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9화.
가게에 있는 손님들이 죄다 일어서서 입구 쪽을 보느라 정신이 없었다.
갑자기 소란스러운 소리에 주방을 나온 서인우가 무슨 일인지 어리둥절해 하고 있었다.
입구에서 한참 사진을 찍던 여자가 얼굴의 반을 가리고 있던 모자를 벗어 앞에 있는 남자에게 주고는 다시 사진을 찍기 시작했다.
그 여자가 모자를 벗는 순간 가게 안에는 그야말로 탄성이 쏟아졌다.
서인우가 반쯤 얼이 빠진 듯한 이준형에게 다가가 물었다.
“뭔데? 왜 갑자기 이렇게 소란스러워진 거냐?”
“넌 눈 없냐? 지금 우리 가게에 누가 왔는지 안 보여?”
“저기 입구에 사진 찍고 있는 여자? 저 사람이 유명해?”
이런...
목소리가 컸다.
순간 사태가 심각하다는 걸 깨달은 이준형과 정다운이 슬그머니 서인우의 곁에서 멀어졌다.
“준형아. 왜 자꾸 그쪽으로 가고 그래? 저 사람이 누군데?”
사진을 찍고 가게 안으로 들어온 여자가 서인우 앞에 얼굴을 바짝 가져왔다.
“나 정말 몰라요?”
“아, 우리가 아는 사이...”
“헐.”
가까이에서 본 여자는 그냥 살아서 숨 쉬는 인형 같았다.
정말 구슬같이 동그랗고 커다란 눈동자와 그에 딱 어울리는 길고 큰 눈, 그 위에 기다랗게 늘어진 눈썹은 말할 때마다 눈의 반을 가렸다.
게다가 뽀얀 피부에 오뚝한 콧날과 도톰한 입술, 무엇보다 놀라운 건 그 모든 게 서인우의 손바닥보다 더 작은 얼굴에 다 들어있다는 거였다.
‘흔한 미모는 아닌데...이런 미모의 여자와 아는 사이일 리가...’
서인우는 계속 실수하지 않으려고 그 여자가 누군지 생각하려 애썼다.
“혹시 제 방송 보셨어요?”
“그럼요, 그래서 오늘 와본 건데요?”
“아, 그렇군요. 제가 방송에 몇 번 나와서 아는 사람으로 착각할 수도 있어요. 괜찮습니다.”
서인우가 깍듯하게 인사하며 세상 자상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결국 그대로 놔뒀다간 소송이라도 걸릴 것 같은 불안함에 이준형이 나섰다.
“아이돌 그룹 [트리플]의 제이 씨 맞으시죠?”
이준형의 뒤에서 연신 사진 찍느라 바쁜 손님들이 또다시 괴성을 질러댔다.
“꺅, 어떻게.”
“어쩌면 사람이 이렇게 예쁠 수가 있어? 저 피부 좀 봐.”
몇몇 손님은 사진 촬영을 요청했다.
“저 너무 팬이에요. 사진 한 장 남겨도 될까요?”
“네, 감사합니다.”
밝은 미소와 함께 고개를 살짝 기울인 제이가 손 브이를 그리며 사진을 찍어 주었다.
그러자, 망설이고 있던 손님까지 우르르 몰려와 사진 촬영을 요청했다.
“죄송해요. 저 오늘 한 끼도 못 먹어서 너무 배고픈데, 뭐 좀 먹고 찍어드리면 안 될까요?”
그제야 손님들이 제자리로 돌아가 소란이 조금 가라앉았다.
이준형의 뒤에 바짝 붙은 서인우가 제이를 흘낏 쳐다보고는 작은 소리로 물었다.
“그럼 저 여자분이 가수라는 얘기야?”
“그냥 가수 아니라 엄청 유명한 아이돌 가수. 너 정말 얼굴 못 알아보겠어?”
“나 텔레비전 잘 안 보잖아. 아이돌이면 소녀시대, 뭐 그런 가수라는 얘기지?”
이준형이 잽싸게 서인우의 입을 틀어막았다.
“뭐? 무슨 시대? 넌 도대체 연세가 어떻게 되세요?”
“아니, 내가 아는 연예인이 워낙 없어서...”
제이가 성큼성큼 다가와 물었다.
“저기 빈자리에 앉으면 되나요?”
이준형의 벌어진 입에서 침이 떨어질 듯 불안해 보였다.
“네, 자리 안내해드리겠습니다.”
이준형과 서인우를 번갈아 쳐다보던 정다운이 제이와 같이 온 남자, 그렇게 둘을 빈 테이블로 안내했다.
“메뉴 보시고 천천히 주문해 주세요.”
“여기 셰프님께 직접 주문해도 되죠?”
“그럼요. 사장님!”
정다운이 주방으로 들어가려던 서인우를 불러세웠다.
“좀 전에 못 알아봐서 죄송합니다. 우리 가게를 찾아주셔서 영광입니다.”
“정말요? 진심으로 영광인가요?”
“네?”
“맞죠? 아직 내가 누군지 모르는 거죠?”
“유명한 아이돌 가수라고 들었습니다.”
“들었다고요? 실물을 보고 너무 예뻐서 못 알아본 게 아니라, 진짜 내가 누군지 몰라서 못 알아봤다는 거예요?”
서인우가 얼른 대답을 내놓지 못했다.
“혹시 어디 인터넷도 안되는 오지에 살다 오셨나요? 오빠, 대한민국에서 나를 못 알아보는 사람이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해?”
매니저인듯한 남자가 다문 입 사이로 바람 빠지는 듯한 웃음소리를 내보냈다.
“요즘 젊은 사람들 텔레비전 전혀 안 보는 사람 많아. 배고프다, 주문부터 빨리하자.”
여자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요상한 포즈를 취하며 짧게 노래를 흥얼거렸다.
“우와! 멋있어요.”
“예쁘다. 우유빛깔 제이!”
다른 테이블에서는 난리가 났는데, 정작 서인우만 계속해서 뒷머리를 쓸어내리고 있었다.
얼굴에는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이래도? 이래도 몰라요?”
“압니다. 아이돌 가수 제이씨. 오늘부터 정확하게 알아요. 딱 기억해두겠습니다.”
“흥!”
큰 눈으로 살짝 노려보는 듯하더니 다시 봄 햇살처럼 밝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알았어요. 오늘부터 기억해 주세요.”
“네, 감사합니다.”
그새 메뉴판에 코를 박고 보던 제이가 심각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왜? 너 또 못 고르고 있는 거야?”
“분명 도착할 때까지 백 짬뽕 먹을 생각이었는데, 갑자기 홍짬뽕이 눈에 아른거리네. 오빠는?”
“그럼 백 짬뽕 하나, 홍짬뽕 하나 시키자.”
“좋아, 그리고 양장피 먹어봐야겠지?”
“그래야지. 난 사실 그거 먹으려고 왔는데.”
“셰프님, 우리...”
“네, 백 짬뽕하나 홍짬뽕 하나 그리고 양장피 하나. 세상에서 가장 맛있게 만들어 올리겠습니다.”
“좋았어. 고마워요.”
주방으로 들어온 서인우가 막 짬뽕 재료를 손질하려고 할 때였다.
갑자기 중식도가 움직이지 않았다.
“사부, 왜 이러지? 안 움직이는데?”
-당연하지. 내가 안 움직이니까.
“그러니까, 왜? 지금 급하단 말이야.”
-너 나랑 약속했지?
“뭘 말이야?”
-예쁘냐? 너 혼자 보니까 좋냐?
“아!”
서인우가 픽 웃고는 바로 말을 이었다.
“그 어느 때보다 맛있게 만들어 보자고. 음식 가지고 나갈 때 사부랑 같이 나갈 거니까.”
-그렇게 나와야지. 오케이. 오늘 내가 본때를 보여주겠어.
그 말과 동시에 중식도가 서인우의 눈에도 보이지 않을 정도로 재빠르게 움직였다.
그런데도 모든 채소와 해물이 일정한 간격에 정확한 모양을 내고 있었다.
-자, 이제 식감 최대한 살리게 볶아서 접시에 가지런히 담으면 양장피 완성. 빨리하고 나가자고!
쟁반에 양장피와 소스를 담고 앞치마 주머니에 중식도를 푹 찔러 넣은 후 홀로 나섰다.
“손님, 주문하신 양장피 나왔습니다.”
제이와 매니저가 잔뜩 기대에 찬 눈으로 서인우의 다음 동작을 기다리고 있었다.
소스를 휙 부으며 재빨리 섞어 준 후 다시 인사를 꾸벅하고 뒤돌아서는데 벌써 감탄하는 소리가 들렸다.
“대박! 이건 기대 이상이야. 너무 맛있는 거 아니야? 나 오늘은 조절 안 할 거야. 이거 먹으려고 일주일 샐러드만 먹었다고.”
“응, 응. 말 시키지 마. 나 바빠,”
입에 양장피를 가득 넣은 매니저가 제이를 쳐다보지도 않고 대답했다.
씨익 웃고 다시 주방으로 들어가려는데 사부의 소리가 자꾸 들려왔다.
‘왜? 봤잖아?’
-좀 더 있다가 들어가자. 다 먹고 살자고 하는 일인데, 뭐 급할 게 있다고.
‘두 가지 짬뽕 만들어야지?’
-저 사람, 아니 사람 아니지? 저 눈에 풍덩 빠져서 헤엄치고 싶다. 딱 보니까 양장피 먹는 데도 오래 걸릴 것 같으니까, 조금만, 응? 아앙.
언제 연습했는지 어울리지 않는 콧소리까지 내는 바람에 웃음을 참기 힘들었다.
급하게 주방으로 들어온 서인우가 앞치마 주머니에 넣어둔 중식도를 꺼내 들었다.
“짬뽕 만들어서 또 가지고 나가자. 그땐 한쪽에 서서 지켜볼 테니까. 됐지?”
-뭐해? 빨리 안 만들고.
신이 난 중식도가 재료를 손질하는 모습이 마치 춤을 추는 것 같았다.
* * *
깜깜한 한강 변에 고급 승용차가 한 대 멈춰있었다.
기사로 보이는 남자가 멀찍이 서서 망을 보고 있었고, 뒷 좌석에 김형식과 다른 남자 하나가 심각하게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그 노인네가 고집이 보통이 아닙니다. 젊은 사람 앞길을 막을 수 없다고 워낙 완고했어요.”
“그래서? 못하겠다는 말이야?”
“그럴 리가요. 회장님 지시라면 무조건 성사시킵니다.”
이제야 좀 맘에 든다는 듯이 김형식의 미간이 살짝 펴졌다.
“그 노인네, 목에 칼이 들어와도 계약을 지켜야 한다고 하더니, 서울에 사는 딸 얘기에 바로 겁을 먹더라고요.”
“누구나 자식이 약점이지. 계속해봐.”
“그 딸이 사는 집 주소와 아이들 학교를 얘기했더니 벌벌 떨면서 그제야 주저앉지 뭡니까?”
김형식이 피식 비릿한 웃음을 내놓았다.
“그럼 계약은 성사된 건가?”
“위약금 넉넉히 쳐서 매입한다고 했습니다. 오늘 계약서에 도장 콱 찍었습니다.”
남자가 납작한 가죽 가방에서 서류를 꺼내 보였다.
가게 이름과 주소, 매도인, 매수인만 빠른 눈길로 확인한 김형식이 조금 전보다 더 큰 웃음을 지어 보였다.
“허허, 까불다가 꼴 좋게 됐어. 경고했을 때 분수를 알고 납작 엎드렸어야지.”
“그러게 말입니다. 멍청한 새끼가 제 무덤을 판 거죠.”
“그럼 그 가게는 이번 달 25일이 마지막이겠군. 정확히 일주일 후면 재미있는 구경거리가 생기겠어.”
“네, 졸지에 가게는 문 닫고 손님들 원성이 장난 아니겠죠. 방송에서 앞으로 열심히 하겠다고 떠들어 댄 게 있으니까요.”
“미련한 놈.”
남자가 덩달아 실실 웃어댔다.
“입단속 철저히 해!”
“그건 걱정하지 마십시오. 물에 빠지면 이 입이 무거워서 가라앉을 사람입니다. 제가.”
“허풍은. 알았으니까 가봐!”
“네.”
대답은 내놓고 차 문을 열지 않고 망설이고 있는 남자에게 김형식이 옆에 있던 누런 봉투를 툭 던졌다.
“감사합니다. 그럼 바로 사라지겠습니다.”
차 문을 열고 나가는 남자를 보며 김형식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비열한 새끼. 돈이라면 뭐든 하는 거 모를 줄 알고, 어디서 충직한 척 까불고 말이야.”
멀찍이 떨어져 서 있던 기사가 차 문을 열고 운전석에 앉았다.
“출발할까요, 회장님?”
“그러지.”
“어디로 모실까요?”
잠시 고민하는 듯하던 김형식이 룸미러를 통해 기사를 쳐다봤다.
“서초동 아기한테 가지.”
“네, 알겠습니다.”
계약이 성사돼서인지, 며칠 바빠서 못 만난 애인을 만나게 돼서인지 김형식의 볼이 실룩거렸다.
* * *
아이돌 가수 제이가 다녀간 다음 날부터 [서풍TWO]는 대기하는 사람이 더 많아졌다.
“사장님, 우리 빨리 돈 벌어서 가게 늘려야겠어요. 기다리시는 손님들이 너무 많아요.”
“그러게. 왜 이렇게 사람들이 더 많아진 거지?”
“모르세요? 최고 인기 가수 제이가 여기 다녀온 사진이랑 음식 사진 올려서 지금 인터넷의 난리잖아요.”
“그런 일이 있었어?”
정다운이 또 짝다리에 고개를 비스듬히 하고는 한숨을 푹 쉬었다.
“사장님은 도대체 텔레비전도 안 보고 인터넷도 안 하고 뭐 하는 사람이에요? 혹시 과거에서 왔어요? 도민준이야?”
“응? 도 누구?”
“헐...”
옆에서 듣고 있던 이준형이 정다운의 어깨를 툭툭 치며 말했다.
“그냥 저놈은 다운 씨 아버지다, 아니 할아버지라 생각해. 맨날 예의가 어쩌고, 사람 사는 도리가 어쩌고 그런 소리만 하는 놈이니까.”
“정말 이게 아까워요.”
정다운이 손으로 얼굴을 위아래로 움직이며 가리켰다.
“비쥬얼은 아이돌 가수나 모델 뺨치게 생겨서 어쩌면 이렇게 고리타분한지.”
점심 장사 준비를 하며 한참 수다를 이어가고 있던 [서풍 TWO]의 문이 드르륵 열렸다.
“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