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2화.
서인우의 설명이 더 필요하다는 눈빛을 알아들은 구본석이 갑자기 웃기 시작했다.
이준형이 말없이 명함을 다시 확인했다.
아마도 이상한 사람 아닌가 하는 의혹이 생긴듯했다.
“서인우 씨가 방송에서 요리하는 모습을 처음 보여줬을 때부터 내가 딱 점찍어 놓고 욕심을 내고 있었거든요.”
“감사한 말씀이지만, 제가 불가피한 사정이 생기지 않았다면 여기서 계속 장사했을 겁니다.”
“그것도 우리가 인연이 되려고 한 거 아니겠습니까? 저는 그렇게 믿고 싶은데요.”
서인우가 대답으로 환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부장님이 워낙 강하게 [만가복]을 밀어붙이고 있어서 지난번에도 왔다가 명함도 못 꺼내고 갔단 말입니다. 그런데, 그런 서인우 씨가 먼저 의사를 표현해 주시니 내가 웃음이 안 나오겠습니까?”
호탕한 웃음소리가 다시 이어졌다.
“진짜 재미있는 대결이 될 겁니다. [만가복]도 [서풍]도 그 명성을 내려놓고 오로지 맛으로만 경쟁하는 겁니다. 그 어떤 외압이나 승부 조작 그딴 짓은 안 통한다는 말입니다.”
구본석이 왜 그렇게 큰 소리로 웃었는지 이제 이해가 됐다.
대형 백화점에 대형 프랜차이즈 중식당이 입접을 위해 준비 중인 상황이다.
그 속에서 아직 규모도 작고 보잘것없는 [서풍]이 모든 상황을 뚫고 이겨나가야 한다.
그걸 가능하게 만들어 줄 방법, 바로 블라인드 테스트라는 획기적인 방법을 생각해낸 구본석이 벌써 흥미진진한 게임을 하듯 눈빛이 살아 꿈틀거렸다.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서인우씨 의사는 확실히 알았으니까, 이제 나머지는 내 몫입니다. 내가 또 이 밥심으로 밀어붙여야죠. 내 전문이기도 하고요.”
“잘 부탁드립니다. 이 가게가 낼모레 문을 닫아야 하는 사정이라 최대한 빠른 답을 듣고 싶습니다. 손님들을 계속 기다리게 할 수는 없어서요.”
“알겠습니다. 회사에서 내 별명이 불도저입니다. 지금 들어가서 바로 밀어붙이고 연락드리겠습니다.”
구본석이 마치 몸으로 밀어 붙일듯한 자세를 취해 보였다.
“그럼 저희가 준비해야 할 일은...”
“좀 전에 드린 서류에 입점 시 회사에서 제시하는 조건과 수입 배분, 주의 사항들이 적혀 있습니다. 가장 중요한 건 양질의 재료와 철저한 위생관리입니다. 그것만 지켜준다 약속해 주시면 됩니다.”
“그야 당연하죠. 저희도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부분입니다.”
“그럼 최대한 빨리 연락 하겠습니다.”
들어올 때보다 더 커진 배를 앞으로 내밀고 기세등등하게 구본석이 가게를 나갔다.
“그 [만가복]하고는 진짜 무슨 악연인지 모르겠다. 결국 또 [만가복]하고 붙는 거네.”
이준형이 목이 말랐는지 컵에 물을 따라 벌컥벌컥 들이켰다.
“잘됐어. 어차피 내가 어떻게든 [만가복] 김형식을 이길 거거든. 이제 시작이니까 지켜보라고.”
“야, 서인우. 너 눈에서 레이저 나와. 무섭다, 인마.”
“네, 사장님. 이런 눈빛 처음이에요.”
정다운이 테이블을 닦으며 계속해서 서인우를 힐끗거렸다.
“나 결국 가게 문은 닫게 됐지만, 이제는 힘들지 않아. 아니, 더 기운이 솟는 것 같아.”
과도한 스트레스가 사람을 병들게 한다더니.
결국 사람이 이렇게 미쳐가는 건가?
이준형이 걱정스러운 눈으로 서인우를 살폈다.
“내가 꺾어버리고 이기고 싶은 상대가 생겼거든. 난 그저 아빠의 [서풍]을 이어가고 싶다는 생각뿐이었어. 그런데, 김형식이 거기에 확실한 목표를 만들어 준 셈이지.”
“좋아, 우리 이 나라에서 제일 유명하다는 [만가복]을 이겨보자고. 그리고, 까짓거 전 세계로 뻗어보자. 꿈은 원대하게, 콜?”
한여름 대낮에 다 큰 남자 둘이 엉겨 붙어 서로 등을 토닥이고 있었다.
보다 못한 정다운이 둘 사이 테이블에 행주를 퍽 소리 나게 던졌다.
“점심 장사 준비 안 해요? 곧 손님 들이닥칠 시간이라고요.”
이 남자들 정신 연령이….
이제 방방 뛰기까지 하는 두 남자를 보며 정다운이 혀를 찼다.
어떻게든 이 가게에서 저 두 남자의 중심을 잡아줘야겠다고 생각하며….
* * *
회사로 돌아온 구본석은 박진상 부장을 설득해 오후 긴급회의를 시작했다.
“뭔데? 오전에 회의 다 했는데, 뭐 새로운 안건이라도 있는 거야?”
어려운 일을 해냈다는 자부심에 어깨에 잔뜩 힘이 들어간 박진상 부장이 짜증이 섞인 말투로 물었다.
“다른 게 아니라 제가 여러 번 말씀드리고 오전에도 말씀드렸던 것 말입니다.”
“또 업체 하나 더 섭외해서 경쟁시키자는 헛소리 지껄일 거면 난 그만 나가보고. [만가복] 같은 큰 사업체를 섭외하는 일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모르는 건 아니겠지?”
“[서풍]이면 어떻습니까? [중화요리 최고의 고수를 찾아서]에서 최종 우승을 거머쥔 서동수 셰프의 아들 서인우 말입니다.”
“또 [서풍] 타령이야?”
회의실에 모여 있던 오진수 대리를 비롯해 다른 직원들 모두 숨소리조차 내지 않으며 눈치를 보고 있었다.
박진상과 구본석 사이에서 강한 스파크가 이는 것 같았다.
그 불똥이 어디로 튈지 몰라 다들 조마조마해 하며 누구 하나 입을 열지 못하고 있었다.
“그거 재미있겠는데요?”
그 순간 갑자기 회의실 문이 열리며 최민기 사장이 모습을 나타냈다.
놀란 직원들이 일제히 자리에서 일어나 인사를 하기 바빴다.
“사장님이 어떻게 여기까지….”
“아버지가, 아니 회장님이 [도원] 나가기 전에 여기서 식사 한번 하고 싶으시다 하셔서 모시고 점심 식사했습니다. 오랜만에 [도원]셰프하고 대화 나누신다고 해서 나 혼자 한 번 둘러보러 왔습니다.”
희끗희끗한 흰머리가 군데군데 섞여 있는 머리를 깔끔하게 빗어 넘기고 시원해 보이는 하늘색 재킷을 입은 최민기 사장이 사람 좋은 웃음을 지어 보였다.
“회의 중인 것 같은데, 계속 진행해요. 조용히 듣다 나갈 테니까.”
조금 전 스파크가 일 때보다 더 불편한 상황에 박진상 부장뿐 아니라 다른 직원들 모두 표정 관리가 안 되고 있었다.
그런 상황을 전혀 개의치 않는다는 듯이 구본석이 말을 이었다.
“그럼 회의를 계속 진행하도록 하겠습니다. 다시 말씀드리자면, 지금 박진상 부장님이 말씀하신 [만가복]하고, 제가 제안한 [서풍 TWO]하고 두 업체 중 심사를 통해 우리 백화점에 입점을 진행하자는 말씀입니다.”
결국 최민기 사장이 보는 앞에서 회의를 계속해야 하는 상황에 박진상 부장의 얼굴이 붉게 타오르고 있었다.
구본석을 곁눈질로 힐끗 노려본 박진상이 어쩔 수 없이 의견을 제시했다.
“다른 곳도 아니고 대한민국에서 제일 잘나가는 [만가복]입니다. 어렵게 입점 제안을 해 한 달 만에 허락을 받았는데, 인제 와서 그런 조그만 가게랑 경쟁하라는 말입니까? 아무리 대회 우승자가 하는 곳이라도...그걸 받아들일 것 같아요?”
박진상이 언성이 높아지려는 걸 간신히 참는듯했다.
최민기 사장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작은 소리로 한마디 덧붙였다.
“우리 백화점을 찾는 고객분들이 만족할 수 있는 최고의 맛을 내는 곳, 그런 곳이 들어오면 되는 거 아닙니까? 고객 대표를 섭외해서 같이 심사하는 것도 괜찮을 것 같은데요...미리 홍보도 할 겸.”
박진상의 동공이 갈 곳을 잃고 정신없이 널을 뛰고 있었다.
“그럼 난 그만 빠질 테니, 회의 잘 마무리 하세요.”
직원들이 동시에 일어나며 회의실 문을 열고 나가는 최민기에게 깍듯하게 고개를 숙였다.
구본석을 잡아먹을 듯이 노려보던 박진상 또한 거칠게 문을 열고 회의실을 빠져나갔다.
구본석을 비롯해 회의실에 있던 직원들이 일제히 인사를 하자 박진상은 엘리베이터를 타고 부장실로 올라갔다.
오진수 대리가 자리로 돌아가려던 구본석을 불러 세웠다.
주위에 아무도 없는 걸 다시 한번 확인한 오진수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을 건넸다.
“부장님이 이미 [만가복]으로 결정하고 있는 것 같은데, 그러면 얘기 끝난 거 아닙니까?”
“그래서 내가 계속 블라인드 테스트를 고집했던 거잖아. 걱정하지 말라고, 맛을 보면 알 수 있을 거야.”
구본석의 눈이 반달을 그리며 웃고 있었다.
“이봐 오대리, 내 별명이 뭐지?”
“구돼...”
“죽을래? 그거 말고.”
“구 본좌이시죠. 맛의 본좌.”
“내 입맛 알지? 모든 시청자와 심사위원들, 거기다 내 입맛을 사로잡은 곳이야. 이번 심사에서 내 입맛이 얼마나 정확한지 증명해 보이지.”
오진수가 구본석을 따라 걸으며 한마디 덧붙였다.
“부장님이 말씀하신 [만가복]도 긴장해야 할 겁니다. 그 셰프도 최종 결승전까지 올라간 사람 아닙니까? 게다가 [만가복]회장님 빽이면...”
“나도 기대하고 있어. 경쟁은 상대가 만만하면 재미없거든. 이번 심사가 아주 흥미진진할 것 같아서 벌써 흥분된단 말이야.”
구본석의 눈이 열정으로 가득 차 있었다.
* * *
부장실로 돌아온 박진상은 검은색 가죽 쿠션이 고급스럽게 보이는 회전의자에 앉아 핸드폰으로 전화를 걸었다.
“접니다, MS 백화점 박진상이요.”
“아, 그날 저녁엔 잘 들어가셨지요? 북한산 송이로 담근 술이라 속은 편하셨을 겁니다.”
테이블 위에 돋보기를 벗어 내려놓으며 김형식이 소파에 등을 붙였다.
“저, 아무래도 일에 좀 차질이 생길 것 같아서 전화했습니다.”
“차질이라면 어떤...”
박진상은 에어컨을 정면으로 바라보고 있는데도 인중에 땀이 차오르는 것을 느끼며 손등으로 닦아냈다.
“실은 부서 회의에서 후보 업체를 한 군데 더 정해놨다고 합니다.”
가만히 핸드폰을 귀에 대고 있던 김형식의 얼굴이 조금씩 일그러졌다.
“내가 하겠다고 하는 순간 이미 정해진 일 아니었던가요? 아쉬운 쪽은 내가 아닌 것 같은데...”
“그게, 백화점 식당 입점은 여기 과장이 쭉 맡아서 해왔던 거라 내 맘대로 정하기가...게다가 하필 오늘 사장이 갑자기 회의에 들어와서 내용을 다 들어버렸단 말입니다.”
“백화점 부장급이 그 정도인 줄 미처 몰랐습니다. 그럼 나도 다시 생각해 보지요.”
“저, 회 회장님. 잠시만 끊지 말아 주세요. 전에도 말씀드렸지만, 여기 강남점 중식당은 이미 대한민국에서 최고라는 소리를 들은 셰프님들 업체만 들어오는 걸로 유명한 거 잘 아시지 않습니까?”
“그래서 나한테 연락한 거 아니었나?”
“그, 그저 형식적인 절차입니다. 아무래도 그 과장이 미는 곳을 심사도 없이 거절하면 뭔가 부정한 방법이 있지 않았나 하는 의심을 받을 수도 있고 해서 말입니다.”
유경동 셰프의 [도원]이 나간다는 정보를 듣자마자 박진상을 움직이게 만든 게 김형식이었다.
이미 많은 인기를 누리고 있는 중식당이긴 하지만, MS 백화점에 입점한 중식당은 또 역사적으로 그 의미가 남달랐다.
대한민국에서 최고의 맛을 낸다고 인정받은 셰프는 모두 MS 백화점에 입점 기록을 남겼다.
서동수가 죽지 않았다면...
그가 죽기 전 김형식을 찾아와 MS 백화점에서 자꾸 사람이 찾아와 고민이라는 얘기를 했었다.
전혀 욕심 없다는 그의 눈빛을 보며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혼자 이를 갈았었다.
다음은 반드시 [만가복] 차례라고.
그런 곳에 차기 [만가복]의 회장이 될 아들 김원상을 보내 입지를 단단히 굳히려는 계획이었다.
물론 사정사정하는 걸 못이기는 척 받아주는 그림으로다가.
김형식은 그가 그린 그림과 조금 엇나가는 상황에 기분이 상했다.
“박 부장이 하도 사정해서 우리 아들이라도 보내 영업을 해보라고 할까 했더니...아무래도 내 건물에서 맘 편하게 일하는 게 낫겠구먼. 다 없던 일로 하자고.”
“회, 회장님. 제 선에서 다시 정리 하겠습니다.”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던 김형식이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도대체 이 [만가복]을 상대로 경쟁해보겠다는 간 큰 곳이 어디야? 누가 그런 허무맹랑한 꿈을 꾸고 있는 거냐고?”
“아주 조그만 가게 하나 가지고 있는 놈입니다.”
“허! 박 부장 지금 제정신인가? 그런 구질구질한 곳하고 어디 우리 [만가복]을 같은 심사대에 올릴 생각을 해!”
“죄, 죄송합니다. 제가 내일 모든 상황을 정리하도록 하겠습니다. 그 서인우인가 뭔가 하는 놈을 직접 찾아가든지….”
“뭐? 누구라고?”
항상 흥분하지 않고 낮게 말하던 김형식의 목소리가 아주 잠시 높아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