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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중식당엔 무언가 특별한 게 있다-72화 (72/200)

제72화.

서인우의 침착하면서도 힘 있는 목소리에 주위에 찬 바람이 휭 부는 것 같았다.

특히 차성철의 눈빛이 누구보다 더 차갑게 변했다.

“지금 남의 회사에 와서 무슨 소리를 지껄이는 겁니까? 최소한 회장님을 만날 생각이면 약속이라도 잡고 왔어야죠.”

“좀 전에 이미 말하지 않았습니까? 전원이 꺼져 있었다고. 금요일 저녁부터니까 오늘까지 정확히 5일 동안 하루에 열 번도 넘게 통화를 시도했었습니다.”

지지 않는 서인우의 눈빛 때문인지 차성철이 안내 직원에게 다시 한번 비서실 연락을 요청했다.

잠시 짧은 통화를 마친 안내 직원이 차성철을 쳐다보고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때였다.

아버지 김형식을 만나 새로 맡은 인테리어 견적서를 자랑할 생각에 엘리베이터로 향하던 김서원이 데스크 쪽에 사람들이 몰려있는 모습을 무심코 쳐다봤다.

그 무리 중에 서 있는 서인우를 발견하고 놀라 자기도 모르게 몸을 숨기고 그들의 대화를 엿듣고 있었다.

“회장님이 오늘은 아무래도 안되겠다고 하십니다. 다음에 정식으로 약속을 잡고 오시라고…. 죄송합니다.”

“지금 회의 중이라고 거의 두 시간을 기다렸습니다. 제 이름 정확히 전달 하신 건 맞습니까?”

“네. 죄송합니다.”

서인우가 주먹을 세게 쥐었다.

절대 흥분하지 않는 그도 순간 눈동자가 흔들렸다.

참을 수 없는 분노에 짧은 어지러움까지 느껴질 정도로.

“정식으로 약속을 잡으려면 전화번호를 알아야 할 것 아닙니까? 어디로 연락해서 약속을 잡으라는 겁니까?”

평상시 같지 않게 목소리 톤이 약간 높아진 서인우가 걱정된 김서원은 발만 동동 구르며 선뜻 나서지 못하고 그대로 서 있었다.

“오늘은 그만하고 돌아가시죠. 여기 직원분들 일 방해 하시지 말고.”

“네, 그럼 지금 약속을 잡아 주십시오. 그럼 아까운 시간 버렸지만, 바로 돌아가겠습니다.”

안내 직원이 계속 서인우와 차성철을 번갈아 쳐다봤다.

얼굴엔 난처한 기색이 역력했다.

보나 마나 김형식이 만나기를 거부한 상황인 듯했다.

그렇다고 포기하고 그냥 돌아갈 수는 없었다.

“죄송합니다. 다음에 다시...”

“다음에 다시 와서 또 두 시간, 세 시간 기다리다 가라는 말씀이십니까? 정식 약속을 잡고 오라고 했으니, 약속만 잡아 주면 바로 사라지겠습니다.”

“이 사람이 진짜 여기서 이렇게 행패를...”

“지금 뭐 하는 겁니까?”

뒤에서 목소리가 들리자 거기 있는 사람이 동시에 고개를 돌려 쳐다봤다.

“김서원 씨.”

“제시카 씨.”

차성철과 서인우가 동시에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서인우는 자기가 알고 있는 제시카라는 이름과 다른 이름이 불리는 것도 놀랐지만, 안내 직원과 옆에 서 있던 유현주 대리가 허리를 깊이 숙여 인사하는 모습이 뭔가 이상했다.

게다가 이런 큰 회사에 아무런 거리낌 없이 당당하게 서 있는 모습도...

* * *

아들 김원상과 [만가복] 마포점의 새로운 메뉴를 의논하고 있던 김형식은 비서실에서 오는 잦은 전화가 귀찮았다.

“무슨 일인데요? 누군지, 제가 나가서 처리할까요?”

“신경 쓸 거 없어. 네 놈이 처리할 수 있는 일도 아니고.”

“벌써 1시간 넘게 기다리고 있는 거 아닙니까? 나 때문이면 그만 가보겠습니다.”

김형식이 자기 분수도 모르고 떠들어댄다는 듯 무시하는 눈빛을 그대로 드러냈다.

“그럼 새 메뉴는 언제부터 올릴 계획인 거냐? 자신은 있고?”

“뭐, 어려운 요리라고...다음 달부터 바로 메뉴에 넣을 생각입니다. 소스 레시피는 차 셰프한테 전달해놨어요.”

“지난달부터 시작한 갈비밥하고 이번 치즈 탕수육이면 거기 중식 거리를 꽉 틀어잡을 자신 있겠지?”

김원상이 어깨에 힘이 들어간 듯 몸을 곧추세우며 웃었다.

“이미 그쪽 일대에서는 내가 맡은 [만가복]을 따라 올 자가 없습니다. 장담합니다, 확인해 보세요.”

중요하지 않다는 듯 바로 김형식이 입을 열었다.

“그렇게까지 깔아줬는데 독보적으로 앞서가지 못하면 그건 능력이 없는 거지. 안 그래?”

기분 나쁜 표정을 애써 감추며 김원상이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 있습니다. 두고 보세요.”

더 길게 앉았다가는 언제 또 언성이 높아질지 몰라 막 일어서는 김원상의 귀에 충격적인 한마디가 들려왔다.

“이제 [서풍]은 없어.”

“네?”

“서인우가 하는 [서풍], 곧 문을 닫을 거라고.”

다시 소파에 주저앉은 김원상이 아버지 김형식을 빤히 쳐다봤다.

“자세히 말씀해 주세요, 그게 무슨 뜻입니까?”

“우리말인데 못 알아들어? [서풍 TWO]인지 뭔지 그놈이 하는 가게 이번 달이 끝이란 말이다.”

놀라움에 여전히 김형식을 향한 시선을 거두지 못하고 있던 김원상이 간신히 고개를 돌렸다.

[서풍 TWO]가 문을 연 지 반년도 되지 않았다.

게다가, 최근 들어 젊은 사람들에게 포토존과 서인우 만의 요리 비법으로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엄청난 인기를 끌고 있었다.

그런 그가 왜 가게 문을 닫는다는 걸까?

아니지.

그가 가게 문을 닫는 거라면 그 소식을 이 자리에서 듣고 있을 수는 없지.

“어떻게 아셨습니까? 역시 아버지가 손쓰신 겁니까?”

“그건 알 거 없어. 누가 했든 너한테는 잘된 일 아니냐?”

“왜요? 그자가 가게를 하든 안 하든 난 실력으로 이길 자신 있습니다. 그런데, 왜 이렇게까지 하시는 겁니까?”

김형식의 입에서 작은 비웃음 섞인 소리가 들렸다.

“정말 네가 실력으로 서인우를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이미 대회에서 겨뤄봤는데도 말이야.”

“그 한 번으로 판단하시면 안 되죠. 아버지는...아니, 회장님은 지금도 그자가 저보다 실력이 뛰어나다고 생각하십니까?”

“아직은...”

김원상의 얼굴이 처참하게 일그러졌다.

“죽으라고 더 노력해. 그래도, 실력으로 안 될 것 같으면 다른 방법으로라도 눌러 버리라고.”

“그게 아버지의 인생철학입니까?”

“내가 이 자리에 올라오게 된 비법이지. 맨손으로 시작해 지금과 같은 권력과 부를 이 손안에 넣는다는 게 쉬운 일인 줄 알았어?”

김형식이 테이블 위에 놓인 김원상이 작성해 온 서류를 오른손으로 구겨 꽉 쥐었다.

그리고는 거칠고 투박한 손아귀 안에 사정없이 구겨진 종이를 다시 한번 뭉쳐 테이블로 던졌다.

“그냥 다 밟아 뭉개 버리라고. 비열하고 치졸함, 야비함... 그런 것들은 성공하고 나면 다 한순간 사라질 감정들이야.”

테이블에 덩그러니 던져진 종이 뭉치를 멍하니 바라보고 있던 김원상이 픽 실소를 보였다.

‘언젠가 수틀리면 나도 저렇게 구겨진 채 버려지겠지….’

알고는 있었지만, 다시 한번 아버지 김형식의 존재가 뼛속까지 와닿았다.

“그만 가보겠습니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네가 맡은 [만가복]을 그 누구도 따라오지 못하게 수단 방법 가리지 말고 만들어. 그렇게 능력을 보이라고. 알아들어?”

“알겠습니다.”

속에서부터 긴 한숨이 밀고 나왔지만, 꾹 눌러 집어넣었다.

회장실 문을 닫고 나와서야 참았던 한숨을 몰아쉬었다.

그런 김원상의 눈치를 보고 있던 비서들이 눈이 마주치자 급하게 시선을 피했다.

“좀 전에 회장님을 만나러 온 사람은 누구입니까?”

“[서풍]의 서인우 씨라고 전해달라 하셨습니다.”

“서인우라고?”

“네, 왜 그러시는지...”

순간 얼굴이 굳어버린 김원상을 이상하게 쳐다보는 비서를 보고, 재빨리 표정을 바꿨다.

“아닙니다. 아는 이름이라서요. 그럼, 수고들 하세요.”

아직 거기 있을까?

갑자기 서인우가 가게 문을 닫을 거라는 얘기가 그래서 나왔던 거였어.

분명 뭔가 일이 벌어지고 있는 줄은 알았는데...이렇게 빨리 진행되고 있다니...

급하게 엘리베이터 하행 버튼을 눌렀다.

1층 로비로 향하는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그곳에 아는 얼굴들이 즐비해 있었다.

‘뭐야. 아직도 로비에서 기다리고 있었던 거야? 미련한 놈.’

서인우를 둘러싸고 있는 사람들 얼굴을 하나하나 살피던 김원상은 그 속에 왜 있는지 모를 얼굴을 발견하고 그들에게 다가갔다.

“김서원. 너 여기서 뭐 하고 있어?”

“아, 오빠!”

제시카의 오빠 소리에 옆에 서 있던 서인우의 동공이 심하게 흔들렸다.

갑자기 나타난 제시카를 차성철이라는 회사 팀장이 김서원이라는 이름으로 불렀다.

그에 놀랄 새도 없이 이번에는 아는 얼굴인 김원상이 다가와 그녀를 익숙한 듯 부르고 있다.

역시 김서원이라는 이름으로.

게다가 제시카는 김원상을 오빠라고...

순간 머릿속이 복잡했다.

이들의 관계를 전혀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김원상의 다음 말을 듣기 전까지는.

“갑자기 회사에는 무슨 일이냐? 너 아버지 만나러 온 거냐?”

순간 제시카의 얼굴이 벌겋게 상기됐다.

그녀는 놀라 서인우를 쳐다봤고, 그런 그녀를 차성철과 김원상이 동시에 보고 있었다.

김서원을 바라보는 차성철 옆에는 유현주 대리가 그들을 하나하나 쳐다보고 있었다.

“오빠, 아빠는 회장실에 오셨어?”

“이제 내가 나왔으니까 회의는 끝난 거겠지?”

“알았어. 자세한 건 다음에 얘기해. 서인우씨. 저랑 같이 올라가시죠.”

그들의 대화로 상황이 어느 정도 짐작이 된 서인우가 잠시 아무 말 없이 생각에 잠겼다.

“서인우 씨. 내 말 들었어요?”

“오늘은 약속이 안 되어 있으니까 그냥 돌아가는 게 맞는 것 같습니다. 대신 내일 이 시간에 다시 오겠다는 말만 전해 주십시오.”

“지금 저랑 같이….”

서인우가 김서원의 눈을 빤히 쳐다봤다.

그 눈빛에 원망이나 분노 같은 게 들어있지는 않았다.

하지만, 무척이나 복잡해 보였다.

“그럼 부탁드립니다. 내일 오전 일찍 꼭, 반드시 만날 수 있도록 약속 잡아 주시기 바랍니다. 소란 피워 죄송합니다.”

서인우는 로비에 있는 직원들과 그를 둘러싸고 있는 소위 [만가복] 관련자들에게 고개 숙여 정중히 인사했다.

뒤돌아 입구로 향하는 서인우를 김서원이 쫓아가려 하자, 김원상이 그녀의 팔을 잡아끌었다.

“다들 돌아가서 볼일들 보세요.”

김원상이 주위를 정리하자, 못마땅한 표정의 차성철이 고개를 까딱하고 유현주와 함께 엘리베이터로 향했다.

“이 팔 좀 놔봐.”

“나중에 말고, 지금 나랑 얘기 좀 하자.”

“나 지금은 가봐야겠어. 1시간 후에...”

“저자와 관련돼서 얘기할 게 있는데, 내가 들은 엄청난 얘기가 있거든...”

김서원이 오빠 김원상의 눈을 살폈다.

어딘가 숨기지 못하는 교활한 웃음이 슬금슬금 묻어있었다.

아침 일찍 서인우가 회사를 찾아온 일.

두 시간을 기다리게 하고 만나주지 않은 일.

무엇보다 지난번 마영준 셰프와 미팅할 때 느꼈던 이준형의 어두운 얼굴...

오빠의 저 웃음에 왠지 그 일들과 관련 있는 엄청난 비밀이 들어있을 것 같아 불안했다.

“알았어. 저기 길 건너 카페로 가.”

“너 차 안 가져왔어?”

“응, 택시 타고 왔어.”

“그럼 내 차 타고 다른 데로 가자. 여긴 보는 눈, 듣는 귀가 너무 많아. 조심해야지, 안 그래?”

그러고 보니 아까부터 안내 직원들이 둘의 대화를 들어보려 귀를 쫑긋하고 있었다.

“알았어. 어디든 조용한 곳으로 가.”

김원상이 조용한 카페를 찾아 차를 몰고 가는 동안 김서원은 계속 서인우가 걱정됐다.

‘바로 따라가서 상황을 설명해줬어야 했는데..’

이렇게 말고 시원하게 맥주 한잔하면서 서인우와 이준형에게 자신에 관한 얘기를 털어놓고 싶었다.

아무런 편견 없이 그들과 자연스럽게 섞이고 싶었는데...

10분 좀 넘게 달리던 차가 3층 전체가 카페로 보이는 한 건물 앞에 멈췄다.

[브래드 앤 커피] 라는 커다란 간판이 눈에 띄었다.

“들어가자. 여기 샌드위치 맛있어. 점심 먹자면 싫다 할 거 아니야?”

“오빠는 일 안 해?”

“우리 가게가 [서풍] 같은 줄 알아? 내가 없어도 차셰프랑 오 매니저가 알아서 할 수 있도록 다 지시해놓고 왔다고.”

김서원이 좋아하는 각종 빵이 종류별로 가득했다.

다른 때 같으면 정신을 못 차릴 정도로 빵 굽는 냄새와 진한 커피 향이 죽이는 곳이었지만, 지금은 김서원의 무시무시한 식욕이 작동하지 않았다.

김원상이 알아서 주문한 샌드위치와 아이스커피를 앞에 두고 김서원을 빤히 쳐다봤다.

“너 서인우랑 무슨 사이야?”

질문을 던지는 김원상의 눈빛에 조금 전처럼 비릿함이 묻어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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