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3화.
순간 김형식의 머릿속이 바쁘게 돌아갔다.
그가 안 하겠다고 하면 [서풍TWO]가 결국 그 자리를 차지할 것이고, 하겠다고 하는 순간 서인우 그놈과 또다시 겨뤄야 하는 상황이다.
뭐가 더 남는 장사일까?
아들 김원상은 절대 서인우를 이기지 못한다.
하지만, 서인우 그놈이 MS 백화점에서 버젓이 성공하는 꼴은 절대 볼 수 없었다.
“지금 서인우라고 그랬나요?”
“네, 회장님. 왜 그 서동수 사장님의...”
“설명 안 해도 잘 알지. 요리 대회에서 우리 아들이 실수하는 바람에 우승까지 차지한 놈을 내가 모를까?”
김형식의 짧은 숨소리가 핸드폰을 통해 전해졌다.
“아무리 박 부장 직위가 더 높아도 아래 직원들한테 무조건 밀어붙일 수는 없는 일이지. 그럼 그 과장인가 뭔가가 하자는 대로 진행해봐요.”
“회장님, 정말 그렇게 해도 되겠습니까? 너무 송구스러워서.”
“어차피 맛으로 겨루는 건데, 우리 [만가복]이 누구랑 붙은 들 문제가 되겠나?”
“그럼요, 서인우 그쪽은 [만가복]으로 정하기 위한 그냥 희생양이라 생각하시면 됩니다.”
김형식이 작게 웃음소리를 내보냈다.
“뭐든 결정되면 연락해요. 내가 마포점을 맡은 내 아들놈한테 얘기할 테니까. 요즘 거기가 워낙 잘 나가서 나도 설득하려면 고생을 좀 할 것 같은데...다 박 부장 정성 봐서 이렇게까지 하는 줄 아시게.”
“그 그럼요. 정말 감사합니다. 역시 큰 사업체를 운영하시는 분이시라 생각하시는 게 남다릅니다. 존경합니다. 회장님.”
“그럼 끊읍시다.”
종료 버튼을 누르는 것과 동시에 핸드폰을 집어 던졌다.
둔탁한 소리와 함께 벽에 부딪힌 핸드폰 액정에 두 개의 금이 갈라져 있었다.
“서인우 그놈은 도대체 뭐야? 내가 그렇게까지 밟아 줬는데, 어떻게 또다시 일어설 수가 있지?”
그 허물어져 가는 가게를 못 하게 뺏어버렸더니, 겁도 없이 백화점, 그것도 최고의 중식당을 보유하는 역사가 있는 MS 백화점을 넘보고 있다.
그가 맞춰놓은 퍼즐의 한 조각이 어긋나는 것 같았다.
그건 그로서는 절대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아직은 꿈틀거릴 힘이 있다는 거군. 그럼 어디 맘껏 꿈틀거려봐. 최선을 다해 죽어라 발버둥 칠 때 그때 바로 밟아 주지.’
좌우로 목을 돌리며 웃는 김형식의 얼굴이 무섭다 못해 괴기스럽게 느껴졌다.
액정이 갈라진 핸드폰을 다시 집어 들어 아들 김원상에게 전화를 걸었다.
“하나만 묻자.”
-갑자기 전화해서 무슨 말씀이세요?
“너 서인우 그놈하고 다시 붙을 기회가 있으면 이길 수 있겠어?”
갑작스러운 질문에 김원상이 잠시 대답을 주춤했다.
“안 되겠나 보군.”
-아닙니다. 다시 겨루게 된다면 이길 자신 있습니다
“그래? 그럼 한 번 믿어보지. 다시 연락하마.”
갈라진 핸드폰 액정을 바라보는 김형식의 시선이 차갑게 식어 있었다.
아니, 넌 절대 그놈을 못 이겨!
* * *
[개인적인 사정으로 내일까지만 영업합니다. 다른 곳에서 최대한 빠른 시일 내에 찾아뵙겠습니다.]
MS 백화점 구본석 과장이 다녀간 후 입구에 커다랗게 쓴 종이를 붙이며 이준형이 한숨을 크게 쉬었다.
“내일이면 문을 닫는데, 적어도 오늘은 옮길 장소를 써서 붙일 수 있을 줄 알았다. 그래서 미루고 있었는데...”
“아직 아무것도 결정된 게 없으니까 어쩔 수 없지. MS 백화점이 안 되면 바로 가게 계약해야지. 어디든지.”
“아까 왔던 그 과장이 힘은 좀 있을까? 부장이 밀고 있는 거면 그냥 게임아웃 아닌가 싶은데...”
눈치만 보고 있던 정다운이 조심스럽게 다가왔다.
“내일이면 정말 끝이네요. 저는...”
“다운 씨는 원하는 대로 해도 돼. 더 좋은 조건 있으면 당연히 가도 되고.”
정다운의 얼굴에 서운함이 가득 묻어났다.
“한때는 가족 어쩌고 하시더니 이제 저는 남이다 이거죠? 알아서 살길 찾으라고요?”
“다운 씨. 그런 뜻 절대 아니야. 내 욕심만 차릴 수는 없는 일이니까. 어디든 다시 시작한다면 반드시 다운 씨랑 같이하고 싶어.”
“그럼 결정 날 때까지 기다려 달라고 하면 될 거 아니에요?”
“그게 얼마나 걸릴지 알 수가 없으니까.”
정다운이 팔짱을 끼며 고개를 삐딱하게 들어 서인우를 바라봤다.
“사장님, 그렇게 자신이 없어요?”
“응?”
“MS 백화점 들어간다면서요? 그러면 여기보다 규모도 훨씬 커질텐데...오히려 직원을 더 고용해야 할걸요.”
“그렇긴 하지. 난 잘할 자신 있어. 하지만, 세상일이 내 맘대로...”
“사장님한테 달렸어요.”
서인우가 놀란 눈으로 정다운을 바라봤다.
“나랑 이 아저씨 인생이요. 그 책임감으로 무조건 이겨요. 6개월 후 월급 인상해준다고 써준 계약서 딱 들고 따질 거니까.”
고마웠다.
믿어줘서, 그리고 기다려 준다 해줘서.
그다음 말이 들리기 전까지는….
“그럼 그동안 내가 요리 연습 많이 해서 사장님을 돕도록 해볼게요. 저도 자신 있어요.”
감동의 도가니탕에서 허우적거리던 이준형이 몸을 부르르 떨며 뭔가 급하게 꺼낼 말을 찾느라 눈동자가 허공을 맴돌았다.
“거기 백화점 셰프는 경력자를 뽑아야 한다고 그랬지? 몇 년 이랬더라?”
이준형이 계속 눈짓을 보냈다.
비집고 나오려는 웃음을 속으로 누르며 서인우가 답했다.
“아무래도 대형 백화점이다 보니 경력 있는 셰프를 하나 뽑아야 한다고 그랬지, 아마.”
“응, 당연히 그래야지. 초보가 혹시라도 실수하면 그건 백화점에 대형사고나 마찬가지지.”
둘의 대화를 제대로 듣고는 있는 건지 정다운의 표정에 변화가 없었다.
“다운 씨, 그래도 희망을 버리지 말고 다음 기회를 위해 열심히 노력해봐. 언젠가는 기회가 있겠지.”
이준형이 정다운의 눈치를 슬쩍 보며 말을 이었다.
“걱정하지 말아요. 나도 사장님처럼 10년 계획이니까요.”
“그런..거지? 휴우 다행이다.”
이런…. 이준형의 안심하는 소리가 너무 컸다.
정다운의 흰자위가 오랜만에 출몰했다.
“무슨 뜻이에요? 다행?”
“응? 아, 그게...”
“지금 이 상황에 뭐가 다행이라는 말이에요?”
준형아, 말 잘해라.
앞으로 10년이 걸린 문제다.
“나, 나는 정다운 씨가 인우를 돕는다고 오늘부터 잠도 안자고 요리 연습한다고 할까 봐 걱정했거든.. 그 약한 몸으로 그러다가 쓰러지지 싶어서...”
저놈은 어디 가서 사기를 쳐서라도 굶어 죽지는 않을 놈이다.
“그건 걱정 안 해도 돼요. 가늘어서 그렇지 나 통뼈에요.”
그렇게 위기는 넘어가고, 가게에 손님이 하나둘 들어오기 시작했다.
낯익은 남자 손님 둘의 얼굴이 보였다.
“뭐여? 여기 인자 몬 오나? 내일 문 닫는겨?”
아들이 문과라 손재주가 없다던 전기 집 사장님과 과일 집 사장님이었다.
“오셨어요? 사정이 생겨서 내일이 마지막 장사입니다. 죄송합니다.”
“워디 아픈겨? 낯짝은 멀쩡헌디.”
“그게 아니라 이 가게를 누가 사버렸어요. 새 주인이 당장 이번 달까지만 장사하고 나가랍니다. 우리도 기가 막혀서.”
그동안 참았던 울분이 터졌는지, 이준형이 말릴 새도 없이 사실대로 다 말해버렸다.
“뭐 그런 썩을것이...”
“누구여? 여기 사장이 착해 빠져서 따져보긴 한겨?”
일이 더 커지기 전에 서인우가 손님 둘을 테이블로 안내했다.
“이쪽으로 앉으세요. 새 주인은 누군지 알려주지 않더라고요. 대신 지금 다른 곳 찾아서 최대한 빨리 문 열 거니까 그때도 꼭 찾아와 주세요.”
“이런 어떤 망할 놈이 그런 짓을 혀? 쯧.”
혀를 차며 자리에 앉은 손님에게 정다운이 메뉴판을 가져갔다.
“이거 볼거 읎어. 나는 짬뽕이여. 자네는?”
“나야 뭐 똑같지. 인자 언제 먹을 수 있을지 모르니께 그 유명하다는 양장피 하나 시키까?”
“그럼 쐬주 때려야 하는디?”
“때리면 되자. 가게 제수씨가 보고 있을거 아녀?”
“그려 그럼, 난중에 집에 들어가서 몇 대 맞음 되야.”
안 듣는 척 서 있던 이준형이 웃음을 참느라 몸을 배배 꼬고 있었다.
주문이 들어오자마자 바로 요리가 시작됐다.
-내일이 여기서 마지막인 거냐?
“아쉽지만, 그래. 우리가 정말 MS 백화점에 들어갈 수 있을까?”
-걱정하지 마라. 거기서 절대 너 안 놓칠 거니까.
“거기 부장이 밀고 있는 곳이 다른 곳도 아니고 [만가복]이야. 지금 대한민국에서 제일 잘 나가는 중식당이라고.”
-네 아빠 서동수가 [서풍] 운영할 때도 [만가복]이 가장 크고 유명했었다.
볶은 채소와 해물을 가지런히 접시에 담고 양장피를 보기 좋게 담았다.
동시에 소스를 작은 그릇에 담아 쟁반 위에 올려 나갈 준비를 했다.
-서동수한테도 여러 번 제안 들어왔었다. MS 백화점에 들어와 달라고?
“뭐? 그게 정말이야?”
-음식 식는다. 나가서 맛있게 섞어 줘.
서인우는 사부가 방금 한 말이 궁금했지만, 가장 맛있는 온도인 지금 음식을 제공하기 위해 양장피를 들고 나갔다.
“직접 섞어 주는겨? [서풍]때 마냥?”
“네, 맛있게 드세요.”
재빨리 소스를 부어 섞은 후 테이블에 올렸다.
매콤한 겨자 향이 코끝을 스쳤다.
“우리가 호강허네. 이게 바로 주방장 싸비스지.”
“주방장이 뭐여? 촌시럽게. 요즘은 샤프라 불른당께.”
“샤프는 뭐 공부할 때 쓰는 거 아닌감?”
“대충 비슷햐. 어여 먹자고.”
양장피도 나오기 전에 이미 소주가 반이 비어있었다.
아무래도 전기 집 사장은 저녁에 많이 맞을 것 같았다.
급하게 주방으로 돌아온 서인우는 방금 요리한 웍을 씻고 짬뽕을 준비했다.
“사부, 방금 한 얘기 뭐야?”
-아마 서동수 그 친구가 죽기 1년 전쯤 됐을 거다. MS 백화점 중식당에 들어와 달라고 그때 사장은 아니고, 꽤 높은 남자가 찾아왔었다.
“그게 정말이야? 나는 전혀 몰랐어.”
-네 아빠가 일 년만 더 시간을 달라고 했어. 자기와 똑같은 맛을 낼 수 있는 제자가 생기면 그때 가겠다고.
서인우는 처음 듣는 얘기에 그때를 떠올렸다.
서동수가 죽기 전부터 그 맛을 똑같이 낼 수 있는 제자를 키우고 싶다는 말은 여러 번 했었다.
하지만, 매번 그게 쉬운 일이 아니라면서 한숨을 쉬었던 일이 기억났다.
“나 그때 왜 아빠가 그렇게 걱정하고 한숨을 쉬었는지 알 것 같아. 사부가 아니면 이렇게 완벽히 똑같은 모양과 맛을 낼 수 없을 테니까.”
-나도 마찬가지로 서동수가 없으면 똑같은 맛은 더 이상 맛보기 힘들 거로 생각했다. 너를 만나기 전까지는.
웍에 불이 화라락 올라왔다.
그 불보다 더 뜨거운 뭔가가 서인우의 가슴에서 타고 있는 것 같았다.
정성스럽게 짬뽕을 두 그릇 만들어 벨을 눌렀다.
이준형이 달려와 음식을 가져가는 소리가 들렸다.
“사부!”
-그렇게 감동할 거 없어. 네 타고난 감각이 [서풍]을 다시 일으키게 할 수 있었던 가장 큰 힘이라는 거 잊지 마라.
“고마워, 사부. 그 말이 너무 힘이 돼. 그래도 사부가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이지.”
-당연하지. 내가 있다는 대전제 아래 네 뛰어난 감각이 힘을 발휘한 거지. 뭐 좀 전문적으로 말하자면 내 역할이 구할 정도?
서인우가 그럼 그렇지 하는 표정을 지으며 웃었다.
-다시 말하지만, 나는 신의 영역이고 너는 인간의 영역인 거지. 절대 나를 따라오지는 못한다는 얘기야.
사부의 잘난 척이 끊이지 않고 이어지는 사이 앞치마 주머니에 넣어둔 서인우의 핸드폰이 울렸다.
액정이 뱉어놓은 [구본석 과장님]이라는 이름을 확인한 순간 심호흡을 크게 하고 통화버튼을 눌렀다.
“여보세요, 서인우입니다.”
-내가 밀어붙인다고 했죠? 우리 제대로 사고 한 번 쳐봅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