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8화.
“우리 가게도 여기 [서풍TWO]와 똑같이 입구를 바꾸면 어떨까 하는데, 원조 사장님들한테 먼저 물어보려고 왔어.”
햄버거를 잔뜩 베어 물어 말할 공간이 빨리 만들어지지 않는 이준형이 급하게 음료와 함께 덩어리를 꿀꺽 삼켰다.
“우리가 한 인테리어 업자 소개해달라는 말씀이신 거죠?”
“그렇지, 이제 [셰프의 주방]이 아니라, [셰프의 주방 × 서풍] 이니까 컨셉을 같이 해서 통일감을 주는 게 좋을 것도 같고.”
“물론이죠. 그 인테리어 사장 내가 바로 소개해 줄 수 있어요. 공사할 때도 내가 가서 도와주도록 하겠습니다.”
정다운의 눈이 말했다.
‘뭐래? 이 정신 나간 아저씨가 지금 우리 가게는 내팽개치고 그 여자 따라간다고 말하는 거야?’
그걸 또 눈치챈 이준형이 덧붙여 말했다.
“우선 저희 인테리어 견적 보여드릴게요. 결정하시면 그때 제가 연락해서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그 어느 때보다 적극성을 보이는 이준형이 다시 햄버거를 엄청나게 크게 베어 물었다.
신나서 입이 더 찢어졌는지, 말 그대로 기염을 토해내고 있었다.
“서인우 생각은 어때? 입구를 똑같이 만들어서 통일감을 주는 거 말이야.”
“정말 좋은 생각인 것 같아요. 앞으로 [서풍]이라는 이름의 가게를 열 때마다 저 입구가 상징이 되는 거죠.”
“가게를 키워나가겠다는 자신감이 대단한데?”
“그럼요. 여기서 시작해 어디까지 뻗어나갈지는 장담 못 합니다. 선배님도 같이 키워나가셔야죠?”
마영준이 음료 잔을 들어 서인우의 잔을 부딪쳤다.
“좋지, 우리 한번 잘해보자고.”
“네, 파이팅입니다.”
마영준이 돌아가고 저녁 장사를 준비하면서 서인우가 현란한 솜씨로 양파를 썰고 있던 중식도를 순간 멈췄다.
-갑자기 왜 멈춰?
“사부, 여기가 우리 아빠 처음 장사했던 곳이라고 했잖아?”
-그렇다면서?
“그런데, 왜 사부는 기억을 못 해? 아빠와 함께한 모든 것을 기억하잖아.”
-서동수가 여기서 처음 시작했을 때는 내가 이 중식도에 깃들지 않았었어.
서인우의 표정이 심각하게 변했다.
“그게 무슨 말이야? 그럼 그때는 사부가 아닌 그냥 평범한 중식도였다고?”
-그렇다고 할 수 있지.
“그래? 아빠가 이 중식도를 처음 쥐게 된 날부터 사부와 함께했던 게 아니라는 얘기야?”
-난 어느 날 갑자기 이 중식도에 깃들게 됐지. 지금도 그날이 생생하게 기억나.
팔짱을 끼고 마른침을 연거푸 삼킨 서인우가 중식도를 다시 유심히 관찰했다.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지? 그게 말이 돼?”
-내가 움직이고 말하는 건 말이 되냐?
“그렇긴 한데...”
-내 능력이 어떻게 깃들게 됐는지, 서동수가 나를 어디서 처음 만나게 됐는지는 나는 모른다. 뭔가 주문이 들어가 있었던 게 아닌가 하는 생각만 할 뿐.
“주문이라고?”
중식도가 빙그르르 돌더니 순간 멈췄다.
-서동수한테 들은 건 중국에서 요리 배우던 시절에 그 사부한테 상으로 받은 거라는 게 전부야. 나를 상으로 받으려면 최소한 나라 정도는 구해야 하는건데...서동수가 나라를 구한 것 같진 않더라고.
중식도의 얘기를 들을수록 궁금증은 더해만 갔다.
이모든 스토리를 알고 있는 사람, 바로 [양자강]의 최영만 아저씨를 빨리 만나봐야겠다는 생각만 가득했다.
서인우는 바로 핸드폰을 꺼내 전화를 걸었다.
“아저씨, 잘 지내셨어요?”
-그래, 방송 잘 봤다. 그동안 마음고생 많이 했지?
울컥하는 걸 억지로 참는듯한 음성이 들렸다.
“손님들이 조금씩 믿어주고 찾아주기 시작했어요. 이제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정말 다행이다. 걱정돼서 핸드폰만 만지작거렸었다.
“안 그래도 이번 휴일에 아저씨 찾아뵈러 가려고요. 시간 괜찮으세요?”
-그럼, 나랑 휴무일이 같으니까 얼마든지 시간 낼 수 있지.
“알겠습니다. 그럼 월요일에 다시 연락드릴게요.”
-그래, 몸 상하지 않게 잘 챙겨 먹고.
“네, 감사합니다. 아저씨도 건강 잘 챙기시고 월요일에 봬요.”
-그러자.
서인우가 핸드폰을 다시 앞치마 주머니에 넣고 중식도를 손에 들었다.
-아빠 친구지? 삼인방 중 한 명?
“응, 이 아저씨가 아빠가 어떻게 사부를 만나게 됐는지 알고 계신 것 같았어.”
-나도 궁금하군. 같이 갈까?
“됐어. 내가 다녀와서 자세히 알려줄게.”
-치, 나도 맨날 이 좁아터진 주방에만 있으니 답답하다고. 가끔 홀에도 가지고 나가지. 오늘도 지들만 햄버거 먹고.
“뭐?”
서인우가 소리를 내 웃다가 입을 막았다.
“어차피 사부는 먹지도 못하는데?”
-난 눈으로 먹어. 전문용어로 눈요기하고 하지.
“알았어. 다음엔 뭐든 사부 보여줄 게 있으면 내가 슬쩍슬쩍 들고 나갈게.”
-내가 그 말 지키는지 딱 보고 있을 거야. 명심해!
대화를 마치고 경쾌한 도마 소리를 내며 저녁 장사 준비를 마무리했다.
5시가 조금 넘어가면서 주문이 하나둘 들어오기 시작했다.
주방에서 달콤 짭조롬한 짜장소스 냄새와 얼큰한 짬뽕 냄새가 쉬지 않고 풍겼다.
“사장님! 먹물 만두 얼마나 남았어요? 방송 때문인지 찾는 사람이 많네요.”
서인우가 만들어놓은 만두를 확인하고는 바로 알렸다.
“점심때 이미 많이 나가서 이제 6인분 남아있어.”
“알았어요. 정말 포장 판매라도 해야 할까 봐요.”
말하는 정다운의 얼굴이 신이 난 듯 살짝 상기되어 있었다.
정다운이 남긴 말을 곰곰이 생각하고 있는 서인우 앞에 중식도가 빙그르르 돌았다.
-아니야. 바람직한 생각이 아니라고.
“응?”
-너 지금 먹물 만두 포장 판매를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잖아.
“맞아. 오늘 퇴근하고 좀 만들어서 급냉 시켜봐야겠어. 내일 아침에 먹어보고 포장 판매를 좀 더 계획해 봐야 할 것 같아.”
-그냥 나한테 죽으라고 해. 너 지금 나 믿고 너무하는 거 아니냐?
서인우가 픽 웃었다.
“최형만 아저씨 만나러 갈 때 가방에 넣어 가볼까?”
-어쭈? 지금 나랑 거래하자는?
“결국 해줄 거면서….”
-서동수가 나라를 구한 게 아니라, 네가 전 세계를 구했나 보다. 운 좋은 녀석 같으니라고.
“사부를 만난 건 정말 이번 생에 가장 큰 행운이지. 난 평생 감사하며 살 거야.”
중식도가 서인우의 뒤쪽으로 슬며시 움직였다.
“왜 또?”
-너 혹시 꼬리 있나 해서. 그저 순진하고 착하기만 한 놈인 줄 알았더니. 요거요거 아주 여우야.
“난 감사한 일, 슬픈 일, 기쁜 일 다 표현하며 살 거야. 특히, 감사한 일은 반드시…. 다시는 아빠 때처럼 후회할 일은 만들지 않을 거야.”
-얘가 또 나를 약해지게 만드네. 알았어. 뭐든 해보자고.
“그래. 고마워, 사부.”
서인우는 새로 걸린 주문지를 확인하고는 냉장고에 재어둔 돼지고기를 꺼내 탕수육 만들 준비를 했다.
튀김 기름이 끓기 시작하자 재워둔 고기를 튀김 반죽에 담갔다가 재빨리 넣어 튀겨냈다.
주방에 고소한 냄새가 진동했다.
다른 웍에 소스를 만들어 방금 튀긴 고기를 넣어 휙 빠르게 볶았다.
완성된 탕수육을 접시에 옮겨 벨을 누르자 정다운이 금세 와서 가져갔다.
사부와 서인우, 그리고 이준형과 정다운이 만들어 내는 환상의 팀워크는 그야말로 흠잡을 것이 없었다.
손님이 끊이지 않고 들어오기 시작하더니, 다시 전처럼 대기하는 손님마저 생겼다.
특히 [서풍 TWO]의 새로 만든 입구가 젊은 사람들 사이에 포토존으로 유명해지면서 서인우를 비롯한 직원 모두 행복한 비명을 질러댔다.
방송을 봤다는 사람부터, 언제 올렸는지 정다운이 인터넷에 올린 장면을 보고 찾아왔다는 사람까지 모두 인생 사진을 남긴다면서 우르르 찾아오기 시작했다.
“다운 씨는 제시카 씨도 별로 안 좋아하면서 저기 사진은 언제 올린 거예요?”
“나 어려도 공과 사는 구분하거든요? 우리 가게가 잘돼야 내 월급도 오를 거니까. 아니, 사장님이 올려준다고 약속했으니까 더 당당하게 받으려고요.”
방금 손님이 나간 테이블을 정리하면서 말하는 정다운이 든든하다는 생각을 하며 이준형이 마지막으로 대기하고 있는 손님을 불렀다.
“이제 대기 손님 더 없죠?”
“그럼, 벌써 8시가 넘었어.”
주문을 받아 주방 앞에 걸어놓고 카운터에서 정리를 하고 있던 이준형의 핸드폰이 울렸다.
“여보세요.”
-통화할 시간 되지?
“아, 마 셰프님. 말씀하세요.”
-전에 말한 인테리어 회사 소개 좀 해달라고. 요즘 그 가게가 포토존으로 화제라면서?
“네, 인테리어 사장님 감각이 제대로 통했어요. 요즘 유행이 레트로 아닙니까?”
-그래, 내가 보기에도 근사하더라고. 언제든 오전이나 점심 장사 후 쉬는 시간에 들러 달라고 하려고. 내가 직접 전화하는 게...
이준형이 다급하게 말을 잘랐다,
“제가 전화해서 대략 얘기하고 셰프님 전화번호 알려줄게요. 아예 약속을 잡을 수 있으면 그렇게 하고요.”
-그게 낫나?
“그럼요, 내가 딱 전화해서 소개해줘야 더 믿고 잘해주죠.”
-그렇겠다. 알았어. 그럼 준형 씨한테 부탁 좀 할게.
“네, 감사...아니 알겠습니다.”
통화를 마친 이준형이 바로 핸드폰의 연락처를 스캔했다.
제시카의 이름을 찾자 목을 가다듬고는 통화 버튼을 눌렀다.
“여보세요.”
-아! 안녕하세요? 잘 지내시죠?
“그럼요, 제시카 씨 덕분에 우리 가게가 요즘 젊은 사람들 사이에 아주 인기가 많아졌어요.”
-그래요? 정말 다행이에요. 음식점이야 맛을 찾아가는 거겠지만, 제가 한 인테리어에 대한 칭찬으로 받아들이겠습니다.
이준형이 급히 손을 흔들었다.
“아니에요. 정말 제시카 씨가 꾸며준 입구가 포토존으로 유명해 졌다니까요? 그래서 전화 드린겁니다.”
-정말요? 감사합니다. 이럴 때 진짜 일할 맛 나거든요.
“그래서 말인데요, 여기서 10분 정도 거리에 마영준 셰프님이 하시는 퓨전 중식당이 있는데요.”
-아, 거기 알아요. 얘기 많이 들었어요. 한번 가서 먹어봐야지 했는데...
얼굴이 활짝 밝아진 이준형의 설명이 이어졌다.
“그 가게 이름이 [셰프의 주방 ×서풍] 이에요. 두 가게의 콜라보 같은 의미로 [서풍]이름이 들어가 있거든요.”
-그래요? 멋진데요?
“그래서 이제 본론을 말씀 드리자면, 거기 사장님이신 마영준 셰프님도 우리 가게와 똑같이 입구를 바꿔서 통일성 있는 컨셉으로 나가고 싶으시다네요.”
-정말요? 지금 저 대신 영업 해주신 거예요?
“전 아무것도 한 거 없어요. 마셰프님이 직접 보시고 선택하신 겁니다. 물론 제가 연결해 드리긴 했지만요.”
-감사합니다.
제시카와 통화만도 너무 행복한데, 감사 인사까지 받으니 다리에 힘을 꽉 주고 있지 않으면 하늘로 날아갈 것 같았다.
“제가 두 분 미팅하실 수 있게 약속까지 잡아 드리겠습니다. 빨리하시고 싶으신 듯한데, 언제 시간이 되세요?”
-내일은 다른 일이 있고, 모레 아무 때나 괜찮습니다.
“그럼 모레 오전 10시쯤 우리 가게로 오셔서 저하고 같이 가시면 되겠네요.”
-바쁘실텐데...제가 혼자...
“오전에는 서인우만 재료 손질하느라 바쁩니다. 전 아주 한가해요. 심심할 정도로 말입니다.”
-알겠습니다. 그럼 모레 시간 맞춰 갈게요. 감사합니다.
“네, 그럼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종료 버튼을 누른 이준형의 볼이 살짝 불그스름해졌다.
아까부터 통화 내용을 듣고 있던 정다운이 짝다리를 하고 서서 연신 콧방귀를 끼어대고 있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신이 난 이준형이 제시카와 통화 내용을 간략히 정리해 마영준에게 문자를 보냈다.
꽉 찬 테이블 한쪽에서 식사를 마친 손님이 계산하고 나가려고 문을 열었다.
그리고, 얼마 후 꺅하는 비명이 들렸다.
그와 동시에 가게가 갑자기 소란스러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