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3화.
김서원이 기가 막힌다는 표정으로 김원상을 쳐다봤다.
“그런 쓸데없는 소리 할 거면 나 일어날 거야.”
“성질은 여전해서…. 그 자식 곧 가게 문 닫을 거다.”
“뭐? 가게? [서풍 TWO]를 말하는 거 맞아?”
“서인우가 그 콧구멍만 한 가게 말고, 어디 다른 가게 있냐?”
너무 예상 밖의 대화 내용에 당황한 김서원이 유리잔에 꽂혀있던 빨대를 빼버리고 아이스커피를 벌컥벌컥 들이켰다.
눈을 정신없이 깜빡거리며 급기야 얼음을 하나 와그작 깨물어 먹고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왜? 그게 말이 돼?”
“가게야 사정이 있으면 못할 수도 있지, 말이 또 안 되는 것도 아니지.”
“거기 인테리어 새로 한 지 한 달도 안 됐어. 게다가 바로 얼마 전에 방송에 나와서 열심히 하겠다고 전 국민한테 약속도 했다고.”
김원상이 느긋하게 샌드위치를 크게 베어 물고 커피를 빨대로 쪽쪽 빨아 마셨다.
“먹어봐. 진짜 맛집이라니까.”
“됐어. 알아듣게 자세히 말 좀 해봐. 무슨 소리야?”
“그런데, 너 그놈 가게에 대해 아주 자세히도 안다. 인테리어 새로 한 것까지, 게다가 언제 했는지까지 알고 있네. 정말 둘이 무슨 사이인데?”
“휴우.”
김서원이 결국 긴 한숨을 내쉬며 가방에서 명함을 한 장 꺼냈다.
“[서풍 TWO]의 입구 인테리어 한 사람, 그거 바로 나야.”
명함을 건네받은 김원상이 명함과 김서원을 번갈아 쳐다봤다.
“뭐야? 바램 인테리어 대표? 네가?”
“나 독일에서부터 공부하고 준비했어. 대전에서 작업했던 걸 우연히 보게 된 서인우 씨 이모부가 소개해준 게 인연이 된 거야.”
입가에 묻은 소스를 냅킨으로 거칠게 닦으며 김원상이 명함을 다시 쳐다봤다.
“그럼 서인우 가게 입구가 포토존이 됐다고 하던데...그게 네 작품이라는 얘기야?”
“오빠도 방송 봤을 거 아니야? 내가 컨셉 잡고 주문 제작해서 설치까지 한 거라고. 서인우 씨랑은 그렇게 일로 아는 사이고.”
“허, 계집애가 피아노 한다고 돈을 그렇게 처발라놓고, 결국 딴짓하고 왔다는 소리네.”
김서원이 사납게 그를 노려봤다.
“말 그런 식으로 하지 마. 난 적어도 누구처럼 회장 자식이라는 타이틀 쓰고 남의 자리 뺏는 일 따위는 하지 않으니까.”
“너 말 다 했어?”
“아니, 하지만, 지금은 그 얘기로 오빠랑 싸우고 싶지 않아. 그러니까 [서풍] 얘기나 알아듣게 사실대로 말해.”
아이스커피를 크게 들이켜며 흥분을 가라앉힌 김원상이 다시 차분한 어조로 말했다.
“나도 자세히는 몰라. 오늘 아버지 사무실에 있을 때 비서실에서 연락이 왔었는데…. 계속 회의 중이라 말하라고 하고는 만나주지 않더라고.”
화가 난 김서원의 어깨가 들썩거렸다.
“난 그때 그 사람이 서인우 인지도 몰랐어. 그러니, 나는 원망 마라.”
“그래서? 갑자기 [서풍]이 왜 문을 닫아?”
“여기까지 얘기하면 딱 감이 오지 않냐? 뭐겠냐? 아버지가 손 쓴 거지. 이번 달까지만 장사할 수 있다고 하더라.”
“서인우 씨가 그래서 아침 일찍 달려온 거고?”
“아마도.”
아이스 커피잔을 잡은 김서원의 손이 바들바들 떨렸다.
아버지 김형식을 어느 정도는 알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그래도 이 정도까지 사람이 욕심 많고 잔인할 거라고는 미처 몰랐다.
“그런데, 왜? 뭣 때문에? 오빠 말대로 [만가복]하고는 비교가 안 되게 규모도 작고 이제 겨우 일 년도 안 된 가게인데?”
“나도 그게 궁금해. 그 이유 알게 되면 나한테도 좀 알려줘라.”
실실 웃으며 말하는 김원상의 얼굴에 얼음 담긴 커피를 확 쏟아붓고 싶었다.
간신히 꿈틀거리는 손모가지를 잡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 아직 다 안 먹었다.”
“천천히 내 거까지 다 처드세요. 나 먼저 일어나.”
“저게, 이씨.”
카페를 나온 김서원은 바로 앞에 세워져 있던 택시에 올라탔다.
서인우 보다 먼저 만나야 할 사람이 생겼다.
* * *
[만가복] 본사를 빠져나온 서인우는 몹시 혼란스러웠다.
제시카의 한국 이름이 김서원이란다.
게다가 김형식 회장의 하나뿐인 딸.
왜 그 사실을 비밀로 했을까?
이유는 모르겠지만, 분명 그녀만의 사정이 있었을 거다.
어떤 사정으로 제시카라는 이름을 쓰는지, 오늘은 왜 아버지 김형식을 만나러 갔던 건지 이런저런 생각을 하던 서인우가 한산한 거리로 나와 크게 숨을 들이켰다.
‘지금 한가하게 그런 생각이나 하고 있을 때가 아니지.’
다시 정신을 차린 서인우는 핸드폰을 꺼내 최영만의 번호를 찾아 통화 버튼을 눌렀다.
“안녕하세요, 아저씨. 저는 이 시간 이후로 아무 때나 괜찮습니다. 언제가 편하세요?”
“나 지금 가게다. 쉬는 날이라고 만날 친구도 없고, 심심해서 가게 청소나 할까 하고 나왔어. 넌 어디냐?”
“저 여기 [만가복] 본사 앞이에요.”
“뭐? 어디? 네가 왜 거기에 ...”
최영만의 목소리가 한 톤 높아졌다.
“그럼 제가 바로 아저씨 가게로 갈게요. 아직 점심 전이시죠?”
“그래, 같이 점심 먹자. 조심해서 와.”
“네, 바로 가겠습니다.”
최영만이 서인우한테 오라고 알려준 곳은 [양자강]에서 십 분 정도 떨어져 있는 돼지갈빗집이었다.
“아저씨, 그동안 잘 지내셨어요?”
“어, 인우 왔냐? 얼른 앉아. 내가 우선시켜놨어.”
“맛있겠는데요?”
“어, 이 집 고기도 부드럽고 맛있어. 나중에 냉면도 꼭 같이 먹어야 해. 냉면에 싸 먹는 맛이 또 죽여주지.”
“벌써 침이 막 고입니다.”
최영만의 입이 귀까지 걸렸다.
잘 익은 고기를 자르는 가위가 춤추듯 신나 보였다.
“제가 할게요.”
“에이 절대 안 돼. 나 고깃집에서 가위랑 집게는 무슨 일이 있어도 다른 사람한테 안 맡겨. 내가 구워야 맛있다고.”
서인우는 더운 날씨에 땀을 뻘뻘 흘리며 고기를 굽고 있는 최영만 아저씨가 안쓰러우면서 고마웠다.
불판 위에 있는 연통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연기를 빨아들이고 있었다.
고기가 먹기 좋게 익자 최형만이 자르는 족족 서인우의 접시에만 올려놓았다.
“아저씨, 같이 드셔야죠. 이렇게 저한테만 주시면 저 편하게 못 먹습니다.”
“아, 나도 먹어야지. 먹자, 먹자.”
최영만이 상추에 깻잎을 올리고 그 위에 윤기가 자르르하고 큼직한 돼지갈비를 한 점 올렸다.
다시 그 위에 쌈장을 푹 찍은 생마늘과 파채를 듬뿍 넣어 입에 쏙 집어넣고는 웃으며 우물거렸다.
“마시 어...?”
입이 꽉 차 발음이 정확하지 않았지만, 분명 고기 맛을 묻는 것 같았다.
“진짜 부드럽고 맛있네요.”
조금 전 일이 생각나 사실 입맛이 별로 없었다.
그런 서인우의 속도 모르고 고기를 구우며 행복해하는 아저씨가 감사해 억지로 더 맛있게 먹으려 애썼다.
머릿속이 복잡해 입맛은 없었지만, 고기는 정말 부드러웠다.
배부르다는 서인우의 말을 무시하고, 결국 일 인분을 더 추가하고 냉면도 비빔과 물냉면으로 시키고서야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웃었다.
고기가 다 익어 직원이 들어와 불을 빼자 요란한 연통 소리도 조용해졌다.
“콜라 하나 시켜줄까? 낮이라 술은 좀 그렇지?”
“아저씨 괜찮으시면 소주 한잔할까요?”
“나야 처음부터 소주 생각이 간절했지. 네가 고기 먹을 줄 아는구나.”
소주를 한 잔 따라 부딪치며 최영만이 먼저 입을 열었다.
“오늘 [만가복] 본사에 왜 갔었는지 물어봐도 되겠냐?”
“요 며칠 일이 좀 있었어요.”
“어떤 놈이 음식 먹고 탈 났다고 난리를 친 게 엊그제인데, 또 무슨 일이 있는 거냐?”
서인우가 최영만의 빈 잔에 소주를 따르고 자신의 잔에 따라 바로 입에 털어 넣었다.
그 모습을 최영만이 걱정스러운 눈으로 지켜보다 그도 자신의 잔에 담긴 술을 마셨다.
“우리 가게가 다른 사람한테 넘어갔대요. 이번 달까지 정리해서 나가라는 조건으로요.”
“그게 무슨...아직 계약 기간이 많이 남아있지 않냐?”
“그래서 위약금까지 챙겨줄 테니 하루빨리 정리하고 나가라고….”
“어느 썩을 놈이...누가 그런 짓을 했다는 거야? 주인이 사람 좋은 할머니라고 그러지 않았냐?”
다시 잔에 소주를 채워 마신 서인우가 노 사장한테 들은 얘기를 간략하게 전했다.
“혹시, 혹시나 말인데…. 그 일 하고 오늘 [만가복] 본사 갔던 일이 연관이 있는 거냐?”
잔만 물끄러미 바라보던 서인우가 놀란 눈으로 최영만을 쳐다봤다.
“아저씨, 우리 아빠와 김형식 회장 사이에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겁니까? 세 분이 제일 친한 친구 사이라고 하시지 않았나요? 저도 아빠한테 그렇게 들었는데...”
“친구는 무슨 얼어 죽을!”
“아빠 돌아가시기 전에 항상 그러셨어요. 청춘을 함께한 친구들이라고요. 고향에서부터 아셨던 사이셨다고 들었어요.”
최영만이 서인우의 빈 잔에 남은 술을 따르고 소주를 한 병 더 시켰다.
“사실 내가 동수보다, 아니 네 아버지보다 한 살 많아. 형식이랑 둘이는 동갑이고.”
“그런데, 친구가 되셨네요?”
“내가 어려서 좀 많이 아팠어. 그래서 국민학교를 일 년 더 다녔지. 중학교 3학년 때 같은 반이 되면서 셋이 친해졌고.”
“정말 오래된 인연은 맞네요.”
그 시절 생각에 잠시 잠긴 최영만의 눈에 그리움이 서렸다.
“참 뭘 해도 재미있고, 좋았던 시절이지.”
“그럼 그때부터 쭉 연락하고 지내셨던 거예요? 군대도 다녀오셨을 텐데...”
“그건 아니야. 각자 상황이 다 달라서 바쁘게 지내다가 군대 제대 후 서동수가 먼저 연락을 해왔어.”
“아빠가요?”
“자네 아빠가 공부를 제일 잘했지. 좋은 대학에 붙었는데, 가정 형편이 좋지 않아 대학을 포기하고 돈 좀 벌다가 입대를 했더라고.”
중간에 피식 웃음을 웃어 보인 최영만이 말을 이었다.
“나랑 형식인 꼴통이라 대학은 아예 생각도 안 하고 입대를 했었고.”
서인우는 대답 대신 작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나는 그래도 그때 큰 서점에 취직해서 일하고 있었어. 물론 월급이 많지는 않았지만.”
“아빠도 그때 다른 일을 하고 계셨던 건가요?”
“아니, 군대 선임이 호텔 중식당에서 일하던 사람이었다는데, 그 선임 영향을 아주 많이 받았더라고. 전부터 요리하고 싶어 했었다더군.”
“그게 계기가 된 거군요. [서풍]의 시작이요.”
“진짜 [서풍]의 시작은 그때가 아니야.”
“네?”
최영만이 새로 주문한 소주 뚜껑을 틀어서 딴 후 두 잔에 가득 따랐다.
“얘기가 길어. 우선 한잔하자.”
“네.”
새로 나온 시원한 소주를 입에 털어 넣고 이미 식은 고기를 한 점 천천히 씹었다.
여전히 고기는 부드러웠다.
술을 마시며 아저씨를 통해 그동안 몰랐던 아빠의 젊은 시절 얘기를 들으니 그리움이 확 밀려왔다.
‘이 자리에 아빠와 함께라면 얼마나 좋을까?’
몇십 번, 아니 몇백 번 했던 생각이 또 머릿속에 가득했다.
“우리 셋이 새로운 인생에 도전을 시작한 게 아마 네 나이쯤 됐을 때일 거다.”
“뭐든 할 수 있는 20대니까요.”
“그렇지. 그때는 군대가 지금보다 훨씬 길어서 제대까지 아주 까마득했던 것 같다. 맞기도 많이 맞았는데….”
최영만이 몸을 부르르 떨며 다시 잔을 들어 부딪혔다.
“하루는 제대 후 아빠가 나와 형식이한테 연락했더라. 군대 제대하고 나니 고향 친구가 제일 그립다면서.”
서인우는 말없이 얘기만 묵묵히 듣고 있었다.
“인천 차이나타운에서 제일 유명하다는 중식집에 우리를 초대했어. 난 그렇게 맛있는 요리는 태어나서 처음 먹어봤다.”
군침을 한 번 삼키고 그걸 또 안주 삼아 소주를 마신 최영만이 다음 말을 이었다.
“서동수가 그랬다. 이런 맛있고 훌륭한 요리를 평생 만들고 싶다고…. 본토인 중국으로 건너가서 그 요리를 배우고 돌아올 거라고.”
“그게 아빠의 시작이었던 건가요?”
“그렇지, 아빠뿐 아니라 우리 셋의 시작이었던 거지.”
“네?”
“그때 서동수가 먼저 제안했어. 셋이 같이 중국으로 건너가자고. 그래서 서동수가 소개받은 중식 고수에게 요리를 배우자고!”
“중국에 있는 고수라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