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 중식당엔 무언가 특별한 게 있다-98화 (98/200)

제98화

박진상의 얼굴이 씹다 뱉어놓은 껌처럼 제대로 구겨졌다.

“회장님, 회, 회장님. 한 번만 용서해 주세요. 저도 정말 억울합니다.”

“뭐요? 억울해?”

“[만가복] 김형식 회장이 직원 하나 시켜서 그 표시만 해주면 나머지는 알아서 한다고 해서...저도 일이 이렇게 진행 될 줄 몰랐습니다.”

“몰랐습니까?”

뭔가 희망의 끈이라도 잡은 듯 박진상의 얼굴이 스멀스멀 밝아지기 시작했다.

“네. 김정훈이를 시켜서 아주 작은 표시만 하면 그다음 과정은 몰라도 된다고 해서...”

“지금 백화점 부장이라는 사람이 그게 할 소리입니까?”

“네? 그게...”

“감히 내 회사에서 내 직원을 해고하겠다고 협박까지 해놓고서는 지금 어디서 고개를 들고 변명을 하는 거야?”

박진상이 아무 말도 못 한 채 입을 꾹 다물었다.

“내 회사 사람이 [만가복] 회장의 말에 따라 이런 짓을 벌이다니... 어쨌든 오늘 이후로 얼굴 보는 일 없도록 합시다.”

소식을 들었는지 급하게 달려온 최민기 사장이 평상시와 달리 심하게 화를 내는 아버지 최만수의 팔을 조심스럽게 잡았다.

“회장님. 혈압 올라가십니다. 나머지 일은 제가 알아서 처리할 테니, 장 비서님 아버지 모시고 돌아가 계세요.”

“여기 박부장이라는 사람은...”

“걱정하지 마십시오. 이 시간 이후로는 이 백화점에 발도 붙이지 못할 겁니다.”

“사장님 오셨으니 저희는 물러날까요, 회장님? 이제 회사 일은 거의 손 떼셨는데…. 노년의 낙에 대해서 하던 얘기나 하시죠.”

박진상을 한 번 더 노려보고 나서야 최만수가 평상시 온화한 눈빛으로 아들 최민기를 바라봤다.

“자세한 얘기는 나중에 하자. 나는 나가서 만날 사람이 있어. 장비서, 이제 가도록 하지.”

“네, 회장님.”

최만수는 주차장으로 향하는 엘리베이터를 타자마자 휴대폰에 저장해 놓은 서인우의 번호를 찾아 전화를 걸었다.

“안녕하십니까? 어르. 아니, 회장님.”

-지금 가게로 가면 잠시 만날 수 있나?

“죄송합니다. 사실, 가게는 사정이 생겨서 며칠 전에 문을 닫았습니다.”

-뭐? 그럼 지금 어디서 일하고 있는 건가?

“아직 적당한 곳을 찾지 못했습니다. 지금은 아는 선배님 가게에서 2차 심사 준비하고 있습니다.”

-내 번호로 그곳 위치 좀 찍어 보내주게. 좀 전에 제대로 인사도 못 해 서운해서 말이야.

“네, 오랜만에 봬서 반가웠었는데…. 시간 내주신다면 제가 오히려 감사한 일이죠.”

이준형, 안상훈과 함께 마영준 가게에 도착했을 때는 막 점심 장사가 끝나가고 있었다.

오늘 있었던 1차 심사 결과가 궁금한 마영준은 급하게 마지막 주문 음식을 만들어 놓고, 서인우와 이준형, 안상훈이 앉아있는 테이블로 다가갔다.

“오늘 심사 결과는? 당연히 [서풍]이 이겼지?”

“말도 마세요. 오늘 완전 반전에 반전, 대반전이었어요.”

“무슨 소리야? 완전 막상막하였나 보네.”

이준형이 뭐부터 말해야 할지 고민하는 듯 눈동자를 몇 바퀴 돌리더니 바로 말을 이었다.

“우선 심사 결과부터 말씀드리자면 완벽하게 동점이었어요.”

“뭐? 동점?”

“네, 이번 심사가 블라인드 테스트였잖아요?”

“그랬지. 어떻게 심사해도 여기 요리 고수들을 이기기는 힘들텐데...하긴 김원상 셰프와 차은석 셰프도 실력이 만만치 않긴 해.”

안상훈은 여전히 아무 말 없이 그들의 대화를 듣고만 있었다.

“오늘 그곳에 누가 왔었는지 아세요?”

마영준이 자꾸 묻지 말고 그냥 빨리 얘기하라는 눈치를 줬다.

“아마 들으면 선배님도 놀라 뒤로 넘어갈 겁니다.”

“누가 왔었는데 그래?”

“혹시 지난번 경연대회 때 최고령 참가자였던 최만수 할아버지 기억하세요?”

“그 어르신? 당연히 기억하지. 아주 인상적이었거든.”

“그분이 오셨는데요...”

그다지 놀랄 일도 아니라는 듯한 표정으로 마영준이 피식 웃었다.

“요리에 일가견이 있으시고, 사람들한테 인지도도 좀 있고 하니 MS 측에서 일부러 섭외 했나 보네.”

“내가 그런 걸 가지고 놀라 기절할 거라 하겠어요?”

“이 친구 완전히 흥분했네. 뭐 그 어르신이 그 백화점 사장 아버지라도 되나?”

웃으며 말하던 마영준이 순간 입을 다물며 놀란 눈으로 그를 보고 있는 나머지 셋을 번갈아 쳐다봤다.

“뭐, 뭐야? 진짜 그 백화점 사장 아버지라고?”

“선배님, 왜 여기서 음식을 만듭니까? 밖에 돗자리 깔고 점이나 봐주시지….”

“인우야, 이 친구 하는 말이 정말이야? 그 어르신이 MS 백화점 사장 아버지가 맞는다고?”

서인우가 막 입을 열려고 할 때 가게 문이 열리며 최만수가 모습을 나타냈다.

모두 약속이나 한 듯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여기는 어떻게...?”

이준형과 마영준이 동시에 입을 열었다.

최만수 또한 당황하기는 마찬가지인 듯 보였다.

분명 요리 경연대회 때 심사위원으로 나왔던 마영준의 얼굴을 똑똑히 기억했다.

자신이 보기에는 너무나 훌륭한 서인우의 요리를 계속해서 지적하고 심지어 최저 점수를 줬던 바로 그 사람.

게다가, 눈에 띄게 [만가복] 김원상의 요리에 후한 점수를 줬었다는 걸 분명히 기억하고 있었다.

“회장님, 잘 찾아오셨네요. 정식으로 인사시켜 드리겠습니다.”

서인우가 최만수에게 다가가며 외치는 소리에 눈이 동그랗게 커진 마영준이 이준형의 귀에 대고 작은 소리로 물었다.

“어른신을 왜 회장님이라고 부르냐? 사장 아버지라서?”

“내가 딱 그 얘기를 하려던 타이밍이었는데...저 분이 처음 MS 백화점을 만든 회장님이시랍니다. 대박이죠?”

“뭐?”

자기도 모르게 이준형의 귀에 대고 소리를 지른 마영준 앞으로 서인우와 최만수가 다가왔다.

“우선 여기 마영준 셰프님은 기억하시죠?”

“그럼, 내 기억에는 서인우의 요리를 무척 싫어했던 걸로 아는데?”

그 말에 마영준이 잠시 고개를 숙였다.

“마영준입니다. 그때는 정말 죄송했습니다.”

어떻게 된 영문인지, 왜 하마터면 서인우를 떨어트릴 뻔 했던 저 작자와 서인우가 같은 공간에서 그것도 이렇게 화기애애한 분위기에 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 그 당시 제가 했던 모든 행동에 대해 여기 서인우 셰프에게 용서받고 이제는 친한 형, 동생 사이가 됐습니다.”

“그랬군요. 잘된 일이군.”

서인우가 이번에는 안상훈을 가리켰다.

“오늘 저와 함께 요리해주신 안상훈 셰프입니다. 저희 아버지 서동수 셰프님의 유일한 제자이십니다.”

“어! 그래? 이상하네. 내가 그렇게 자주 갔었는데…. 한 번도 얼굴을 본 기억이 없네요. 반갑습니다. 최만수입니다.”

“안녕하십니까? 안상훈입니다.”

그 말 외에는 안상훈의 입에서 어떤 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여기 안셰프님은 항상 주방에서 혼자 묵묵히 일하셨습니다. 그래서 저도 이번에 처음 알게 됐습니다.”

서인우가 보충 설명을 하자 이해된다는 듯이 최만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저는 이준형이라고...”

“오늘 인사 나누지 않았나요? 서인우씨 사업 파트너.”

“네. 기억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마영준이 최만수를 테이블로 안내하고는 주방에 들어가 음료수를 내왔다.

“날씨도 더운데 시원하게 한 잔 드시면서 말씀 나누세요.”

“고마워요.”

시원한 유자에이드를 크게 한 모금 들이킨 최만수가 네 명의 조합이 신기하다는 눈으로 쳐다봤다.

“지금 대한민국에서 요리 좀 한다는 사람은 여기 다 모여있네요. 다음에 기회가 되면 나도 [서풍]의 백 짬뽕을 꼭 배워보고 싶습니다.”

“회장님. 말씀 편하게 하세요.”

마영준이 역시 적응이 안 된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젊어서 이것저것 안 팔아 본 게 없을 정도로 고생을 많이 했어요. 그러다가 작게 마트를 한 게 계기가 돼서 점점 사업을 키웠지.”

요리 경연대회 때 최만수가 말했던 어린 시절 얘기가 떠오르기는 했다.

“그런데, 어떻게 아무도 알아보지 못했던 거죠? 분명 뉴스에서라도 봤을텐데...”

마영준이 여전히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비록 MS 백화점을 내가 세우기는 했지만, 언론에 노출된 적은 한 번도 없었어요. 감사하게도 내 아들이 판단도 바르고 실력도 좋아서 일찍부터 경영을 맡겼지.”

“아드님이시라면 지금 최민기 사장님을 말씀하시는 건가요?”

최만수가 고개를 끄덕이자 마영준과 이준형도 같이 고개를 끄덕였다.

“ MS 백화점 최민기 사장님이라면 방송을 통해 몇 번 봤습니다. 워낙 훌륭한 경영인으로 사람들 입에 자주 오르내리기도 했고요.”

“그래서 내가 맘 놓고 평생 꿈이었던 요리를 할 수 있었던 겁니다. 오늘도 [서풍]하고 [만가복]이 심사에 참여한다는 얘기를 들으니 궁금해서 참을 수가 있나? 그래서 한걸음에 달려 온건데...”

최만수의 얼굴이 심하게 어두워졌다.

“난 서인우 자네가 말한 것처럼 내 음식을 맛있게 먹어 줄 손님을 가지고 장난치는 그런 짓은 절대 용서할 수 없네.”

다 같이 심각한 표정을 지어 보이는 가운데, 마영준만이 무슨 소리인지 어리둥절해 하고 있었다.

이준형이 하고자 했던 얘기를 다 끝내지 못했는데 갑자기 등장한 최만수 때문에 중요한 걸 듣지 못한 상태였다.

“오늘 있었던 일은 내가 절대 그냥 넘어가지 않을 겁니다. 그 약속 하려고 찾아왔어요.”

서인우가 꾹 다물고 있던 입술을 어렵게 떼어 물었다.

“오늘 일과 관련된 MS 백화점 직원은 회장님의 처분대로 하시는 게 맞는다고 생각됩니다. 하지만...”

잠시 말을 끊고 눈을 두 번 깜빡거리더니 다시 말을 이었다.

“오늘 저희와 같이 심사에 참여한 김원상 셰프와 차은석 셰프는 정말 최선을 다하는 걸 느낄 수 있었습니다.”

“나도 그건 알고 있어요.”

“네?”

“오늘 [만가복] 셰프들의 눈은 절대 거짓말을 하고 있지 않았습니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래서 2차 심사도 꼭 같이 겨뤄보고 싶습니다.”

이준형이 미간을 찡그리며 서인우의 팔을 툭 쳤다.

“아무리 그래도 부정을 저지른 팀하고 다시 또 경쟁하려고? 잘하던 가게까지 문 닫게 했는데...또 김형식이 무슨 수작을 부릴지 알고?”

“뭐? 그게 무슨 소리요?”

“뭐? 또 김형식이라고?”

이준형의 말에 최만수와 마영준이 동시에 소리를 높여 물었다.

이마에 주름이 잡힐 정도로 잔뜩 인상을 쓰고 있는 마영준과 조금 전 요리 얘기할 때 보여준 온화한 미소가 싹 사라진 최만수의 얼굴이 이준형을 쳐다봤다.

“그게...”

당황한 이준형이 서인우에게 SOS를 쳤다.

짧게 한숨을 내쉰 서인우가 김형식에 의해 가게 문을 닫게 된 그동안의 사정을 간략하게 설명해 주었다.

그러는 사이 이준형이 마영준에게 오늘 1차 심사에서 있었던 [만가복]이 저지른 수작을 상세히 알려 주었다.

마영준이 흥분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 인간 도대체 서인우 너한테 왜 이러는 거냐? 요리 대회 때도 그렇게 너를 못 잡아먹어 난리더니….”

“뭐요? 그럼 요리 경연대회 때부터 [만가복] 김형식이 뭔가 일을 벌였다는 겁니까?”

크게 심호흡을 하고 난 마영준이 그와 김형식 사이의 거래와 그 후 보복까지 상세히 말해주었다.

“이 정도까지 사람을 괴롭히다니...”

화가 난 최만수가 주먹으로 테이블을 툭 치며 말했다.

“나도 [만가복] 김형식 회장의 사업 스타일과 끝없는 욕심은 들어서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건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수준이군.”

“처음에는 아버지 친구분이라 너무 반가웠습니다. 그런데, 이제 김형식은 그냥 제가 절대 지고 싶지 않은 사람입니다.”

서인우가 최만수의 눈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어떻게든 [만가복]을 꺾어버릴 겁니다. 이제 더는 당하고만 있지 않을 겁니다.”

“그래, 마음먹었으면 제대로 꺾어줘야지. 나도 이번 일을 그냥 넘길 생각이 절대 없어. 서인우!”

최만수가 오른손을 내밀며 인우의 이름을 불렀다.

“이제 세상을 한 번 가져봐! 이 늙은이가 자네 편에 있다는 걸 명심하라고!”

서인우가 조심스럽게 최만수의 손을 두 손으로 꼭 움켜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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