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3화.
오븐에서는 오겹살이 다시 구워지며 톡톡 튀는 소리를 내고 있었다.
차은석의 표정에 불만이 많아 보였지만, 지금 그런 기분 따위를 챙길 여유는 없었다.
커다란 접시에 바싹하게 구운 오겹살과 매콤한 팔보채를 올려 세팅한 후 다시 직원들을 불렀다.
“와우! 조금 전보다 더 화려해졌는데요? 고기도 먹고 해산물도 먹고...아주 값비싼 요리 같아요.”
비싼 전복과 새우, 소라까지 들어갔으니 당연히 비싼 고급 요리지.
그 정도 아니면 대결에서 이기기 힘들 거야.
“어때?”
“난 사실 고기보다는 해물을 더 좋아하는데, 같이 먹을 수 있으니 최고인 것 같아요.”
오승연이 사이드로 올린 팔보채의 전복, 소라 등을 집어 맛있게 먹어 보였다.
시선을 김지호 보조셰프에게 돌리자, 복잡한 표정을 보일 뿐 뭐라 말이 없었다.
“ 진짜 심사라 생각하고 솔직히 말해줘요. 그래야 내일 최종 레시피로 다시 연습할 수 있으니까.”
“이 오겹살 오븐 구이는 육즙도 살아있고, 바싹한 식감이 느껴져 좋고, 팔보채는 워낙 좋은 해산물이 많이 들어가서 우리 가게 인기 메뉴죠.”
“그런데?”
김지호가 머뭇거리자 차은석이 말을 덧붙였다.
“이걸 메뉴로 정하면 얼마짜리 음식으로 할겁니까? 지난번 대회 때도 황제 짬뽕을 만드시더니….”
차은석이 조심스러운지 말끝을 흐렸다.
“심사잖아? 그리고, 강남에서 가장 큰 백화점이야. 거기 오는 손님들이라면 가격은 신경 안 쓰지. 이걸로 하겠다는 게 아니야, 의견을 들어 보자는 거지.”
차은석이 잘 구워진 오겹살 위에 매콤하게 볶은 전복을 올려 입에 넣었다.
천천히 씹으며 맛을 음미하는 듯하더니, 픽 하고 입술 끝을 올리며 웃었다.
“왜? 그 표정 상당히 기분 나빠.”
“죄송합니다. 이건 말보다 직접 느껴보시는 게 나을 것 같습니다.”
김원상이 기분 나쁜 티를 팍팍 내며 조금 전 차은석처럼 오겹살 한 점에 잘 볶아진 새우를 올려 입에 넣었다.
“맛이 어떤가요?”
“내가 만들었으니 당연히 맛있지?”
“네, 점장님 요리 실력은 우리 다 인정하는 거고요, 지금 식감이나 맛이 어떤지 말씀해 보세요.”
김원상이 입에 남아있던 음식을 급하게 삼키며 말을 이었다.
“뭘 말하는지 알아요. 고기와 해산물을 같이 먹으니 맛이 섞여 이 맛도 저 맛도 아니지.”
“그렇죠? 당연히 아시겠지만, 그걸 느껴보셨으면 했습니다.”
“누가 이렇게 다 올려서 한 번에 먹나? 고기 먹고 다시 해물 먹고 하지...그냥 좀 더 고급스럽게 하고 싶었을 뿐입니다.”
오승연과 김지호가 눈치를 슬쩍슬쩍 보는 듯했다.
“그럼 처음 했던 사천식 청경채 볶음을 사이드로 하도록 하죠. 다들 같은 의견이죠?”
“둘 다 너무 맛있어서 결정하기 어려워요. 두 분이 최종적으로 결정하시면 될 것 같습니다.”
여전히 눈치를 보던 오승연이 웃으며 대답했다.
김지호 역시 뒷머리를 긁으며 씩 웃고는 자리를 피했다.
차은석과 김원상 둘만 남은 주방이 한여름인데도 쌩하고 찬 바람이 부는 것 같았다.
“메인 메뉴가 너무 약한가? 지난번에 연습한 걸로 바꿔야 하나?”
혼잣말인 듯 아닌 듯 얘기하는 김원상에게 먼저 다가간 차은석이 접시에 담긴 오겹살 오븐 구이를 다시 한 점 입에 넣었다.
“식었는데도 고기 냄새가 전혀 나지 않네요. 아직 바삭하고 맛있습니다.”
그 말에 조금 기분이 풀린 김원상도 고기를 한 점 집어 먹어 보았다.
여전히 육즙이 입안에 가득 퍼지며 고소한 맛이 올라왔다.
“이거 식으니까 약간 편육 같은 느낌도 나네.”
“네, 아이디어도 좋고 맛도 있습니다.”
“차 셰프가 만든 사천식 청경채 볶음이랑 먹으면 그 맛이 배가 됩니다. 그럼 우리 이대로 해봅시다.”
차은석이 조금 전 보인 눈빛을 싹 거둔 눈으로 김원상을 지긋이 바라봤다.
“왜 그런 눈으로 봅니까?”
“이번 백화점 입점 정말 욕심내시는 것 같아서요. 사실 [만가복] 정도면 이미 인지도나 매출에서 아쉬울 게 없는 곳이라서 좀 이해 안 되긴 했습니다.”
“MS 백화점이니까요.”
“하긴 거긴 좀 얘기가 다르긴 하죠.”
차은석이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했다.
“우리 최선을 다해 꼭 [서풍]을 이기도록 해요. 저는 솔직히 [서풍]을 이기는 데 더 목적이 있습니다.”
김원상이 악수를 하며 궁금하다는 눈빛을 보였다.
“[서풍]의 서동수 사장님 돌아가신 지 벌써 몇 년째인데, 아직도 내 요리와 그분의 요리를 비교하는 사람들이 있어서요...그거 기분 별로거든요.”
“웬일로 오늘 나랑 뜻이 맞지? 나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번에 반드시 서인우를 눌러줄 테니 두고 보세요.”
김원상과 차은석이 서로 맞잡은 손에 힘을 꾹 주었다.
이제 모든 준비는 끝났다.
* * *
드디어 MS 백화점 입점을 위한 심사 1차전이 있는 날이다.
심사에 참여하는 사람은 서인우와 안상훈이건만, 왜 이준형이 청심환을 먹고 있는지는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다.
“인우야! 잘 할 수 있지? 떨지 말고.”
밤새 염소가 됐는지 이준형의 목소리가 심한 바이브레이션을 뽐냈다.
“잘 할 수 있어. 아니, 무조건 이길 거다. 그러니까 진정 좀 해.”
“내가 요리하는 것도 아닌데, 뭘 진정하라고….”
떨리는 목소리를 감추려고 신경 써서 그런지 오른쪽 다리를 심하게 떨고 있었다.
“아저씨, 괜히 사장님 더 긴장시키지 말고 집에 가 있는 게 어때요?”
오히려 차분한 말투의 정다운이 이준형을 한심하게 쳐다봤다.
“무, 무슨 소리야? 이 [서풍]의 공동대표인 내가 반드시 와야지.”
“그럼 정신없으니까 그 다리 좀 어떻게 해보시든가.”
정다운이 이준형의 오른쪽 다리를 내려다보자 그제야 인지한 이준형의 떨리는 다리가 멈췄다.
“아씨, 왜 이렇게 떨리냐? 청심환을 하나 더 먹을까?”
“아저씨, 그러다 부작용으로 쓰러질지도 몰라요. 벌써 두 개나 먹었잖아요.”
말없이 미소만 짓고 있는 안상훈과 서인우의 얼굴도 긴장한 티가 역력했다.
오늘 있을 심사가 얼마나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는지 너무나 잘 아는 두 사람이기에 당연한 일이었다.
멀리서부터 존재감을 뽐내며 그들에게 다가온 구본석 과장이 반갑게 인사를 했다.
“안녕하세요. 여기서 보니 더 반갑네요.”
“안녕하세요.”
“전화로 설명해 드린 것처럼 잠시 후 11시부터 심사가 진행될 겁니다. 식당 안으로 들어가면 심사를 해주실 분들이 기다리고 계십니다. ”
“알겠습니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네, 기대합니다.”
뒤돌아 식당 안으로 들어가려던 구본석이 그를 향해 다가오는 김원상을 알아보고 큰 소리로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네, 안녕하십니까?”
김원상과 차은석이 동시에 인사했다.
“두 분만 오신 건가요? 여기 [서풍]처럼 뭐 응원단들은 오지 않으시고요?”
“정신없게 무슨 응원단까지...우린 조용히 심사에 참여할 둘만 왔습니다.”
이준형이 두 개나 먹은 청심환 부작용인지 주먹을 불끈 쥐고 눈을 부라렸다.
여차하면 한 대 패게 생겼다.
약발이 잘 드네.
“자 그럼 MS 백화점 중식당 안으로 들어가 볼까요?”
구본석을 따라 재료가 담긴 큰 아이스 박스를 들고 입구를 돌아 안으로 들어갔다.
식당 안쪽에 꽤 많은 사람이 앉아있는 모습을 보고 서인우 뿐만 아니라 김원상도 놀란 표정을 지어 보였다.
네 명이 앉는 테이블 다섯 개가 꽉 차 있었다.
구본석이 그들 앞으로 다가가 네 명의 심사 참가자를 소개하기 시작했다.
“다들 아는 얼굴일 텐데요, 다시 한번 소개하도록 하겠습니다. 우선 [만가복] 팀부터 인사하시죠.”
김원상과 차은석이 구본석이 비켜준 자리에 서서 고개를 숙여 정중하게 인사를 했다.
“안녕하십니까. [만가복] 마포점 점장을 맡은 김원상입니다. 이쪽은 저와 같이 호흡을 맞출 우리 매장 최고의 셰프 차은석입니다.”
“안녕하십니까. [만가복] 마포점 셰프 차은석입니다.”
둘이 옆으로 비켜서자 구본석이 서인우에게 나오라는 손짓을 했다.
“안녕하십니까. [서풍] 아니, 정확히는 [서풍 TWO]의 서인우입니다. 제 옆에 계신 분은 이전 [서풍]의 안상훈 셰프님입니다.”
“안상훈입니다.”
어색한 듯 잔뜩 긴장한 얼굴로 안상훈이 인사를 했고, 이어 구본석이 심사를 해줄 사람들을 소개했다.
“우선 여기 맨 앞 테이블에 계신 분들은 우리 백화점 중식당 최고 이용 고객분들이십니다. 그리고 그 뒤에는 식품부 박진상 부장님과 다른 부서 직원들입니다. ”
서인우를 비롯한 네 명의 참가자가 동시에 인사를 했다.
“이미 말씀드렸지만, 오늘 두 팀의 참가자가 요리하는 모습을 보며 거기 심사표에 적힌 기술, 청결 등에 표시를 해주시면 됩니다.”
심사를 맡은 사람들이 손에 들고 있는 심사표를 쳐다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다시 자기 자리로 돌아와 앉아 주시면 됩니다. 말씀드린 대로 음식 심사는 블라인트 테스트로 진행됩니다. 같은 메뉴의 음식이 똑같은 접시에 담겨 나올 겁니다. 물론 여러분께 서빙은 우리 백화점 직원들이 해줄 겁니다.”
고객 심사단 중 한 명이 질문했다.
“그럼 우리가 시식할 때는 저기 계시는 셰프님들은 나오지 않으시는 건가요?”
“네, 같은 접시에 담긴 같은 음식을 드시고 더 맛있다고 느껴지는 것에 아까 나눠드린 스티커를 붙여 주시면 됩니다.”
총 스무 명의 심사단 얼굴이 기대감으로 가득 차 있었다.
“이제 10분 후면 여기 셰프들의 요리가 시작될 겁니다. 네 분은 저를 따라 주방으로 들어가시죠.”
구본석이 서인우와 세 셰프를 데리고 주방 안으로 들어갔다.
각종 조리도구가 놓여 있는 조리대와 화구가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각자 이름이 적힌 조리대 앞으로 서서 준비해 온 재료들을 꺼내놓았다.
서인우는 따로 챙겨온 가방에서 중식도를 꺼내 가까이 놓았다.
-아, 답답해 죽는 줄. 오랜만에 다시 느껴보는 긴장감. 아주 짜릿한데.
‘사부. 오늘도 잘 부탁해.’
-오늘 저놈들 기를 팍 죽여줘 볼까?
‘그러자. 밖에 있는 심사단들에게 경이로움을 선사해 주자고.’
-콜! 두말하면 허기지지.
긴장을 덜어낼 겸 사부와 농담을 주고받는 사이 조금 전 심사단에 앉아있던 박진상 부장이 주방 안으로 들어왔다.
서인우 앞을 쓱 지나가 김원상 앞에 멈춰서서 얼굴에 가식 쩌는 미소를 담아 인사를 건넸다.
“김원상 씨. [만가복] 같이 크고 유명한 식당이 이런 번잡스러운 심사까지 마다하지 않으시고 참여해 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회장님이 좀 언짢아하시긴 했지만, 여기 MS 백화점이라 참여했습니다. 역사적인 의미가 있으니까요.”
“회장님과 점장님의 넓디넓은 아량에 정말 감탄해...”
“곧 대회 시작인데, 김원상 씨도 준비를 좀 해야 할 텐데요.”
구본석이 용감하게 박진상의 말을 잘랐다.
두 팀이 대결하는 데 김원상에게만 다가와서 아부를 떠는 모습을 차마 보고 넘기지 못한 듯했다.
당황한 박진상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했다.
이에도 마치 유명한 침대 광고처럼 전혀 흔들리지 않는 편안함을 보이는 구본석을 힐끗 노려본 박진상이 서둘러 주방을 빠져나갔다.
-재수 없었는데, 꼴 좋다. 저 고깃덩어리 맘에 드네.
‘풋. 뭐? 고깃덩어리?’
-딱 잔칫날 바비큐 통구이처럼 생겼구만. 먹는 거 실컷 먹으려고 식품부에 취직했나 본데?
서인우가 삐져나오는 웃음을 참느라 시선을 아래로 떨구었다.
모든 준비를 마치고 본격적인 대결의 시작을 알리는 벨 소리가 경쾌하게 울렸다.
“그럼 지금부터 [만가복]과 [서풍 TWO]의 입점 심사를 위한 요리를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두 팀 다 최선을 다해 주십시오.”중식도를 잡은 손에 힘을 꽉 준 서인우의 눈빛이 비장함까지 느껴질 만큼 강하게 빛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