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4화.
스무 명이 줄지어 서 있는 앞에서 구본석이 심사의 시작을 알렸다.
“지금부터 제일 첫 번째 심사과제인 고기 요리 중 하나인 탕수육을 만들도록 하겠습니다. 셰프들의 실력을 꼼꼼히 체크해 주시길 바랍니다.”
네 명의 셰프들이 요리할 조리대 앞쪽 기다란 테이블 위에 네 번의 심사과제에 필요한 재료들이 놓여 있었다.
“앞에 놓인 주재료는 두 팀이 똑같은 조건입니다. 그 외 필요한 재료는 각자 준비해 오셨습니다. 그럼 요리를 시작해 주세요.”
시작과 동시에 돼지고기 등심과 안심을 일정한 크기로 자르는 서인우의 손놀림에 사람들이 시선을 뺏겼다.
이미 방송에서 본 사람들이 많을 텐데, 그 모습을 가까이서 보게 됐다는 사실에 다들 들떠있었다.
마치 틀에 맞춰 자른 듯 일정한 크기로 자른 고기를 소금과 후추, 생강즙 등을 넣어 재어두었다.
깨끗이 씻은 중식도를 다시 잡은 서인우가 각종 채소를 빛의 속도로 자르자 여기저기서 탄성이 쏟아져 나왔다.
그 모습을 가장 넋을 잃고 쳐다보고 있는 사람은 김원상도 심사단도 아닌 차은석 이었다.
방송에서는 편집이 되어 보여줬기에 이렇게 적나라하게 볼 수는 없었을 거다.
김원상 또한 고기 잡내를 없애기 위해 재어 놓고는 바로 채소 손질을 시작했다.
각 재료를 준비해놓자 차은석이 웍에 기름을 가득 붓고 튀김옷을 입힌 고기를 튀기기 시작했다.
맛있는 소리를 내며 튀김옷이 노랗게 부풀어 올랐다.
모든 재료를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일정한 크기로 준비해놓은 서인우가 웍에 각 채소를 넣어 새콤달콤한 소스를 만들었다.
그 옆에서 안상훈이 튀김옷을 입힌 고기를 끓는 기름에 넣자 꽃처럼 부풀며 맛있는 소리를 내었다.
비슷한 듯하면서 어딘가 조금씩 다른 느낌의 요리가 서서히 완성되어 가고 있었다.
구본석의 지시에 따라 스무 명의 심사위원이 처음 앉아있던 자리로 돌아갔다.
각자 자리에 앉아 심사표에 뭔가를 표시하고 있었다.
서인우는 만들어 놓은 소스에 갓 튀긴 고기를 넣어 볶음 탕수육을 완성해 담당 직원이 가져다준 하얀 접시에 조금씩 나눠 담았다.
시식을 위한 것이라 20인분을 다 만들 필요는 없었다.
김원상도 그쪽 담당 직원이 가져다준 하얀 접시에 맛있게 튀겨진 고기를 담고 소스를 부어 요리를 완성했다.
각 팀을 담당하는 직원들이 일사불란하게 완성된 요리를 심사단 앞에 하나씩 내려놓았다.
심사를 할 사람 한 명당 두 개의 접시가 놓였다.
“이제 앞에 놓인 탕수육을 시식해 주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더 맛있는 탕수육이 담긴 접시에 제가 드린 스티커를 붙여 주시면 됩니다.”
심사단이 시식하는 동안 네 명의 셰프들은 다음 과제인 칠리새우를 만들어야 했다.
구본석이 시식단을 맡아 진행하는 동안, 그를 도와 주방에서는 오 대리가 실수 없이 일을 처리하고 있었다.
완전히 똑같은 흰색 접시에 담긴 탕수육을 신중하게 음미하고는 각자 더 맛있게 느껴지는 요리에 스티커를 붙였다.
시식을 마친 사람들이 심사표에 뭐라 적는 모습이 보였다.
“아, 저 표에 간단히 평도 적는 건가 보다. 나는 인우가 만든 거 한눈에 알아보겠는데….”
구본석과 함께 한쪽에 서서 시식하는 모습을 보고 있던 이준형이 작은 소리로 말했다.
정다운 또한 고개를 끄덕였다.
“우린 좀 특이하게 볶음 탕수육을 하니까 저건 나도 알아보겠어요.”
“다음 요리부터는 모양 보고 절대 못 알아볼 것 같은데…. 진짜 긴장되네.”
“어차피 승리는 우리 사장님이에요.”
작은 어깨의 정다운이 오히려 심하게 떨고 있는 이준형을 안심시키고 있었다.
그러면서 정다운의 눈은 심사단이 서인우의 탕수육을 먹을때의 표정을 놓치지 않고 따라가고 있었다.
시식을 위해 담긴 탕수육을 깨끗이 비운 사람이 대부분이었다.
세 사람만이 조금 남겼을 뿐.
조금 전 음식 접시를 가져온 담당 직원들이 들어와 스티커가 붙어 있는 접시와 처음 그대로인 접시를 구분해 들고 나갔다.
“이제 첫 번째 심사과제인 탕수육 시식이 끝났습니다. 지금 안에서는 다음 과제인 칠리새우를 만들고 있습니다.”
심사단에서 한 명이 손을 들었다.
“질문이 있는데요, 이제 요리하는 모습은 더 못 보는 건가요?”
“아닙니다. 두 번째 심사과제부터는 앞에 준비된 화면을 통해 보실 수 있습니다.”
“아!”
많이들 궁금했는지 질문한 사람은 하나인데, 여기저기서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말을 마치면서 구본석이 손에 들고 있던 리모컨을 누르자 정면에 놓인 대형 화면에 요리하는 모습이 보이기 시작했다.
“아저씨, 지금 요리하는 걸 어디선가 찍고 있나 본데요? 그런 말은 없지 않았어요?”“그러니까, 나도 몰랐었는데...뭐 우리 인우야 화면발 잘 받아서 손해 볼 건 없지.”
마치 둘의 대화를 듣고 있었던 것처럼 구본석이 다시 설명을 시작했다.
“지금 안에서는 자신들의 요리하는 모습이 여기에 나오고 있다는 사실을 전혀 모릅니다. 심사단이 보지 않는 환경에서 요리하는 모습이 궁금해서 제가 준비했습니다.”
그 말에 박진상의 표정이 심하게 일그러졌다.
며칠 전 그 아이디어를 얼핏 말하기는 했었는데 실행에 옮길 거라고는 생각도 못 한듯했다.
박진상의 얼굴을 힐끗 쳐다본 구본석이 평상시보다 더 활짝 능청스럽게 웃어 보였다.
그 모습에 급기야 볼까지 실룩거리던 박진상이 손을 올려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차은석과 안상훈이 동시에 통통한 새우를 튀기고 있었다.
거의 흡사한 요리법이지만, 분명 입에 넣었을 때 식감과 맛은 다를 거였다.
서인우는 새우가 맛있게 익기를 기다리며 소스를 만들고 있었고, 이미 소스를 완성해놓은 김원상은 차은석을 재촉하고 있었다.
“다운 씨, 우리 안셰프님 묵묵히 일하는 게 너무 믿음직스럽지 않아?”
“맞아요, 처음엔 불안해 보이는 표정 때문에 실력을 의심했는데, 우리 사장님 다음으로 제일 잘하는 것 같아요.”
“다시 봐도 정말 운명의 파트너야.”
바싹하게 튀긴 새우를 소스에 버무려 요리가 거의 완성되자 구본석이 리모컨 전원 버튼을 눌렀다.
“접시에 담아서 가져오는 과정은 철저히 비밀로 진행됩니다. 엄격한 블라인드 테스트 니까요.”
심사단 한쪽에서 아쉬운 듯한 목소리가 들렸다.
“주말 드라마보다 더 재밌네. 그냥 쭉 보고 싶다.”
그 말에 다른 사람들도 소리 내 웃었다.
결과는 잔인하겠지만, 심사 과정에서는 요리하는 셰프들도 심사하는 사람들도 다 즐거워 보였다.
역시 조금 전과 같은 방법으로 똑같은 하얀 접시에 완성된 칠리새우를 담고 있었다.
그때 입구 쪽에서 소란스러운 소리가 잠시 들리더니 정장을 잘 차려입은 나이 많은 남자 둘이 들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회, 회장님.”
덩치에 안 어울리게 구본석이 놀랐는지 순간 말을 더듬었다.
심사단에 앉아있던 박진상이 급하게 일어나며 의자가 넘어져 더 소란스러워졌다.
“쉿!”
입에 손가락을 올리며 조용히 하라는 표시를 한 최만수가 어딘가 들떠있는 사람처럼 살짝 상기된 얼굴로 미소 짓고 있었다.
“다들 자리에 빨리 앉아서 시식할 준비 합시다. 마침 점심시간이라 왔는데, 우리 둘도 시식 가능한가?”
“그, 그럼요. 혹시라도 부족하면 제 것 드십시오.”
마치 준비하고 있었던 것처럼 박진상이 잽싸게 대답했다.
구본석이 눈치 하자 직원 하나가 급히 주방으로 들어가 두 명분을 더 준비하라는 전달을 했다.
이준형의 놀라 벌어진 입이 닫힐 줄 몰랐다.
“저, 저 사람이 왜 여기서 나와?”
“네?”
“다운 씨. 저 할아버지 누군지 모르겠어?”
“저 할아버지요? 처음 보는 분이신데...”
“셰프복 대신 양복을 입어서 그래, 얼굴 자세히 봐봐.”
아직도 놀란 마음을 달래지 못했는지, 이준형이 고개를 연신 가로저으며 중얼거리고 있었다.
“말도 안 돼. 이건...정말 상상도 못 했는데...”
시식 현장 분위기를 전혀 모르는 서인우는 네 개의 접시가 더 늘어나게 되는 걸 정확히 계산하며 똑같이 나누어 담으려 애썼다.
최만수와 장비서가 한쪽 테이블에 앉자 담당 직원들이 조금 전과 똑같이 작은 접시를 두 개씩 앞에 놓았다.
구본석이 스티거 종이를 가져가며 설명을 시작하려 했다.
“맛있는 거에 붙이면 되는 거지? 아닌가?”
“맞습니다. 같은 요리지만, 더 맛있다고 느껴지는 요리에 스티커를 붙여 주시면 됩니다.”
“알았어요. 우리 신경 쓰지 말고 계속 진행하지.”
“네.”
최만수가 먼저 젓가락을 들자 옆에 앉아있던 장 비서를 시작으로 마치 술자리 파도타기처럼 하나씩 젓가락을 들기 시작했다.
“이거 다 맛있는데…. 수능 문제보다 더 어렵겠어.”
그 말에 심사단에 앉아있던 사람들이 작은 소리로 웃었다.
다시 한번 완성한 요리를 이리저리 살펴보고 입에 넣은 최만수가 아주 천천히 맛을 음미했다.
이제 결정을 했다는 듯이 웃으며 스티커를 붙였다.
그 모습을 장비서가 힐끗 쳐다보자 몸을 돌려 가렸다.
“회장님, 지금 뭐 하십니까?”
“철저히 블라인드 테스트라잖나? 내꺼 따라 하지 말라고.”
“에이, 저를 뭐로 보시고. 저도 이미 정했습니다.”
그러면서 똑같이 등을 돌려 스티커를 붙이고는 계속 최만수가 못 보게 손으로 가렸다.
“맛있는 것도 먹고, 무슨 게임하는 것처럼 재미도 있지 않나? 내 말 듣고 오길 잘했지?”
“네, 회장님. 아직 짬뽕은 하지 않았겠죠?”
“이 다음이 삼선볶음밥, 그리고 마지막이 짬뽕이야.”
“어떻게 순서까지 다 아세요?”
“현주 그놈이 어제 다 알려줬어.”
최만수의 환한 미소를 보며 덩달아 웃음 짓고 있던 장비서가 그 틈을 타 최만수의 접시를 보려 시도하고 있었다.
“에헤이. 보지 말게.”
최만수가 잠시 고개를 갸웃하더니, 다시 마치 동심으로 돌아간 듯 즐겁게 웃자 볼에 패인 주름이 더 깊어졌다.
심사단의 시식이 끝나갈 무렵 구본석이 앞으로 나와 리모컨을 눌렀다.
화면에 보이는 서인우는 삼선볶음밥을 준비하려는지 해물을 손질하고 있었다.
오징어에 칼집을 내는 모습이 보이자 그 손놀림에 다들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다.
새우, 해삼을 손질해서 한쪽에 놓고, 서인우가 중식도와 도마를 씻었다.
그리고 이어서 당근과 파를 다지는 동작에 또다시 감탄이 쏟아졌다.
그 모습을 지켜보는 최만수의 얼굴에 반가움이 크게 묻어났다.
그 옆에서 김원상이 웍에 기름을 두르고 달걀을 올려 몽글몽글하게 볶으며 잘 손질한 해물을 넣어 빠르게 볶았다.
각자 밥을 넣어 볶으며 웍을 기울여 살짝살짝 불맛을 얹었다.
이미 두 가지 요리를 시식했지만, 침이 꼴깍 넘어가는 비주얼이었다.
완성된 삼선볶음밥이 담긴 접시가 앞에 놓이자 유심히 쳐다보던 최만수의 미간이 순간 잠시 일그러졌다.
“회장님. 왜 그러십니까?”
“아니네. 어서 맛을 보도록 하지.”
걱정스러운 눈빛의 장 비서에게 대답하면서 동시에 그의 접시도 유심히 살펴보는 듯했다.
음식의 모양을 살피고 향을 맡은 후 해물만 건져 맛을 보고 나서야 숟가락으로 듬뿍 떠서 볶음밥을 입에 넣었다.
아무래도 음식 만드는 것을 좋아하는 최만수만의 시식법인 듯 보였다.
다시 천천히 맛을 느끼며 다 비운 최만수가 다시 한번 두 개의 그릇을 유심히 살폈다.
말없이 입만 꾹 다물고 있던 최만수가 옆 테이블에 앉은 박진상과 다른 직원들의 그릇도 슬쩍 살피는 듯 보였다.
자기를 쳐다보는 줄 착각한 박진상이 억지로 더 티 나게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일 년에 몇 번 보는 게 전부인 회장에게 점수를 딸 기회라고 생각하는 듯 신이나 보였다.
담당 직원들이 시식을 마친 그릇들을 다시 모아 밖으로 가지고 나갔다.
그 모습을 유심히 바라보던 최만수가 구본석에게 잠시 오라는 손짓을 했다.
불룩 나온 배를 최대한 집어넣어 재킷 단추를 여민 구본석이 한걸음에 달려왔다.
최만수가 그에게 작게 귓속말을 건네자 구본석의 눈썹이 꿈틀거리더니 급기야 코 평수가 커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