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6화.
“여보세요. 안상훈 씨 핸드폰 맞나요?”
-안상훈 씨 행폰 맞는데요, 아저씨는 누구세요?
아저씨?
그러고 보니 아주 어린 아이의 목소리였다.
게다가 발음도 살짝 부정확한.
“혹시 안상훈 씨는 옆에 없나요?”
-모르는 사람이 전화해서 그건 왜 물어보는 건데요? 아저씨가 누군지 먼저 말해야지요.
“나는 서인우 라는 사람인데, 그럼 지금 전화를 받는 사람은 누구예요?”
-그건 비밀이에요. 우리 엄마가 아무한테 이름 말해주면 안 된다고 했어요. 사이누가 누구지?
“그럼, 안상훈 씨 좀 바꿔줄래요?”
-우리 아빠, 아니 안상훈 씨는 지금 자요.
안상훈 셰프의 딸인 모양이다.
나이는 잘 모르겠지만, 아주 어린 목소리인데 제법 야무졌다.
“그럼 엄마 좀 바꿔줄래요?”
-아저씨, 보이스핑이야?
보이스핑?
아! 보이스 피싱을 말하는 것 같았다.
“그런 사람 아니야.”
진짜 보이스 피싱이라고 해도 누가 그렇다고 대답해줄까 싶었다.
-다 아니라고 그런댔어. 우리 아빠 돈 없어요. 그러니까 보이스핑 안 돼요.
유진아, 너 누구랑 통화 하는 거야?
옆에서 누군가 다른 사람의 목소리가 들렸다.
여자 음성으로 보아 안상훈은 아닌듯했다.
-여보세요, 안상훈 씨 핸드폰입니다.
“아, 안녕하세요. 저는 서인우라고 합니다. 전에 안상훈 씨가 일했던 [서풍] 서동수 사장님 아들입니다.”
-어머! 정, 정말이요? 잠시만요. 이이 깨울게요.
아이와 와이프가 동시에 안상훈을 깨우는 소리가 핸드폰에서 살짝살짝 들려왔다.
잠시 후 목이 잠긴 남자의 음성이 넘어오기 시작했다.
-여보세요. 안상훈입니다.
“안녕하세요. [서풍] 서동수 사장님 아들 서인우 라고 합니다.”
-정말 서동수 사장님 아들 맞아요?
“네, 맞습니다. 전화로 이럴 게 아니라 한 번 만나 뵙고 싶은데, 지금 계시는 곳이 어디 신가요?”
대답이 바로 넘어오지 않았다.
-나를 왜?
여전히 잠긴 목소리는 생기가 전혀 없게 느껴졌다.
“그건 만나서 천천히 말씀드리겠습니다. 서울에 계신가요?”
-그러긴 한데...
“꼭 만나 뵙고 싶습니다.”
-그럼 그쪽이 있는 곳을 말해주면 근처로 가리다.
“전에 일하셨던 [서풍] 근처입니다. 제가 일을 하고 있어서, 죄송하지만 3시부터 5시까지 시간이 가능한데, 괜찮으시겠어요?”
-알았어요. 근처 가서 이 번호로 전화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전화 기다리겠습니다.”
통화를 마친 서인우는 목소리에서 느껴지는 모습을 상상하며 빨리 만날 수 있기를 바랬다.
9시가 넘은 시간에 잠을 자는 걸로 봐서는 정식 출퇴근하는 일을 하고 있지는 않은 것 같았다.
생각에 빠져 있던 서인우 앞에 언제 들어왔는지 이준형이 목을 쭉 빼고 쳐다보고 있었다.
“어제 얘기들은 그 사람? [서풍]의 수제자라는?”
“응, 방금 통화됐어.”
“번호는 어떻게 얻었어?”
“이모부께 부탁했는데 여기저기 수소문해서 알아봐 주셨어.”
더운지 냉수를 한 컵 따라 마신 이준형이 선풍기 앞으로 얼굴을 내밀었다.
“느낌이 어때? 만나기로 했어?”
“오늘 점심 장사 끝나고 쉬는 시간에 이 근처로 와서 전화 주기로 했다.”
“어떤 사람일까? 진짜 궁금하네. 그것보다 지금 뭐 하고 있을까? 우리 제안을 받아들여 줄지 그것도 걱정이고...”
궁금하지?
나도 궁금하고 답답하다.
시간 돼서 만나봐야 알 수 있는 일이니 조금만 참아주라.
“오늘이 여기서 마지막 장사다. 우리 열심히 해서 유종의 미를 걷어보자고.”
“그래, 어! 다운 씨도 일찍 왔네.”
더운지 머리를 위로 깡충 묶고 정다운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
“좋은 아침입니다.”
“다운 씨 일찍 왔네.”
“오늘이 여기 마지막이라 생각하니 잠이 안 오더라고요. 그래서 뒤척이다 일찍 나왔어요.”
다들 확실치 않은 미래에 불안하겠지.
서인우를 믿고 한 선택이 과연 옳은 일이었는지 고민도 될 거다.
그런 걱정과 불안을 없애주기 위해서라도 MS 백화점 입점 심사에 반드시 통과해야 한다.
11시가 조금 넘자마자 바로 손님이 들이닥치기 시작했다.
이 곳에서 마지막 영업이라는 걸 알고 온 젊은 여자 세 명이 입구에서 한 참 사진을 찍고는 가게 안으로 들어왔다.
“어서 오세요.”
“여기 진짜 오늘이 마지막이에요?”
“네, 어떻게 알고 오셨어요?”
“인터넷 보고 문 닫기 전에 가보자고 서둘러 왔어요.”
서인우와 이준형이 동시에 정다운을 바라봤다.
정다운이 쑥스러운 듯 바닥을 발로 차며 웃었다.
“멀리서 오는 손님들이 헛걸음하시면 안 되잖아요. MS 백화점 심사 통과하면 새로운 소식 바로 올릴 거예요. 그래야 손님들이 [서풍]을 잊지 않죠.”
“다운 씨, 정말 최고다. 역시 우리 직원 1호 답네.”
이준형이 엄지를 들어 올리고 신이나 웃으며 메뉴판을 들고 자리에 앉은 손님들에게 향했다.
“주문하시겠어요?”
“네, 아! 그런데, 아이돌 제이 씨하고는 누가 친해요?”
갑자기 왜 그런 질문을?
질문의 의도도 답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이준형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제이 씨요? 우리 아무도 친하지 않은데...그건 갑자기 왜 물으시는 건데요?”
“우린 이거 보고 왔는데요.”
맞은 편에 앉아있던 앞머리가 눈을 반쯤 가리고 있는 여자가 핸드폰을 가까이 보여주었다.
“어? 여기 우리 가게 맞는데...”
“여기서 인생 짬뽕을 먹었다고 그래서 너무 궁금해서 왔어요. 그리고, 여기 보면 오늘이 이 가게에서 마지막이라고 아직 안 가본 사람들 꼭 가보라고 써놨잖아요.”
이준형 뿐 아니라, 서인우까지 고개를 쭉 내밀고 제이가 올린 글을 정신없이 보고 있었다.
대한민국에서 제일 유명하다는 아이돌 가수를 몰라 본 서인우 로서는 지금 이 상황이 더 믿기지 않았다.
물론 지금은 확실히 기억하고 있지만, 자신의 SNS에 이 가게 정보까지 올려줄 줄이야.
그런데, 이 가게가 오늘 문 닫는 걸 어떻게 알았을까?
그 뒤로 제이 뿐 아니라 그 매니저도 온 적 없었는데 말이다.
그 궁금증에 답할 차례라는 듯이 천천히 다가온 정다운이 자기 핸드폰에 손가락을 쩍 가져다 대고는 둘에게 잘 보라는 듯 눈짓을 했다.
“여기 보라고? 뭐...이게 무슨 뜻인데?”
놀라 입을 벌리고 있는 이준형과 달리 서인우는 연신 눈을 깜빡거리며 정다운의 핸드폰 액정으로 들어갈 듯 보고 있었다.
“다운 씨, 둘이...언제부터...?”
이준형의 턱이 곧 빠질 위기에 처해 있었다.
“지난번 제이 씨가 여기 다녀가고 그다음 날부터요.”
그러니까 그게 무슨 소리냐고?
서인우 혼자 대화에 끼지 못하고 있었다.
“다운 씨랑 제이 씨가 맞팔이라잖아?”
“맞 뭐라고?”
서인우의 당당한 외침에 메뉴를 고르고 있던 여자 셋과 이준형, 정다운이 다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리고는 바로 이준형이 정다운의 팔을 쓱 잡아끌어 서인우의 곁에서 멀리 떨어트렸다.
왠지 전에 느껴본 기분이었다.
제이 씨가 가게에 온 날도 저놈이 슬금슬금 거리를 뒀었는데...
“뭔데? 그게 뭔데 그러냐고?”
진짜 쪽팔린다는 표정을 있는 그대로 보이며 이준형이 서인우를 주방으로 끌고 들어갔다.
“너 진짜 나랑 동갑 맞지? 혹시 회귀해서 몸만 이십 대인 건 아니지?”
“조금 전에 다운 씨가 보여 준 게 나이랑 관련 있는 거였냐?”
어쩌면 좋을까? 이건 어디서부터 알려줘야 할지 갈 길이 너무 멀었다.
원래도 관심 없던 사람이 요리에 빠져서 더 관심을 놔버렸으니….
이준형이 간략히 설명하고 있는데, 주문이 들어왔다.
“요리에 신경 써라. 다음에 차분히 알려줄 테니까.”
“그래, 난 이 가게에서 펼쳐지는 세상이 더 재미있다. 맛있게 만든 내 요리를 행복한 얼굴로 먹고 좋아해 주는 모습이 제일 좋다고.”
웍에 물을 넣고 센 불에 끓여 먹물 만두를 삶았다.
부드럽게 잘 익은 만두를 접시에 담아 벨을 누르자 정다운이 바로 가지고 손님 테이블에 올렸다.
서인우는 곧장 정확한 사이즈로 자른 채소와 고기를 볶으며 확 올라오는 불길을 얹어 불맛을 입혔다.
윤기 자르르한 짜장 소스를 갓 삶은 탱글탱글한 면에 올려 짜장면을 완성했다.
매콤한 고추기름이 자르르한 짬뽕과 해산물을 가득 넣고 볶은 삼선볶음밥을 완성했다.
이마에 송골송골 맺힌 땀을 닦기 바쁘게 다음 주문이 들어왔다.
정신없이 주문받고 정성껏 음식을 만들었다.
정확히 3시가 되었을 때 서인우의 핸드폰이 울렸다.
[서풍]이 있던 자리에 새로 생긴 쇼핑몰 안에 있는 카페에서 만나기로 하고 앞치마를 벗어 던지고 바로 약속장소로 달려갔다.
오전부터, 아니 어제 마영준에게 들은 뒤부터 궁금했다.
카페 문을 열어 안을 살피던 서인우 눈에 구석 자리에 앉아있는 한 남자가 보였다.
비교적 마른 몸에 살짝 긴 듯한 앞머리가 굵게 웨이브져 있었다.
한눈에 그를 알아본 서인우가 천천히 다가가자 자리에서 일어난 안상훈이 먼저 입을 열었다.
“혹시 [서풍]...?”
“네, 맞습니다. 안상훈 셰프님이시죠?”
서인우를 바라보는 안상훈의 눈빛이 유독 슬프고 진지해 보였다.
방송을 본 적이 없는지 서인우의 얼굴은 몰라보는 듯했다.
“안상훈입니다.”
“반갑습니다, 그리고 나와 주셔서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서동수 사장님 아들인데...”
듣던 대로 말을 많이 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눈빛에서 알 수 있었다.
이 사람이 얼마나 진심인지.
“혹시 실례지만 지금 어디서 무슨 일을 하고 계시는지 여쭤봐도 될까요?”
안상훈이 잠시 말없이 커피를 마셨다.
서인우도 커피를 마시며 그의 대답을 묵묵히 기다렸다.
“그냥 이것저것 합니다.”
“그럼 요리를 하고 계시는 건가요?”
서인우의 질문에 안상훈의 눈빛이 흔들렸다.
안색까지 안 좋아진 안상훈이 시선을 돌리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림 그리고 있습니다.”
[서풍] 서동수 셰프의 수제자라면 분명 어디서든 대우받으며 요리를 할 수 있었을 텐데...
궁금했다.
“저는 이 근처에서 작게 가게를 하고 있습니다. 아빠의 [서풍]을 이어가고 싶어서 [서풍 TWO]라는 이름을 걸고 정말 열심히 하고 있었습니다.”
서인우는 어떻게 아빠의 [서풍]을 이어가게 됐는지, 그리고 지금 어떤 상황인지를 간략히 설명했다.
집에 텔레비전을 사놓지 않아서 방송을 한 번도 본 적이 없다는 안상훈은 왠지 주위 사람들과 단절된 삶을 사는 것 같았다.
대화 도중 느껴지는 뭔지 모를 불안함까지.
“오늘 아침에 전화 받은 아이는 딸인가요? 아주 똘똘하고 귀엽던데요?”
딸바보였나?
딸 얘기가 나오자 금세 화색이 돌았다.
“네, 내 딸 유진입니다. 올해 여섯 살이에요.”
“한번 만나보고 싶네요.”
시간을 가지고 천천히 다가가야 할 것 같았지만, 서인우의 상황은 그걸 허락하지 않았다.
당장 구본석 과장의 연락이 오는 대로 심사 준비를 해야 하는 상황이다.
서인우는 짧게 심호흡을 한 후 오늘 만남의 본론을 꺼내기 시작했다.
“조금 전 말씀 드린 대로 지금 하는 가게는 오늘이 마지막입니다. 제 의지와 상관없이 돈 있고 힘 있는 사람에 의해 강제로 쫓겨나게 됐습니다.”
말없이 듣고만 있는 안상훈의 얼굴이 더 심각하게 변해 있었다.
“저는 아빠의 [서풍]을 이렇게 문 닫게 할 수는 없습니다. 다행히 기회가 되어 MS 백화점에 입점해보려고 합니다. 물론 다른 업체와 경쟁해서 이겨야 가능하지만요.”
“MS 백화점이요?”
백화점 이름이 나오자 안상훈이 반응을 보이기 시작했다.
긴장한 듯 안상훈의 침 삼키는 소리가 크게 들렸다.
“[서풍]은 한참 전에 MS 백화점에 들어갔어야 했어요. 아니, 반드시 들어갔을 겁니다. 사장님이 돌아가시기 바로 전까지 입점 제안이 들어왔었죠. 거의 수락한 상태였는데….”
목이 타는지 냉수를 들이켠 안상훈이 고개를 들어 서인우를 바라봤다.
“그래서 내게 바라는 게 뭡니까?”
“아빠에게 배운 요리 실력으로 저와 함께 [서풍]을 이어가자는 말씀을 드리려 찾아왔습니다. 반드시 [만가복]을 이기고 MS 백화점에서 다시 새롭게 [서풍]의 바람을 일으킬 겁니다.”
“[만가복] 이라고 했어요?”
내내 조용히 듣고만 있던 안상훈의 눈에 핏발이 서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