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 중식당엔 무언가 특별한 게 있다-90화 (90/200)

제90화.

시간은 이미 12시를 넘어가고 있었고, 아직 술이 고픈 김서원은 병나발을 불기 시작했다.

“내가용 항국 나와서 제일 잘 항게 뭥지 알아용?”

이미 발음은 한참 전부터 새기 시작했고, 눈까지 게슴츠레하게 뜬 김서원이 물었다.

이에 지지 않을 정도로 잔뜩 흐트러진 머리에 한참 전부터 계속 눈을 감았다 떴다 하던 정다운이 대답했다.

“음....제시카로 상거용?”

“여기 익는 사람들 앙게됭거용.”

우리가 익었다는 건지...

분위기가 무르 익었다는 건지...

갑자기 절친 모드가 된 김서원과 정다운이 서로 주거니 받거니 즐거워 보였다.

“엉니, 나도 그래용. 여기 사장닝하고 아저씽하고 알 게 돼서 너무너무 좋아용. 이제 엉니도 생기고...”

꺄르르.

뭐가 그리 재미있는지 김서원이 배를 잡고 뒤로 넘어갔다.

“이 쪽응 사장님인데, 이쪽응 왜 아저씽? 푸흡!”

웃음이 또 터지려고 하는 걸 손으로 막자 손가락 사이로 술인지 침인지 모를 액체가 질질 흘렀다.

“에이 엉니, 이쁜 엉니가 이렇게 침을 흘리명 앙돼죵.”

“다운 씽, 나 놀리는 거징? 자기가 더 이쁘명서...”

정말이지 놀고 있다.

기사도 정신을 발휘해 김서원을 바래다 주겠다는 굳은 의지를 보이는 이준형이 술에 지지 않으려 눈에 힘을 주고 있었다.

“다운 씽, 자기 때문엥 준형씨 화났다봥. 아저씨라 그래성.”

“아닙니다.”

“에이, 맞는 것 같은뎅?”

“아니에요. 술 취하지 않으려고 눈에 힘주고 있는 겁니다. 난 취하면 바로 잠들어 버리거든요.”

꺄르르.

이번에는 또 어느 포인트가 웃음을 자아낸 건지.

김서원과 정다운이 동시에 웃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두 여성의 주사는 웃는 건가 보다.

술만 마시면 우는 사람보다는 낫긴 하지만, 왠지 제정신으로 보기 힘들어지긴 했다.

“서인우 씨는 웡래 이렇게 말이 없어용? 입은 술을 마실 때만 열리넹.”

또 꺄르르.

자기가 말해놓고 또 죽어라 웃어 젖히고 있는 김서원이 재미있게 느껴졌다.

“시간도 늦었고, 취한 것 같은데 이제 정리 할까요?”

“헐.”

이번에는 김서원과 정다운이 동시에 말을 내뱉었다.

“한창만에 말하는겡 그만 일어나라고용? 2차 가야죵? 그치, 다운씽?”

정다운은 이제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아마도 20년 평생 가장 많은 술을 마신 기록적인 날이 될 것 같았다.

“다운씽. 무승 생각행? 눈을 감응거야 뜽거양?”

자기 눈이 감겼다 떠졌다 하니 세상이 보였다 안 보였다 하는 것 같았다.

이제 더 있다가는 김서원마저 잠들 것 같았다.

그런 대참사가 있기 전에 서인우가 서둘러 자리를 정리했다.

김서원이 취해 잠들기 전에 빨리 주소를 알아놔야 했다.

“김서원씨. 이제 일어납시다. 주소가 어떻게 돼요?”

“우리 집? 냉집? 아니면 아퐈 집?”

“서원 씨 집이요.”

“내 안싱처? 공덕에 잉는 내집이용?”

서인우가 주소를 묻기 시작하면서부터 이준형이 더 눈에 힘을 꽉 주었다.

작지만 강렬한 눈빛이 술에 지지는 않은 듯 보였다.

“공덕역에서 나와성, 아니지 내 차로 가명 돼용. 2차 가는거죵?”

서인우가 한숨을 쉬며 이준형을 바라봤다.

“대리기사 불러서 데려다줘야 할 것 같다. 네가 할 수 있지?”

“응, 나 안 취했어.”

“그래, 나는 정다운 씨 데려다줄게. 가게는 내일 정리하면 되니까 일어나자.”

서인우와 이준형이 물먹은 솜처럼 축 늘어진 김서원과 정다운을 부축하고 가게를 나왔다.

두 여성의 물미역 같은 머리가 앞으로 쏟아져 흔들거리고 있었다.

“불 왜 껐어용? 왜 이렇겡 깡깡행?”

너님 머리가 가려서 그래.

취해 두 다리가 꼬인 김서원과 정다운을 부축하랴 흘러내리는 머리 커튼 쳐주랴 서인우와 이준형의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아무래도 그동안 새벽 운동으로 다진 근육을 좀 동원해야 할 것 같았다.

* * *

정다운을 집까지 바래다주고 들어와 늦게서야 잠든 서인우는 오늘도 알람이 울리기 전에 몸이 먼저 반응했다.

머리도 지끈 아프고 몸도 무거웠지만, 눈은 떠졌다.

오늘만 운동을 쉬고 더 잘까 하는 고민도 잠시 용수철처럼 몸을 일으켰다.

이대로 침대에 다시 누우면 왠지 몸살이 날 것 같았다.

그동안 하루도 쉬지 않고 바쁘게 지냈다.

건강관리도 아침 시장도 최선을 다했다.

한 번 무너지기 시작하면 걷잡을 수 없을 것 같은 생각에 운동복으로 갈아입고 밖으로 나가 달렸다.

달리면서 무거웠던 몸은 좀 가벼워지는 것 같았는데, 지끈거리는 머리는 나아지지 않았다.

거기다 속까지 울렁거려 평상시보다 짧게 운동을 마치고 들어와 개운하게 씻었다.

해장이 시급했지만, 난장판인 가게 정리가 더 시급했다.

물만 한 잔 들이켜고 바로 가게로 나섰다.

가게 문을 열고 들어와서 본 풍경은 한마디로 쓰레기장이었다.

더운 날씨에 먹다 남은 음식에서 나는 시큼한 냄새가 안 그래도 울렁거리는 속을 아예 뒤집어 놓고 있었다.

술병과 맥주병이 나뒹굴고 있었고, 누가 흘렸는지 젓가락도 하나 떨어져 있었다.

주방으로 들어가 앞치마를 두르는 서인우의 귀에 사부의 낮은 음성이 들렸다.

-이 사부가 여기 있다는 걸 잊은 게냐?

“응? 갑자기 무슨 말이야?”

-항상 청결을 최우선으로 하던 제자라 받아줬더니, 밤새 쓰레기 더미 속에서 이 사부를 있게 만들다니. 불쾌하다고.

“미안, 사부. 어제 다운 씨가 너무 취해서 바래다 주고 다시 오려고 했는데, 나도 술이 확 올라와서...”

중식도가 빙그르르 돌더니 서인우의 눈앞에 멈춰 섰다.

-용서해 줄 테니 하나만 솔직히 말해.

“뭔데?”

-술에 취한 여성을 집까지 데려다줬는데 별일 없었냐? 별일 없었으면 빨리 병원을 가보고, 별일 있었으면 넌 어린 애한테 범죄를 저지른 거다.

“뭐? 하하하.”

-왜 웃는데?

“사부 말대로 어린애야. 우리 직원이고.”

-젊은 여자다. 이쁘고.

별 싱거운 소리를 다 한다고 한마디 하고는 그릇들을 설거지 기계에 넣었다.

-에이, 시시해. 그렇다면 또 한 놈의 스토리를 기다려야겠군. 그놈은 분명 사심이 있어 보였는데...

이준형?

끝까지 술에 취하지 않으려 이를 악물고 있었던 이준형은 김서원 씨를 잘 바래다줬을까?

-너도 궁금하지?

“아 깜짝이야. 내 생각 좀 안 읽으면 안 돼?”

-응, 안돼. 그 재미를 왜 뺏으려고 하는데? 내 능력이니까 건들지 마.

서인우도 이준형이 궁금했지만, 아직 너무 이른 시간이라 물어볼 수도 없었다.

“사부, 오늘부터 요리를 못한다고 생각하니까 더 하고 싶어지네. MS 백화점 입점 심사는 까다롭겠지?”

-기본기를 보겠지. 그리고 기본기라면 이미 나를 차지한 네가 무슨 걱정인데?

“빨리 심사해서 뭐든 결정 나면 좋겠다. 그리고, 안상훈 셰프도 같이 할 수 있으면 좋겠고.”

-오늘 왠지 느낌이 좋아. 좋은 소식이 있을 것 같다고.

“그래? 내가 또 사부 촉이라면 무조건 믿지. 그럼 힘을 내야지.”

앞치마를 벗어 걸어두고 서인우가 옷 매무시를 살폈다.

-왜? 뭐 하려고?

“해장국 좀 먹고 오려고. 금방 다녀올게.”

-요리하고 싶다며? 만들어 먹어. 나 심심해.

“가게 냄새 때문에 속이 더 안 좋아, 재료도 없고. 창문 다 열어놨으니까 환기할 동안 해장하고 금방 돌아오겠습니다, 사부님.”

-너무 기다리게 하지 마. 나 보기보다 외로움을 많이 타.

서인우는 뒤통수에 대고 계속 소리 지르는 사부의 말을 들으며 환한 미소를 지었다.

부드러운 수란이 올라간 콩나물 해장국으로 시원하게 해장을 하고 이제 막 문을 연 카페에서 아이스커피를 하나 사서 가게로 돌아왔다.

다행히 시큼한 냄새는 거의 빠진 것 같았다.

테이블을 하나씩 정성 들여 닦고 바닥을 쓸며 오늘 정리할 가게를 여느 때처럼 신경 써서 청소했다.

오후에 이삿짐센터에서 와 [서풍]의 메뉴판부터 테이블과 의자, 주방 도구들을 다 정리해 잠시 보관하기로 했다.

‘아! 입구 인테리어도 오늘 정리해야 하는데...’

김서원이 만들어놓은 입구를 멍하니 쳐다보고 있는데, 이준형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른 시간인데도 말끔하게 차려입고 나온 이준형이 반가웠다.

“어제 늦게 들어갔을 텐데, 일찍 나왔네.”

“응, 잠이 별로 안와서...오늘 이사하기 전에 정리도 해야 하고.”

“내가 거의 다 했어. 피곤했을 텐데 왜 잠이 안 왔는데?”

이준형이 서인우를 한참 바라보더니 한숨을 푹 내쉬었다.

“왜 그래? 어제 무슨 일 있었어?”

“일? 일이 있었다고 해야 하는 건가? 아니지, 아무 일도 없어서 그게 일인 거니까...에잇, 모르겠다.”

머리를 세게 흔들고 있는 이준형을 달래 의자에 앉혔다.

“뭔데 그래?”

“말하기 싫다.”

“알았다. 그럼 다음에 듣자.”

“그러니까 또 하고 싶어지네.”

절대 속에 담고 있지 못하는 이준형의 성격을 잘 아는 서인우가 픽 소리 없는 웃음을 웃어 보였다.

“어제 김서원 씨 차에 네비가 가리키는 대로 집은 잘 찾았어.”

“그런데?”

“차에서 내내 2차 가자고 조르던 김서원 씨가 집 앞에 도착해서는...”

이준형이 그때 생각이 났는지 코를 벌름거리기 시작했다.

무슨 일인지는 몰라도 준형이 흥분하면 나오는 버릇이었다.

“집에 도착해서는 왜 나냐고? 서인우 씨는 어디 가고 내가 데려다준 거냐고 따져 묻더라. 여전히 혀는 꼬여서...내가 어땠는지 보여줄까?”

이준형이 자리에서 일어나 다리를 엇갈리게 꼬고 몸을 흔들었다.

그리고는 팔짱을 끼더니 다시 오른손으로 삿대질을 시작했다.

“엉? 서인우 씨는 어디갔엉? 왜 아저씨만 있엉?”

목소리까지 가늘게 만들며 이준형이 흉내를 냈다.

“그러더니, 가까이서 내 얼굴을 빤히 쳐다보다가 갑자기 우는 거야. 울면서 계속 왜 나냐고, 서인우가 아니고 그러더라.”

“술 취한 사람이 하는 소리를 뭐하러 신경 쓰냐? 아마 김서원 씨 기억도 못 할걸?”

“몰라. 기분 상했어. 어떻게 사람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면서 그렇게 말하냐?”

“어? 안녕하세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서인우가 누군가를 향해 인사하는 곳을 바라보니 김서원이 떡하니 서 있었다.

“안녕하세요, 두 분 다 역시 일찍 나오셨네요. 오늘 이사 맞죠? 여기 인테리어 철거해야죠.”

“속은 괜찮으세요?”

“나요? 멀쩡하죠. 어제 집에도 혼자 잘 찾아간 거 보면 몰라요?”

혼자?

역시 김서원은 아무것도 기억하고 있지 않았다.

괜히 이준형 혼자 속상해하고 있었던 것 같다.

당황한 이준형이 김서원에게 다가가 물었다.

“설마 어제 어떻게 집에 들어갔는지 기억 안 나요?”

“대리기사를 불렀던 것 같고, 그리고 집에 잘 들어갔는데…. 혹시 내가 무슨 실수라도 한 건 아니죠?”

실수?

실수라기보다는 내 친구 이준형에게 모욕감을 줬지.

“정말 내가 얼마나 힘들게 바래다줬는데…. 하나도 기억 안 난다는 말이에요? 어떻게 그럴수가...”

이준형의 얼굴이 처참하게 무너졌다.

“아. 그랬어요? 미안해요. 내가 너무 마셨나 보다. 정말 하나도 기억이 안 나요. 어제 감사했습니다. 지금이라도 인사할게요.”

“됐어요. 뭐 기억도 안 나는데요.”

“사과하는 의미로 해장국 쏠게요. 둘 다 아직 아침 전이죠?”

해장국 하나에 넘어갈 줄이야.

이준형이 금세 입을 헤벌쭉 벌리고는 나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나는 방금 먹고 왔어요. 둘이 가서 먹고 와요.”

단둘이 해장국을?

이준형의 입이 더 벌어져 곧 턱이 빠질 듯 보였다.

“아쉽네요. 그럼 우리 둘이 먹고 올게요. 그때쯤 폴딩도어 해체 작업하러 사람도 올 거예요.”

정확히 9시.

둘이 막 나가려는데 서인우의 핸드폰이 울렸다.

액정이 뱉어낸 이름은 구본석 과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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