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 중식당엔 무언가 특별한 게 있다-76화 (76/200)

제76화.

평상시와 똑같이 새벽 4시에 일어나 아침 운동을 하고 새벽 시장을 나갔다.

내일 당장 가게 문을 닫게 된다 해도 오늘 장사는 전과 똑같이, 아니 전보다 더 열심히 할 생각이다.

가게 문을 열고 시장에서 사 온 싱싱한 재료들을 주방으로 가지고 들어갔다.

“사부, 좋은 아침.”

-어제 하루 쉬었다고, 기운이 넘치나 보다. 그 아저씨는 안 만난 거지? 설마 나 빼고 만난 건 아니지?

이런….

뭐라고 해야 하나?

-내가 네 생각 다 읽을 수 있다는 거 잊었냐? 지금 속으로 핑곗거리 찾고 있는 거지? 나랑 지금 장난하나 젊은이?

“사부, 내가 다 얘기해 줄게. 그런데, 지금은 더 중요한 일이 있어.”

-그러겠지. 나하고 한 약속 따위가 뭐 중요하겠어. 더 중요한 게 있으니까 이 쇳덩어리와 한 약속은 새까맣게 잊고 있었겠지.

사부가 제대로 열받았다.

뭐라 얘기해야 사부의 화를 풀어줄 수 있을지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오늘 김형식 회장 만나기로 했어. 9시에.”

-그러세요. 그런 중요한 일을 미천한 나한테 뭐 전하고 그러세요?

“도대체 나한테 왜 이렇게까지 하는지 물어보고 두 손 모아 정중하게 사정하고 올 거야. 그리고, 어제오늘 들었던 얘기 모두 사부한테 전해줄게.”

진지한 서인우의 얼굴과 급박한 상황이 다행히 사부의 화를 조금 누그러트린 것 같았다.

-무슨 대책이라도 세우고 가야지. 그 양반 보통 아닐텐데...

“진심으로 사정하면 들어주지 않을까?”

-그럴 사람이면 서동수 친구라면서 그 아들이 하는 가게를 이런 식으로 문 닫게 하진 않지. 넌 순진한 거냐 바보인 거냐?

“아직 이유를 듣지 못했으니까...”

-너는 꼭 찍어 먹어봐야 그건지 된장인지 아냐?

서인우가 픽 웃음을 보였다.

-이 상황에 웃는 거 보니 바보 맞네.

“우선 재료 빨리 손질해놓고 다녀올게. 다녀와서 자세히 얘기해줄게. 맞다, 한 가지 꼭 먼저 말해주고 싶은 게 있어.”

-뭔데?

“상이었대.”

-뭔 소리?

“아빠가 사부를 처음 만나게 된 거, 아빠의 요리 스승님께 받은 상이었다고, 사부가.”

-너 빨리 댕겨 와. 나 궁금해서 기다리다 현기증 난단 말이야.

서인우가 소리 내 웃으며 재료 손질을 시작했다.

* * *

아침 일찍 일어나 평상시보다 더 든든하게 아침을 챙겨 먹은 김서원이 얇은 린넨 재킷을 걸치며 옷매무시를 살폈다.

아무래도 자기가 낄 자리는 아니지만, 그래도 걱정돼서 그냥 집에 있을 수는 없었다.

차 키를 들고 다시 시간을 확인했다.

8시 정각.

일찍 가서 어딘가에 숨어 상황을 지켜볼 생각이었는데...

걸렸다.

누구도 빠져나가기 힘든 출근 정체에.

분명 서인우는 정확한 시간 약속을 위해 지하철을 타고 올텐데.. 생각이 짧았다.

김서원이 사는 공덕에서부터 [만가복] 본사가 있는 강남까지 평상시에는 30분이면 가는 거리라 1시간 일찍 나왔다.

하지만, 지금은 차를 버리고 걸어가고 싶을 만큼 도로가 꽉 차 있었다.

조급한 마음에 하릴없이 발만 동동 굴렸다.

8시 40분.

회사에 도착해서 적당한 장소를 찾아 서인우의 움직임을 지켜보려 했던 계획과 달리, 아직 올림픽 대로 한가운데였다.

‘저 강을 따라 수영해서 갔어도 도착했겠다. 대한민국엔 차가 너무 많아.’

그런 생각을 하다 피식 바람 빠지는 웃음이 나왔다.

엄마, 아빠, 오빠 그리고 그녀까지 네 식구 모두 운전하는 그녀가 할 말은 아니었다.

더디긴 해도 차가 조금씩 회사를 향해 다가가고 있었다.

‘서인우 씨는 도착했을까? 설마 아빠가 오늘도 기다리게 하지는 않겠지?’

빨리 가서 두 눈으로 확인해야 하는데...마치 시동 꺼진 차를 뒤에서 미는 것처럼 그렇게 천천히 움직이고 있었다.

* * *

8시 40분에 [만가복] 본사 로비를 다시 찾은 서인우는 안내 직원을 향해 깍듯하게 인사했다.

흰색 면티에 얇은 곤색 정장을 차려입은 모습이 유명한 패션 화보에서 막 튀어나온 모델 같았다.

인사를 건네는 안내 직원들의 눈이 서인우의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스캔하느라 바쁘게 움직였다.

“안녕하세요. 김형식 회장님하고 9시에 약속되어 있습니다.”

“네,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연락해보겠습니다.”

안내 직원이 비서실 직원과 짧게 통화를 마치고 서인우의 곁으로 다가왔다.

“여기 엘리베이터 타시고 10층에서 내리시면 바로 비서실 직원이 안내해 드릴 겁니다.”

“감사합니다.”

엘리베이터로 향하는 서인우의 뒤에서 직원들이 요란스럽게 떠들어댔다.

“내가 따라갈 걸 그랬나?”

“어딘지 못 찾을까 봐? 주책이야.”

“설마 회장님이 또 기다리게 하시는 건 아니겠지?”

“한 30분만 로비에서 기다리라고 하면 좋겠네. 눈이나 호강하게. 좀 심했나?”

“그럼 땡큐긴 하지.”

아침부터 로비에 웃음소리가 퍼졌다.

10층 회장실에 서인우가 도착하자, 비서 둘이 자리에서 일어나 다가왔다.

“9시 약속 맞으시죠?”

“네.”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회장님 아직 출근 전이십니다.”

“아,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창가로 걸어가 핸드폰으로 확인한 시간이 8시 50분이었다.

‘아직 약속 시간이 된 건 아니니까.’

10층 창밖으로 사람들의 바쁜 움직임이 보였다.

하루를 시작하는 사람들의 걸음걸이가 활기찼다.

그들과 섞여 하루하루를 생기있게 시작하고 싶었는데, 여기서 이러고 있는 시간이 너무 아까웠다.

정확하게 9시 1분 전에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며 김형식과 수행 비서로 보이는 남자 하나가 대화를 하며 다가왔다.

“안녕하십니까? 회장님.”

비서 둘의 머리가 바닥을 향해 심하게 꺾였다.

대답 대신 서인우를 향해 시선을 돌리자 그 중 한 비서가 눈치 빠르게 설명했다.

“서인우 씨가 기다리고 계십니다.”

“들여보내.”

“네, 알겠습니다.”

둘이 나누는 대화가 다 들리는데 굳이 비서를 통해 말하는 이유는 알다가도 모르겠지만, 못 들은 척 창밖을 응시했다.

“서인우 씨, 들어가시죠.”

“네, 감사합니다.”

드디어 김형식과의 대면이다.

어떤 얼굴로 무슨 말들을 꺼내 놓을지 어깨를 들어 올리며 다시 한번 크게 심호흡을 한 후 회장실 문을 열었다.

“안녕하십니까? 서인우 라고 합니다.”

“정신없으니까 앉지.”

“네.”

소파에 앉아 기다리고 있는 서인우를 잊어버렸나 싶을 정도로 비서를 불러 오늘 스케쥴을 확인하고, 이제 일어나 올까 기다렸더니 다시 전화기를 들고 있었다.

‘이렇게 기선제압을 하시겠다? 그 정도는 얼마든지 기다려 드리죠. 그따위에 불안해하고 조바심 가질 서인우가 아닙니다.’

처음 회장실 문을 열 때와 조금도 달라지지 않은 차분한 표정으로 김형식의 일거수일투족을 천천히 지켜보고 있었다.

별로 재미가 없었을까?

삼십 분쯤 지나자 책상 앞 커다란 가죽 의자에서 몸을 일으킨 김형식이 느린 걸음으로 다가왔다.

“내가 뭐 정리 좀 하느라…. 이름이 뭐라 그랬지?”

“아시고 계시지만, 다시 말씀드리죠. 서인우 라고 합니다.”

“흠, 그렇군. 자세히 보니 서동수 아들이네. 그런데, 나를 만나고 싶어 했다고?”

모르쇠 컨셉이다.

그러기로 맘먹었다면 난 친절한 인우 씨 컨셉이다.

“네, 회장님과 전화 통화를 하기 위해 거의 일주일을 시도했지만, 한 번도 연결이 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직접 찾아뵈러 왔습니다.”

“무슨 일로? 장사가 잘 안되나? 혹시 돈이 필요한 거라면 시간 끌지 말고 액수나 말하고 돌아가지. 동수 아들인데, 그 정도는 내가 해줄 수 있네.”

테이블 아래로 주먹을 꽉 움켜쥐며 시선이 흔들리지 않게 애썼다.

“지난번 찾아주셨던 저희 가게 [서풍 TWO]가 새로운 주인에게 넘어갔습니다. 혹시 아시는 내용이십니까?”

“그래? 거기 땅값이 오를 거라는 소문이 있던데…. 누군지 발 빠르게 움직였군. 그래서?”

“아무래도 회장님은 그런 작은 가게 같은 거에 관심도 없으실 것 같은데요, 이상하게 그 계약서에 회장님 번호가 적혀 있었습니다.”

김형식이 소리 없이 입꼬리만 올려 웃었다.

“그럴 리가...뭔가 착각하나 본데, 나 [만가복]회장이야. 그런 구멍가게 같은 곳에 관심을 가질 시간이 없다는 말일세.”

“구멍가게라도 그 주인이 누구냐에 따라 얘기가 달라지겠죠.”

“뭐라고 지껄이는 겐가?”

“예를 들어 전 국민의 사랑을 받은 서동수 셰프님의 아들이라거나, 마포점 김원상 셰프와 요리 대결에서 이긴 서인우가 하는 가게라면요?”

대답 대신 김형식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통 못 알아들을 소리만 하는군. 할 말 다 했으면 그만 가봐. 자네 헛소리를 들어줄 만큼 내가 한가하지 않아.”

“이미 마영준 셰프님 통해 전화번호 확인하고 온 겁니다. 중국에서부터였습니까? 우리 아버지한테 열등감이 생긴 게 말입니다.”

“뭐야? 어린놈이 건방지게 어디서 함부로 지껄여?”

“그런 게 아니시라면 정중하게 다시 말씀드리죠. 아무래도 회장님께 잘 보이고 싶은 누군가가 회장님 모르게 제 가게를 사들인 것 같습니다. 앞으로 남은 계약 기간만 계속할 수 있게 부탁드립니다.”

김형식이 눈을 지그시 감고 고개를 뒤로 젖혔다.

“누군가 나에게 잘 보이고 싶어 한 일이라면 내가 끝까지 모른 척해줘야지, 안 그래? 자네 일은 안타깝게 됐지만, 이럴 시간에 빨리 대책을 세우는 게 낫지 않겠어?”

“오늘 제가 여기에 온 이유는 딱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왜 이런 일을 벌이셨는지 이유가 듣고 싶었고, 또 하나는 회장님께 계약 기간만 지킬 수 있게 부탁드리려고 왔습니다.”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나 서인우를 내려다보던 김형식이 낮은 목소리로 한마디 더 했다.

“그 두 가지 다 내가 해줄 건 없는 것 같군. 돌아가 봐.”

“회장님, 저를 믿고 제 가게를 찾아와주는 사람들과의 약속입니다. 그럼 정리할 시간 한 달만 주십시오. 진심으로 부탁드립니다.”

“약속이란 깨지라고 있는 거고, 계약 또한 새로 한 계약이 우선이겠지. 새 계약서에 적힌 날짜 잘 지키는 게 신상에 좋지 않겠나?”

어금니를 굳게 악물고 서인우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김형식. 그 이름 오늘부로 다시 기억해두죠. 제 아버지를 통해 기억하고 있던 이름은 이 시간 이후로 잊도록 하겠습니다.”

회장실 문을 여는 서인우의 뒤통수에 세상에서 가장 소름 끼치는 웃음소리가 꽂혔다.

절대 잊지 못할 웃음소리가.

그냥 이번엔 제대로 경고를 하고 싶어서인 줄 알았다.

항상 친구인 서동수에게 갖고 있던 열등감에 아들까지 경연대회에서 밀린 것에 대한 화풀이 정도로 생각했다.

서인우가 만나 본 김형식은 그런 류의 사람이 아니었다.

친구 아들이 하는 가게라며 반가운 척 찾아와 인사를 건네고는 그 뒤에서 바로 그 아들의 가게를 송두리째 뺏어 버릴 수 있는 사람이 김형식이었다.

회장실을 나서며 저런 인간에게 괴롭힘을 당했을 아빠를 생각하니 화가 치밀어 올랐다.

끝까지 우정을 저버리지 못했던 아빠한테까지 화가 났다.

어두운 표정으로 건물 입구를 빠져나온 서인우는 갑자기 걸음을 멈춰 섰다.

그리고는 뒤돌아 건물을 올려다봤다.

김형식.

내가 다시 이곳에 올 때는 지금의 나와 달라진 모습일 거다.

아빠의 [서풍]을 다시 일으키고 싶다는 생각뿐이었다.

누구를 이겨보고 싶다는 마음을 가져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하지만, 지금 이 건물을 나서는 서인우의 가슴에 화라락 불이 붙었다.

그것도 강렬하고 빠른 속도로 무섭게 타오르는 불이.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