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7화.
그 순간 모든 것이 멈춰버린 것 같았다.
지금 어디에 있고, 무엇을 듣고 있는 건지 이 모든 상황이 믿기지 않았다.
-서인우, 너 저 사람 알아?
‘그럴 리가.’
-[서풍]하고 관련 있는 사람이라고는 여기 다 모여 있는데, 어디서 저런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지껄여!
이제 오늘 대결에 참여했던 [만가복]의 김원상, 차은석과 [서풍]의 서인우, 안상훈 그리고 이준형, 정다운을 제외하고는 식품부 직원들만 남아있었다.
그제야 최만수가 서인우와 김원상 곁으로 다가갔다.
“인사가 늦었네. 이렇게 다시 봐서 반가워요.”
“안녕하십니까? 어르신.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최만수 옆에 붙어 있던 장비서가 희미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내가 요리 경연대회 때 분명히 말했는데, 젊었을 때 이것저것 파는 일을 했다고...”
“네, 분명 그렇게 말씀 하셨죠. 그럼 이것저것 파는 곳이 바로 이 백화점입니까?”
“그렇지. 백화점보다 더 많은 걸 파는 곳이 있나? 안 그런가?”
큰 소리로 웃으며 말하는 모습을 보니 알고 있던 어르신이 맞기는 했다.
“반가운 인사는 좀 뒤로 미루고 우선 오늘 일부터 해결하도록 합시다. 구 과장!”
“네, 회장님!”
구본석이 큰 덩치로 바람을 가르며 달려왔다.
“조금 전 심사에 쓰였던 그릇들 다시 가져와 보세요.”
“네, 알겠습니다.”
구본석이 그릇이 있는 카트를 가져오자 까만 점이 찍힌 그릇을 하나 집어 들었다.
“김정훈 씨. 여기 이 점이 당신이 찍어둔 거 맞지?”
“네? 네. 마, 맞습니다.”
김정훈은 분명 [서풍]과 관련 있는 사람이 시킨 일이라고 자백까지 한 지금 왜 다시 문제의 그릇을 보고 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죄송합니다. 제가 한 짓은 맞지만...정말 저는 이렇게 이용될 줄 꿈에도 몰랐습니다.”
“그런가?”
“네. 그저 [서풍] 쪽 사람이라고만 밝힌 사람이 시킨 것뿐입니다.”
최만수가 알 수 없는 표정으로 작게 웃음을 웃어 보였다.
“좋아, 그렇다면 이 일을 해준 대가는? 뭔가 보상이 있어서 했을 거 아닌가?”
“그게…. 입점하게 되면 매달 수익의 10프로를 주겠다고 해서...돈이 궁했던 제가 잠시 정신이 나갔었습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뭐? 이런 미친...”
구본석이 입 밖으로 나오려는 욕지거리를 간신히 참는듯했다.
그러면서 동시에 서인우를 쳐다봤다.
그 눈빛에는 믿을 수 없다는 의아함과 실망감, 충격 등이 담겨있었다.
“아닙니다.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이미 얼굴이 터질 듯 붉어진 이준형이 소리쳤다.
“안녕하십니까. 회장님. 저는 여기 서인우 대표와 함께 [서풍 TWO]를 공동 운영하는 이준형이라고 합니다.”
최만수가 말없이 그를 쳐다보며 다음 말을 기다렸다.
“저와 서인우 셰프, 그리고 여기 정다운 직원 이렇게 셋이 젊음을 걸고 시작한 일입니다. 이런 말도 안 되는 짓은 맹세코 한 적 없습니다. 이건 모함입니다.”
이준형의 코가 다시 심하게 벌렁거렸다.
흥분한 이준형의 어깨에 잠시 손을 올린 서인우가 그의 눈을 바라보며 환한 미소를 보여 주었다.
“준형아, 내가 실력으로 보여줄 거야. 그러니까 너무 흥분하지 마.”
“그래도...이게 말이 되냐고? 이 심사가 우리에게 얼마나 중요한데...그리고 네가 잠도 안 자면서 그렇게 열심히 준비했는데 이런 모함을 듣고 그냥 넘기라는 말이야?”
“전에 내가 말했었지? 진실은 꼭 밝혀진다고.”
서인우가 이준형의 어깨를 잡은 손에 힘을 한 번 더 주더니 최만수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확실하게 말씀드릴 수 있는 건 저는 절대 손님을 상대로 이런 장난 치지 않습니다.”
구본석이 여전히 복잡한 눈빛으로 서인우를 쳐다봤다.
그 순간 최만수가 서인우에게 한 걸음 더 다가왔다.
“나는 알고 있지, 자네가 얼마나 요리에 진심인지 말이야.”
그 말에 슬슬 눈치를 보던 박진상이 조심스럽게 한마디 했다.
“회장님, 이런 어처구니없는 일이 벌어진 것에 대해 식품부 부장으로서 책임을 통감합니다. 이렇게 범인도 잡히고 자백도 한 마당에...”
“자백? 김정훈 사원이 한 말이 진실이라고 믿는 겁니까?”
“네? 그게 무슨...”
최만수의 갑작스러운 발언에 박진상을 비롯해 주변에 있던 사람들 모두 놀란 눈으로 김정훈을 바라봤다.
여전히 이마에 맺힌 땀을 닦으며 불안한 시선을 어디에 두어야 할지 몰라 동공이 방황하고 있었다.
“오늘 이상하게 이 대결에 와보고 싶더니….”
여전히 무슨 말인지 이해하기 힘든 사람들이 서로 무슨 말인지 눈으로 물으며 고개를 갸웃하고 있었다.
최만수 옆에 서 있는 장 비서만이 얼굴에 미소를 짓고 있었다.
“사실 처음 시식할 때부터 이상하다 생각을 했어. 칠리새우에 검은깨라...중식에는 거의 넣지 않는 검은깨가 그것도 하나만 보였지.”
식품부 직원 모두 작게 탄성을 보냈다.
“이상해서 뭐가 묻었나 하고 살짝 닦아봤는데, 지워지지 않더군. 아무리 우리 백화점이 관리를 철저히 해도 하나 정도는 뭔가가 묻을 수 있다고 생각했네.”
“지난달에 새로 사들인 가장 깨끗한 그릇을 사용했습니다. 회장님 말씀대로 우리 식품부에서는 청결과 식기 관리를 신중히 하고 있습니다.”
구본석이 설명을 덧붙였다.
“세 번째 대결 메뉴인 삼선볶음밥이 나왔을 때, 똑같은 위치에 검은 점이 보이는 순간 옆자리에 앉은 장비서의 그릇을 살펴봤네.”
“역시 회장님 대단하십니다. 저는 같이 시식했는데 전혀 몰랐습니다.”
박진상이 일부러 더 큰 소리로 말했다.
“마지막 짬뽕이 나왔을 때 나는 이미 누가 한 짓인지 알고 있었네.”
“네? 그때 이미 아셨다는 말씀입니까?”
구본석이 소리를 지르자, 옆에서 귀를 막으며 박진상이 짜증이 잔뜩 묻은 눈빛을 보냈다.
그러거나 말거나 구본석이 여전히 흥분해 커진 목소리로 물었다.
“어떻게 아신 겁니까? 그럼 저 김정훈이의 반응을 일부러 보신 겁니까?”
“너무 일찍 밝혀 버리면 분명 다른 자백을 했겠지. 안 그런가? 김정훈 사원.”
얼굴이 하얀 백지장이 되어 버린 김정훈이 억울한 눈빛으로 박진상을 쳐다봤다.
급하게 남들 몰래 고개를 가로저은 박진상이 손수건을 꺼내 인중의 땀을 닦고 있었다.
“오늘 수고해준 [만가복]팀에게는 미안하지만, 내가 예전 [서풍] 때부터 거의 매일 점심을 그곳에서 짬뽕으로 해결했지. 그래서 요리도 시작하게 된 거고.”
전에 요리대회 때 최만수를 통해 얼핏 들은 내용이었다.
“국물만 먹어봐도 [서풍]의 맛을 단번에 알아차릴 수 있다는 얘기야. 이제 내 말을 알아듣겠나?”
“그러니까 정리하자면, 마지막 짬뽕을 드시면서 점이 찍혀있던 그릇이 어디 건지 아실 수 있었다는 말씀이시죠?”
“그렇지.”
구본석이 크게 침을 꼴깍 삼키고는 바로 이어서 질문을 던졌다.
“그럼 확실하게 말씀해주실 수 있겠네요? 도대체 이런 수작을 부린 곳이 [만가복] 입니까? 아니면 [서풍]입니까?”
최만수가 서인우 앞으로 걸어갔다.
“[서풍]인가?”
“절대 아닙니다. 회장님.”
걸음을 옮겨 김원상 앞으로 간 최만수가 다시 물었다.
“[만가복]인가?”
김원상이 짧게 한숨을 쉬고는 바로 대답했다.
“저도 절대 아닙니다. 하지만...”
눈을 감고 다시 한번 한숨을 쉰 김원상이 초점이 없는 듯한 눈빛으로 최만수를 바라봤다.
“[만가복]은 절대 아니라는 말씀은 못 드리겠습니다.”
“네? 점장님.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우리는 절대 그런 짓 하지 않았잖아요?”
놀라고 화가 난 차은석이 김원상의 팔을 자기 쪽으로 잡아끌며 물었다.
회장 아들이 자기 상사로 있는 사실 자체가 맘에 들지 않아 일부러 거리를 두었던 차은석이 요리대회 이후 김원상의 실력을 인정하기 시작했었다.
그의 실력과 노력에 조금씩 마음을 열어가던 중이었다.
그런 차은석은 지금 김원상이 하는 말이 무슨 의미인지 도저히 알아듣지 못했다.
김원상의 입에서는 더는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주위에서 듣고 있던 사람들 모두 궁금하고 답답하다는 표정으로 최만수만 바라봤다.
“나는 누가 꾸민 수작인지는 당연히 모릅니다. 하지만, 점이 찍혀있던 그릇은 정확히 [만가복]이었습니다.”
놀란 직원들이 저마다 웅성거렸다.
그리고는 바로 김정훈의 흐느끼는 소리가 들렸다.
“죄송합니다. 저는 정말 이런 의미인지 몰랐습니다. 시키는 대로 하지 않으면 바로 해고해 버린다고…. 흑흑.”
“감히 내 회사 직원을 누구 맘대로 해고해?”
최만수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장비서가 걱정스러운 눈으로 얼굴이 붉어진 그를 바라보자 잠시 흥분을 가라앉힌 최만수가 김정훈 앞으로 걸어갔다.
“내가 용서해 줄 수 있는 마지막 기회네. 누가 시킨 일인가?”
낮고도 위엄있는 목소리였다.
“정말 어렵게 들어온 이 회사에서 쫓겨나고 싶지 않았습니다. 제 부모님...”
목이 메 잠시 말을 끊은 김정훈이 떨림이 느껴지는 심호흡을 간신히 하고는 말을 이었다.
“제 부모님이 이렇게 큰 백화점에 취직했다고 얼마나 좋아하셨는데…. 일 년도 안 돼서 해고당할 수는 없었습니다.”
잠시 또 말을 끊은 김정훈이 고개를 돌려 박진상을 노려봤다.
“박 부장님. 저한테 왜 그러셨습니까?”
김정훈의 목소리가 바들바들 떨렸지만, 박 부장이라는 단어는 모두 똑똑히 들었다.
“지금 여기 있는 박진상 부장을 말하는 겐가?”
“네. 맞습니다.”
김정훈의 폭탄 발언에 그곳에 있던 직원들이 놀라고 당황해 표정 관리가 되지 않았다.
“박 부장, 지금 이 말이 사실인가?”
박진상이 털썩 바닥에 주저앉았다.
“그게 아니라...”
“정확히 사실만 말하도록 하세요. 좋은 말로 하는 건 이게 마지막일 테니.”
“죄송합니다. 이게 다 [만가복] 김형식 회장이 시킨 일입니다.”
“뭐라고?”
계속해서 빵빵 터지는 폭탄 발언에 모두 정신을 차리기 어려울 정도였다.
박진상의 입에서 김형식 회장의 이름이 나오자 직원들 모두 자기네 들이 손대기에는 일이 너무 커져 버렸다는 사실을 실감했다.
김원상만이 차분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표정은 차분했지만, 눈빛은 비참하게 일그러졌다.
옆에서 그 눈을 쳐다본 차은석이 이제야 김원상이 한 말을 이해할 수 있겠다는 듯이 눈을 감고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최만수 또한 복잡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어깨를 올리며 크게 한숨을 쉬고는 구본석에게 작은 소리로 뭐라 지시했다.
고개를 끄덕이며 지시 사항을 다 전해 들은 구본석이 서인우와 김원상 앞으로 다가왔다.
“오늘 수고해 주신 셰프님들은 이제 돌아가셔서 다음 2차 심사를 준비해 주시기 바랍니다. 이번 1차 심사에 대한 최종 판단은 추후 연락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구본석이 일일이 고개 숙이며 인사했다.
서인우를 비롯해 [서풍]과 [만가복] 사람들이 홀을 빠져나가고 잠시 그곳에는 정적만 흐르고 있었다.
그때 계속해서 입술을 꾹 다물고 눈을 감고 있던 최만수가 고요 속에서 낮은 음성으로 또박또박 그의 결정을 알리기 시작했다.
“김정훈 사원은 우선 돌아가서 처분을 기다리도록 하세요. 최민기 사장이 신중히 고민하고 결정할 테니.”
“네, 죄송합니다.”
김정훈의 목소리가 심하게 갈라져 나왔다.
“박진상 부장!”
“네, 회장님. 이번 한 번만 용서해 주시면…. 앞으로는 절대 이런일이...”
“앞으로? 그런 건 없어. 당신은 오늘 이 시간부터 해고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