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7화.
묵묵히 듣고만 있던 안상훈의 눈빛이 달라졌다.
“[만가복] 잘 아시죠? 사실 규모나 인지도, 어떤 점으로 겨뤄도 [만가복]이 훨씬 앞서는 게 사실입니다.”
“[서풍]은...”
안상훈이 목이 메는지 헛기침을 하며 물을 마셨다.
“[서풍]은 대한민국 최고였습니다. [만가복]뿐 아니라, 그 어떤 곳도 [서풍]만큼 인정받은 곳은 없어요. 사장님의 음식은 정말 우리 모두에게 감동을 줬습니다.”
“네, 그래서 저도 그런 음식을 만들고 싶습니다. 안셰프님이 그 요리를 직접 배우신 분이시잖아요? 그래서 꼭 함께하고 싶습니다.”
안상훈이 침울한 표정으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사장님이 안 계신 지금 그건 불가능합니다. 오로지 사장님만이 가능한 요리라는 말입니다.”
“안 셰프님이 함께 해주신다면 자신 있습니다.”
“그게 나 혼자로는 절대...”
“도와주세요. 부탁드립니다.”
“미안합니다, 불가능한 일이에요.”
고개를 숙인 채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안상훈의 손을 서인우가 힘주어 잡았다.
“제가 해낼 겁니다. [서풍]의 요리를 똑같이 만들어 낼 자신 있단 말입니다.”
“아까 말한 [만가복] 김형식 회장도 서동수 사장님의 요리를 똑같이 만들어 내고 싶다고 정말 집요하게 괴롭혔습니다. 매일 같이 찾아와 묻고 따라 하고, 또 숨어서도 지켜보고... 사람을 시켜 협박까지 했었지만...결국 그 맛을 내는 데 성공하지는 못했습니다.”
서인우가 안상훈의 눈을 한참 쳐다봤다.
당황한 안상훈이 시선을 어디에다 둬야 할지 불안해하고 있었다.
“그 [만가복]이랑 경쟁입니다. 이번 기회에 다시는 [서풍]을 넘보지 못하게 확실히 해둘 겁니다.”
안상훈이 대답 대신 여전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게 오기만 가지고 될 일이 아닙니다. 나는 더 할 얘기 없으니 그만 ...”
“그럼 제 음식을 드셔 보시고 판단해 주세요.”
서인우가 급하게 말을 잘랐다.
“그게 무슨...”
“제가 만든 음식을 맛보시고 결정해도 늦지 않을 거라는 말씀입니다. [서풍]에서 가장 유명했던 요리를 만들어 보이겠습니다. 그걸로 판단해 주세요.”
“나한테 왜 이렇게까지 하는 겁니까?”
안상훈의 질문에 서인우가 바로 답을 내놓지 못했다.
잠시 짧은 심호흡을 한 후 서인우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돌아가시기 전 몇 년 동안 아빠와 가장 오랜 시간을 같이하셨던 분이십니다. 그 추억을 함께하고 싶습니다.”
안상훈의 검은 눈동자가 촉촉이 젖어 들었다.
사람들과의 소통이 힘들어 선택한 그림이 그를 더욱 단단한 틀 속에 갇혀 바깥세상과 멀어지게 만들었다.
그런 그에게 요리하는 서동수의 모습은 가슴 뛰는 충격으로 다가왔었다.
그리고 그가 만들어 준 음식을 처음 맛본 순간 무작정 따라 하고 싶었다.
“처음 서동수 셰프님의 요리하는 모습을 본 후 꼬박 한 달을 하루도 빠짐없이 똑같은 시간에 [서풍]에 가서 매일 같은 메뉴를 시켰습니다.”
“한 달을요?”
“내가 워낙 낯가림이 심해서 한 달째 되는 날 심하게 떨며 부탁드렸어요. 요리하는 법을 배우고 싶다고.”
그때의 떨림이 고스란히 전해지듯이 안상훈의 손이 심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그걸 자각한 듯 두 손을 테이블에서 내려 무릎 위에 살며시 포갠 안상훈의 말이 잠시 끊겼다가 이어졌다.
“그날 사장님이 물어보셨어요. 왜 매일 같은 음식만 먹냐고 말입니다.”
“네, 저도 그 이유가 너무 궁금합니다.”
“한 달을 짬뽕만 시켜 먹었더니, 처음 느끼지 못했던 재료의 맛들이 하나하나 느껴졌어요. 아주 미세한 향신료까지.”
“음식을 드시며 연구를 하셨던 거군요?”
“네, 그래서 그렇게 대답했습니다. 사장님의 짬뽕에 들어간 모든 재료와 조미료, 심지어 면발의 재료까지 느껴진다고요.”
서인우가 활짝 웃어 보였다.
“그래서 아빠의 수제자가 되신 거군요?”
“그저 운이 좋았습니다.”
“그게 운이 아니라 안상훈 씨의 실력이라는 걸 많은 사람에게 증명해 보이세요.”
테이블 모서리에 시선을 고정한 안상훈이 깊은 생각에 잠긴 듯 꼼짝하지 않고 있었다.
“그래도 난 자신이 없어요.”
서인우가 자리에서 일어나 안상훈의 곁으로 다가갔다.
“저는 자신 있습니다. 안셰프님과 함께 [서풍]을 다시 일으킬 자신이 있단 말입니다.”
안상훈의 얼굴이 무척이나 복잡해 보였다.
“지금 저와 함께 제 가게로 가시죠. 방금 말씀하신 향신료까지 느낄 수 있었던 그 실력으로 제 음식을 드셔 보시고 판단해 주세요. 진심으로 부탁드립니다.”
가게에 도착할 때까지 안상훈은 아무 말이 없었다.
복잡한 머릿속이 정리가 안 되는지 이따금 고개를 저으며 걸었다.
“잘 만나고...어?”
가게 문을 열자 기다리고 있었는지 이준형이 달려오다 멈칫 멈춰 섰다.
“내가 말했던 [서풍] 안상훈 셰프님이셔.”
“여기는 저와 동업하고 있는 이준형이라고 합니다.”
서인우의 소개로 어색한 인사를 나눈 안상훈의 시선은 가게에 떡하니 걸린 이전 [서풍]의 메뉴판에 고정되어 있었다.
“아빠 가게에 있던 메뉴판을 걸었습니다. 들어오시면서 보셨겠지만, 그래서 가게 이름도 [서풍]을 넣었고요.”안상훈이 메뉴판에 이어 가게를 둘러보고 있었다.
“다운 씨, 이쪽으로 와서 인사해요.”
“안 셰프님, 저희 가게 정식 직원 1호인 정다운 씨입니다.”
“안녕하세요.”
둘이 동시에 고개를 숙이며 짧은 인사를 나눴다.
“아무 데나 편한 곳에 앉아서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제가 빨리 음식을 만들어 가지고 오겠습니다.”
어떻게 된 일인지 전혀 감이 오지 않은 이준형과 정다운이 서인우를 따라 주방으로 들어왔다.
“계속 자신 없다고 거절해서, 내가 만든 음식을 직접 드셔 보시고 우리와 함께할 건지 결정해 달라고 했어.”
“알았어. 방해 안 할 테니까 정말 끝내주게 만들어와.”
이준형의 말에 정다운이 주먹을 쥐어 보이며 응원의 눈빛을 보냈다.
웍에 기름을 두르고 파를 넣어 향긋한 파기름을 만들었다.
-마지막에 차돌을 넣어.
“사부, 그냥 오리지널 짬뽕을 만들 생각이야.”
-조금 전에 하는 얘기 들었다. 안 셰프 왔다면서?
“응, 내가 꼭 이전 [서풍]의 맛으로 안 셰프를 설득할 거야.”
-그러니까 차돌 짬뽕으로 만들라고.
서인우는 중식도가 하는 말을 바로 이해하기 어려웠다.
-[서풍]에서 차돌 짬뽕을 처음 만든 게 안상훈이다. 네가 그걸 알고 있으면 아주 많이 신기해하겠지?
서인우의 눈이 반짝하고 빛을 냈다.
“오케이. 그럼 완벽한 [서풍]의 맛을 내면서 안 셰프가 만든 차돌 짬뽕을 그대로 재현해 주면...?”
-캬! 감동의 도가니탕에서 헤어나오지 못하지.
편으로 넓적하게 썰은 배추와 양파, 청경채등을 넣어 볶다가 버섯을 넣고 마지막으로 해물을 넣어 센불에 빨갛게 볶은 후 육수를 넣었다.
여기까지가 [서풍]의 홍짬뽕이다.
서인우가 마지막으로 차돌을 펼쳐 넣어 순식간에 섞었다.
차돌이 푹 익자 빨간 기름이 웍에 가득했다.
삶은 면에 방금 완성한 차돌 짬뽕탕을 넣어 기름지고 풍성한 한 그릇을 완성했다.
정다운이 깔끔하게 올려놓은 단무지와 양파, 쟈차이를 멍하니 보고 있던 안상훈이 점점 다가오는 진한 향에 절로 고개를 돌렸다.
“안 셰프님, 천천히 맛보시고 평가해 주시길 바랍니다.”
“이건 차돌 짬뽕이네요? [서풍]의 대표 짬뽕은 이게 아니라...”
“이건 안상훈 셰프님이 처음 만들어서 유명해진 차돌 짬뽕 그 레시피 그대로입니다. 그러니, 그때의 기억과 비교해 주세요.”
안상훈의 놀란 동공이 지진을 일으켰다.
“그걸 어떻게...”
“오늘 처음 뵀지만, 아빠한테 얘기는 많이 들었습니다.”
사부에게 들었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어쩔 수 없는 선의의 거짓말이라 스스로 위로하며 거짓말을 덧붙였다.
“이 짬뽕을 안상훈 셰프님이 만드신 걸 보고 아빠가 정말 좋아하셨습니다. 집에서도 몇 번 해주셨어요.”
점점 이준형을 닮아가나?
거짓말이 늘었다.
“내가 원래 고기를 엄청 좋아합니다. 해물도 좋고 고기도 좋은데 같이 먹을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 고민하다 만들었는데...사장님이 메뉴로 만들어 주셨어요.”
짬뽕에서 눈을 떼지 못하며 말하는 안상훈은 다시 그때로 돌아간 듯 행복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고개를 숙여 향을 깊이 들이마시고는 국물을 한 숟가락 떠서 입에 넣었다.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다시 한번 국물을 입에 넣는 안상훈의 손이 미세하게 떨렸다.
본격적으로 면과 채소, 해물들을 골고루 얹어 두세 번 짬뽕을 먹던 안상훈이 놀란 눈으로 서인우를 바라봤다.
“이게...이 맛이 어떻게 가능한 겁니까?”
이준형이 주먹을 쥐어 보이며 속으로 환호하는 듯 입을 동그랗게 모았다.
“이건 서동수 셰프님만이 낼 수 있는 맛이에요. 내가 몇 년을 죽어라 하고 노력했지만, 비슷하게 흉내만 낼뿐 정확히 이 맛이 나오지는 않았습니다.”
“그래서 부탁드리는 겁니다. 저와 안 셰프님이 함께라면 [서풍]의 바람을 다시 불러일으킬 수 있을 것 같아서요.”
“[서풍]의 바람...”
안상훈의 눈빛이 달라졌다.
“너무 갑자기라 지금 아무 생각도 나지 않습니다. 하루만 시간을 주세요. 고민하고 연락드리겠습니다.”
“네, 안 셰프님과 함께 새로운 [서풍]을 시작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그럼 생각해 보시고 연락해주세요.”
안상훈이 천천히 몸을 일으켜 인사를 하고는 바로 가게 문을 열고 나갔다.
이준형과 정다운 또한 간절한 마음을 담아 깍듯하게 인사했다.
“인우야, 방금 저 사람 어딘가 좀 불안해 보이지 않아? 아까 인사할 때 내 눈을 바로 못 쳐다보는 것 같던데...”
“사장님, 저도 똑같이 느꼈어요. 사장님과 대화를 나누면서도 주로 시선을 다른 곳으로 많이 두시던데...정말 낯가림이 심하신가 봐요.”
“말수도 없고 낯가림도 아주 심하다고 들었어. 그래도 오늘은 정말 얘기 많이 해 주셨다.”
“어떤 결정을 내릴지 진짜 궁금하다. 단번에 [서풍]의 맛을 알아내긴 하던데...어?”
말을 하던 이준형이 놀라 출입문을 쳐다봤다.
조금 전에 나간 안상훈이 다시 가게로 들어오는 게 보였다.
“안 셰프님. 무슨 하실 말씀이라도...”
“괜찮다면 주방을 한 번 봐도 될까요?”
“주방을요?”
“내가 요리에 손을 뗀 지 좀 돼서 주방을 보고 다시 고민해 보려 합니다. 그때의 열정이 다시 살아나는지 확인해보고 싶어서요.”
용기를 냈는지 안상훈이 조금 전과 달리 서인우의 눈을 정면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럼요, 얼마든지 가능합니다.”
안상훈을 주방 안으로 안내한 서인우는 천천히 살펴볼 수 있도록 한쪽 옆으로 몸을 피해 있었다.
-안 셰프네? 다시 보니 반갑구만.
‘주방을 보고 싶다고 해서 같이 들어왔어. 지금은 요리를 안 하고 있어서 다시 시작한다고 마음먹기가 쉽지 않은가 봐.’
-안 셰프가 말이 없어 그렇지 요리에 진심이었는데...
‘주방에 펼쳐져 있는 웍이나 중식도들, 그릇들을 보면 다시 속에서 뭔가 꿈틀거리는 게 느껴질 거야. 틀림없어.’
-그때가 행복했다면 그렇겠지, 끔찍했다면 다시 악몽이 떠오를 거고.
‘행복했을 거야. 분명히.’
“여기는 오늘이 마지막이라고 했죠?”
“네, 안타깝게도 그렇게 됐습니다. 그래서 MS 백화점 입점에 최선을 다할 겁니다.”
“작지만 깔끔하고 편리하게 되어 있네요. 정리도 아주 잘 되어 있는 것 같고.”
“네, 아빠가 처음 시작한 곳입니다. 그래서 더 이곳을 고집했었고요.”
“그래요? 그건 몰랐습니다. 서인우 씨의 진심 충분히 전해지네요. 잘 봤습니다.”
주방을 나오려던 안상훈이 잠시 걸음을 멈췄다.
그의 시선이 꽂힌 곳을 따라가 보니 중식도가 보였다.
“저, 저 중식도는...?”
놀라 소리치는 안상훈의 목소리가 떨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