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6화.
졸지에 심사를 진행했던 MS 백화점 중식당에 강한 북태평양 찬 기류가 휘익 몰아쳤다.
“회, 회장님. 무효라니요?”
박진상이 당황해 말을 더듬었다.
무효라는 말보다 어르신을 회장님이라고 부르는 것에 더 놀란 서인우가 이마에 주름이 잡힐 정도로 인상을 쓰며 그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다.
옆에 서 있던 김원상 또한 적잖이 놀란 표정이었다.
심사를 위해 온 사람들도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다른 사람도 아닌 이곳 백화점 회장이 직접 하는 말이라 무시할 수도 없었다.
“이 심사가 무효일 수밖에 없는 이유는 여기 구 과장이 설명해 줄 것입니다.”
최만수가 옆으로 비켜서자 구본석이 앞으로 나왔다.
스무 명의 심사단과 힘들게 요리를 했던 네 명의 셰프들, 그뿐 아니라 그곳에 있는 모든 사람이 숨죽여 구본석의 입이 열리기만 기다리고 있었다.
“이번 심사는 처음부터 말씀드린 대로 누가 만든 음식인지 전혀 알지 못한 상태에서 심사하는 블라인드 테스트입니다.”
“그렇지.”
“실제로 그렇게 하지 않았나?”
작은 소리지만 여기저기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누가 만든 건지 철저하게 감추기 위해 그릇에 음식을 담을 때부터 모든 걸 비공개로 진행했고, 그래서 똑같은 그릇에 음식을 담았습니다.”
고개를 갸웃거리는 사람이 하나둘 더 많아졌다.
설명을 들을수록 더 지금 상황이 이해되지 않는다는 듯 보였다.
“정정하겠습니다. 똑같은 그릇에 음식을 담으려 했습니다. 하지만...”
구본석이 잠시 말을 끊고 심사단석에 앉아있는 사람들과 이번 심사의 모든 진행을 맡아주었던 직원들을 하나하나 쳐다봤다.
마른침을 삼키며 눈빛이 흔들리는 사람이 여럿 보였다.
한참 볼을 씰룩거리다 어깨를 들어 올리며 크게 심호흡을 한 구본석이 다시 끊었던 말을 이어갔다.
“여기 그릇들을 자세히 보면 깨끗한 하얀색에 작은 점이 찍혀있습니다. 마치 검은깨가 묻은 것처럼 말이죠.”
“뭐라고요?”
“어머, 말도 안 돼!”
“나도 본 거 같아요. 분명 검은깨가 묻어있었는데…. 그게 아니었다는 건가요?”
사람들이 저마다 흥분해 한마디씩 떠들었다.
“그릇 제일 윗부분에 정말 깨알같이 작은 크기의 점이 찍혀있었기 때문에, 아마도 이 사실을 미리 알고 있었던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누구도 의심하지 못했을 겁니다.”
웅성거리는 소리가 더 커졌다.
“솔직히 저도 몰랐으니까요. 조금 전 여기 계신 회장님이 저를 불러서 은밀히 체크를 지시하시기 전까지는 말이죠.”
이 자리에 있었던 사람들 모두 최만수가 구본석을 불러 귓속말을 하는 걸 다 보았기에, 이제야 다들 이해가 되었다.
구본석이 하는 충격적인 발언에 땀 흘리며 요리를 마친 서인우를 비롯한 네 명의 셰프 얼굴이 실시간으로 구겨졌다.
-저거 분명 [만가복] 짓이다.
‘아직은 아무도 모르지.’
-얘는 꼭 찍어 먹어 봐야 뭔지 된장인지 안단 말이야.
‘무슨 말이야?’
-우리가 아닌데 그럼 누구겠냐? 분명 그 욕심 많은 능구렁이 같은 노인네가 꾸민 수작이지.
김원상의 얼굴 또한 심상치 않았다.
처음 경연대회 때에는 모르고 있다가 사실을 알게 되면서 수치스러웠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에는 뭔가 조작이 있었다는 사실 만으로 이미 충분히 짐작되었다.
‘역시 이번에도 내가 서인우를 못 이길 거로 생각했다는 거지?’
심각한 분위기에 혼자만 실실 웃음을 웃고 있었다.
-인우야. 저놈 결국 저렇게 미쳐가나 보다. 지금 웃음이 나올 타이밍이냐?
서인우도 지금 김원상이 왜 웃고 있는지 이해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그의 웃음이 기뻐서 웃는 건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들 뿐이었다.
“그럼 그 작은 표시가 무엇을 의미하는 건지 파헤쳐 봐야겠죠?”
박진상이 구본석을 향해 눈을 흘기며 앞으로 나왔다.
“회사 일이니 우선 고객 심사단은 귀가하시게 하고...”
“그건 아니죠, 부장님. 이 표시가 누구에게 보이기 위한 것인지는 이 사람들과 함께 밝혀야 하지 않겠습니까?”
“괜히 일 시끄럽게 만들지 말고 자리 정리부터 해요. 회사 이미지도 있는데...”
최만수가 매서운 눈으로 박진상을 쳐다봤다.
“박 부장이라고 했나?”
“네, 회장님.”
“이런 불미스러운 일이 내 회사에서 일어났다는 사실을 이 사람이 용납할 수 없겠는데.. 그래도 지금 자리를 정리해야 합니까?”
“아, 아닙니다. 감히 제가...지금 확실하게 밝혀내야죠.”
시원한 에어컨이 열 일을 하는 중인데도 박진상의 인중에서 땀이 똑 떨어졌다.
그 광경을 계속 지켜보고 있던 서인우는 눈앞에서 펼쳐지고 있는 상황이 믿기지 않았다.
같이 요리 대회에 나가서 많은 의지가 되었던 어르신을 이곳에서 만나게 된 것도 믿기지 않는데, 그가 이 백화점의 회장이라니.
최만수도 그런 서인우의 눈빛을 의식하는 듯 보였으나 다가와 인사를 건네지는 않았다.
“인우야. 저 할아버지 맞지? 그때 경연대회.”
“응, 맞아. 처음 시작할 때는 분명 없었는데?”
“첫 번째 음식 시식 끝나고 나서 갑자기 들어오셨어. 나도 사람들이 벌떡 일어나 회장님이라고 부르는 소리에 기절하는 줄 알았다.”
뭔가 조작이 있었다는 사실과 최만수를 이곳에서 만나게 된 일이 겹쳐 서인우의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심사 내내 내가 여러 가지를 생각해 봤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구본석이 어느 티브이프로그램 사회자처럼 말을 하기 시작했다.
“이 그릇에 손을 댈 수 있는 사람을 추려 봤더니, 처음 회사 식당에서 그릇을 준비해 온 우리 식품부 직원 두 명을 포함한 여기 직원들 안에 있는 누군가의 손을 거쳤을 겁니다.”
직원들 저마다 긴장한 기세가 역력했다.
“지금 이 심사를 위해 밤낮으로 열심히 일한 우리 직원들을 의심하는 거야? 구 과장 이 사람이 제정신이 아니군.”
구본석이 씩 웃으며 대답했다.
“저는 한솥밥 먹는 우리 직원들을 의심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고객 심사단은 저를 따라서 바로 여기 홀로 이동하셨습니다.”
심사단이 일부러 더 크게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그런데 말입니다.”
구본석의 말에 박진상이 제대로 짜증이 난 얼굴로 그를 노려봤다.
“이게 누구를 의심하고 심문하고 할 필요가 없습니다. 다행히 오늘 두 팀의 요리과정을 여러분께 보여드리기 위해 촬영을 하지 않았습니까?”
그 말에는 몇몇 얼굴이 확 변하는 게 보였다.
여차하면 폭발해 버릴 듯이 빨갛게 볼이 상기된 1년차 김정훈이 어쩔 줄 몰라 하며 맞잡은 손을 꾹꾹 누르고 있었다.
심사단에 있던 사람 중 여러 명의 눈동자가 정신없이 흔들리고 있었다.
그중 조금 전 개표를 도왔던 남자가 입을 열었다.
“바쁜데 입점 심사에 참여해 달라고 해서 왔더니, 지금 우리를 의심하는 겁니까? 기분 나빠서 더는 여기 있지 못하겠습니다.”
구본석이 뭐라 의견을 말하려고 할 때 심사단에 있던 다른 남자가 재빠르게 말을 이었다.
“맞아요. 이 귀한 시간을 이렇게 낭비하게 하다니...”
“죄송합니다. 잠시면 모든 게 다 밝혀집니다.”
구본석이 불룩한 배를 최대한 집어넣으며 고개를 푹 숙였다.
“아니에요, 우리 심사단 중에 부정행위를 한 사람이 있다면 밝혀야죠. 이런 찝찝한 상태로 집에 가고 싶지는 않습니다.”
“맞습니다. 오늘 이 심사를 위해 더운 날씨에 땀을 뻘뻘 흘리며 요리해준 저기 저 셰프들을 위해서라도 밝혀야 합니다.”
최만수가 그들 앞으로 다가왔다.
“이해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모든 과정이 다 녹화되어 있으니 바로 해결이 가능할 것 같습니다. 구 과장, 어떻게 됐나?”
“네, 지금 준비됐습니다. 심사 시작하기 전 주방을 찍어놓은 영상을 지금 공개하도록 하겠습니다.”
구본석이 리모컨으로 플레이 버튼을 누르자 멈춰있던 화면이 재생되기 시작했다.
아직 심사가 진행되기 전이라 주방에는 직원들 몇몇 만 왔다 갔다 움직이고 있었다.
조리대를 정리하고 마지막으로 재료들까지 준비한 후 직원들이 일제히 주방을 빠져나가는 모습이 보였다.
그리고 잠시 후.
직원 하나가 살며시 들어와 눈치를 보며 심사에 사용할 그릇들을 향해 재빨리 걸어갔다.
화면에는 뒷모습만 보일 뿐이었다.
왼손으로 그릇을 드는 동작과 오른손을 분주하게 움직이는 모습이 보일 뿐 무엇을 하는 건지 누구인지 통 보이지 않았다.
“뭐야? 저 사람 촬영하는 걸 알고 있는 사람인 건가? 얼굴이 안 나오는데?”
“설마 저러다 끝나지는 않겠죠? 얼굴이 한 번 정도는 나오겠죠?”
심사단으로 온 사람들이 궁금한 내용을 서로 묻느라 바빴다.
똑같은 장면만 지루하게 이어졌다.
“이거 계속 보고 있어야 하는 거야? 난 이제 집에 가겠습니다.”
조금 전부터 아까운 시간을 버렸다고 투덜거리던 남자가 급기야 자리를 막 뜨려고 할 때였다.
구본석이 리모컨의 정지 버튼을 눌렀다.
“이제 저 사람이 누군지,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 밝혀질 겁니다.”
다시 리모컨의 재생 버튼을 누르는 것과 동시에 누군가의 외침이 들렸다.
“잘, 잘못했습니다.”
화면은 이미 뒷모습만 보이던 남자가 뒤를 돌아 서 있었다.
손에 기다란 펜을 들고 서 있던 남자의 얼굴이 드디어 공개되었다.
식품부 1년 차 김정훈이었다.
“회, 회장님. 정말 잘못했습니다. 하지만, 저도 억울합니다.”
콧등과 이마에 맺힌 땀을 연달아 닦으며 김정훈이 최만수 앞에 무릎을 꿇었다.
추리해본다고 했지만, 긴가민가했던 구본석이 놀란 얼굴로 김정훈을 바라봤다.
“김정훈 씨. 이게 무슨 일입니까? 아니, 도대체 왜 이런 일을 벌인 겁니까?”
“저도 이런 일이 있을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습니다. 정말입니다. 그저 시키는 일만 했을 뿐인데...”
“시키는 일이라고요? 누가 시켰다는 말입니까?”
김정훈이 화난 얼굴로 박진상을 노려봤다.
박진상이 시선을 돌리자 다시 고개를 돌린 김정훈이 최만수를 바라봤다.
“김정훈이라고? 식품부 직원인가?”
“네, 여기 취직한 지 아직 1년도 되지 않은 신입입니다.”
구본석이 김정훈을 간단히 소개했다.
“젊은 사람이 성실하고 부지런해서 팀원들 사이에 인정도 많이 받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왜...”
김정훈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입을 꾹 다문 채 잠시 생각에 잠긴 듯한 최만수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오늘 귀한 분들을 모시고 이런 불미스러운 일이 생겨서 진심으로 유감입니다. 제가 대신 사과드립니다.”
박진상과 구본석을 비롯해 백화점 직원들이 어쩔 줄 몰라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
“이 일은 우리 회사 직원과 관련 있는 일이니 철저하게 조사해서 한 치의 실수도 없이 해결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럼, 다음 2차 심사에서 뵙도록 하겠습니다.”
최만수가 서둘러 자리를 정리했다.
분명 그 안에 김정훈과 한통속인 사람들이 있을 거였다.
그런데, 급하게 자리를 정리하는 모습이 이해되지 않았다.
“회장님, 이렇게 갑자기 자리를 정리하시면….”
“우선 고객 심사단들 보내고 다시 얘기하지.”
뭔가 계획이 있는 듯한 눈빛에 구본석이 더는 말을 하지 않았다.
최만수가 김정훈을 자리에서 일으켰다.
“왜 이런 일을 벌인 겁니까? 어떻게 된 건지 자세히 얘기해봐요.”
“저는 아무것도 모릅니다. 그냥 심사에 사용될 그릇에 작은 점으로 표시만 해주면 된다고 했습니다.”
“그래서요?”
“네?”
최만수가 조금 전보다 차가운 표정을 지으며 묻자, 김정훈이 살짝 움찔하는 듯 보였다.
“작은 표시를 해주면 여기 심사단으로 있던 사람들 중 누군가는 그 표시를 알아볼 수 있었겠지?”
“저는 그런 건 정말 모릅니다. 그냥 시키는 대로...”
최만수가 매서운 눈으로 김정훈을 노려봤다.
그 눈빛에 서인우 또한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항상 지지해주고 웃어주던 최만수에게서 처음 보는 눈빛이었다.
“도대체 누가 그런 일을 시켰다는 말입니까?”
단호한 말투에 김정훈 뿐 아니라 그곳에 있는 사람들 모두 잔뜩 긴장한 듯 보였다.
“죄송합니다. 그건...”
김정훈의 목소리가 심하게 떨렸다.
“그건...말씀 드릴 수 없습니다.”
“뭐야? 이 사람이 지금 뭐 하는 짓이야? 감히 회장님 앞에서!”
박진상이 버럭 소리를 지르자 김정훈의 손이 바들바들 떨렸다.
“그게...”
“누굽니까? 이런 일을 벌이라고 시킨 사람이?”
“저도 이름은 밝히지 않아서 모릅니다. 그냥 [서풍]하고 관련 있는 사람이라고만 말했어요.”
-저 미친.
최만수의 날카로운 눈이 순간 서인우를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