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 중식당엔 무언가 특별한 게 있다-77화 (77/200)

제77화.

주차장에 차를 세우자마자 엘리베이터를 향해 뛰어간 김서원이 10층을 누르고는 조바심에 입술을 깨물었다.

핸드폰이 알려준 시간은 9시 15분이었다.

‘서인우 씨는 아빠를 만났을까? 대화는 순조롭게 진행됐을까?’

오늘따라 층마다 서는 엘리베이터가 야속하게 느껴졌다.

6층에서 또 엘리베이터가 멈추더니 유현주 대리 얼굴이 보였다.

“안녕하세요.”

“네, 안녕하세요.”

9층과 10층 버튼에 불이 들어와 있었다.

아무것도 누르지 않는 걸로 봤을 때, 유현주 대리는 9층 아니면 10층에 볼 일이 있을 것이다.

인사를 하며 입술 깨무는 걸 멈췄지만, 무의식적으로 왼쪽 다리를 떨고 있었나보다.

뒤에 서 있던 두 명의 직원들이 다리를 심하게 떨고 있는 김서원을 쳐다보고 있었다.

슬쩍 시선을 아래로 내린 유현주가 작게 헛기침을 했다.

그 소리에 정신을 차리고 제멋대로 떨어대던 다리를 잡아 세웠다.

띵.

엘리베이터가 9층에 도착하자 뒤에 서 있던 두 명의 직원이 인사를 하며 내렸다.

‘왜 안 내리지? 설마 회장실에 가는 거야?’

엘리베이터 안에 둘만 남게 되자 어색하게 웃던 김서원이 물었다.

“혹시 회장실에 가시는 길인가요?”

“네, 회장님이 조금 전에 다음 달 홍보 계획서 가져오라고 하셔서요.”

“지금요?”

“아마 김서원 씨 오는 거 모르셨나 봅니다. 비서실 통해 여쭤보고 제가 나중에 다시 올게요.”

띵.

드디어 10층에 도착해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비서가 난처한 눈으로 둘을 쳐다봤다.

회장실 안에서는 제법 큰 소리가 문을 넘어 나오고 있었다.

누구 하나 고성을 지르진 않았지만, 한마디 한마디 강한 어조로 똑똑 끊어서 하는 말들이 조금씩 새어 나왔다.

생각지 못한 상황이 궁금했는지 유현주가 비서에게 다가갔다.

“회장님이 방금 서류 가지고 올라오라고 하셔서 왔습니다. 그런데, 안에 누구예요?”

“서인우 씨라는 분이 와계십니다.”

“아, 오늘은 드디어 만났네요. 그럼 저는 나중에 다시 올까요?”

“미팅 끝나는 대로 연락드리겠습니다.”

비서의 말을 듣고 있기는 한 건지, 문에 귀를 쫑긋 세우고 듣고 있던 유현주가 연신 놀란 표정을 지어 보였다.

비서들과 김서원의 시선을 느낀 유현주가 어깨를 들썩였다.

“얘기가 제법 심각하게 돌아가는 것 같은데요. 그럼 저분 가시는 대로 연락 주세요. 저는 그때 다시 오겠습니다.”

유현주가 들고 온 서류를 그대로 가지고 뒤돌아 엘리베이터로 향했다.

“저는 다음에 올 테니까 제가 왔었다는 얘기 전하지 말아 주세요.”

“네? 아, 알겠습니다.”

회장실 안의 분위기가 심각함을 느낀 김서원은 엘리베이터가 아닌 계단으로 향했다.

서인우가 회장실을 나와 엘리베이터를 타는 모습이 잘 보이는 곳에 몸을 숨기고 답답하고 걱정되는 마음을 계속해서 한숨으로 내보내고 있었다.

서인우의 모습이 보이기까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지금까지 본 적 없는 무섭고 어두운 표정을 한 서인우가 엘리베이터로 걸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재빨리 9층에 멈춰있던 엘리베이터를 타고 주차장에 내려 세워놓은 차로 달려갔다.

주차장을 빠져나와 두리번거리던 김서원의 눈에 건물을 올려다보고 있는 서인우가 보였다.

빠앙.

가볍게 클랙슨을 누르고 차창을 내리자 서인우가 고개를 비스듬히 하고 안을 살폈다.

“서인우 씨. 타세요.”

“네? 아, 안녕하세요. 저는 지하철...”

“가게 갈 거죠? 나도 그쪽으로 가는 길이에요.”

서인우가 안전벨트를 하고 말없이 앞만 바라보고 있었다.

복잡한 감정을 다 담지 못한 눈빛이 방황하는 듯 보였다.

“회장님은 잘 만났어요?”

“네, 약속 잡아 주신 덕분에 오늘은 기다리지 않고 바로 만났습니다. 감사합니다.”

“물론 만나기만 잘 만났겠죠? 얘기는 잘 됐을 리 없을거고...”

서인우가 허무한 웃음을 내보였다.

“왜 웃어요?”

“김서원씨 말대로 약속은 문제없이 지켜졌는데, 대화는 전혀 성과가 없었네요. 오늘부터 많이 바빠져야 할 것 같습니다.”

김서원의 한숨 소리에 차 뚜껑이 열리는 줄 알았다.

“하늘 무너지겠어요. 무슨 한숨을 그렇게 크게 쉬어요?”

“그러지 말라고 했지만... 너무 죄송하고. 그 보다 쪽팔려서요.”

“네?”

“갑자기 홍길동이 된 심정이에요.”

“그게 무슨?”

“쪽팔려서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는 이 심정 말이에요.”

“뭐라고요? 하하, 하하하.”

서인우가 큰 소리로 웃었다.

“지금 이 상황에 이렇게 웃으면 미친놈 같겠지만, 난 아직 젊고 다시 시작할 자신 있어요. 그러니까, 앞으로 나한테 절대 미안해하지 마세요.”

“오늘이 23일이에요. 당장 일주일밖에 남지 않았는데, 어떻게 하시려고 그래요?”

“그래서 오늘부터 많이 바빠질 거라 하지 않았습니까?”

[만가복] 건물을 빠져나오면서 다짐을 하고 난 서인우는 이제 더는 안 되는 일에 연연하지 않기로 했다.

“준형이랑 가까이에 새로운 가게 알아보기로 했으니까 곧 찾을 수 있을 겁니다. 손님들한테는 미안하지만, 최대한 빨리 준비해서 다시 시작해야죠.”

“어디든 가게 다시 계약하면 알려주세요. 내가 해놓은 인테리어 옮길 수 있는 건 그대로 옮겨야죠.”

“그게 가능합니까?”

“설마 다 버리고 갈 생각이었어요?”

김서원의 눈이 그새 도끼눈이 되어 쳐다봤다.

“저는 전문가가 아니라 모르니까요. 가져가서 다시 할 수 있는 건지...”

“업체 사장님께 잘 부탁해 봐야죠. 내가 얼마나 공들인 작업인데...휴우.”

또다시 긴 한숨이 늘어졌다.

입에서 연기라도 뿜어져 나올듯한 범상치 않은 한숨 소리였다.

“거의 다 왔네요. 김서원 씨는 이 근처 무슨 볼일이세요?”

“저요?”

“근처 볼 일 있으시다고...”

“스트레스 풀어야 해서요.”

“네. 네?”

“오늘은 제일 매운 버전으로 홍짬뽕 먹을 거예요. 정수리에서 김 나게 만들어 주세요.”

“아. 알겠습니다.”

근처 공용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김서원과 함께 가게로 들어갔다.

“인우야! 어? 안녕하세요.”

노트북으로 뭔가를 열심히 알아보고 있던 이준형이 서인우와 김서원을 동시에 쳐다봤다.

“어떻게 둘이 같이 들어오냐?”

걱정했는지 얼굴이 시커메진 와중에도 김서원과 같이 들어오는 게 눈에 걸린 모양이었다.

김서원이 김형식의 딸이라는 걸 알게 되면 저놈은 어떤 반응을 보일는지….

“사장님. 여기 새 주인은 만났어요? 그분 만나러 가셨다고 들었는데...”

졸지에 직장을 잃을 수도 있게 된 직원 1호 정다운의 얼굴색도 그다지 좋아 보이지 않았다.

작은 가게지만 사장이라는 타이틀만 가지고 있을 뿐, 이렇게 직원을 걱정하게 만들다니...

한심하고 창피했다.

“아무래도 새로운 가게를 찾아봐야 할 것 같다.”

“그래? 얘기가 잘 안 된 거냐?”

서인우가 대답 대신 고개만 작게 끄덕였다.

“점심 장사해놓고, 몇 개 찾아놓은 가게 있으니 부동산에 가서 알아보자.”

“그래. 설마 우리 셋이 일할 가게가 없겠냐? 능력 있고 솜씨 죽이는 셰프있지, 성실하고 브레인인 나 있지, 그리고...”

이럴 때일수록 말 잘해야 할 거다.

“똑 부러지고 깐깐한 직원 있지. 뭐가 걱정이야? 안 그래?”

정다운이 칭찬인지 욕인지 살짝 헷갈리는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런데, 김서원 씨는 무슨 일로...?”

이준형이 잊지 않고 물었다.

“요 앞에서 만났어. 우리 가게에 점심 드시러 오셨다네.”

김서원이 서인우를 힐끗 보더니 바로 의자를 꺼내 앉았다.

“다운 씨. 여기 주문받아요. 셰프님, 지금 바로 식사 되나요?”

“그럼요. 준비 다 해놨습니다.”

정다운이 메뉴판을 가지고 김서원에게 다가갔다.

여전히 달갑지는 않은 표정이었다.

“저 홍짬뽕 가장 매운맛으로 하나요. 물론 곱빼기로 주세요.”

정다운이 주방으로 향하다 다시 몸을 돌렸다.

“설마 공깃밥도..”

“아, 깜빡할뻔했네. 공깃밥 하나 추가요.”

주문을 듣고 주방으로 들어온 서인우가 재킷을 벗어 걸어놓고 앞치마를 단단히 묶었다.

“후우, 어디 시작해 볼까?”

-잘 다녀왔냐? 그 개새는 만나고?

“뭔 새? 사부 그런 말은 또 어디서 배웠어?”

-이런 십장생, 시베리안 허스키 그 다음으로 배운 신생어야.

서인우가 ‘설마 저 욕 들을 다 아빠한테 배운 건 아니겠지.’ 생각하며 중식도를 손에 들었다.

“홍짬뽕 제일 매운맛으로 만들어야 해.”

-알았으니까, 오늘 다녀온 결론부터 말해봐.

“점심 장사해놓고, 새로운 가게 알아보러 가야 해. 무슨 뜻인지 알겠지?”

-이런 십새.

“어 또! 그런 말 자꾸 쓰지 마.”

-알았어. 개랑 새, 열 마리 새.

중식도가 계속 중얼거리는 걸 들으며 짬뽕에 넣을 새우와 오징어를 손질했다.

새벽시장에서 사 온 싱싱한 해물과 채소에 최고의 화력으로 불맛을 얹었다.

평상시보다 고춧가루를 한 숟가락 더 넣고, 매운맛을 요구하는 손님들에게만 추가하는 청양고추 가루까지 더했다.

매운 냄새가 주방에 가득했다.

-너 이러다 손님 잡겠다. 저 여자는 왜 자기 위를 혹사하려고 그래?

“사부, 홀에 누가 왔는지 보인 거야?”

-그 개새 딸 새.

“응? 딸 뭐?”

-아닌가? 이런 말은 없던 것 같기도 하고. 하여튼 그놈 딸 왔잖아?

순간 웍을 흔들던 손을 멈춘 서인우가 중식도를 노려봤다.

“사부 정말 어디까지 보이는 거야?”

-전에 말했지? 순간순간 보일 때가 있다고. 나도 그 기준은 몰라.

서인우가 계속해서 중식도를 노려봤다.

-너 눈 깔아. 기분 나빠지려고 하거든!

“아, 미안. 사부의 능력이 아무래도 내가 아는 게 전부가 아닌 것 같은데...이제 솔직하게 털어놓지?”

-먼지 털리게 맞기 전에 눈 깔고 요리한다. 실시!

사부와 대화를 나누다 보니 오늘 김형식과 나눈 짧은 대화에서 받았던 스트레스가 어느 정도 풀리는 것 같았다.

가게는 옮겨야 하지만, 사부는 항상 내 곁에 있다는 사실이 너무 감사했다.

“사부!”

-얘가 오늘 장사 안 할 거야? 왜 자꾸 불러?

“나 오늘 [만가복] 회장 만나고 결심한 게 있어.”

-뭔데? 난 절대 울지 않을 거야. 뭐 이딴 소리 하면 맞을 줄 알아.

“김형식. 그를 이기고 싶어. [만가복]이 절대 따라올 수 없는 최고의 맛을 내는 가게로 꼭 성공하고 말 거야.”

순간 중식도가 빙그르르 돌더니 멈춰 섰다.

-네가 서동수의 [서풍]을 이어가겠다고 했을 때, 이미 예견된 일이었다. [만가복]은 한 번도 [서풍]을 이겨본 적이 없어. 너도 그래야 그 이름을 이어갈 자격이 생기는 거라고.

“사부, 나 자신 있어. 반드시 해낼 거라고.”

-그럼, 그전에 이 짬뽕부터 빨리 완성하시지?

“아!”

서인우가 준비된 면에 각종 해물과 채소에 불맛을 더한 탕을 얹어 완성한 후 쟁반에 담아 홀로 가지고 나갔다.

“화끈하게 매운 짬뽕 완성됐습니다. 걱정돼서 그러는데, 너무 매우면 다 안 먹어도 됩니다.”

보기만 해도 매울 것 같은 시뻘건 국물을 보자 이준형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걱정하지 마세요. 오늘은 국물까지 다 먹어 버릴 거니까.”

가방에서 노란 고무줄을 꺼내 머리를 묶은 김서원은 마치 전장에 나가는 군인 같은 표정이었다.

이준형이 눈으로 물었다.

‘왜 저래?’

지금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냥 모르겠다는 듯 어깨만 들썩여 보였다.

반면에 김서원의 전투력은 상당히 우수했다.

점점 붉게 타오르는 얼굴은 얼마나 많은 재료를 쳐부수고 있는지 그대로 보여주고 있었다.

점점 바닥을 보이는 짬뽕만큼 그녀의 얼굴에 땀이 비 오듯이 흘렀다.

블라우스 단추를 하나 풀어 손부채를 하는 김서원을 보며 이유는 모르겠지만, 이준형이 침을 꿀꺽 삼키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본 정다운이 어느새 짝다리를 하고 그를 노려보고 있었다.

서인우의 눈에는 그 모든 광경이 사랑스러웠다.

이들과 함께 성공하고 싶다는 생각이 온몸에 전율을 일으키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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