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8화.
안상훈이 점점 중식도를 향해 다가갔다.
“저게 다행히 다른 사람 손에 안 가고 제대로 주인을 찾아갔네요.”
“네?”
서인우는 안상훈이 하는 말의 의미를 알 수 없어 물었다.
“아, 아닙니다. 사장님의 중식도를 어떻게 찾으셨어요?”
“제 짐 속에 들어있었습니다. 한눈에 알아보시네요?”
“특별하니까요. 보기엔 똑같은 것 같지만, 여기 손잡이 부분에 사장님만 알고 계시는 표식이 있어요.”
이 중식도와 함께한 그 많은 시간 동안 서인우도 몰랐던 사실이었다.
“처음 듣는 얘기인데요?”
“여기 손잡이 끝에 이거요.”
안상훈이 가리킨 곳에는 진하게 탄 듯한 색으로 점이 찍혀있을 뿐이었다.
“이건 탄 자국 같은데요? 얼룩 같기도 하고...”
“그냥 육안으로는 안 보여요. 돋보기로 보면 아주 작은 글씨가 새겨져 있어요. 신기하죠?”
-나도 몰랐던 사실인데...내 신체의 비밀을 남의 입을 통해 듣다니...이거 참 부끄럽구만.
‘아무리 봐도 그냥 점처럼 보이는데...’
“안 셰프님은 보신 적이 있으신 거죠?”
“네. 한자가 하나 적혀 있습니다.”
“아빠 이름 중 하나인가요? 아니면 [서풍] 글자 중 하나?”
“柳(리우)라는 글자라고 들었습니다. 이 중식도를 선물해준 사부님이 리우 사부인데, 중국에서는 쌀알에도 글자를 새기는 기술이 있다고 하더라고요.”
서인우도 아는 이름이었다.
[양자강] 최영만 아저씨한테 들은 중국요리 고수인 리우 사부를 말하는 것 같았다.
“저도 들어서 아는 이름이네요. 정말 신기합니다. 그리고, 감사합니다.”
“네? 뭐가요?”
“안 셰프님 아니었으면 절대 모르고 지나갔을 거예요. 앞으로 계속 그런 추억들을 공유하고 싶습니다.”
“잘 봤습니다. 내일 연락드리겠습니다.”
아쉬운 듯 주방을 한 번 더 휙 둘러본 안상훈이 다시 인사를 하고는 조용히 가게를 나갔다.
“준형아, 요즘에도 문구점에 돋보기 팔까?”
“돋보기? 확대경 말하는 거냐?”
“응.”
“뜬금없이 그건 왜 찾는데?”
“우선 사 와서 신기한 거 보여줄게.”
시간을 확인하고는 급하게 가게 문을 나간 서인우가 10분 쯤 지나 목 주변이 땀에 젖어 들어왔다.
“오늘도 꽤 덥다. 다들 주방으로 들어와 봐.”
뭔가 신이 난 듯 보이는 서인우가 방금 사 온 돋보기를 손에 들고 주방으로 향했다.
“뭔데 그래? 이 돋보기 보니까 초등학교 때 생각난다. 햇빛에 비추면 그 검은색 종이에서 연기가….”
“이거, 이거 봐봐.”
“뭐? 여기 손잡이에 있는 점?”
“이 점을 돋보기로 비춰볼게.”
안상훈이 말한 대로 돋보기로 중식도의 손잡이 점처럼 생긴 부분을 확대해서 보였다.
그러자 선명하게 한자 柳가 나타났다.
“이게 무슨 글자더라? 많이 본 거 같은데?”
“유씨 성에 많이 쓰는 유라는 글자인데, 중국어로 리우라는 음이야.”
“올, 서인우. 있어 보이는데?”
정다운도 역시 몰랐었는지, 동의한다는 눈빛을 보냈다.
“아빠가 중국에서 요리를 배운 스승님이 있었는데, 그 사람을 리우 사부라고 불렀었대.”
“아, 그 스승님의 성이 새겨진 거구나? 진짜 신기하다. 어떻게 보이지도 않게 글씨를 쓸 수가 있지?”
“신기하지? 이 중식도가 그 스승님께 받은 상이었다고 들었어.”
정다운이 돋보기를 들고 다시 한번 글자를 비춰보았다.
“이거 정말 영화 같아요. 멀리 중국에서 만난 최고의 고수에게 요리를 배우고, 그 상으로 받은 중식도라는 거잖아요?”
서인우 역시 오묘한 기분이 들었다.
-참, 내가 얼마나 귀한 몸인지 얘네들도 이제 알게 되었군. 난 가만히 있어도 이렇게 다 티가 나니 말이야.
‘사부는 그 스승님이 아빠에게 준 상이면서, 아빠가 내게 준 선물이지.’
-그렇지. 그냥 한마디로 가문의 영광인 거야.
계속해서 돋보기로 중식도 여기저기를 살피고 있는 이준형이 뭔가 아쉬운 듯 머리를 긁적이고 있었다.
“왜?”
“혹시 다른 중요한 비밀 같은 게 있지 않을까 해서 꼼꼼히 살펴봤는데, 이 글자 말고는 없네.”
중식도의 어마어마한 비밀은 나만 보인단 말이야.
피식 웃어 보이고는 이준형과 정다운을 다시 데리고 주방을 막 나오는데 가게 문이 열렸다.
“잘들 지내셨어요?”
김서원이었다.
“제시카 씨. 안녕하세요?”
이준형이 조금 전 아쉬움은 새털처럼 가볍게 날려버리고 반가움에 입을 벌린 채 달려갔다.
“오늘 몇 시까지 하시나요?”
“다른 때와 똑같이 10시에 문 닫습니다.”
“알았어요. 그럼 제가 근처에 볼일이 있어서요, 빨리 끝내놓고 다시 오겠습니다.”
오늘이 마지막 날이라 일부러 온 듯했다.
종일 불편했을 김서원을 생각하니 서인우도 마음이 편치는 않았다.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빨리 오세요.”
엄마와 떨어지기 싫은 어린아이처럼 이준형이 가게 문을 나서는 김서원을 향해 큰소리로 외쳤다.
마지막 날이어서 그런지 다른 날보다 더 많은 손님이 [서풍 TWO]를 찾아주었다.
중식도와 함께하는 주방에서는 각종 음식 냄새가 가득했다.
홀을 꽉 채운 손님들이 저마다 얼굴에 미소를 가득 보이며 아쉬운 마음을 접어두고 행복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 * *
[도원]이 나간 후 리모델링 작업하고 영업을 시작하려면 업체 선정을 최대한 빨리 끝내야 하는 상황이었다.
MS 백화점 구본석 과장은 블라인드 테스트를 어떻게 하면 가장 성공적으로 해낼 수 있을지 여러 가지 방안을 구상 중이었다.
“과장님, 오늘까지 보고서 넘겨야 하는데요?”
“알고 있어. 오전에 회의 한 내용으로 가면 될 것 같은데...부장님이 받아들여 주실지 걱정이긴 하네.”
“에이, 평상시 겁 없는 불도저는 어디로 갔습니까? 이왕 이렇게 된 거 끝까지 밀어붙여야죠.”
“그야 당연하지. 제대로 밀어붙여야지. 내가 지금 올라갈테니까 30분 내에 오지 않으면 구급차 대기 시켜놔라.”
오 대리가 씨익 웃으며 영혼 없는 대답을 날렸다.
“네, 네. 어차피 결국 뜻대로 밀어붙이고 올 거면서...”
부장실 앞에 서서 비집고 나온 와이셔츠를 대충 바지 속으로 집어넣고 재킷의 단추를 여몄다.
옷이 작아졌는지 배가 더 커졌는지 단추가 발사체의 형태를 띠고 아슬아슬하게 달려 있었다.
똑똑.
노크와 동시에 문을 열고 들어간 구본석을 바라보는 박진상 부장의 눈빛이 과히 곱지 않았다.
“그렇게 바로 들어올 거면 노크는 뭐 하려고 하나?”
“그냥 벌컥 문을 열면 부장님 놀라실까 봐 걱정돼서요.”
눈치가 없는 건지 눈치를 안 보는 건지 진심 걱정돼서 그랬다는 표정으로 천연덕스럽게 대답하는 구본석을 잠시 노려본 박진상이 소파로 자리를 옮겼다.
“다음 주부터 시행할 중식당 업체 선정 심사과정입니다.”
손에 들고 있던 보고서를 건네며 구본석이 바로 위기의 재킷 단추를 풀고 자리에 앉았다.
“지난번 전체 회의 때 말씀드린 것처럼 [만가복]과 [서풍]이 똑같은 요리를 만들어 심사하게 될 겁니다. 아래 대결 과제를 적어놨습니다.”
“면 하나, 밥 하나, 그리고 고기 요리 하나, 해물 요리 하나. 이렇게 네 가지로 심사를 한다는 건가?”
“네.”
중식의 메뉴야 워낙 많지만, 가장 많은 고객이 찾는 기본 메뉴를 테스트할 생각이었다.
“오전에 회의 내용을 대략 말씀드리자면, 면 요리는 가장 기본인 짜장면과 짬뽕 중에서 그래도 맛의 차이가 더 많이 나는 짬뽕으로 정했습니다.”
“그렇지, 짜장면은 거기서 거기니까.”
“거기서 거기라니요?”
또 먹는 것에 진심인 구본석이 불끈했다.
“짜장면 하나도 집마다 오묘한 맛의 차이가 납니다. 우선 [만가복]의 짜장면은 다른 곳보다 모든 재료를 작게 다지듯이 해서 면과 잘 섞이게 만드는 것이 특징입니다.”
박진상이 또 시작됐다는 듯 귀를 긁적거리고 있었다.
“그에 반해 [서풍]의 짜장면은 기계로 자른 듯 고기와 채소의 크기가 일정하고 센 불에 볶아 재료 본질의 맛이 살아있는 게 특징이죠. 둘 다 맛있지만, 분명 호불호는 갈립니다.”
이제 말릴 때가 됐다 싶은지 박진상이 급하게 다음 내용으로 화제를 돌렸다.
“알았으니까, 그럼 밥 요리는 뭐로 하기로 했지?”
아직 할 말이 많은 듯 아쉬움을 삼킨 구본석이 말하며 입에 고인 침도 같이 삼키며 다음 얘기로 넘어갔다.
“밥은 우리 백화점 중식당에서 가장 많은 매출을 올렸던 삼선볶음밥으로 정했습니다. 아무래도 [도원]을 찾아주신 고객들이 선호하는 메뉴라서요.”
“그럼 짬뽕하고 삼선볶음밥, 그리고 고기 요리와 해물 요리는?”
“다 기본으로 하는 게 가장 좋겠다는 의견이었습니다. 고기 요리는 탕수육으로 해물 요리는 칠리 새우로 정했습니다.”
뭔가 꼬투리 잡을 걸 열심히 찾고 있던 박진상이 입소리를 쩝하고 내며 서류를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너무 기본으로만 메뉴를 선정한 거 아니야? 두 셰프의 실력을 보려면 뭔가 좀 특별한 메뉴를 해보라고 해야 할 거 아냐?”
“그래서 첫날에는 기본 메뉴로 다음 날에는 스페셜 메뉴로 테스트를 하면 어떨까 합니다.”
여전히 언짢다는 듯이 박진상이 구본석을 노려봤다.
“지금 그냥 모시고 와야 할 [만가복]을 이틀씩이나 심사를 하자는 말이야? 구 과장이 아주 정신이 나갔구만.”
“그래도 제대로 심사해야 하니까요. [만가복]도 [서풍]도 워낙 만만치 않은 곳이지 않습니까?”
“그러다 [만가복]이 안 들어오겠다고 하면 어쩔 건데?”
“그러진 않을 겁니다. 심사에 응하겠다는 건 이미 입점을 욕심내고 있다는 거니까요.”
박진상이 윽박지르는 소리에도 전혀 흔들리지 않는 구본석이 자신만만하다는 듯이 웃어 보였다.
“이렇게 진행해 보죠. 제가 연락해보고 [만가복]이 어떻게 나오는지 봐서 다시 보고드리겠습니다.”
“자네가 저질렀으니까 알아서 수습해. 혹시라도 그쪽에서 못하겠다 하면 책임져야 할 거야.”
“넵!”
저 자신감은 분명 배에서 나오는 게 틀림없었다.
구본석이 자리에서 일어나 툭 튀어나온 배를 집어넣느라 엉덩이를 뒤로 쓱 빼고 고개를 푹 숙여 인사를 했다.
빨리 꺼져달라는 듯 손을 흔들어 나가라는 뜻을 밝힌 박진상이 두통이 밀려오는지 머리를 꾹꾹 눌렀다.
그리고는 핸드폰을 들었다 다시 내려놓았다.
‘괜히 전화했다가 그 노인네한테 무슨 험한 말을 들을지 모르지. 구 과장이 수습한다고 했으니까 좀 빠져서 지켜봐야겠어.’
통화를 포기한 박진상이 다시 머리를 꾹꾹 누르고는 의자에 기대 눈을 감았다.
* * *
마지막 날 마감 시간까지 한 시간이 남아있었다.
정다운까지 오늘은 같이 정리하고 들어가겠다고 고집을 피워 셋이 말없이 한 테이블에서 모임을 하는 사람들만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드르륵.
가게 문이 열리며 오후에 잠시 들렀던 김서원이 모습을 나타냈다.
“아직 주문할 수 있죠?”
“네, 가능합니다.”
“그럼 양장피랑 탕수육 대자로 부탁합니다.”
“네? 둘 다 대자로요?”
“네.”
9시가 다 되어 혼자 들어와 양장피와 탕수육을 그것도 가장 큰 사이즈로 시키고 앉은 김서원을 서인우가 잠시 멍하니 쳐다보고는 주방으로 들어갔다.
-뭐냐? 손님이 새로 온 거냐?
“응, 아마도 이 주방에서 마지막 요리일 것 같은데...양장피랑 탕수육을 만들어야겠어.”
-그럼 재료 아끼지 말고 넉넉히 만들어.
“그러면 좋은데 아무리 대식가라도 혼자 먹기에는 많을 것 같아서...”
-마지막이라고 이 시간에 찾아온 거 보면 같이 술 한잔하자는 뜻 아니겠냐? 애가 눈치가 없어.
일부러 미리 들러 마감 시간에 오겠다고 했던 것도, 혼자 와서 대자로 시킨 것도 다 그런 이유에서였나?
-서비스로 짬뽕 국물 넉넉히 만들어서 같이 가져가.
“완전 술판을 벌이라는 얘기네?”
-어차피 저 여자 계속해서 안주 찾을 거니까, 차라리 처음부터 차려놓고 먹이라고.
서인우가 작은 소리를 내 웃었다.
“사부 또 보이는 거야? 밖에 있는 저 사람이 그렇게 많이 먹는 모습이?”
-쯧쯧. 오늘 고생 좀 하겠다.
“응? 그건 또 무슨 말이야?”
-너 각오해라. 저 여자 오늘 완전 꽐라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