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 중식당엔 무언가 특별한 게 있다-79화 (79/200)

제79화.

평상시 즐겨 마시던 양주가 아닌 와인 잔을 앞에 놓고 차성철이 핸드폰으로 시간을 확인했다.

한 시간만 앉아있다 9시에 일어날 생각이었다.

유현주가 불쑥 나타나기 전까지는.

“여기 계실 줄 알았어요. 오늘은 와인이네요?”

“혹시 내 핸드폰에 뭐 깔아 놨습니까?”

“네?”

“위치 검색 같은 거 말입니다.”

“에이, 그럴 리가요. 사람을 붙였을 뿐입니다.”

“뭐라고요?”

차성철이 놀라 쳐다보자 유현주가 바로 손을 흔들며 농담이라고 말하고는 크게 웃었다.

“얼굴이 너무 심각해 보여서 농담 좀 했습니다. 그냥 술 한잔 생각났는데, 혹시 여기 계시지 않을까 하는 촉이 맞았던 것뿐입니다.”

차성철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바텐더가 건넨 와인잔에 와인을 따라 주었다.

“감사합니다.”

잠시 향을 음미하고는 바로 와인을 입에 머금어 맛을 보고 천천히 넘겼다.

“오, 좋은 와인 드시네요. 내가 술은 잘 모르는데, 안 써요.”

정사각형으로 잘라 놓은 작은 치즈를 입에 넣고 눈깔사탕 녹이듯이 입을 동그랗게 모으고 있는 모습이 처음부터 자기 자리인 듯 편안해 보였다.

“그거 알아요?”

유현주의 뜬금없는 질문에 차성철이 대답 대신 그녀의 눈을 쳐다봤다.

“얼마 전에 회사에서 봤던 서인우 씨 기억하죠? 그 사람이 하는 [서풍]이 곧 문을 닫는 다네요.”

차성철은 이미 김서원과 김형식의 대화를 들어 알고 있는 내용이었다.

“그래요? 뭐 장사하다가 접을 수도 있는 거죠.”

“에이, 그런 거면 내가 지금 말도 꺼내지 않죠. 그 [서풍]을 갑자기 내쫓은 사람이...”

말하다 말고 주위를 쓱 둘러본 후 안심이 됐는지 유현주가 말을 이었다.

“우리 회장님이 그 가게를 산 거래요. [서풍]을 문 닫게 한 장본인이 우리 회장님이라니까요.”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리는 어디에서 듣고 하는 겁니까?”

“지금 회사 내에 소문이 쫙 퍼졌는데, 아마 팀장님만 모르실걸요. 워낙 남의 일에 관심이 없으시니까요.”

“유현주 대리는 왜 이렇게 남의 일에 관심이 많은 겁니까?”

입안에 치즈가 다 녹았는지, 유현주가 다시 와인잔을 들어 한 모금 마시고는 유리 볼에 담겨있는 아몬드를 몇 개 손에 들고 하나씩 입에 넣었다.

오도독 씹는 소리를 내며 연이어 세 개를 입에 넣고는 말을 이었다.

“나도 남의 일에는 관심 없어요. 하지만, 내가 또 불의를 보면 못 참는 성격이라서요.”

“그랬나요?”

“어째 비꼬는 말투로 들리는데요?”

“아닙니다. 그냥 참 오지랖이라는 생각이 들 뿐입니다.”

그 말이 기분이 상했는지, 남은 와인을 홀라당 마셔버린 유현주가 빈 잔을 내밀었다.

“포도 주스 아닙니다. 술 약하다면서 뭐 이렇게 빨리 마셔요?”

“목말랐거든요. 팀장님.”

유현주가 와인을 따르고 있는 차성철을 빤히 쳐다봤다.

“듣고 있으니까 말해요.”

“회장님이 서인우 씨가 잘 하고 있는 가게를 사들여서 하루아침에 쫓겨나게 했어요. 그 얘기를 듣고 아무렇지도 않으세요?”

차성철이 손에 묻은 검붉은 와인을 냅킨으로 쓱 닦았다.

“소문일 뿐이지 사실은 아무도 모르지 않습니까? 난 사실 확인이 되지 않은 말을 떠들고 다니는 거 제일 싫어합니다.”

“그럼 내일 사실 확인 좀 해주세요. 팀장님은 회장님께 뭐든 거리낌 없이 다 말씀 하시잖아요.”

“별로 안 궁금한데…. 내가 왜 그래야 합니까?”

“내가 궁금하거든요. 걱정도 되고.”

차성철이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작게 웃었다.

“지금 말이 된다고 생각합니까? 유현주 대리가 궁금하고 걱정된다고 내가 왜 회장님께 그걸 물어야 하는지...”

“내가 팀장님을 좋아하니까요.”

차성철이 조금도 흔들리지 않는 시선으로 와인잔만 바라봤다.

“이런 얘기 불편합니다. 이것만 마시고 일어나죠.”

“에이, 직장 상사로서 좋아한다고요. 그러니까, 직장 후배의 궁금증 좀 풀어 주면...”

“잘은 몰라도 회장님이 하신 일이라면 이유가 있을 겁니다. 그렇다면, 서인우 씨는 이 나라에서 장사하기 힘들어지겠죠.”

“여기 얼음물 한 잔 주세요.”

유현주가 바텐더를 향해 큰 소리로 말했다.

얼음이 가득 담긴 냉수를 벌컥벌컥 마신 유현주가 차성철이 냅킨을 건네기도 전에 손등으로 입을 씩 닦았다.

“이유요? 그 경연대회에서 아들이 져서? 아니면, [서풍 TWO]도 [서풍]처럼 만가복 보다 더 인정받게 될까 봐?”

갑자기 흥분해 큰 소리로 말을 내뱉는 유현주의 입을 차성철이 손으로 틀어막았다.

“미쳤어? 그렇게 큰 소리로 떠들 내용은 아니지 않나?”

“죄송해요. 난 사실 재미로 면접 봤다가 팀장님의 정확하고 확고한 말투에 끌려 여기서 일하게 된 거지, 회장님의 경영 철학은 정말 맘에 들지 않아요.”

“직장 상사한테 할 얘기는 아닌 것 같은데...”

“맨날 회의 때마다 소리만 지르고, 지금도 엄청 잘 나가고 있는데 욕심이 너무 끝도 없는 것 같다고요.”

직장 상사 앞에서 회장을 제대로 욕하고 있는 이 여자는 아무리 생각해도 온 세상 사람한테 다 관심이 많은 것 같았다.

“회장님의 그런 욕심이 회사를 이렇게 키워 놓으신 겁니다. 난 전에도 말했지만, 회장님을 보고 회사 다니는 거 아니에요. 이 회사의 발전 가능성과 내 미래를 보고 다니는 거지.”

“나도 마찬가지예요. 회장님 보고 다니는 거 아니고 누구 보고 다니는 거지. 하여튼, 이번 일은 그냥 넘어갈 수 없어요.”

유현주가 재빨리 화제를 바꿨다.

누구 보고 다니는 거냐고 따져 물으면 또 어떤 핑계를 대야 할지 복잡해지기 때문일 거였다.

“누구한테든 내 목소리를 똑바로 내고 싶으면 능력이 있으면 됩니다. 일 열심히 해서 어떤 소리를 해도 나를 자를 수 없게 만들어 놔야 흔들리지 않고 중심을 잡을 수 있어요.”

유현주는 와인 때문인지, 흔들리지 않고 소신껏 말하고 있는 차성철의 말투 때문인지 점점 정신이 몽롱해지는 것 같았다.

넋을 잃고 차성철의 옆얼굴을 쳐다보다 질질 침이 흐를 것 같아 유현주가 또 급하게 와인을 들이켰다.

“지금 몇 시지?”

갑자기 잔을 내려놓으며 핸드폰으로 시간을 확인한 유현주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아직 9시 안 됐으니깡 우리 얼큰하게 짱뽕 한 그릇 하러 가용.”

“벌써 취했어요? 와인 마시다가 무슨 짬뽕을 먹자는 겁니까?”

이미 혀가 꼬여버린 유현주가 놀라운 차성철이 더 마시지 못하게 잔을 뺏었다.

“배고프면 혼자 가요. 난 와인 더 마시다가 집에 갈테니까...어차피 같이 온 것도 아니고.”

워낙 술이 약한 유현주가 취기가 많이 올라오는지 입을 쭉 내밀고 뿌우하고 나팔을 불었다.

“창 매정하시넹. 앙겠습니당. 그럼 나 홍자 가서 먹죵. 나는요, 아무래도 걱정이 돼성...그럼 홍자 분위기 있게 덩 드세용.”

말을 마치며 허리를 꺾어 인사를 하자 굵은 웨이브의 긴 머리가 죄다 앞으로 쏟아져 공포물의 한 장면을 만들었다.

“원래 이 정도로 술이 약합니까?”

“내가용, 다 자싱 있는데용. 이 술하고 딱 항사람 그렇겡 두 가지망 몽 이겨용. 진짱 열받앙.”

“알았으니까 조심해서 들어가요. 아니, 짬뽕 먹고 술 깨고 들어가세요.”

“넹.”

다행히 혀만 풀렸는지 걸음걸이는 문제없어 보였다.

처음 몇 걸음은.

다섯 걸음을 떼지 못하고 오른발과 왼발이 서로 꼬이기 시작했다.

“후우.”

짧은 한숨을 내쉰 차성철이 유현주의 팔을 살짝 부축했다.

“엉? 팀장님도 짱뽕 콜?”

전생에 짬뽕 못 먹어 죽은 귀신이 붙었나?

혹시 이게 이 여자의 주사인 건가?

용케도 꼬인 발에 걸려 넘어지지 않으며 택시를 잡아 세운 유현주가 큰소리로 외쳤다.

“기사님, 망웡동 [서풍]이용.”

“네? [서풍]은 없어지지 않았나요?”

“앙, 이전 [서풍] 말고용 새로 생긴....”

“망원시장 초입으로 가주시면 됩니다.”

차성철이 정확한 위치를 알려주자 택시가 속도를 내기 시작했다.

“엉? 팅장님 정확항 위치까징 아시네용.”

대답 대신 차문을 내려 더운 바람이라도 들어오게 하자 유현주가 밖으로 얼굴을 내밀고 다시 입술 나팔을 불기 시작했다.

“뿌우우우.”

“얌전히 좀 가시죠?”

“전 이러명 술이 빨리 깨용. 뿌우우우.”

도착하기까지 거의 20분을 연신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던 유현주가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거의 다 온 것 같은데, 아닌가요?”

혹시 조금 전에 혀 꼬인 소리는 쇼였을까? 하는 의문이 들 정도로 유현주가 멀쩡한 발음으로 물었다.

“네, 곧 도착합니다.”

택시 기사 또한 신기한 듯 룸미러로 유현주를 힐끗 쳐다보고는 바로 답을 내놓았다.

택시에서 내린 차성철이 가게로 막 들어가려는 유현주를 불러 세웠다.

“여기 전에 와봤어요?”

“아니요. 어렸을 때 할아버지랑 [서풍]에 자주 갔었어요. 여긴 오늘이 처음이고요.”

“그렇군요. 그럼 나는 집으로...”

차성철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유현주가 가게 문을 활짝 열었다.

“아직 식사 되죠?”

창가 쪽 두 군데 테이블에서 요리에 술을 마시고 있던 사람들이 보였다.

“네. 어서 오세요.”

이준형이 메뉴판을 들고 빈 테이블로 둘을 안내했다.

어쩔 수 없이 따라 들어온 차성철의 표정이 별로 좋지 않았다.

가게 정리할 시간이 다 되어가는데 손님이 들어오자 서인우가 주방에서 나와 둘이 앉은 테이블을 응시했다.

익숙한 얼굴에 잠시 멈칫했던 서인우가 바로 그 둘을 알아보고 가까이 다가왔다.

“안녕하세요. 며칠 전 [만가복]에 갔을 때 뵌 분들 같은데...맞으시죠?”

“안녕하세요. 기억하시네요?”

“그럼요. 오래되지도 않았는데요.”

“정식으로 인사할게요. 유현주라고 합니다.”

“서인우입니다.”

이제 당신 차례에요 하는 눈빛으로 유현주가 차성철을 빤히 쳐다봤다.

“차성철입니다. 난 생각 없고 여기 유현주 대리 짬뽕하나 해주세요.”

“에이, 치사하게 여기까지 와서 나 혼자 먹으라고요? 그럼 백짬뽕 둘 시원하게 해주세요. 와인을 살짝 했거든요. 해장 되게 부탁합니다.”

차성철은 그것도 술 마신 거라고 해장 타령하는 유현주가 그저 신기하기만 했다.

“알겠습니다. 속 풀리는 백짬뽕 준비해 올리겠습니다.”

서인우가 인사를 하며 주방으로 향했다.

-마지막 주문이지?

해물과 채소를 꺼내 손질을 시작하자 사부가 물었다.

“그럴 것 같은데...재료도 이제 거의 다 떨어졌어. 뭐야? 귀인이 온다더니 결국 아무도 나타나지 않네. 오히려 마주치기 싫은 [만가복] 사람들이 오고 말이야.”

-이런...아직 나에 대한 믿음이 부족한가?

“곧 가게 정리할 시간인데 누가 또 온단 말이야?”

-이미 왔는데?

서인우가 웍에 화라락 불길이 올라오는 걸 재빨리 저었다.

“뭐? 귀인이 누군데?”

-기다려봐.

사부의 알 수 없는 말에 계속 고개를 가로저어가며 백짬뽕을 완성했다.

쟁반에 시원한 백짬뽕을 담아 홀로 직접 가지고 나간 서인우가 목을 빼고 쳐다보고 있던 유현주 앞에 먼저 그릇을 올려놓았다.

“드디어 그 유명한 [서풍]의 백짬뽕을 먹어 보네요. 우와. 보기만 해도 시원해.”

“감사합니다.”

차성철이 그릇을 받으며 짧게 고개를 숙였다.

후루룩 소리를 연거푸 내며 유현주가 그릇을 들고 국물을 먼저 마셨다.

“이 맛은...방송에서 한 말들이 사실이네요? 진짜 예전 [서풍]에서 먹어봤던 바로 그 맛이에요. 어떻게 이럴수가... 어서 드셔 보세요.”

마지못해 국물을 숟가락으로 떠 입에 넣은 차성철의 눈썹 사이가 움찔했다.

역시 이번에도 [서풍]의 맛을 그대로 내고 있었다.

유현주가 숟가락에 면을 얹고 그 위에 해물과 배추를 올려 입에 넣기를 두 세 번 하더니 다시 그릇을 들고 국물을 마셨다.

“진짜 시원하고 맛있어요. 너무 신기해요. 어떻게 [서풍] 맛을 그대로 낼 수가 있죠? 서동수 사장님이 직접 하셨다고 해도 믿을 정도예요.”

“감사합니다. [서풍]을 기억해주시는 많은 분께 똑같은 맛으로 보답해 드리고 싶어서 정말 열심히 노력했습니다.”

“진짜 대단하네요. 정말 다 먹고 싶은데, 배가 너무 불러서 아쉽지만 조금 남겨야겠어요.”

처음 담긴 양의 반 조금 넘게 먹은 유현주가 정말 배가 부른지 그릇을 들었다가 다시 내려놓았다.

“서인우씨. 며칠 내에 가게 문 닫는다는 거 사실이에요?”

유현주가 안타까움이 가득 담긴 눈으로 쳐다봤다.

옆에 서 있다 놀란 이준형이 순간 서인우를 바라봤다.

“여기 이분들 [만가복] 직원이셔.”

[만가복]이라는 이름이 들리자 이준형의 눈빛에 기분 나쁜 티가 역력했다.

뭐라고 한마디 해주고 싶은 듯 입을 옴싹 거리던 이준형이 짧은 한숨과 함께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리고 있었다.

“네, 그렇게 됐습니다. 이른 시일 내로 어디든 가게를 찾아서 다시 열겁니다. 반드시요.”

“그래야죠. 이런 맛이라면…. 어떻게든 더 많은 사람에게 선보이셔야죠.”

유현주가 두 주먹을 쥐어 보이며 진심 어린 눈으로 말했다.

자기가 계산 하겠다고 지갑을 꺼내던 유현주가 갑자기 몸을 돌려 서인우를 바라봤다.

“서인우 씨. 이렇게 당하고만 있으면 안 돼요. 하루라도 빨리 더 많은 사람을 저처럼 행복하게 해주셔야 합니다.”

“네, 그래야죠.”

“그럴 방법이... 있을 것 같아요.”

“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유현주가 지갑에서 명함을 하나 꺼내 내밀었다.

“MS 백화점 강남점 중식당에 도전해보세요. 여기 명함에 있는 구 과장님께 전화하시면 됩니다. 꼭 하셔야 해요.”

“MS 백화점 중식당이라고요?”

서인우의 눈에 또다시 반짝하는 빛이 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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