 그동안 있었던 일들을 자세히 알려주었다.
얘기를 듣는 내내 박정원의 얼굴이 심하게 굳어졌다.
“그런 일이 있었으면, 나한테 연락을 하지 그랬어? 우리 같이 사업하는 동료 아니었나?”
“죄송합니다. 어떻게든 제힘으로 해결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지금 MS 백화점 심사 준비를 하는 거라고?”
“네. 오늘 1차 심사 마치고 이틀 후 2차 심사가 있습니다. 이분은 예전 [서풍]에서 서동수 셰프님한테 직접 배우신 안상훈 셰프님입니다.”
“[서풍]의 수제자 시구만. 반갑습니다, 박정원입니다.”
“반갑습니다.”
안상훈이 쑥스러운 듯 짧게 인사를 건넸다.
이에 박정원이 박스를 열며 말을 이었다.
“공교롭게 또 [만가복]이랑 붙었군. [서풍]이나 [만가복] 모두 백화점 측에서는 두 팔 벌려 환영 일 텐데...”
“이번에 서로 입점을 원하고 있어서 결국 심사까지 가게 됐습니다.”
“난 기쁜 소식 빨리 알려주려고 급하게 달려왔는데…. 이거 새우면 완성품이야. 내일부터 바로 대량 생산할 수 있게 됐어.”
“정말입니까? 보완점들은 다 해결이 된 겁니까?”
“그러니까 대량 생산에 들어간다는 거지. 한번 잘 봐봐.”
서인우가 박스 안을 살폈다.
박정원이 하얀 면이 네 개 들어있는 투명한 것과 화려한 포장이 되어있는 상품을 들고 설명하기 시작했다.
“이건 우리가 흔히 접하는 우동 사리나 라면 사리 같은 거야. 모든 음식에 면 대신 사용할 수 있지.”
“그러니까, 예를 들어 볶음 우동을 해 먹으려 하는데, 밀가루 면을 못 먹는 사람은 이 새우면으로 해 먹으면 된다는 그런 말씀이신 거죠?”
이준형이 정리하듯 물었다.
“그렇지. 그럼 이건 뭐냐면?”
“그건 백 짬뽕 밀키트 겠네요?”
“맞아. 여기 음식명 적혀있는 것처럼 이거 하나면 [서풍]의 백 짬뽕을 그대로 만들 수 있는 거지. 물론 완벽히 똑같을 수는 없다는 건 잘 알 테고.”
마영준이 자리에서 일어나서는 테이블에 펼쳐놓은 새우면을 주섬주섬 챙겼다.
“제가 지금 주방에서 요리해보겠습니다. 우선 새우면 사리로 해물볶음 우동을 만들어 보겠습니다.”
마영준이 주방으로 들어가자, 안상훈도 일어나 조용히 그의 뒤를 따랐다.
“선배님, 그럼 새우면은 바로 판매 들어가는 겁니까?”
“내 가게에서는 내일부터 바로 새우면과 일반면으로 구분해서 주문할 수 있게 해보려고. 밀키트는 판매 루트를 찾아야겠지.”
이준형이 서인우의 눈치를 슬쩍 보더니, 조심스럽게 물었다.
“선배님, MS 백화점 식품매장에 진열하고 팔면 어떨까요?”
“MS 백화점? 거기라면 광고도 되고 최고지. 하지만, 백화점에 상품 하나 넣기가 쉬운 일이 아니야.”
“그건 걱정하지 마십시오.”
“이 사람 왜 이렇게 자신만만해? MS 백화점에 뭐 친구라도 일하고 있나?”
실실 웃고 있는 이준형을 보고 박정원이 궁금해 죽겠다는 표정을 보였다.
“내 친구가 백화점에서 일해봤자, 잘해야 대리 정도 달았으려나? 그 정도 빽으로는 어림도 없죠. 사장이나 회장님 정도 알고 있으면 몰라도.”
“최민기 사장하고 아는 사이인가?”
이준형이 의자를 당겨 박정원 가까이 몸을 숙였다.
“선배님. 최민기 사장 말고 MS 백화점 회장님이 누구인지 아십니까?”
“MS 백화점 회장? 뉴스에서 최민기 사장은 몇 번 봤는데, 회장에 대한 정보는 전혀...”“그 할아버지 말입니다. 요리 경연대회 최고령 참가자였던 최만수 할아버지요.”
“이 친구가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거야? 서인우 이게 어떻게...”
박정원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으며 서인우에게 어서 정확한 얘기를 풀어보라고 재촉했다.
“어제 MS 백화점에 1차 심사를 하러 갔다가 알게 됐습니다. 최만수 어르신이 그 백화점 회장님이셨더라고요.”
“어제 여기에도 오셨었어요.”
이준형이 신이 나 말을 덧붙였다.
“그래도 달라지는 건 없습니다. 이 새우면은 당당하게 심사를 통해 입점시킬 겁니다. 저는 자신 있습니다. 선배님은 자신 없으십니까?”
박정원이 마땅한 답을 찾기 위해 눈동자를 굴리는 사이 마영준이 접시 가득 볶음 우동을 완성해서 나왔다.
새우와 오징어, 청경채, 숙주 등을 넣어 함께 볶아낸 볶음 우동은 윤기가 자르르해 먹음직스럽게 보였다.
“그럼 우선 시식 먼저 해보자고.”
각자 앞접시에 우동을 가져가 식감에 신경 쓰며 맛을 보고 있었다.
“요리하면서는 밀가루로 만든 일반 우동면과 차이가 없었습니다. 식감은 오히려 더 탱글탱글한 게 저는 아주 만족입니다. 드셔 보세요.”
마영준의 설명에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이거 정말 맛있는데요? 방송에서 인우가 만든 새우면을 모르는 사람은 이게 밀가루가 전혀 들어가지 않았다는 걸 믿기 어려울 정도겠어요.”
말을 마친 이준형이 입안 가득 볶음 우동을 집어넣었다.
“안 셰프님은 제가 만든 새우면을 모르는데, 어떻습니까? 식감이나 포장 상태 등등 고려해서 말씀해 보세요.”
“저는 먹어보면서는 솔직히 밀가루를 전혀 쓰지 않은 면이라는 걸 몰랐습니다. 그 정도로 아주 훌륭합니다.”
“앗싸, 좋았어.”
신이 난 이준형이 이번에는 새우면 밀키트를 들고 일어났다.
“요린이도 이것만 있으면 [서풍]의 백 짬뽕을 만들 수 있다는 거죠? 그럼 내가 딱 제격이죠. 잠시만 기다리세요.”
평상시 라면 끓이는 게 최고의 요리인 이준형이야말로 제일 적임자이긴 했다.
겉봉투에 적힌 대로 시간은 10분이면 충분했다.
그새 완성된 백 짬뽕을 들고나오는 이준형의 얼굴이 벌겋게 물들어 있었다.
“이거 정말 대박입니다. 인우가 만들어 줬다고 해도 믿을 정도예요.”
박정원 역시 입이 귀에 걸려 작은 그릇에 백 짬뽕을 나눠 담았다.
“내가 그랬잖아. 이건 진짜 성공할 거라고.”
“그래서 지금 당장 가지고 와보래요.”
이준형의 얼굴이 이제는 완전히 잘 익은 토마토가 되었다.
“누가?”
“MS 백화점 최만수 회장님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