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1화.
서인우가 초조한 듯 시간을 확인했다.
“10분 지났겠지?”
“정확히 9분 50초 됐다.”
“너 시간 체크하고 있었던 거야?”
“응, 심심해서.”
심심해서라는 말을 믿기에는 이준형의 시선이 심각하게 불안해 보였다.
“긴장되나 보다?”
“에이, 뭐 이런 일로 긴장까지 하냐?”
그러면서 왜 마른침은 계속 삼키고 있는지.
서인우가 다시 핸드폰으로 최근 통화 목록을 찾아 통화버튼을 눌렀다.
이번에는 신호가 한 번 가자마자 누군가의 목소리가 바로 건너왔다.
-네, MS 백화점 식품사업부 구본석 과장입니다.
“안녕하세요. 조금 전에 전화했던 [서풍 TWO]의 서인우 라고 합니다.”
-안녕하세요. 중식당 입점 문제로 전화하셨다고 전해 들었습니다.
“네, 아는 분이 구 과장님 명함을 주셨습니다.”
구본석이 입이 귀에 걸린 채 오른손 주먹을 쥐어 보이며 통화를 계속했다.
-아는 분이라면?
“유현주 라는 분이십니다.”
-아, 그렇군요. 이렇게 기회가 돼서 영광입니다.
“기회를 주신다면 제가 영광이죠. 혹시 심사기준이나 절차 등을 좀 알 수 있을까요?”
-아, 지금 바로 제가 가게로 찾아가겠습니다.
벽에 걸린 시계를 쳐다보던 서인우가 말을 이었다.
“제가 가도 되는데요.”
-아닙니다. 편하게 하시던 대로 요리하고 계세요. 내가 가서 백 짬뽕도 한 그릇 먹고 오렵니다.
“아, 알겠습니다.”
-그럼 만나서 심사 방법이나 추후 일정 등에 관해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통화를 마치자 핸드폰에 머리를 들이밀고 있던 이준형이 물었다.
“잘 안 들려서 정확히는 모르겠는데, 방금 통화한 사람이 우리 가게에 오겠다는 거지?”
“응, 자세한 얘기는 만나서 하자고 그러네.”
“느낌이 어때?”
“나쁘지 않아. 이 구본석이라는 사람 목소리도 크고 뭔가 열정이 느껴졌어.”
이준형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완전 다 들리지는 않았지만, 목소리가 나까지 들리긴 했으니까, 그런데 막상 온다고 하니까 떨리네.”
“너 아까부터 계속 떨고 있었거든.”
“아니야, 잠을 못 자서 그래. 맞아, 수면 부족 현상.”
우리 가게의 브레인은 확실히 아닌 것 같다고 생각하며 서인우는 주방으로 들어갔다.
조금 전 손질하다 멈춘 양배추를 씻어 가늘게 채썰기 시작했다.
여느 때처럼 경쾌한 도마소리가 주방에 활기를 불어넣는 것 같았다.
-오늘따라 손에 힘이 들어간 것 같다. 어제 온 손님이 귀인이 될 것 같은 분위기인데?
“어제 받은 명함으로 전화했는데, 오늘 당장 여기로 온다고 했어.”
-그럼 우리 무대가 바뀌는 거냐?
“응, 새로운 도약은 좋은데, 규모가 너무 크지 않을까 솔직히 걱정되기도 해.”
-규모가 커지면 혼자 감당하기는 힘들지. 그래서 서동수처럼 수제자를 키워야 한다고. [서풍]의 맛을 최대한 비슷하게 낼 수 있는 사람 말이야.
“우리 직원 1호는...”
-응, 아니야. 정에 이끌리지 말고 이럴 때일수록 냉정해야 한다.
점심 장사 준비를 마치고 나니 앞치마를 두른 허리춤이 땀에 젖어 축축했다.
시원한 아이스커피가 간절한 계절이었다.
곧 장마가 시작될 텐데, 가게는 문을 닫아야 한다.
언젠가 [양자강] 최영만 아저씨와 나눈 대화가 떠올랐다.
사람들이 비가 오거나 눈이 오면 더 짜장면이나 짬뽕을 찾는다고...
불쾌 지수 올라가는 장마 기간에 한 끼 식사만이라도 맛있게 해서 기분전환을 시켜주고 싶었는데….
올해 장마 기간은 날씨만큼 우울할 것 같다고 생각하며 원두를 갈아 향긋하고 시원한 커피를 만들어 홀로 가지고 나갔다.
“입에 침 닦고 커피 마셔.”
카운터에 엎어져 자고 있던 이준형이 냅킨으로 입을 쓱 닦으며 안 그래도 살벌한 벌건 눈을 비볐다.
“안녕하세요.”
시원해 보이는 흰색 원피스를 입은 정다운이 상큼한 미소를 보이며 들어오다 멈칫 멈춰 섰다.
“이 아저씨 왜 이래요?”
“다운 씨, 나 너무 피곤해 보이지?”
“머리는 떡지고 입가에 얼룩까지 정말 드러워 보여요.”
“뭐? 이씨. 내가 우리 가게를 위해 밤새 고민하고 한 숨도 못 잤단 말이야. 이 눈 충혈된 거 봐봐.”
“잠 안 자고 밤새도 눈곱은 끼나? 거울 좀 봐요. 진짜 드러...피곤해보여요.”
충혈된 눈 때문인지 금방 눈물샘이 터질 것 같은 이준형을 보고 눈치 빠른 정다운이 재빨리 말을 바꿨다.
“너 이거 빨리 마시고 점심 장사 시작하기 전에 사우나가서 좀 씻고 와. 구 과장님 오시기 전에.”
아이스 커피를 원샷 때리고 그 여파로 골이 때리는지 머리를 쥐어 잡던 이준형이 곧장 일어나 가게를 나갔다.
단정하게 명찰과 앞치마를 착용한 정다운이 그런 이준형을 한심한 듯 쳐다봤다.
“다운 씨도 커피 한 잔 내려줄까? 요즘은 아침 먹는 거지?”
“네, 오늘도 엄마가 끓여준 김치찌개랑 밥 먹고 왔어요. 커피는 점심 장사 끝나고 마실게요.”
“그 남자는... 이제 안 찾아오지?”
서인우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네, 엄마가 이혼소송에서 이긴 후에 접근 금지 명령이 내려졌어요.”
입고 있는 환한 원피스와 달리 어두운 표정의 정다운이 한숨을 쉬었다.
“이혼소송에서는 이겼지만, 결국 그때 맞은 후유증으로 엄마는...”
정다운의 눈가가 붉어졌다.
요즘 들어 하나씩 꺼내 놓기 시작한 엄마 얘기를 들으며 이제 조금씩 마음을 여는 정다운이 고마웠다.
“힘들면 지금 얘기하지 마. 다운 씨는 우리 [서풍TWO]의 직원 1호인데, 앞으로 지겹게 볼 거니까 천천히 하자.”
“당장 낼모레 가게 문 닫아야 하잖아요. 나도 정말 오래오래 열심히 일하고 싶었는데...집에서 요리 연습도 진짜 많이 한단 말이에요.”
“다운 씨. 우리 장소만 바뀔 뿐이지 [서풍]은 계속 이어질 거야.”
정다운이 바닥을 차던 발을 멈추고 서인우를 바라봤다.
“오늘 MS 백화점에서 사람이 올 거야. 우리 거기 입점해보려고.”
“네? 백화점이요? 그게 사실이에요?”
금세 얼굴이 상기된 정다운이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 * *
구본석이 운전대를 잡은 두꺼비 같은 손을 차에 흘러나오는 음악에 맞춰 두드리고 있었다.
“일이 되려니까 유현주 씨가 내 명함을 전해줬다 이거지? 회사 행사 때 다짜고짜 부탁했는데, 이게 무슨 횡재냐?”
이미 반은 녹아버린 아이스 커피를 마시며 구본석이 여전히 흥에 겨워 몸까지 흔들고 있었다.
덩치와 어울리지 않는 빨간색 소형 자동차가 버거운 듯 뒤뚱거렸다.
“진상 박 부장이 분명 [만가복]하고 뭔가 거래가 있었을 것 같은데...그러지 않고서야 내가 다른 곳하고 경쟁시켜 결정하자고 그렇게 부탁했는데 말이야. 오늘 내 의견 완전 무시하고 통보를 하나?”
박진상 부장에게 제안할 만한 조커 카드를 손에 쥐고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요리 경연대회에서 분명 실력 차이를 인정해 준 두 사람이다.
최종 우승자가 우리 백화점을 선택했다는데 설마 또 개무시하고 자기 맘대로 진행하지는 않겠지?
네비게이션에 도착 시간까지 10분이 남았다는 숫자가 선명히 보였다.
남은 커피인지 얼음물인지 구분이 힘든 액체를 몽땅 입에 털어 넣고 근처 주차장에 차를 세웠다.
앉았다 일어나면 자꾸만 밖으로 튀어나오는 와이셔츠 자락을 주섬주섬 바지 속으로 정리한 후 멀리 보이는 [서풍 TWO]의 간판을 한참 응시했다.
“드디어 이곳에 다시 와보는군. 오늘은 텔레비전에서만 봤던 [서풍]의 백짬뽕을 영접하는 날이다. 이건 꼭 구본석 역사에 남겨야 해.”
입구 인테리어에 잠시 시선을 뺏겼던 구본석은 가게로 막 들어가려던 이준형을 따라 안으로 들어갔다.
“어서 오세요. 여기 자리로 앉으세요.”
비누 냄새를 솔솔 풍기며 이준형이 에어컨이 잘 나오는 자리로 안내했다.
“안녕하세요. 조금 전에 통화했던 MS 식품사업부 구본석 과장입니다.”
“아, 안녕하세요. 잠시만요.”
이준형이 후다닥 주방으로 뛰어가 서인우를 데리고 나왔다.
“안녕하십니까? 서인우라고 합니다.”
“아, 맞네요. 방송을 워낙 열심히 봐서 그런지 이미 친한 동생 같습니다. 한참 전에 한 번 왔었는데, 그때는 서인우씨를 못 봤습니다.”
껄껄 웃는 목청 또한 한여름의 소나기처럼 시원하게 느껴졌다.
“여기 제 명함 받으세요. 손님들 몰려오는 시간 피한다고 좀 일찍 출발했습니다.”
“안녕하세요, 저는 서인우와 [서풍 TWO]를 공동 운영하는 이준형이라고 합니다.”
“안녕하세요, 그럼 같이 앉으시죠.”
서인우와 이준형이 나란히 앉고 맞은편에 구본석이 앉았다.
가방에서 여러 장의 서류를 꺼내 보이며 구본석의 설명이 이어졌다.
“MS 백화점 중식당은 아시겠지만, 5년간 유경동 셰프님의 [도원]이 엄청난 인기를 끌었습니다. 그 식당이 우리 백화점 매출의 상당 부분 영향을 줬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네, 요즘은 특히 젊은 층이 맛집을 찾아다니며 그곳에서 쇼핑까지 이어지는 현상이 빈번하게 일어난다고 알고 있습니다.”
“이준형 그런 세세한 부분까지 공부한다고 밤을 새운 거였어?”
말끔히 씻고 새로 태어난 듯 똑 부러지게 말하고 있는 이준형이 믿음직스러웠다.
“사실 서인우 씨라면 인기리에 방영됐던 요리 경연대회 우승자이자 [서풍] 서동수 사장님의 아들이라는 사실 만으로도 우리 백화점으로서는 당연히 영입 대상이었습니다.”
“그런가요? 좋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런데, 말씀드릴 것이 있습니다.”
구본석이 자세를 고쳐 앉았다.
“지금 저희 부장님이 [만가복]에 입점 제안을 한 상태입니다. 공교롭게 [만가복]과 다시 입점 경쟁을 겨뤄야 할 것 같아서요.”
[만가복]이라는 이름에 어쩔 수 없이 서인우를 비롯해 홀에 있던 이준형과 정다운까지 동시에 미간에 힘이 들어갔다.
“어차피 어디와 경쟁해도 똑같습니다. 저는 그저 제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할 뿐입니다.”
“이미 대회 때 봐서 알고 있습니다. 서인우 씨가 얼마나 요리에 진심이며 성실한지는... 다만 상대가 또 [만가복]이라는 거죠.”
“아무래도 [만가복]이 현재 대한민국에서 제일 유명하고 잘나가는 중식당이니까요. 힘든 경쟁이겠지만, 최선을 다해 보겠습니다.”
“좋습니다.”
구본석의 큰 목소리가 흥분되어 더 크게 울렸다.
“오늘은 서인우 씨 의사를 확인하러 왔습니다. 회사에서 [만가복]을 밀고 있는 사람이 부장님이시라 쉬운 대결은 아닐 겁니다. 방법은 어떻게든 제가 책임지고 만들어 보겠습니다.”
“네, 잘 부탁드립니다.”
“그 문제는 저한테 맡겨주시고, 좀 이르긴 한데 점심으로 백 짬뽕 하나 먹고 가고 싶은데, 가능할까요?”
“물론입니다. 맛있게 만들어오겠습니다.”
“곱빼기로 부탁합니다.”
“네,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웍에 싱싱한 채소와 해물을 넣고 불맛 가득 입혀 한 그릇 넉넉하게 만들어 나왔다.
정다운이 정갈하게 차려놓은 단무지와 양파, 쟈차이 밑반찬을 맛보고 있던 구본석이 입에서 쩝 소리를 내며 침을 삼켰다.
“이야, 진짜 내가 오늘 이걸 맛보네. 우선 기록을 남기고..”
자리에서 일어나 항공 샷을 열심히 날린 후 바로 앉아 그릇을 들어 국물을 쭉 들이켰다.
“이거지 이거, 이 시원하고 칼칼한 맛. 진짜 죽입니다. 지난번엔 다른 사람들하고 와서 홍짬뽕을 먹었거든요. 물론 그것도 끝내줬어요.”
입에 흡입기가 들어있는 걸까?
젓가락질 몇 번 만에 그릇 가득 담겨있던 면이 흔적 없이 사라졌다.
분명 전혀 배고프지 않았었는데...
구본석의 먹방을 직관하던 이준형과 정다운이 동시에 배에 손을 올리며 군침을 삼켰다.
남은 국물까지 다 마신 후 자리에서 일어난 구본석이 서인우를 향해 부담스러울 만큼 강렬한 눈빛을 쏘아댔다.
“이 맛 변하지 않고 낼 수 있는 거죠? 자신 있죠?”
“네, 자신 있습니다.”
“그럼 됐습니다.”
“네?”
“이번 대결은 블라인드 테스트로 진행해 보겠습니다.”
“블라인드 테스트 라고요?”
서인우의 질문에 구본석이 튀어나올 듯한 눈을 부라리며 목이 꺾일 듯 고개를 세게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