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 중식당엔 무언가 특별한 게 있다-85화 (85/200)

제85화.

숨도 쉬지 않고 다음 말을 기다리고 있는 서인우와 이준형을 번갈아 쳐다보던 마영준이 조용히 술잔을 비웠다.

“그 사람, [서풍]의 서동수 셰프님 수제자.”

“네? 그게 누구인데요?”

“셰프님 돌아가시고 나서 한동안 손에 중식도를 잡지 못했다고 들었어. 안 셰프님 말이야. 안상훈 셰프.”

“안상훈 셰프요? 저는 처음 듣는 이름인데요?”

치열한 입시 경쟁을 준비했던 학창 시절, 그리고 합격의 기쁨에 빠져 밖으로만 돌던 대학 1학년 시간.

서동수가 죽기 전 그 귀한 시간을 남들과 똑같이 서인우도 그렇게 한 집안 다른 사람처럼 살았었다.

입시를 잘 치르고, 새내기 생활 맘껏 하고 나서는 아빠와 여행도 좀 다니고 대화도 많이 나눌 거로 생각했었다.

한 치 앞도 모르는 어리석음에 얼마나 뼈저리게 후회를 했는지….

그 시절이 다시 떠올라 몸서리쳐진 서인우가 말없이 잔을 비웠다.

“아빠 가게에 가끔 갔었는데…. 한 번도 뵌 적 없는데요.”

“그럴 거야. 안 셰프님은 절대 주방에서 안 나오셨을 거다. 워낙 말수도 없고, 낯가림이 심해서 나도 딱 두 번 정도 대화 나눠본 것 같다.”

“지금 어디 계시는데요?”

“원래 그 사람이 그림을 그리던 사람인데, 서동수 셰프님 그렇게 되시고 한동안 방황하다 다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고 들었다.”

“그림이요?”

이준형이 이해가 되지 않는 눈빛을 내보이며 물었다.

“그럼 요리에 손 뗀 사람인데, 인우한테 도움이 되겠어요?”

“그 사람 미적 감각이 뛰어날 뿐 아니라, 워낙 집요하고 세심해서 서동수 셰프님 요리를 가장 똑같이 만들어 냈어.”

“그래요?”

“물론 인우가 만든 음식을 먹어 보기 전까지는 가장 똑같았지. 그래서 서동수 셰프님이 유일하게 수제자로 키우고 계셨고.”

잠시 아무도 말을 잇지 못했다.

아빠가 죽기 전까지 아마도 가장 많은 시간을 보냈을 그 사람이 궁금했다.

“그 사람을 찾아야겠어요. 안상훈 셰프님이요.”

“내가 여기저기 수소문해 볼게. 너도 주변에 알아볼 수 있으면 좀 알아봐.”

“어머니나 이모부는 알고 계시지 않을까? 그 사람이라면 정말 해볼 만할 것 같다.”

사부를 통해 아빠의 수제자 얘기를 얼핏 듣기는 했다.

그냥 보조 셰프 중에 누군가를 가르치셨나보다 생각하고 가볍게 넘겨버렸다.

당장 사부를 만나 물어보고 싶어 엉덩이가 들썩거렸다.

“내가 잘 알아보도록 할게요. 내일 장사를 위해 이것만 마시고 일어나죠.”

“그러자, 벌써 많이 마셨네.”

테이블에 빈 병이 다섯 개나 나와 있었다.

“고기 더 안 먹어? 얼마든지 더 사줄 수 있어.”

“아니요, 됐어요. 이러다가 내일 일어나면 닭 돼 있는 거 아닌가 걱정이네요.”

그러면서도 이준형이 마지막 남아있는 닭갈비를 야무지게 상추에 싸서 입에 넣었다.

“그럼 마지막 잔이니까 한 번 부딪칠까? [서풍 TWO]의 MS 백화점 입점을 기원하며, 마시자!”

“감사합니다. 응원도 좋은 정보도요.”

기분 좋게 알딸딸한 상태로 둘과 헤어진 서인우는 가게에서 마지막 하루를 보내고 싶다는 핑계를 대고 혼자 가게 문을 열고 들어왔다.

“사부!”

-이 시간에 왜 왔냐?

“혹시 사부가 밤에는 변신하는 거 아닌가 보려고 왔지. 그대로네.”

-넌 아직 내가 사부로 보이냐?

가늘게 목소리를 바꿔가며 장난을 치는 사부를 향해 씨익 미소를 지어 보였다.

-너 나한테 할 말이 있어서 왔구나? 얼굴을 보아하니 서동수와 관련 있는 얘기겠구만.

“사부 진짜 귀신이네.”

-귀신 아니고 신이라고!

“며칠 전에 아빠 수제자에 대해 잠깐 언급했었지? 기억나?”

-별 얘기 안 했는데? 그 백화점 제안 들어왔을 때 그 수제자가 좀 더 요리를 익힐 시간이 필요하다고 거절했었다고 그랬지.

“그 사람 이름이 뭔데?”

-이름? 안상훈. 서동수가 맨날 안솁 이라고 불렀어.

“안 셰프?”

-응, 지금 나이가 40은 됐겠다. 사람이 말도 없고 어둡고 영 기운도 없어 보였는데, 음식 플레이팅이 예술이었지.

중식도가 빙그르르 돌더니 딱 멈춰 서며 물었다.

-갑자기 그 사람에 관해 묻는다는 건 인재를 고용해 보겠다는 의미?

“맞아. [만가복]에서는 분명 거기 대표 셰프와 함께 이번 대결을 준비할 거야. 그럼 나도 빨리 대책을 세워야 하니까.”

-안 셰프가 다시 와준다고만 하면 천하무적이지. 그런데, 쉽지 않을 거다. 워낙 말도 없고, 고집도 보통 아니야.

“그래도 찾을 수만 있으면 정중히 부탁해 보려고.”

-서동수를 친형님처럼 따랐던 네 이모부가 알 거다. 워낙 자주 들락날락했으니까.

아침 일찍 이모부와 통화를 해봐야겠다고 생각하며 집으로 돌아온 서인우는 쉬이 잠이 들지 않았다.

안상훈이라는 사람이 궁금했다.

몇 년 동안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

과연 아직 [서풍]에서 배운 것들을 기억하고 있을까?

몇 번이나 몸을 뒤척이다 간신히 잠이 들었다.

평상시보다 늦게 잠이 들어서인지 술 때문인지 알람 소리를 듣고도 잠이 바로 깨지 않았다.

간신히 몸을 일으켰지만, 머리 위에 바위라도 올려놓은 것처럼 무겁게 느껴졌다.

시원한 물을 한 잔 마시고는 바로 집 밖으로 나와 달리기 시작했다.

10분, 20분 달릴수록 다행히 머리는 가벼워지는 것 같았다.

비록 규모는 작지만, [서풍]이라는 이름을 걸고 야심 차게 시작한 가게가 오늘로 문을 닫는다.

마지막 하루까지 [서풍]을 찾아주는 손님들에게 가장 맛있는 음식으로 보답할 수 있도록 새벽 시장에서도 더욱 깐깐하게 재료들을 골랐다.

“사장님, 오늘 이후로 당분간 장 보러 못 나오게 됐습니다.”

“왜? 가게에 무슨 일 있어?”

“사정이 생겨서 가게 문을 닫게 됐어요. 다른 곳에서 다시 시작할 거니까 그때도 지금처럼 제일 좋은 재료 책임져 주셔야 합니다.”

수산시장 오 사장이 걱정스러운 눈으로 서인우를 빤히 쳐다봤다.

“잘 나가는 가게에 갑자기 문 닫을 일이 뭐가 있어? 혹시 어디 아픈 건 아니지?”

“아니에요. 곧 다시 시작할 겁니다.”

꼼꼼하게 고른 재료들을 가지고 가게로 돌아갔다.

장을 보며 정말 가게 문을 닫는다는 게 실감이 난 서인우는 착잡한 심정 때문인지 속이 헛헛한 것 같았다.

유독 싱싱해서 많이 사 온 전복을 세 개 꺼내서 솔로 깨끗이 손질했다.

-해물 먼저 손질하려고?

“고소하게 전복죽을 좀 끓여 먹으려고.”

-어디 아프냐?

“응, 많이 아파.”

-다시 말하지만 내가 의학적으로는 좀 약한데.. 어디가 아픈 건데?

“마음이. 그래서 오늘은 좀 든든하게 챙겨 먹고 시작하려고.”

-흠...마음이 아플 때 잘 듣는 치료법을 알긴 하지.

전복을 씻어 도마 위에 올리던 서인우가 중식도를 빤히 쳐다봤다.

“그런 치료법이 있어?”

-이건 정말 아무한테나 해주는 치료가 아닌데...내가 특별히 너한테만 해주는 거다. 어디 가서 절대 소문내지 마. 나 피곤해지는 거 딱 질색이다.

서인우는 사부가 정말 신이 맞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자, 가슴이 벅차올라 쿵쿵 뛰는 것 같았다.

-준비됐어?

“어? 내가 어떻게 하고 있어야 하는데?”

-가만히 서 있어. 그럼 내가 치료해 줄 테니까.

마음을 치료하는 치료법이 대체 뭘까? 그리고, 사부는 그런 치료법을 어떻게 알게 됐을까?

서인우는 생각할수록 너무 신기하고 믿기지 않았다.

계속해서 뛰어대는 가슴을 간신히 가라앉히며 잔뜩 기대에 부풀어 중식도를 향해 가만히 서 있었다.

-호!

서인우의 가슴팍 가까이 멈춰선 사부가 던진 한마디, 아니 치료법이었다.

“지, 지금 호 해준 거야?”

-쑥스러우니까 얘기하지 마. 나 정말 용기 내서 해준 치료니까.

“하하, 하하하.”

정말 엄청난 치료법이었다.

크게 웃고 나니 시장에서부터 묵직하게 가슴을 짓누르고 있던 착잡한 심정이 다 사라진 것 같았다.

“고마워.”

-뭐가? 치료해줘서?

“전부 다. 나를 찾아와줘서 고맙고...오늘 치료도 너무 고마워.”

-아파도 말은 바로 해야지. 내가 너를 찾아간 건 아니야. 네가 나를 발견해 준거지.

“사부를 보내준 아빠한테도 너무 감사해.”

-그럼 든든하게 아침 챙겨 먹고 오늘 하루 멋지게 마무리해. 더 큰 무대를 위해 준비하자고.

깨끗이 손질한 전복을 잘게 다져 씻어놓은 쌀과 함께 참기름을 넉넉히 둘러 볶았다.

주방에 고소한 참기름 냄새와 터트린 내장에서 나는 바다향이 가득했다.

물을 부어가며 계속 저어주다 다진 양파와 당근을 넣어 팍팍 끓여 주었다.

쌀알이 퍼져 가며 걸쭉하게 죽이 완성되어 갔다.

소금을 넣어 간을 한 후 마지막에 참기름을 한 번 더 부었다.

어려서부터 감기에 걸리거나 배탈이 나면 엄마가 끓여주던 기억으로 전복죽을 만들었다.

그때의 어린 서인우는 그 맛을 정확히 알지 못했지만, 이제는 알 것 같았다.

그때 엄마의 전복죽은 걱정과 사랑이었다는 것을.

전복죽 한 그릇으로 힘을 얻은 서인우는 아침 시장에서 사 온 재료들을 더 열심히 손질해 장사 준비를 마쳤다.

9시가 넘으면 이모부에게 전화를 걸어볼 생각이었다.

하지만, 이제 8시가 조금 넘은 시간...어제 들은 안상훈 셰프의 소식이 궁금해서 참을 수가 없었다.

[이모부, 잘 지내고 계시죠? 혹시 통화 괜찮으세요? 통화 가능하시면 전화 좀 주세요.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출근 준비로 바쁜 시간일 것 같아 우선 문자를 보냈다.

5분쯤 지나 핸드폰이 울렸다.

“안녕하세요, 이모부.”

-운전하면서 통화하는 게 편할 것 같아서, 차 타자마자 전화했다. 잘 지내지?

언젠가 알게 되더라도, 오늘은 거짓말을 좀 해야 했다.

“저야 잘 지내죠. 날씨가 꽤 덥네요.”

-그치, 곧 장마 시작일텐데...매일 불 앞에서 고생이 많다.

“전 그 불꽃 보는 게 아주 좋아요.”

-타고났다, 타고났어.

핸드폰으로 이모부의 웃음소리가 넘어왔다.

“저, 이모부. 혹시 전에 아빠 가게에서 일했던 안상훈이라는 셰프 아세요?”

-고독한 안 셰프?

“네?”

-맨날 혼자 있고, 말도 없고 해서 형님이랑 그렇게 불렀어. 고독한 안 셰프라고.

“그분 연락처 알고 계세요?”

-그때 딱 한 번 술자리를 같이 한 적 있는데, 번호가 있는지 모르겠다. 내가 회사 도착하는 대로 찾아서 보내줄게.

“부탁 좀 드릴게요. 감사합니다.”

잠시 말이 끊겼던 핸드폰에서 조심스러운 이모부의 낮은 음성이 들렸다.

-갑자기 안 셰프를 찾는 이유를 물어봐도 될까?

처음부터 다 말씀드릴 걸 그랬나?

그러면, 그대로 차를 돌려 서울로 올라오시겠지?

“사실 이모부 말씀대로 가게를 좀 확장해볼까 생각하고 있어요. 그러면, 지금처럼 저 혼자서는 안될 것 같아서요.”

-그래? 가게가 더 잘되나 보다?

당분간이라도 그렇게 알고 계셔주세요.

엄마랑 이모네 가족들까지 걱정 끼쳐 드리고 싶지는 않습니다.

“네. 기다리는 손님들이 많아져서요. 안상훈이라는 셰프가 아빠의 수제자였다고 들었어요.”

-그 사람 말은 없고 느린데, 손은 매우 빠르고 정확했어. 특히 음식을 접시에 담을 때 뭐 자신만의 철학이 있다나 그래서 멋있기도 했고.

“저도 그렇게 들었어요.”

-무엇보다 형님의 맛을 가장 비슷하게 냈지. 나도 놀랐으니까.

“얘기 들으니까 더 빨리 만나고 싶네요.”

-알았어. 내가 어떻게든 연락처 알아봐 줄 테니까 바로 만나봐.

“네, 감사합니다. 그럼 연락해주세요.”

고독한 안 셰프?

과연 아빠의 요리를 그대로 전수받은 이 남자는 지금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오래전 헤어진 연인을 다시 찾는 것처럼 궁금하고 설레었다.

전화 통화 하나 했는데, 목덜미를 타고 땀이 흘러내렸다.

시원하게 아이스 커피를 만들어 한 모금 들이키고 나자 핸드폰에 반가운 문자가 날아왔다.

[전에 주방에서 보조로 일하던 다른 직원 통해 번호 얻었다. 연락해봐. 오늘도 파이팅이다.]

안상훈의 전화번호와 함께 이모부의 응원 메시지가 서인우에게 반갑게 다가왔다.

이게 뭐라고 살짝 떨려왔다.

피식 웃음을 한 번 웃어 긴장을 없애고 메시지로 날아온 안상훈의 번호를 눌렀다.

신호가 세 번 울리더니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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