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1화.
마영준의 눈에 근심이 가득했다.
“누구한테 들은 소리야? 확실한 거야?”
“네, 전 주인 할머니가 찾아와서 울고불고….”
“아직 계약 기간도 남았는데, 팔아먹고는 왜 자기가 울고불고야? 정작 울어야 하는 사람이 누구인데….”
이준형이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었다.
“그게 아니에요. 그 할머니 며칠을 잠도 못 자고 우셔서 눈이 다 짓물렀더라고요.”
“그럴 짓을 왜 했냐고 그러니까.”
“그 가게를 넘기라고 막 협박을 했다네요. 딸 이름하고 주소까지 다 알고, 게다가 손주가 다니는 학교까지 말했다는데…. 정말 겁났을 거예요.”
이준형의 한숨이 그칠 줄을 몰랐다.
“이렇게 손 놓고 있을 수는 없는 일 아니야? 서인우는 지금 뭐 하고 있어?”
“새 주인한테 사정해본다고 했는데, 전화 연결이 아예 안 돼요. 이건 완전 의도를 가지고 접근한 거라니까요.”
“서인우나 이준형 너나 누구한테 원한 살 일도 없을텐데...”
갑자기 말끝을 흐린 마영준의 눈동자가 심하게 흔들렸다.
“왜요? 뭐 집히는 사람 있어요?”
“확실하진 않아서...내가 좀 알아봐야겠다. 가서 서인우한테 힘 보태줘. 분명 혼자 해결해 본다고 또 날밤 새우고 있을텐데...”
“안 그래도 한숨도 안 자고 시장 다녀온 것 같더라고요. 저는 그럼 가보겠습니다.”
“그래, 방법이 있을 거야. 힘내고.”
“네.”
대답은 넘어왔지만, 문을 향해 걸어가는 이준형의 어깨가 축 처져 있었다.
그 뒷모습을 빤히 쳐다보고 있던 마영준은 지난번 가게를 잃을 뻔했던 그때의 자신이 떠올랐다.
누가 이런 짓을 벌였을까?
번화한 곳도 아니고, 으리으리한 건물도 아닌 그 작고 허름한 가게를 누가 뺏으려 들었을까?
목적이 가게가 아님은 틀림없어 보였다.
그렇다면 계약이 아직 남아있는 사람을 위약금까지 줘가며 내쫓지는 않겠지...
누구일까?
혼자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가고 있을 때, 가게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어, 뭐냐? 이준형이랑 바통 터치 한 거야?”
“안 그래도 오다가 만났습니다. 선배님과 조용히 의논드릴 일이 있어서요.”
“앉아라. 덥지? 몸보다 마음속이 더 열나지?”
“얘기 들으셨군요?”
마영준이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서인우가 의자를 빼 앉으며 짧은 한숨을 내놓았다.
“제가 어제 밤새 생각해 봤는데요. 누군가 이 가게를 살 수는 있어요. 계약 기간에 주인이 바뀌는 경우는 얼마든지 있으니까요.”
“그렇지, 그런 일은 가끔 있어.”
“그런데, 장사하던 사람한테 위약금까지 줘가며 가게를 비워달라고 하는 건 두 가지 경우죠.”
마영준이 계속하라는 눈빛을 보냈다.
“하나는 요즘 우리 가게가 조금씩 유명해지니까 누군가 그 자리에서 장사하고 싶어서 투자하는 경우. 그리고 하나는...”
“서인우가 장사하는 꼴을 못 보는 경우겠지.”
마영준이 던진 말에 서인우가 눈을 들어 그를 쳐다봤다.
“선배님도 역시 같은 생각을 하고 계시는군요?”
“심증만…. 물증은 없어.”
마영준이 옆에 놓인 얼음이 녹은 물을 벌컥벌컥 마셨다.
“얼마 전에 서인우 아니었으면 나도 같은 꼴을 당할 뻔했으니까... 그냥 그런 생각이 들었다. 아무것도 확실한 건 없어.”
“그래서 통화를 해보고 싶었는데, 계약서에 적힌 번호는 아무리 전화해도 연결이 되지 않았어요. 통화가 돼야 사정이라도 해볼텐데...”
“계약서는 자세히 봤어?”
“네, 처음 보는 이름이 적혀 있었어요.”
서인우가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저장해 놓은 계약서 이미지를 보여주었다.
“이전 사장님이 곤혹을 많이 치르신 것 같았어요. 당장 가게를 접어야 해서 막막한데…. 오열하고 있는 사장님 보니까 마음도 너무 안 좋아서...”
“이 번호...”
“네?”
“번호가 익숙한데…. 잠깐만.”
마영준이 자신의 핸드폰을 꺼내 악마라고 저장된 연락처를 찾았다.
“어? 같은 번호인데요? 혹시 아는 사람...악마라면...”
“심증만 있었는데, 이렇게 또 확신을 주네. 욕심 많은 늙은이가 서인우 잘되는 꼴을 보고 있진 않겠지.”
“[만가복] 김형식 회장 맞나요?”
“경연대회에서 자기 아들이 최종 우승을 놓쳤을 때, 아니 서인우가 그걸 차지했을 때 이미 계획하고 있었을 거야. 정말 속에 악마가 사는 것 같아 끔찍하다.”
놀라움, 실망감, 두려움...
지금 서인우는 자신의 감정이 정확히 어떤 건지 알 수 없었다.
아마 그런 것들보다 더 큰 건 분노.
그래, 분노였다.
아버지의 가장 친한 친구로 기억되어 있던 사람.
그를 찾아와 죽은 친구에 대한 추억을 얘기했던 사람이 어떻게 이런 일을 벌일 수 있는건지...
길지 않은 인생이지만, 지금까지 살아온 인생의 결이 다른 서인우로서는 절대 이해할 수도 받아들일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아직은 확실한 건 아닙니다. 내가 당장 김형식 회장 만나보고 확인해 보겠습니다.”
마영준이 눈을 질끈 감은 채 고개만 끄덕였다.
“내가 아는 그자라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그가 가지고 있는 재력과 권력, 그거면 못할 게 없지.”
“저는 사람을 함부로 의심하고 싶진 않습니다. 확인해 보고 다시 연락드리겠습니다.”
마영준이 급하게 일어서는 서인우의 팔을 잡았다.
“서인우. 정신 차려. 오늘이 토요일인데...어디 가서 그자를 만나겠다는 거야?”
순간 서인우가 핸드폰을 열어 날짜를 확인했다.
“주말 동안 어떻게 대처할지 잘 생각해 보고, 철저하게 계획을 세워서 만나도록 해. 그래도, 이기기 어려운 상대야.”
“죄송해요. 내가 순간 너무 흥분했었나 봐요. 주말이라는 것도 잊어버렸어요.”
“그럴 수 있어. 나라면 더 했을 거다. 주말 동안에도 계속 전화해 보고, 월요일에 당장 회사로 찾아가면 만날 수 있을 거야.”
“네, 그렇게 하려고요. 감사합니다, 선배님.”
서인우가 자리에서 일어서자 따라 일어선 마영준이 두 손으로 어깨를 힘주어 잡았다.
“힘내고, 뭐든 도울 일 있으면 말해. 그럴 게 아니라, 월요일에 같이 갈까?”
“아닙니다. 혼자 다녀올게요. 감사합니다.”
답답하고 분노가 치밀어오르는 마음을 가까스로 잡아두며 요리를 다시 시작했다.
주말 내내 서인우는 잠도 거의 못 자고 풀리지 않는 의문에 머리가 지끈거렸다.
월요일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다른 때보다 두 배는 더 되는 거리를 전력으로 달렸다.
답답하고 복잡한 생각을 좀 털어보려 했지만, 쉬운 일이 아니었다.
깔끔하게 옷을 챙겨입고, 지나가는 택시를 잡아탄 서인우의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강남에 자리한 [만가복] 본사 건물 앞에 내린 서인우는 높은 건물을 한참 올려봤다.
‘정말 김형식 회장이 그런 짓까지 했을까?’
달리는 택시 안에서도 오직 그 생각뿐이었다.
마영준이 자신의 핸드폰에 저장된 번호를 확인시켜줬지만, 믿을 수는 없었다.
크게 숨을 들이켠 후 마영준이 확인해 준, 계약서에 있는 그 번호로 다시 한번 전화를 걸었다.
여전히 핸드폰은 꺼져 있었다.
이제 직접 만나서 확인하는 것밖에 방법이 없었다.
로비로 걸어 들어가 1층 안내 데스크로 향했다.
“안녕하십니까? 어디 찾아오셨나요?”
안내 여직원이 상냥한 미소와 함께 물었다.
“안녕하세요. 김형식 회장님 좀 만나러 왔습니다.”
“약속은 하셨나요?”
“아니요, 전화기가 꺼져 있어서요. 저는 [서풍]의 서인우 라고 합니다. 연락 부탁드립니다.”
“잠시만요.”
안내 직원이 내선 전화를 들고 누군가와 짧게 통화를 했다.
내용을 듣자 하니 회장실 비서인 듯 보였다.
“지금 비서실에 연락했습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감사합니다.”
서인우가 데스크에서 좀 떨어져 기다리고 있는 모습을 여직원 둘이 쳐다보며 작은 소리로 중얼거렸다.
“방송에 나왔던 그 사람 맞지? 무슨 고수인가 뭔가 하는?”
“맞는 것 같아요. 실물이 더 잘생겼네. 혹시 우리 회장님이 스카우트 제안이라도 하셨나?”
“꺅, 그럼 우리 매일 볼 수 있을 수도 있겠다. 저렇게 하드웨어 소프트웨어가 다 완벽한 사람은 하루라도 빨리 채가야지. 우리 회장님 역시 돈 냄새 하나는 끝내주게...”
전화벨이 울리자 방금 얘기하던 여직원이 전화를 받았다.
잠시 후.
“지금 회장님이 회의 중이시라는데요, 30분 정도 걸리는데 기다리시겠냐고 하시네요.”
어차피 자리에 없을 수도 있다고 생각하고 온 걸음이다.
오늘 무슨 일이 있어도 확인하고 돌아갈 거다.
“알겠습니다. 기다리겠습니다.”
서인우가 주위를 두리번거리다가 입구 쪽에 마련되어 있는 긴 벤치에 앉았다.
실내까지 에어컨이 세게 나오고 있어서 덥지는 않았다.
[안녕하세요, 아저씨. 제가 오늘 급한 일이 있어서 어디 좀 나왔습니다. 아무래도 오늘 늦게 들르거나, 다음에 가야 할 것 같아요. 다시 연락드리겠습니다.]
[양자강]의 최영만에게 문자를 보내고 급하게 들어오느라 자세히 보지 못했던 로비를 천천히 살폈다.
겉모습도 화려했지만, 실내 장식이며 직원들 분위기가 멋스럽게 세련돼 보였다.
시간을 아끼려 핸드폰으로 [서풍 TWO]가 위치한 곳 주변에 마땅한 가게를 검색했다.
며칠 전까지는 새로운 주인한테 어떻게 부탁해야 간절한 진심이 통할지만 밤새 고민했다.
하지만, 그 새 주인이 김형식일 수도 있다는 걸 안 이상 지금은 현명한 대안을 세워야 했다.
이것저것 찾아보느라 얼추 30분이 흘렀다.
조금 전 전화 통화를 했던 안내 직원이 서인우를 향해 다가왔다.
드디어 김형식을 만날 시간인가보다.
자리에서 일어나는 서인우를 바라보는 여직원이 어쩔 줄 몰라 하는 모습으로 입을 열었다.
“저, 방금 회장님 비서실에서 연락이 왔는데요, 1시간 정도 더 기다리셔야 할 것 같다고 합니다. 아무래도 회의가 길어진 것 같아요.”
“알겠습니다. 기다리겠다고 전해 주십시오.”
뒤돌아 돌아간 여직원이 옆에서 지켜보던 직원에게 뭐라 계속 말하는 것 같았다.
가게에 자리가 없어도 기다려 주던 고마운 손님들이 떠올랐다.
하지만, 오늘 만나서 해결하지 않으면 그 손님들을 한참 동안 못 보게 될 수도 있었다.
이를 꾹 악물고 기다렸다.
시간은 더디게 갔지만, 그래도 흐르고 있었다.
직원이 말한 1시간이 지나고 데스크로 향한 서인우에게 난처한 표정을 감추지 못한 직원이 아직 회의 중임을 알렸다.
“죄송합니다. 지금 회의 중인 건 확실한가요?”
“네?”
“보통 회장님까지 함께 한 회의라면 거의 보고 일색일 텐데, 이렇게 시간이 지연되는 경우가 흔한가 해서요.”
“죄송합니다. 저희는 연락받은 대로 전해드리는 거라서요.”
이 직원들인들 알 방법이 있을까?
위에서 한마디 던져 놓으면 그대로 따라야 하는 처지 일텐데...
정말 회의가 길어지는 건지, 일부러 피하는 건지 알 수는 없었다.
“그럼 얼마나 더 기다려야 하는지 여쭤봐 주십시오.”
“네, 다시 연락해보겠습니다.”
여직원이 내선 전화를 연결하려던 순간에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차성철 팀장과 유현주 대리가 서인우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방송을 모니터하면서 내내 지켜봤던 데다가, 회장님을 모시고 직접 가게까지 갔던 차성철이 얼굴을 바로 알아보고는 안내 데스크로 다가갔다.
“무슨 일이에요?”
옆에 서 있던 유현주가 서인우를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지금 이분이 회장님을 만나 뵙고 싶다고 오셨습니다.”
“그런데요?”
“회장님이 회의가 길어지셔서 두 시간 째 기다리고 계십니다.”
회의라는 말에 차성철의 눈썹이 살짝 꿈틀거렸다.
“저...서인우 씨 맞죠?”
유현주가 마치 어릴 적 친구라도 만난 것처럼 반가운 얼굴로 물었다.
“네, 서인우라고 합니다.”
“지난번 방송 너무 잘 봤어요.”
“감사합니다.”
“그나저나 [서풍]의 서동수 사장님 아들이 [만가복] 회장님을 만나러 오신거면...이건 무슨 의미일까요?”
유현주의 호들갑에 차성철이 인상을 구겼다.
“약속을 안 하고 오신 겁니까?”
차성철의 질문에 서인우가 차분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핸드폰 전원이 계속 꺼져 있어서요.”
차성철이 입꼬리를 살짝 틀어 올리며 들릴 듯 말 듯 한 웃음소리를 내보냈다.
“회장님은 일년내내 핸드폰을 꺼두신 적이 없습니다. 이런 큰 기업을 운영하는 회장님 핸드폰이 꺼져 있다는 게 말이 됩니까?”
순간 서인우의 눈빛이 매섭게 변했다.
“당신들이 모르는, 아니 절대 알면 안 되는 다른 핸드폰이라면 가능하지 않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