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4화.
아버지 김형식을 만나러 가는 김서원은 심장이 터질 것만 같았다.
비록 방송을 보진 못했지만, 단지 오빠 김원상과 겨룬 경연대회에서 이겼다는 이유로 저런 일을 벌였을 리는 없다.
그냥 생판 모르는 사람이라도 그럴 리 없는데, 젊은 시절을 같이 보낸 가장 친한 친구의 아들이다.
왜 이런 말도 안 되는 일을 벌였을까?
많이는 아니지만, 김서원이 접해본 서인우 라는 남자는 따뜻한 사람 냄새가 나는 주변에 보기 힘든 케이스 였다.
직접 커피를 내려 건네며 따뜻하고 밝게 지어 보이던 미소, 며칠을 못 잤는지 충혈된 눈으로도 밝게 맞아주던 모습들...
그의 얼굴과 아버지 김형식의 얼굴이 자꾸 겹치며 혼란스러웠다.
택시에서 내리자마자 입구로 성큼성큼 걸어가는 김서원을 안내 직원들이 이상하게 쳐다봤다.
조금 전 복잡한 상황을 다 봤던 직원들이니 그럴 만도 했다.
김서원은 정중히 인사하는 직원들에게 가볍게 고개를 숙여 인사한 후 바로 엘리베이터로 향했다.
10층에 도착하자마자 비서실 직원이 일어서기도 전에 바로 회장실 문을 벌컥 열었다.
“서원이 너 뭐 하는 짓이냐?”
차성철 팀장과 뭔가를 얘기 중이었는지, 둘이 동시에 놀란 눈으로 김서원을 바라봤다.
“얘기 중이셨으면 죄송합니다. 얼마나 기다리면 될까요? 설마 저도 두 시간 기다리다 돌려보내시진 않겠죠?”
이미 눈에 지금 제정신 아니라는 걸 잔뜩 드러내고 있는 김서원을 슬쩍 본 차성철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막 일어나려던 참입니다.”
“잘됐네요.”
김서원이 차성철과는 눈도 마주치지 않은 채 소파로 다가와 앉았다.
“그럼 나가 보겠습니다.”
차성철이 허리를 숙여 인사를 하고는 뒤돌아서며 김서원을 다시 한번 힐끗 보더니, 문을 열고 나갔다.
“여기가 어디라고 그렇게 매너 없이 함부로 쳐들어와?”
“그럼, 사람을 밖에서 두 시간 넘게 기다리게 하는 건 무슨 매너인가요?”
김서원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묻자 귀찮다는 표정으로 조금 전 보고 있던 보고서로 시선을 돌렸다.
“지금 제 말 듣고는 계시는 거예요?”
“네가 왜 쓸데없는 일에 끼여서 이 소란이냐? 목소리 낮추지 못해?”
낮지만 힘 있는 목소리에 살짝 움찔한 김서원이 흥분을 가라앉히려 크게 숨을 들이켰다.
“목소리가 컸다면 죄송합니다. 서인우씨 가게 어떻게 된 거예요? 정말 아빠가 그렇게 하신 거 맞아요?”
“그게 너랑 무슨 상관인데 이 난리인 거냐?”
“지난번 말씀드렸잖아요. [서풍 TWO] 새로 한 입구 인테리어 제가 한 거라고요.”
“그거 하나 했다고, 무슨 특별한 정이라도 생긴 게냐? 어디서 나한테 눈 동그랗게 뜨고 그놈 얘기를 따져 들어?”
김서원이 작게 한숨을 쉬었다.
잠시 김형식이라는 아버지를 보통 평범한 아버지로 착각했다.
이런 상황에 그를 더 자극하면 서인우에게 더 큰 불이익이 생길 수 있다는 걸 너무 흥분한 나머지 잊었다.
“내가 오늘 회사 왜 나왔는지 아세요? 이번 달에 벌써 정식으로 두 번째 작업 의뢰를 받았어요. 아빠한테 그거 자랑하러 오다가 로비에서 모든 장면을 목격했던 거고요.”
“푼 돈 번다고 자랑하러 왔다고?”
“아니요, 이제 정말 시작이니 믿어 달라고 말씀드리러 왔던 겁니다. 그런데, 서인우 씨가 보였고, 조금 전 오빠한테 자세한 얘기 들었습니다.”
김형식이 피곤한지 목을 빙그르르 돌렸다.
“다 들었는데 뭘 확인하고 싶어서?”
“정말 아빠가 하신 일인지, 그렇다면 왜 서인우 씨 가게인지 그 이유가 듣고 싶어서 왔습니다.”
아무런 소리 없이 김형식의 얼굴이 웃고 있었다.
소리 없이 웃는 저 웃음.
어려서부터 아빠가 저 웃음을 보이고 나면 얼마 안 있어서 사람들이 집에 찾아와 살려달라 용서해 달라 난리가 났었다.
웃고는 있지만, 소리 지르고 화내는 것보다 더 소름 끼치고 무서웠다.
“내가 하는 일에 이유는 아무도 알 필요 없다. 물론 그 정도 일은 아무 이유 없이 할 수도 있는 일이기도 하고. 그러니, 넌 신경 끄고 나가봐.”
“아버지, 아니 회장님. 한 청년의 인생이 달린 일입니다. 아무 예고도 없이...무슨 이유인지 몰라도 한 달만 시간을 주시면 안 될까요?”
“필요하면 그놈이 와서 빌겠지. 다시 말하지만 넌 신경 꺼. 한마디만 더하면 당장 내쫓아 버릴 테니까.”
“아버...”
결국 입을 다물었다.
그냥 겁주려고 하는 말은 절대 아니라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알겠어요. 그럼 내일 오전 시간 약속은 지켜주세요. 얼굴을 보고 대화를 해야 사정을 하든, 사실을 받아들이든 할 거 아니에요.”
“내일 오전 9시 정각. 1분이라도 늦으면 기회는 사라질 거다.”
더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이 문을 열기 전까지 궁금하고 화나는 일이 가득했는데, 지금은 김서원도 서인우도 그에 맞서기엔 너무 작았다.
“그대로 전달하겠습니다. 그럼 가볼게요.”
아무런 대답도 넘어오지 않은 채 막 문을 열려고 하는 김서원의 귀에 작은 소리가 들렸다.
“변하는 건 없어. 그냥 그놈이 어떻게 나올지 궁금할 뿐이지.”
두 주먹을 꽉 쥐어 감정을 가라앉히고는 바로 문을 열고 그 끔찍한 곳을 빠져나왔다.
* * *
잔에 담긴 술을 홀라당 입속으로 집어넣고 최영만의 얘기는 계속됐다.
“군대 선임한테 소개받았다더라. 엄청난 실력을 숨기고 있는 말 그대로 재야의 고수라고.”
“그래서요?”
“처음에 나는 전혀 관심을 보이지 않았어. 나와 다르게 형식이는 워낙 야망이 큰 사람이라 눈빛이 달라지더라.”
잠시 잊고 있던 김형식의 이름이 나오자 입안이 까끌까끌한 것 같았다.
“그 고수라는 자는 절대 아무나 받아주지도 않고, 훈련도 혹독해서 버티는 사람이 거의 없다는데, 수련 과정을 끝까지 다 버티면 엄청난 실력가로 거듭나게 된다고 했어.”
“정말 처음 듣는 얘기네요. 이런 스토리가 있는 줄 몰랐습니다.”
“나도 오랜만에 그때 얘기를 꺼내니까 속이 울렁거린다.”
“감회가 새롭겠어요?”
“푸흡!”
밑반찬으로 나온 상추 겉절이를 입에 넣다가 웃음을 터트린 최영만이 냅킨으로 입을 닦으며 연신 웃어댔다.
“왜요? 뭐 재미있는 일이라도 생각나신 거예요?”
“재미있는 일? 물론 지금 와서 다시 생각해 보니 추억이긴 했는데…. 방금 내가 속이 울렁거린다고 했던 건 정말 토할 때까지 수련했거든.”
“토할 때까지요?”
“성이 유씨라 리우 사부로 불렸던 그 고수가 진짜 혹독한 훈련을 시켰지. 작은 체구에 반백의 머리가 거의 어깨까지 오는 어쩐지 좀 기괴한 느낌이 드는 사람이었어.”
“그냥 외모만 상상해봐도 고수의 느낌이 나기는 하는데요?”
“너도 중식도 처음 접했을 때 고생 좀 했을 거 아니냐? 우리 셋은 채소도 고기도 다 아깝다고 종이로 중식도를 훈련했었지.”
아, 중식도!
김형식을 만나고 바로 오느라 사부와의 약속을 지키지 못한 게 순간 떠올랐다.
가방에 넣어 같이 듣게 해준다고 약속했는데...
내일 당장 들을 원망에 잠시 머리가 띵하고 울리는 것 같았다.
“종이로 중식도를 연습하신 거예요?”
“그랬지. 뻣뻣한 종이를 머리카락 굵기가 될 때까지 썰어서 통과해야 했으니까. 여기가 그때 생긴 굳은살이다.”
최영만이 손바닥에 딱딱하게 잡힌 굳은살을 보여주고는 다시 빈 잔에 술을 따랐다.
“그럼 세 분이 같이 중국으로 건너가서 그 고수를 찾아 요리를 배우신 거네요?”
“그랬지. 그 성질 고약한 리우 사부가 절대 우리를 제자로 받아줄 수 없다고 고집을 피워서 그때 네 아빠가 정말 고생 많이 했다.”
서인우는 묵묵히 이어지는 얘기를 기다렸다.
“무슨 모텔 같은 싸구려 호텔을 잡아놓고 바로 우리랑 같이 가서 그 고수 설득에 실패한 후, 나랑 형식이랑 쉬고 있을 때나 자고 있을 때 꼬박 3일을 찾아가서 사정했다더라.”
“꼬박 3일 이나요?”
“나도 나중에 들었는데, 말도 잘 안 통하는 사람을 쫓아다니면서 계속 청소하고 물도 받아 오고, 마늘이며 양파며 가득 쌓여있는 재료들을 다 손질하고 그랬단다, 서동수 그놈이.”
잠시 젊은 시절 아빠가 괴짜 고수를 쫓아다니며 일하고 부탁하고 했을 것을 상상하니 어딘지 모르게 낯설지 않았다.
항상 열심히 재료 손질하고 요리하는 모습을 보여줬던 아빠기에 당연히 그랬을 거라는 믿음이 있었나 보다.
“결국 제자로 받아주신 거군요?”
“그랬지, 네 아빠 덕에 우리를 받아 준 줄도 모르고, 나랑 형식이는 툭하면 리우 사부를 흉보고 험담하고 그랬지. 어찌나 사람 쉬는 꼴을 못 보던지.”
‘그런 훈련을 받았으니 엄마가 그렇게 하루만 쉬고 여행 가자고 해도 그걸 못했던 거였구나.’
아빠의 지난 삶이 조금씩 이해되기 시작하는 순간이었다.
“이거 병이 새나? 술이 언제 다 떨어졌지?”
앞에 놓인 잔에 술을 따르려다 비어있는 걸 확인한 최영만이 빈 병을 흔들며 말했다.
“딱 한 병만 마지막으로 마시자. 취하냐? 어때? 마실 수 있겠어?”
“저는 아무렇지도 않습니다. 아저씨는 괜찮으시겠어요?”
“그래봤자 둘이 각 일병인데, 내가 네 나이 때는 혼자 네 병, 다섯 병 마셨다.”
어쩔 수 없이 나오는 라떼는 말이야를 들으며 소주 한 병을 추가했다.
“그때 얘기하자면 며칠 밤을 새워도 모자랄 거다. 중요한 건 수련이 끝나갈 때였어.”
“얼마나 요리를 훈련하셨어요?”
“처음 한 달은 종이만 썰고, 미친놈도 아닌데 웍에다 그 종이를 볶고 그랬다. 불도 안 붙이고 말이야.”
“그럼 그냥 중식도와 웍에 익숙해지는 훈련을 하신 거네요?”
“그랬지. 그때 때려치웠으면 지금은 뭘 하고 있었으려나?”
마침 직원이 가져온 소주를 흔들어 빈 잔에 따르고 쨍 소리가 나게 부딪혔다.“정확히 한 달 지나고 나서부터 채소부터 시작해 하나씩 손질하는 걸 훈련 시키더라. 그렇게 6개월을 하루도 쉬지 않고 밤낮으로 훈련했어.”
“6개월이요?”
“처음부터 리우 사부가 내건 조건이었어. 6개월 안에 자기 테스트에 통과해야 한다고.”
“테스트도 있었어요?”
‘캬’ 소리와 함께 잔을 내려놓은 최형만이 기다란 오이를 쌈장에 푹 찍어 와드득 크게 씹었다.
진한 오이 향이 느껴지자 저절로 입에 침이 고였다.
덩달아 큼직한 오이를 하나 집어 입에 넣었다.
오이에서 나온 시원한 물이 입안을 헹궈주는 것 같았다.
“지난번 네가 했던 요리 경연대회 있잖냐? 그런 거랑 비슷하다고 보면 될 거다. 처음에는 똑같은 크기의 무를 우리 세 명 앞에 주고는 채를 썰어보라고 그랬지.”
“물론 가장 가늘게 그러면서 제일 빠르게 말이죠?”
“그렇지. 나는 그때 서동수는 절대 못 따라가겠다고 생각했다. 언제 그렇게 연습했는지 손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빠르게, 그러면서도 정확한 크기로 무를 채 썰어 보였지. 물론 실처럼 아주 가늘게 말이다.”
아빠의 실력이 처음으로 인정받는 순간이라는 생각에 가슴이 두근거렸다.
“그럼 첫 테스트는 아빠가 일등을 했던 건가요?”
“그랬지, 그것도 아주 월등한 실력으로.”
“그리고 바로 너도 선보였던 수타면 테스트가 이어졌어.”
“기본기를 보자는 거네요.”
최영만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수타면도 네 아빠가 일등을 차지했어. 물론 김형식이 가장 빨리 면을 뽑아내긴 했지만, 그 면을 삶아서 면의 질감과 맛을 다 느껴보고는 서동수에게 일등을 안겨줬지.”
‘그때부터 아빠한테 열등감이 생겼던 걸까?’
서인우는 아빠가 말하는 김형식과 그가 느끼는 김형식이 다른 이유가 궁금했다.
“이제 마지막 테스트가 남았다고 했을 때, 우린 다 엄청난 실력을 요구하는 요리가 주제로 나올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어요?”
“우습게도 마파두부가 최종 테스트였어.”
“네? 마파두부요?”
“재료도 단순하고 조리법도 아주 쉬운 마파두부라는 얘기에 내가 되물었지. 이런 게 정말 마지막 테스트 맞냐고? 흐흐, 흐흐흐.”
최영만이 취기가 오르는지 웃음이 실실 새는 것 같았다.
“내가 한 질문에 답이 뭐였는 줄 아냐?”
“뭔데요?”
“리우 사부 손에 들려있던 국자로 등짝을 세게 얻어맞았지. 잘은 모르겠지만, 기본이 제일 중요한 거라나 뭐 그렇게 말하는 것 같았어.”
기본.
[서풍] 의 인기는 그 기본에서 나온 것임이 틀림없었다.
마지막 테스트까지 얘기가 나왔지만, 정작 궁금해했던 사부에 관한 얘기는 하나도 들리지 않았다.
그때였다.
“결국 서동수가 최종 우승을 차지했고, 지난번 네가 들고 왔던 그 중식도가 그때 리우 사부한테 받은 선물이었어. 언젠가 뭐...더 큰 힘을 발휘하게 될 거라고 대충 그런 말과 함께.”
그게 바로 사부가 깃들기 전의 중식도와 아빠의 시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