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4화.
심장이 쿵쿵 뛰기 시작했다.
핸드폰을 통해 들리는 구본석 과장의 목소리가 너무 커서만은 아니었다.
-우리 제대로 사고 한 번 쳐봅시다.
그 말이 계속 귀에 윙윙거리며 심장은 더 빨리 뛰기 시작했다.
“그럼 말씀하신 대로 저희와 [만가복] 중에 경쟁을 통해 한 업체가 선정되는 건가요?”
-네, 그렇습니다. 죄송한 말씀이지만, 아무래도 현재는 [만가복]이 훨씬 유리한 상황입니다. 하지만...
“자신 있습니다. 실력으로, 그리고 맛으로 결정하는 거라면 얼마든지 이길 자신 있습니다.”
-그거면 됩니다. 다른 거 다 필요 없어요. 셰프의 실력과 끝내주는 맛이면 게임 끝입니다. 그렇게 되도록 이 구본석이가 끝까지 해낼 겁니다.
핸드폰이 터지든 서인우의 심장이 터지든 뭐든 하나 터질듯하게 구본석의 말이 울려 퍼졌다.
“감사합니다. 과장님을 만나서 정말 다행입니다.”
자기도 모르게 서인우의 목소리도 주방에 크게 울렸다.
-그 감사 인사는 우리 둘 다 유현주 씨한테 해야 할 것 같네요. 그것도 입점했을 때 말입니다.
“네, 반드시 대결에서 이겨 감사 인사 제대로 하도록 하겠습니다.”
-자세한 심사 절차나 방법, 일정 등은 내일 구체적인 스케쥴 나오는 대로 메일로 보내 드리겠습니다. 그럼 바쁜 시간일 텐데 이만 전화 끊습니다.
“감사합니다.”
두 손으로 핸드폰을 쥐고 잠시 멍하니 천장을 바라봤다.
‘아빠, 내가 [만가복]은 절대 [서풍]을 따라올 수 없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느끼게 해줄 거야. 아빠가 이뤄놓은 [서풍]의 명성을 반드시 되찾을 거라고. 그러니까, 꼭 지켜봐 줘.’
밖에서 소리를 들었는지 이준형이 후다닥 주방으로 뛰어 들어왔다.
눈시울이 붉어진 서인우가 급하게 눈을 깜빡거렸다.
“인우야. 무슨 전화야? 백화점?”
“준형아, 우리 [만가복]하고 제대로 겨뤄보기로 했어. 난 말이야, 무조건 이길 거다. 다시는 나와 함께하는 너나 다운 씨가 걱정하는 일 따위는 만들지 않을 거라고.”
“우와 진짜? 정말이야? 그 과장이 결국 해낸 거야?”
이준형이 고개를 끄덕이고 있는 서인우를 얼싸안고 또다시 방방 뛰고 있었다.
-쟤 빨리 내보내, 정신없어. 그리고, 주방에 먼지 날려. 당연한 결과 가지고 호들갑은.
‘사부, 나 심장이 이상해. 아까부터 자꾸 심장이 터져버릴 것 같아.’
-난 의학 쪽으로는 좀 약한데.
“하하, 하하하.”
정말 이럴 때는 소리 내서 크게 웃고 싶었다.
“너도 너무 좋지? 우리 정말 잘해보자. 제대로 준비해서 [만가복] 그 재수 없는 늙은이 코를 납작하게 해주자고.”
“그래, 오늘부터 더 연습하고 노력할 거야.”
“그래, 우리 잘 할 수 있어.”
-말은 똑바로 해야지. 자기가 뭘 잘할 수 있는데? 듣자 듣자 하니 다 내 몫이구만. 그 과장 번호 대. 빨리 전화해서 취소하게.
“하하, 하하하.”
서인우의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영문을 모르는 이준형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덩달아 웃었다.
주방의 웃음소리가 전염이라도 된 듯 홀에 있는 테이블 여기저기에서 손님들의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서인우는 생각했다.
이런 행복한 식당을 만들고 싶었다고.
그리고, 유현주가 해준 말처럼 곧 더 많은 사람이 행복해하는 식당으로 키워낼 거라고.
* * *
저녁 장사가 거의 마무리 되어 갈 즈음 마영준이 앞치마에 손을 닦으며 서인우에게 전화를 걸었다.
하마터면 가게를 꼼짝없이 뺏길 뻔했던 그에게 서인우는 동생이지만, 은인이었다.
그런 그가 내일이면 가게에서 쫓겨난다는 사실이 생각할수록 분하고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안녕하세요, 선배님.”
-곧 문 닫지?
“네, 지금 정리하고 있습니다.”
-술 한잔하자.
“좋죠, 저도 드릴 말씀이 있는데, 잘됐네요.”
-준형 씨랑 둘이 뭐 먹고 싶은지 의논해서 정해, 오늘은 형이 사줄 테니까.
자기도 모르게 형이라는 말을 뱉은 마영준이 픽 하고 작게 웃었다.
어느새 정이 들어 그들이 친동생처럼 느껴졌나 보다.
무작정 서울로 올라와 같은 일을 하며 알게 된 사람이 한, 둘 있긴 했지만 외로웠다.
세상과 혼자 힘들게 싸우며 사람들과는 더 두꺼운 벽을 쌓고 있었다.
그런 마영준의 입에서 저절로 형이라는 말이 나왔다는 게 그냥 좋았다.
“실수하시는 걸 텐데요? 우리 오늘 많이 마실 겁니다.”
-실컷 마셔. 뭐든 다 사줄 테니까.
“알겠습니다. 그럼 정리 끝나는 대로 선배님 가게 앞으로 가겠습니다.”
-그래, 그리고...서인우.
“네?”
-이제 편하게 형이라고 불러.
“좋아요, 형. 금방 갈게요.”
핸드폰은 한참 전에 꺼져 액정이 까맣게 변했는데도 꼼짝하지 않고 서서 미소를 짓고 있었다.
몇 년 동안 정말 열심히 일만 하며 살았다.
[셰프의 주방]을 많은 사람이 좋아해 주고 찾아주는 걸 보며 뿌듯함과 동시에 더 열심히 해야겠다는 열정이 생겼었다.
하지만, 항상 가슴 한쪽이 시린 한겨울 들판 같았었다.
드디어 마영준의 가슴에도 봄이 찾아온 듯 따뜻했다.
설거지해서 엎어놓은 웍과 조리도구, 그릇들을 가지런히 정리해 놓고 조리대 또한 물기 하나 없이 깨끗이 닦았다.
서인우와 이준형이 도착하기를 기다리며 박박 닦고 또 닦았다.
문 위에 달린 종소리가 유독 경쾌하게 들리며 서인우의 목소리가 텅 빈 가게에 울렸다.
“형, 우리 왔어요. 배고파요.”
씨익.
환한 미소를 지으며 서있는 서인우를 보자 절로 미소가 그려졌다.
“나도 배고프다, 뭐 먹을까?”
“매콤한 닭갈비에 소주, 어때요?”
“야, 탁월한 선택. 군침 돈다. 얼른 가자.”
그곳에서 나와 두 블록 걸어가 50년 전통이라고 크게 써 붙여놓은 닭갈비 집으로 들어갔다.
유명한 체인점들과 달리 동그란 스테인리스 테이블이 정말 노포집 느낌을 주는 곳이었다.
“여기 아주 느낌 있는데요?”
“괜찮지? 내가 좋아하는 곳이야. 맛도 끝내줘.”
쩝 소리를 크게 내며 이준형이 메뉴판을 빠른 속도로 훑었다.
“주문할까요?”
“그래.”
“사장님. 저희 주문이요.”
빨간 앞치마를 두른 60대쯤 되어 보이는 사장이 주문지를 들고 다가왔다.
“저희 주문은 여기 형이 할 겁니다.”
이준형이 마영준을 가리켰다.
“뭐?”
마영준이 웃으며 닭갈비 중간 매운맛으로 3인분과 쫄면, 치즈 추가, 그리고 소주 한 병을 주문했다.
“섞을 사람? 맥주도 시킬까?”
“형, 그렇게 작전 쓰고 그러면 안 됩니다.”
이준형이 뜬금없이 뱉은 소리를 잘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표정으로 마영준이 쳐다봤다.
“원래 고기 조금 먹게 하려고 탄산음료나 맥주를 미리 먹이고 그러는데, 오늘 우리한테는 안 통합니다. 술은 소주만 달릴 겁니다.”
“난 또 무슨 소리인가 했네. 배 터질 때까지 먹어.”
그 사이 사장님이 들고 온 채소 가득한 빨간 닭갈비를 불판에 부었다.
치이익.
뻘건 기름이 불판 테두리로 쫙 퍼지며 매콤한 냄새가 코를 자극했다.
닭고기와 채소, 떡, 고구마 등을 불판에 넓게 펼치며 연통을 끌어다 가까이 놓은 사장이 손에 들고 있던 주걱을 한쪽에 내려놓았다.
“이거 아무도 손대지 마셔. 내 담당이여.”
“네.”
당황해하는 서인우와 이준형과 달리 마영준이 빨리 답을 내놓았다.
사장이 다른 테이블로 사라지자 마영준의 설명이 이어졌다.
“여기 50년 동안 한 자리에서 장사하면서 손님이 먹기 전까지 닭갈비를 볶아주는 걸 쭉 고수해온 곳이래.”
“정말요? 쉽지 않을 텐데요.”
“중간에 너무 바쁘고 힘들어서 손님들한테 맡겼더니, 사장님이 만든 요리가 아닌 맛없는 닭갈비를 먹고 있더란다. 그 뒤로 절대 손님한테 손도 못 대게 해.”
“대단하시네요.”
“다 익으면 그 차이를 직접 느낄 수 있을 거다.”
사장이 다시 다가와 알맞게 익은 고기와 채소 등을 한꺼번에 뒤집으며 전문가의 손놀림을 제대로 보여주었다.
홀린 듯이 쳐다보고 있던 이준형의 목에서 침 삼키는 소리가 크게 나왔다.
“배고픈가 보구만. 이대로 손대지 말고 딱 1분만 있다가 자셔요.”
“네.”
양념이 잘 묻은 떡과 채소에 노르스름한 기름이 살짝살짝 보이는 게 일 분이 한 시간처럼 느껴졌다.
그새 핸드폰으로 시간을 재고 있었는지 이준형이 들고 있던 젓가락으로 불판 위를 툭 쳤다.
“무기 장착 완료. 이제 바로 전투를 시작합시다.”
상추도 쌈장도 더하지 않고 그대로 고기 위에 양배추를 올려 입에 쏙 넣었다.
닭갈비도 육즙을 머금을 수 있다는 사실을 처음 알게 됐다.
부드러운 고기를 씹자 짭조름하고 고소한 육즙이 입안에 가득했다.
“이건 정말 차원이 다른 맛인데요?”
“그렇지? 이 집이 왜 맛집인지 잘 알겠지?”
늦은 시간까지 장사하고 허기진 세 남자는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배를 채우기 바빴다.
불판 바닥이 점점 보이기 시작할 때쯤 마영준이 서인우와 이준형의 잔에 술을 따라 주었다.
“내일이 마지막 날이지?”
“네, 그곳에서는 마지막 날입니다.”
마영준이 술잔을 들어 부딪치고는 바로 입에 털어 넣었다.
“아직 새로운 가게는 찾지 못했다면서?”
“아직은 찾을 필요 없을 것 같습니다.”
“왜? 좀 쉬려고?”
걱정스러운 눈으로 서인우와 이준형을 번갈아 바라보던 마영준이 한숨을 크게 쉬고는 말없이 빈 잔에 술을 따랐다.
“오늘 저도 드릴 말씀 있다고 했잖아요?”
푹 고개를 숙이고 있던 마영준이 순간 시선을 올려 서인우를 빤히 쳐다봤다.
“저희 MS 백화점 중식당에 입점해보려고 합니다. 물론 다른 업체와 대결해서 이겨야 가능하긴 하지만, 꼭 성공시켜 보려고요.”
“뭐? MS 백화점? 갑자기 무슨 얘기야? 어떻게 된 건지 자세히 좀 얘기해봐.”
술 때문인지 방금 서인우가 꺼낸 화제 때문인지 마영준의 볼이 붉게 물들어 있었다.
[만가복]에 찾아가 김형식을 만난 얘기부터 유현주 대리를 통해 받은 구본석 과장의 명함 얘기까지 다 들은 마영준이 마치 자기 일인 듯 손뼉을 치며 좋아했다.
“그렇게 기회가 찾아온 거네. 너무 잘됐다. 그래서 그 과장이 뭐라 했는데?”
“선배님, 아니 형도 잘 알겠지만, MS 백화점 중식당 입점은 그 의미가 워낙 남다르잖아요.”
“그렇지, 그래서 경쟁하는 업체가 만만치 않을 거야. 지난번 요리 대회 때 심사위원으로 나왔던 유경동 셰프가 지금 MS 백화점 중식당을 맡고 있잖아. 우리 셰프들 사이에서도 그 식당은 암암리에 급이 다르다고 평가하고 있지.”
서인우가 새로 시킨 소주를 마영준의 잔에 따랐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이준형이 말을 덧붙였다.
“지금부터가 중요합니다. 놀라지 마세요.”
“왜? 무슨 문제라도 있어?”
“우리와 같이 입점 심사를 하게 된 업체가 바로 [만가복]입니다.”
“뭐? [만가복]? 그건 안 돼!”
마영준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소리쳤다.
놀란 서인우가 그를 자리에 앉히며 강한 눈빛으로 말했다.
“이제 그냥 당하지는 않을 겁니다. [만가복]은 절대 [서풍]의 맛을 이기지 못한다는 거 보여 줄 거라고요.”
지난 요리 경연대회에서 김형식이 벌인 온갖 악행을 다 알고 있는 마영준은 걱정으로 머리가 터질 것 같았다.
김형식이 그 제안을 받아들였다는 건 무조건 그 백화점을 차지하겠다는 뜻이었다.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돈으로든 힘으로든 할 수 있는 모든 걸 해서 서인우를 끌어 내릴 게 불 보듯 환했다.
“서인우, 이거 시작부터 너무 불리한 싸움이다. 김형식 그자를 만나봐서 알겠지만, 어떤 방법을 써서라도 네가 하려는 걸 막고 말 거야.”
“저도 알아요. 다행히 이 일을 진행해준 구본석 과장도 그런 부분을 걱정해서 획기적인 대안을 제시해 줬어요.”
“획기적인 대안?”
“우리 대결을 블라인드 테스트로 하기로 했습니다. 처음부터 외압이나 조작을 막자는 취지에서요.”
“누가 만들었는지 모르는 상태에서 오로지 맛으로 대결을 하게 한다는 거지?”
“네.”
“그렇다면 해볼 만하겠는데? 요리 실력이라면 자신 있지 않나?”
서인우가 쨍 소리 나게 잔을 부딪쳤다.
“자신 있습니다.”
“좋아, 그쪽은 분명히 아들 김원상을 위해 판을 짤 거고, 그럼 차은석 셰프가 보조로 나서겠군.”
“차은석 셰프요?”
이준형의 질문에 마영준이 꾹 다물고 있던 입술을 쭉 내밀며 고개를 끄덕였다.
“마포점 셰프인데, 이정복 대가의 수제자야. 지난번 대회도 김형식이 아들을 밀지 않았다면 그가 나갔겠지. 실력 있는 친구야.”
“그럼 우리 인우도 보조 셰프가 있어야 하는 거잖아요?”
“보조 셰프와 함께 하는 걸 기본으로 심사가 진행될거다. 나라도 같이 하고 싶지만, 난 가게를 비울 수 없으니...”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보는 이준형과 서인우를 향해 심상찮은 눈빛을 내보인 마영준이 서서히 입을 열었다.
“그 사람을 찾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