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 중식당엔 무언가 특별한 게 있다-89화 (89/200)

제89화.

서인우는 마지막 남은 재료를 모두 탈탈 털어 넣어 양장피와 탕수육을 특대 사이즈로 만들어서 나갔다.

“주문하신 양장피와 탕수육입니다.”

이준형이 그 양을 보고 놀란 눈으로 서인우를 쳐다봤다.

“애정을 듬뿍 담았네요. 우리 셰프가.”

“우와, 이제 이 가게에서 유종의 미를 걷어볼까요?”

서인우는 짐작했다는 듯이 미소를 지어 보였고, 정다운과 이준형은 무슨 얘기인지 한참을 생각하는 듯 보였다.

“다운 씨, 여기 소주 네 병, 맥주 네 병 주세요.”

“누가 오기로 했나요?”

갑작스러운 술 주문에 정다운이 물었다.

“아니요, 이거 내가 다 먹을 건데요? 우선 정신 말짱할 때 계산부터 할게요.”

카드를 들고 카운터로 가자 이준형이 얼떨떨한 얼굴로 계산을 마쳤다.

“오늘이 이곳에서 마지막 영업이잖아요. 그 마지막 주문은 꼭 내가 하고 싶었거든요.”

“그래도 이건 너무 많은데...정말 다 먹을 수 있겠어요?”

이준형이 저 납작한 배가 터져버리면 어쩌나 걱정하는 듯 했다.

“이제 다른 손님 없이 우리만 있으니까 다 같이 한잔해요. 오늘은 내가 술 사는 겁니다.”

“아, 그런 깊은 뜻이.”

이제야 모든 상황이 이해 간다는 듯 이준형의 입이 다시 길게 찢어졌다.

서인우가 미리 준비해 둔 해물 가득 넣은 짬뽕 국물을 큰 그릇으로 두 개 만들어 테이블에 놓자 말 그대로 잔칫상이 만들어졌다.

“우리 넷이 소주 각 일병하고, 맥주 각 일병입니다. 부족한 술은 여기 두 사장님이 쏘는 걸로 하죠.”

“좋습니다. 오늘 코가 비뚤어지게 마셔보자고요. 섞을 사람?”

“에헤이, 안주가 이렇게 좋은데, 우선 소주로 깔끔하게 달리다가 섞도록 하죠.”

인테리어 의뢰를 술로 따낸 건 아닌가 의심이 들 정도로 술에 대한 철학이 확실했다.

서인우가 바로 섞어 윤기가 자르르 흐르는 양장피를 입에 넣은 김서원이 한숨을 푹 쉬었다.

“이렇게 맛있는 걸 한동안 못 먹는다는 말이죠? 그것도 누구 때문에...”

제시카가 김서원이라는 걸 전혀 모르는 이준형과 정다운이 다행히 그녀가 말한 뜻을 눈치채지 못한 듯 차가운 소주를 입에 털어 넣었다.

“사장님이 만든 요리는 정말 최고예요. 술도 달게 만드는 마법 같은 요리라니까요.”

“맞아, 다운 씨. 정말 이 식감과 톡 쏘는 겨자 맛이 술을 부르지 않아요? 마셔요.”

분명 정다운이 김서원을 바라보는 눈빛이 이렇게 호의적인 적이 없었던 것 같은데...역시 사람은 뇌물에 약한 건가?

아니면, 정다운이 먹는 것에 특히 약한 건가?

둘이 깔깔 웃어가며 친자매 같은 케미를 보여주고 있었다.

“아, 제시카 씨. 아직 소식 모르겠네요?”

둘 사이를 질투라도 하듯 이준형이 잽싸게 끼어들었다.

“무슨 소식이요?”

“이 가게 악덕 회장 놈이 사서 우리 쫓겨나는 건데요.”

김서원과 서인우가 동시에 놀란 눈으로 서로 바라봤다.

“무슨 얘기 하려고?”

급하게 이준형의 말을 자른 서인우가 불안한 시선을 보내며 물었다.

“우리 좋은 소식 있을 수 있다고 알려 줘야지?”

다행히 자랑이 하고 싶었던가 보다.

“좋은 소식이요?”

“아직 정해지진 않았는데, 우리 MS 백화점 중식당에 입점해보려고 합니다. 심사 대결에서 이겨야 가능하긴 해요.”

“정말이요? 지금 얘기가 진행되고 있는 거란 말이죠?”

김서원이 손뼉을 치며 기뻐했다.

이준형의 말에 서인우가 자세한 설명을 덧붙였다.

“원래 있던 유경동 대가님의 [도원]이 계약 만기로 나가게 된다는 정보를 얻어서 연락하게 됐습니다. 다행히 그쪽에서도 우리 [서풍]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고 하네요.”

“당연하죠. 그 백화점이 아주 일을 잘하네. 요즘 가장 잘나가는 중식당을 섭외해서 젊은 층을 공략하겠다는 얘기네요. 정말 축하해요.”

들고 있던 잔을 들어 다 같이 쨍하고 부딪혔다.

“그럼 이 육즙 가득한 탕수육도, 코끝이 찡한 이 양장피도 다 맛볼 수 있는 거네요? 언제부터 시작이에요?”

빈 잔에 술을 따르던 서인우가 바로 말을 이었다.

“입점을 위한 심사가 있어요. 그 대결에서 이겨야 우리 [서풍]이 들어가게 되는 겁니다.”

“재수 없는 [만가복]하고 또 붙게 생겼어요. 이번에 우리 인우가 다시는 [서풍]을 맘대로 휘젓지 못하게 제대로 물을 먹여 줄 겁니다.”

이준형이 신나 떠드는 말에 김서원의 손이 바들바들 떨렸다.

그 모습을 걱정스레 바라보고 있던 서인우가 어쩔 줄 몰라 하며 다른 화제를 찾느라 눈동자를 굴리고 있을 때였다.

“정말 죄송합니다. 진심으로 미안합니다.”

김서원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고개를 푹 숙였다.

소주 두 병이 비어있었지만, 넷이 나눠 마셨으니 그리 많이 마시지는 않았는데….

벌써 취한 건 아닌지 김서원의 눈치를 살피던 서인우는 그녀의 눈빛이 그 어느 때보다 진지하게 빛나고 있는 걸 느꼈다.

그 눈빛을 보며 서인우가 작게 고개를 가로저었지만, 이미 결심하고 온 듯했다.

영문을 모르는 이준형과 정다운이 당황해하며 김서원을 다시 자리로 앉혔다.

“갑자기 무슨 소리예요? 제시카 씨가 미안할 일이 뭐가 있어요? 이렇게 찾아와 우리 위로주도 사주고….”

“김서원입니다.”

“네?”

“내 이름이요. 김형식 회장의 딸 김서원입니다.”

주위가 시끄럽지도 않았고, 김서원의 목소리가 작지도 않았다.

하지만, 이준형과 정다운의 표정은 전혀 말을 알아듣지 못하겠다는 듯 멍해 보였다.

“[만가복]회장의 딸이라는 엄청난 기회를 손에 쥐고 태어났죠. 흔히들 말하는 금수저가 저예요.”

이제 조금씩 들리기 시작하는지 이준형의 미간이 작게 꿈틀거리고 있었다.

“배부른 소리로 들리겠지만, 난 그게 싫었어요. 그래서 한국을 떠나 외국에서 5년을 혼자 떨어져 살았죠.”

“전에 독일에서 살다 왔었다는 게...”

“맞아요. 거기에서부터 천천히 내 힘으로 살아갈 방법을 찾고 있었어요. 그때 썼던 이름이 제시카입니다.”

김서원이 가득 차 있던 소주를 단숨에 삼켜 버리고 다시 가득 채워 입에 털어 넣었다.

“이렇게 [만가복]하고 얽히는 일이 없었다면, 여기 있는 사람들과는 끝까지 제시카로 살고 싶었는데...살아 있다는 걸 느끼며 너무 행복했어요. 여기 [서풍]의 앞날에 내 인생을 걸어도 좋을 만큼.”

똑소리 나는 성격에 솔직한 김서원으로서는 지금 이 상황이 얼마나 불편했을지 짐작할 수 있었다.

아무 말 없이 듣고 있던 정다운이 잘 마시지도 못하는 소주를 입에 부어 넣고는 팔짱을 끼며 김서원을 바라봤다.

“하나만 물어봐도 돼요?”

“네, 그럼요.”

“지금 우리 가게에 일어난 일, 정확히 말하자면 [만가복] 회장이 여길 사서 우리를 내쫓은 거 말이에요. 그거 알고 있었어요?”

“그건 절대 아니야.”

생각지 못하게 질문에 대한 답이 서인우의 입을 통해 나왔다.

조금 전 김서원의 커밍아웃보다 더 놀란 듯한 이준형과 정다운이 동시에 서인우를 향해 몸을 돌렸다.

“인우 너 인마, 너는 알고 있었던 거야?”

서인우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김형식 회장을 만나겠다고 [만가복] 본사에 처음 갔던 날, 그날 거기에서 김서원 씨를 우연히 만나서 알게 됐어. 그리고, 정식 약속을 잡게 도와준 것도 김서원 씨고.”

“그럼 오늘 여기 온 이유는 뭐예요? 당신 아버지가 우리를 하루아침에 문 닫게 했는데, 그 마지막 날 확인이라도 하러 온 건가요?”

김서원이 슬픈 눈으로 작은 소리를 내 웃었다.

“난 [만가복] 후계자 자리에 아무 관심 없어요. 그런데도 어려서부터 사사건건 오빠와 비교당하면서 그 자리를 차지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지겹도록 강요당했었죠.”

서인우가 말없이 새로 술을 따 잔에 따라주었다.

“그렇게 살다 미칠 것 같아서 외국으로 도망갔던 거고, 다시 돌아와 여기 사람들을 알게 됐을 때...”

김서원이 젖은 눈망울로 얘기를 듣고 있는 서인우와 이준형, 정다운을 하나씩 천천히 쳐다봤다.

마치 마지막이라면 눈에 담아가고 싶다는 듯이.

“부러웠어요. 정말 사람 사는 것 같았어요. 그리고, 무엇보다 따뜻했어요.”

“그 집이 훨씬 좋을 텐데, 거기가 더 따뜻하지 않나?”

이준형의 깨는 한 마디에 갑자기 분위기가 바뀌었다.

“아저씨, 지금 저 언니가 말한 따뜻하다는 건 그 뜻이 아니잖아요?”

언니?

매번 반갑지 않은 눈치를 주며 까칠하게 대하던 정다운의 입에서 시키지도 않았는데 언니라는 말이 툭 튀어나왔다.

김서원도 그 말을 들었는지 갑자기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나 언니라는 말 처음 들어봐요. 정말 다운 씨가 내 동생이면 좋겠다는 생각 많이 했었는데...”

“왜요? 난 동생이라면 지긋지긋한데….”

“뭐든 해주고 싶고, 도와주고 가르쳐 주고 싶은데...그럴 수 없었으니까...”

그 말에 왜 또 이준형의 눈시울이 붉어지는지.

널뛰는 감정을 자주 보이는 이준형은 정말 뒤늦게 사춘기가 온 게 확실한 것 같았다.

“제시카든 김서원이든 그게 무슨 상관입니까? 우리는 [인테리어 바램]의 대표로 알게 된 거고, 앞으로도 계속 그렇게 알고 지낼 건데요, 안 그래?”

이준형이 큰 잔에 맥주를 네 잔 따라 하나씩 건네며 물었다.

“그럼, 김서원 씨는 이미 [서풍]이 성장할 때마다 같이 할 우리 식구인 거지.”

“맞아요. 사실 언니가 별로 내 스타일은 아닌데, 인테리어 실력은 좀 먹히기는 해요. 앞으로도 우리 가게 2호, 3호 생기면 필요할지 모르니까...그냥 쌩까지는 맙시다.”

“누가 보면 다운 씨가 여기 사장인 줄 알겠다.”

이준형의 말에 또다시 정다운의 흰자위가 출몰했다.

“나처럼 이 가게의 앞날을 걱정해주는 직원 있으면 나와보라 그래요. 내가 요즘 잠도 안 자고 새벽부터 얼마나 요리 연습을 하는지 알아요?”

왜 또 얘기가 거기로 튀어서...

“아직 성장기 아닌가? 잠 더 자야지.”

지금 그걸 말이라고...스물 살 아가씨한테 성장기라니?

“뭐요? 성장기?”

그럴 줄 알았다.

결국 정다운이 뭔가 손에 잡을 만한 걸 찾는 듯 보였다.

“흐흑, 나 지금 너무 행복해요.”

갑자기 울음을 터뜨린 김서원이 급기야 오열하기 시작했다.

그 와중에 이준형과 정다운이 서로를 탓하며 구박하고 있었다.

서인우는 말 그대로 난장판인 이 술자리가 좋았다.

정리되지 않고 속에 있는 말을 편하게 털어놓을 수 있는 네 사람이 언제까지나 함께 할 수 있기를 바라며 이 가게에서의 마지막 추억을 그렇게 장식했다.

* * *

[안녕하십니까? MS 백화점 구본석 과장입니다. 저희 백화점 중식당 입점을 위한 심사 일정이 잡혀 연락드립니다. 실무자 연락처를 남겨 주시면 자세한 일정 협의하도록 하겠습니다.]

오전에 날아온 문자를 한동안 보고 있던 김형식이 코웃음을 날렸다.

‘이제 박부장의 손을 떠난 일이라는 얘기지? 건방진 놈들.’

보란 듯이 문자를 보낸 번호로 통화버튼을 눌렀다.

“MS 백화점 구본석입니다.”

-나 [만가복] 김형식 이외다.

“아, 문자 보시고 연락하신 거군요? 감사합니다. 저희 계획도 말씀드리고 세세한 일정 조율도 해야 하는데, 담당 직원 번호를 알려주시면 최대한 맞추도록 하겠습니다.”

-담당 직원? 거기 입점은 마포점 김원상 점장이 맡아서 할거요.

“그렇습니까? 그럼 마포점으로 연락하도록 하겠습니다. 이렇게 직접 전화까지 주시고 정말 감사드립니다.”

-통화된 김에 나한테 간략히 일정을 좀 알려주시게.

“네, 대략 일주일에서 열흘 안에 1차 기본 심사를 하도록 할 겁니다.”

-잠깐, 1차라면 또 다른 테스트를 거쳐야 한다는 말인가? 감히 우리 [만가복]을 상대로?

“그러면 좋겠다는 회의 결과가 나왔습니다. [만가복]도 [서풍]도 워낙 실력이 막강해서 한 번에 결정하기 쉽지 않을 것 같아서요.”

-그래서 그 조그만 백화점 한자리에 들어가기 위해 두 차례나 심사를 거쳐야 한다는 말을 지껄이고 있는 겁니까? 그것도 내 앞에서?

잠시 아무 말도 오가지 않고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죄송하지만, 그렇게 진행하게 된다면 입점을 원치 않으신다는 말씀이십니까?”

구본석의 질문을 들은 김형식의 얼굴에 차갑고 매서운 바람이 소리 없이 스쳐 지나갔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