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1화.
반가운 마음에 서둘러 전화를 받았다.
“안녕하세요, 구 과장님.”
-잘 지냈죠? 내가 출근하자마자 전화한 이유는 우리 백화점 입점 심사 과제가 정해져서 알려드리려고요.
“아, 감사합니다.”
나가려던 이준형과 김서원도 귀를 쫑긋하며 통화 내용을 들어보려 애쓰고 있었다.
-일주일에서 열흘 안에 1차 심사가 있을 겁니다. [만가복]과 [서풍]이 똑같은 요리를 만들어 심사하게 될 겁니다. 구체적인 대결과제는 통화가 끝난 후 문자로 보내 드리겠습니다.
“그럼 심사는 총 몇 차로 진행되는 건가요?”
-기본기를 보는 1차 심사와 스페셜 메뉴로 보는 2차 심사, 그렇게 두 번 있을 겁니다.
“알겠습니다. 문자 보내주시면 대결과제 위주로 죽어라 연습하겠습니다.”
-네, 바로 문자 보내 드리겠습니다. 대략 면 하나, 밥 하나, 그리고 고기 요리 하나, 해물 요리 하나. 이렇게 네 가지로 기본 심사를 하게 될 겁니다.
“벌써 가슴이 뛰는데요? 이 긴장감을 늦추지 않고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네, 전에 말씀드렸듯이 메인 셰프와 보조 셰프 그렇게 둘 만 참가 가능합니다. 그리고...화이팅입니다.
전화를 끊으면서 마지막 건넨 한마디가 머릿속에 계속 맴돌았다.
물론 확성기를 틀어놓은 것처럼 목소리가 커서 일수도 있었다.
그 큰 목소리가 야심 차게 시작한 가게를 정리하는 오늘 한여름 때마침 내리는 소나기처럼 시원하고 반가웠다.
“구 과장님?”
“응, 일주일에서 열흘 안에 1차 심사가 있을 거래.”
“진심으로 들릴지는 모르겠지만... 응원할게요.”
“감사합니다.”
이준형과 김서원이 아침 식사를 하러 나가고 서인우는 주방에 들어가 계속해서 하던 정리를 하고 있었다.
“딱 일주일만 여기서 요리 연습을 하면 좋을텐데...”
-네 실력이 벼락치기로 되는 건줄 알아? 이미 너는 최고의 실력을 갖추고 있다는 사실 잊지 마라.
“그래도 제대로 갖춰진 주방에서 연습하면 좋잖아. 특히 스페셜 메뉴는 뭐로 할지 그것도 정해야 하고.”
-아는 형님 두고 무슨 걱정이냐?
“응? 형님?”
-[서풍]이름을 달고 장사하는 형님, 그래도 모르겠냐?
가까운 마영준의 가게를 생각 못 했다.
“사부 말대로 한 번 부탁해 볼까?”
-아마 네가 부탁해주기를 기다리고 있을 거다. 아이디어도 함께 짜주고. 물론 다 같이 머리 싸매고 애써 봤자 내 실력이면 다 끝난 게임이긴 하지만.
서인우가 말만 하면 자기 자랑인 중식도를 향해 고개를 저으며 핸드폰을 들어 통화버튼을 눌렀다.
“형, 나 인우에요.”
-안 그래도 전화하려고 했는데 오늘 가게 정리하지? 내가 뭐 도와줄 일 없어?
“가게 정리는 거의 다 했고요, 나 부탁할 게 하나 있는데...”
-뭐든 말해. 내가 다 들어줄 테니까.
사부의 말대로 정말 부탁하기를 기다리고 있었나?
0.1초도 안 돼서 답이 건너왔다.
“MS 백화점 심사과제가 정해졌어요. 아마 일주일에서 열흘 안에 심사가 있을 것 같아요.”
-서인우인데, 무슨 주제든 자신 있잖아?
“1차는 기본기, 2차는 스페셜 메뉴 라는데...”
-우리 가게 브레이크 타임이랑 밤 시간에 연습하면 되겠네.
우리가 언제 이렇게 말 안 해도 서로 통하는 사이가 됐을까?
어떻게 말을 꺼낼지 잠시 했던 고민이 무색하게 마영준이 먼저 가게 주방에서 연습을 제안했다.
“정말 그래도 될까요?”
-그럼 나야 영광이지요. 언제 내가 중화요리 고수의 요리를 직접 보고 배워 보겠냐?
“제가 무슨... 형의 도움이 간절합니다.”
-당장 오늘부터도 괜찮으니까 네 가게다 생각하고 편하게 와서 연습해. 아, 그런데 조건이 하나 있어.
“네?”
마영준이 키득거리는 웃음소리가 들렸다.
-손님 있는 시간에 홀에는 될 수 있으면 나오지 마라. 너 가고 나면 손님 뚝 끊길까 봐 걱정되니까.
대답 대신 크게 웃었다.
오늘 같은 날 내 편인 사람이 있다는 게 동지를 얻은 것처럼 든든하고 고마웠다.
통화를 마치고 주방 기구들 정리가 한창일 때 가게 앞에 요란한 소리가 들렸다.
언제 돌아왔는지 김서원이 인부 둘에게 뭐라고 지시하자 드릴소리가 요란하게 들렸다.
“식사는 하셨다니까 이거 시원하게 마셔요.”
얼음이 담긴 시원한 음료를 건네고는 김서원이 손에 들고 있던 끈으로 머리를 깡충 묶었다.
본격적인 작업의 시작을 알리는 듯했다.
소음을 피해 가게 안으로 들어온 서인우가 이준형에게 조금 전 마영준과의 통화 내용을 전했다.
“다행이다. 정말 고맙네. 장사에 지장을 줄 텐데...”
“바쁠 때 내가 도우면 되니까.”
“그나저나 스페셜 메뉴를 뭐로 할지 장 정해야 겠다. 네 요리는 이미 방송 경연대회에서 많이 오픈돼서 새로운 걸 찾아야 하나?”
“그래야겠지. 같이 고민해보자.”
“이삿짐센터는 언제 온다고 했어?”
서인우가 벽에 걸린 시계를 보고는 다시 가게 입구로 시선을 돌렸다.
“저거 철거가 얼마나 걸릴지 몰라서 12시쯤 와달라고 했어.”
“에휴, 이렇게 가게 문을 닫게 될 줄은 정말 생각 못 했다. 인생이 참 계획대로 되지 않는다, 그치?”
“세상이 내가 생각한 대로 굴러가지 않는다는 걸 깨닫게 되는 게 어른이 되는 것 같다.”
둘이 대화 사이사이 한숨을 주거니 받거니 하는 사이 입구 쪽에 익숙한 실루엣이 아른거렸다.
“밖에 누구 온 거 같은데? 어? 저 사람 안상훈 셰프 아니냐?”
* * *
[만가복] 마포점의 김원상이 처음 보는 번호를 내뱉으며 핸드폰이 울리자 잠시 고개를 갸웃거렸다.
‘모르는 번호인데, 스팸인가?’
“여보세요?”
-안녕하세요. MS 백화점 식품 팀 구본석 과장입니다.
갑자기 오전에 아버지 김형식이 전화해서 간략히 얘기해 줬지만, 여전히 이해되지 않는 상태에 전화를 받아 당황스러웠다.
“네, 안녕하세요. 회장님께 연락 올 거라는 통지는 받았습니다.”
-우선 우리 백화점에 입점을 지원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렇지.
다른 가게도 아니고 우리 [만가복]이 그 작은 가게에 입점해주겠다 하면 큰절을 해도 모자랄 판에 듣자 하니 무슨 심사를 한다고?
“아닙니다. MS 백화점 중식당은 다르니까요.”
-네, 맞습니다. 그래서 이번 심사에 우리 백화점 임원분들이 정말 큰 기대를 하고 계십니다.
“우리와 같이 심사하는 업체가 몇 군데인가요? 제가 요즘 바빠서 자세한 얘기는 못 들었습니다.”
-아, 그러시군요. 김원상 씨도 잘 아는 곳이죠, [서풍]이라고 서인우 셰프가 하는 곳이요.
“[서풍]이요?”
그 노인네가 갑자기 전화해 다시 붙으면 서인우를 이길 수 있겠냐고 물었던 게 다 이것 때문이었던 거야?
김원상은 끔찍한 기억으로 남아있는 지난 요리 경연대회가 떠올라 머리가 띵했다.
그때부터 왠지 2인자가 된 것 같은 더러운 기분.
어린놈한테 져서, 그리고 그 작은 가게에 이 [만가복]이 져서 느꼈던 수치스러움.
없애고 싶어도 쉬이 없어지지 않았던 감정들이 다시 꾸물꾸물 기어 올라오는 것 같았다.
“[서풍]의 서인우와의 재대결이라... 이거 재미있겠는데요?”
-그렇죠?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실력이 워낙 막강한 두 분이 이번에는 또 어떤 결과를 보여주실지 정말 기대가 큽니다.
김원상은 들리지 않게 이를 바드득 갈았다.
“그럼 심사과제는 정해졌나요?”
-네, 자세한 내용은 통화 후 문자로 넣어 드리겠습니다. 간략히 기본기를 평가하는 1차 심사와 스페셜 메뉴를 겨루는 2차 심사가 진행될 예정입니다.
“알겠습니다. 문자 기다리겠습니다.”
통화를 마친 김원상의 얼굴이 쓰레기통에 버려진 종잇장처럼 구겨졌다.
대한민국에서 제일 잘 나가는 [만가복], 그 회장 아들이자 그룹 후계자인 자신과 시장 초입에 쓰러져 가는 가게의 서인우를 어떻게 같은 선상에 놓고 심사를 하겠다는 거지?
다른 것보다 그 사실이 자존심 상하고 용납되지 않았다.
서인우가 뭐길래?
운이 좋아 한 번 방송에서 우승해 유명해진 게 전부인 그놈이 어떻게 나랑 같은 조건으로 경쟁을 하겠다고 덤벼?
‘건방진 새끼. 이번에는 반드시 다시는 못 일어나게 깔아뭉개 줄 테니 각오해라, 서인우.’
김원상의 가는 입술 끝이 휘어 올라가며 비릿한 웃음이 새어 나왔다.
* * *
가게 입구에 한참 서 있던 안상훈이 들어오지도 못하고 쭈뼛거리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고 한걸음에 달려간 서인우가 그의 팔을 잡고 안으로 들어왔다.
“가게가 왜...바로 정리 들어가는 겁니까?”
어수선한 가게를 보고 놀란 듯한 안상훈이 힘겹게 서인우의 눈을 바라보며 물었다.
“네, 어제가 마지막 영업이었습니다.”
“그랬군요.”
안상훈의 슬퍼 보이는 눈이 가게를 천천히 둘러보았다.
서인우는 그 속도에 맞춰 어떤 말도 꺼내지 않고 기다려 주었다.
“그럼 앞으로 구체적인 계획이 어떻게 됩니까?”
“전에 말씀드린 대로 MS 백화점 중식당으로 들어갈 겁니다.”
“심사가 있다고...”
서인우가 말끝을 흐리는 안상훈의 눈을 정면으로 응시했다.
“네, 일주일에서 열흘 안에 1차 심사가 있습니다. 그 심사 반드시 통과할 것입니다. 안 셰프님과 함께요.”
안상훈이 옅은 미소를 보였다.
“결정은 하셨습니까?”
“나한테 전화했다가 내 딸 유진이랑 통화 했죠?”
“유진이요? 아, 그랬죠.”
“내가 밤새 끙끙대며 고민하고 있으니까 내 딸이 그러더군요. 무슨 고민 있냐고? 힘든 일은 가족이 나누면 반이 된다고요.”
딸 얘기에 조금 전보다 더 큰 미소를 지어 보이는 안상훈은 영락없이 딸바보인 듯 보였다.
“유진이 너무 똘똘하고 귀여워요.”
“네, 나한테는 정말 선물 같은 아이입니다. 그래서 내가 지금 하는 그림 그리는 일을 그만할까 고민이라고 했습니다.”
“아, 그랬더니 유진이가 뭐라고 했나요?”
“그림을 그만두고 식당에서 일해볼까 한다고 그랬더니, 제일 중요한 한 가지를 답해주면 자기가 결정해준다고 합디다.”
여섯 살 딸아이의 작은 입술과 초롱초롱한 눈망울이 상상되어 마치 앞에 있는 것처럼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유진이의 질문이 뭐였는데요?”
“식당 메뉴가 뭐냐는 게 질문이었어요. 그래서 답해줬죠. 중식당이고 짜장면, 짬뽕, 탕수육 뭐 이런 게 주 메뉴라고요.”
“유진이 답이 너무 궁금한데요.”
“그 메뉴라면 무조건 하라고 하네요. 그럼 자기도 매일매일 짜장면 먹을 수 있지 않냐고요.”
안상훈이 그 순간을 다시 떠올리며 환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래서 결정했습니다. 다시 요리하기로. 내 딸이 좋아하는 짜장면을 세상에서 가장 맛있게 만들어 주는 아빠가 되겠다고 결심했습니다.”
여섯 살 어린아이의 순진한 대답에 아빠만이 할 수 있는 최고의 해석이 얹어졌다.
세상에 이보다 더 명쾌하고 값진 결론이 있을까?
서인우는 자리에서 일어나 정중하게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유진이에게 그 어디보다 맛있고 기억에 남을 음식을 만들어 줄 수 있도록 우리 같이 최선을 다해 봐요. 이렇게 안 셰프님과 함께 할 수 있어서 정말 기쁩니다.”
안상훈 역시 자리에서 일어나 고개를 깊이 숙여 인사했다.
“[서풍] 서동수 사장님이 나를 받아주셔서 지금의 내가 있게 됐습니다. 내가 익힌 모든 실력을 발휘해 [서풍]을 위해 남은 인생을 걸겠습니다.”
가슴이 벅찼다.
의롭게 시작한 가게에서 쫓겨나다시피 문을 닫게 됐지만, 더 큰 도약을 위해 잠시 충전하는 거로 생각하기로 했다.
그 충전을 도울 사람, 내 편이 이제 여러 명이 되었다.
이제 그들과 함께 할 [서풍]의 도약만이 기다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