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7화.
오전 회의가 끝난 10시 30분, 아버지 김형식과 통화 했던 대로 비서를 통해 약속을 잡은 김서원이 회장실 앞에 멍하니 서 있었다.
“안에 계시죠?”
“조금 전에 회의 마치고 오셨습니다. 잠시만요.”
비서가 내선 전화로 김서원의 도착을 알렸다.
노크와 동시에 문을 열어준 비서가 웃으며 안으로 안내했다.
“감사합니다.”
딸이 도착했음에도 불구하고 계속 서류만 쳐다보고 있던 김형식이 돋보기 너머로 힐끗 쳐다보더니 다시 시선을 서류에 고정했다.
“아빠, 저 왔어요. 바쁘신가 보네요?”
“그럼, 내가 너처럼 한가할 줄 알고? 잠시 앉아있어. 이것만 검토하고.”
어디서 미운 말 학원이라도 다녔나?
어쩌면 그렇게 있던 정도 떨어지게 말을 하는지...
김서원은 이미 알고 있는 아빠의 성격이지만, 요즘 들어 더 아쉬움이 커지는 게 사실이었다.
매서운 눈매로 서류를 노려보는 아빠를 쳐다보다 문득 서인우가 내려주는 커피가 마시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갑자기 그 남자 커피가 왜 생각나는 거지?’
너무 뜬금없는 머릿속 반응에 피식 웃음을 내보였다.
“뭐 신나는 일이라도 있냐? 나한테는 생전 보여준 적 없는 미소를 짓고 말이야.”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냥 혼자 엉뚱한 생각 하고 있었어요.”
돋보기를 벗어 서류 위에 올려놓은 김형식이 소파로 다가와 앉았다.
“그래, 도대체 요즘 어디서 뭐 하고 다닌다는 게냐? 회사는 언제부터 나올 생각이고?”
“어제 박정원의 동네 식당 보셨죠?”
“내가 그리 한가한 줄 알아? 그런 구멍가게 나오는 프로그램을 보고 있게?”
“아빠랑 25년이에요. 이제 나도 척하면 안다고요. 분명 [만가복]과 가까운 곳에 있는 중식당인데다가, 그 사장이 오빠랑 같이 경쟁한 요리 대회에서 최종 우승자라면서요?”
김형식이 미간에 주름을 잡으며 김서원을 쳐다봤다.
“그래서?”
“아빠가 관심을 안 가질 수 없다는 거죠. 게다가 그 사장 아버지가 아빠 친구분이시잖아요? 서동수 아저씨.”
서동수라는 이름이 나오자 김형식의 미간 주름이 아예 깊은 골을 만들었다.
슬쩍 아빠의 기분을 살핀 김서원이 바로 대화를 이어갔다.
“그 가게 입구가 달라지지 않았나요? 아빠도 그 전에 분명 가보셨을 거 아니에요?”
“그래, 아주 쓰러져 가는 후진 구멍가게 던데...무슨 말이 하고 싶어서 이렇게 서론이 길어?”
“이번에 새로 바뀐 [서풍 TWO]의 입구 보셨죠? 레트로한 분위기에...”
“계속 쓸데없는 소리 할 거면 차팀장 부를 테니까 회사 일이나 배워!”
“내가 했다구요.”
김서원이 급하게 말을 내놓았다.
“뭐를? 뭘 네가 했다는 거야?”
“그 [서풍 TWO]의 입구 인테리어 말이에요. 그게 내 작품이라고요!”
김형식의 얼굴에 얼핏 놀라는 기색이 보였다.
감정의 변화가 바로바로 얼굴에 나타나지 않는 사람인지라 눈에 띄는 변화는 아니었지만, 유심히 지켜본 김서원의 눈에는 분명 놀라는 모습이 느껴졌다.
“피아노를 전공한 네가 인테리어를 했다는 거냐? 그것도 서인우 그놈이 하는 가게를?”
“네, 사실 독일에서부터 인테리어 공부를 계속했었어요. 피아노는 엄마가 원한 거였지, 난 어려서부터 인테리어 일을 하고 싶었다고요. 전혀 관심 없으셨겠지만...”
김형식의 입이 굳게 다물어졌다.
뭔가 깊이 생각에 잠긴 듯 한참을 앞에 놓인 찻잔만 바라보고 있었다.
“알았다. 그럼, 우리 회사 신사업 팁에 자리 만들어 줄 테니 하고 싶은 인테리어 어디 실컷 해봐.”
“싫어요.”
“뭐?”
“저 집에서 독립한다고 했던 말 그냥 해본 소리 아니에요. 집도 일도 다 독립한다는 의미라고요.”
“으하하하.”
느닷없이 들리는 김형식의 웃음소리에 화들짝 놀란 김서원이 그 웃음의 의미를 찾기 위해 머리를 바쁘게 굴리고 있었다.
“내가 상원이 놈보다 너를 내 후계자로 생각하는 이유가 바로 이거다. 너는 야망이 있어.”
이게 무슨 소리인지?
예상치 못한 반응에 김서원이 고개를 갸웃하며 김형식을 바라봤다.
“독립하고 싶다? 이 아비의 이름이 아닌 네 이름으로 된 사업을 하고 싶다는 거 아니냐?”
“맞아요.”
“그럼 신사업 팀을 독립시켜서 네가 직접 운영해 볼 수 있게 해줄 테니까 응석 그만 부리고 기회 줄 때 기어들어 와.”
어쩐지 얘기가 순조롭게 잘 흘러간다 했더니...
그 과정에서 또 얼마나 많은 사람의 피눈물을 쏟게 할지 안 봐도 훤한 상황이었다.
그러면 그렇지 하는 표정의 김서원이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아빠! 아니, 회장님!”
“뭐가 더 필요해?”
“내 힘으로 사업을 만들고 키워 보겠다는 얘기에요. 회장 딸이라 거저먹는 인생 말고요.”
“미련한 소리. 남들은 못 가져서 안달인 기회를…. 잔소리 말고 하라는 대로 해!”
“아니요.”
김서원이 지갑을 꺼내 명함을 한 장 건넸다.
[바램 인테리어. 대표 김서원.]
“내 회사입니다. 귀국해서 정식 사업자 등록도 다 끝났어요. 이 회사 이름 잘 기억해두세요. 제가 꼭 성공해서 보여주겠습니다.”
“너 지금 이 말이 뭘 의미하는지 설마 모르는 건 아니겠지?”
“네, 충분히, 너무나도 잘 알고 있습니다.”
“후회 안 할 자신 있어?”
“그럼요. 후회 안 할 뿐 아니라 성공할 자신 있습니다.”
말을 하는 내내 김형식의 턱이 움찔거렸다.
뜻대로 되지 않는 상황에 어금니를 악물고 있는 듯 보였다.
“네가 굳이 가진 것을 포기한다면 말릴 이유는 없지. 알았으니까 나가봐!”
“다음에 집으로 갈게요.”
대답은 없었다.
“그럼 가보겠습니다.”
끝까지 눈길 한 번 주지 않는 김형식을 뒤로 하고 회장실을 나온 김서원은 5월이 다 가는데도 갑자기 훅 한기를 느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서풍TWO]의 백 짬뽕이 너무 먹고 싶어졌다.
건물을 빠져나와 보이는 택시를 바로 잡아타고 자기도 모르게 서인우의 가게로 향했다.
* * *
이게 방송의 위력인 건가?
아니면, 박정원의 능력일까?
바로 어제 방송이 나갔는데, 오늘 점심부터 손님이 하나둘 늘기 시작했다.
물론 방송 전부터 [서풍TWO]의 바뀐 인테리어를 좋아해 주는 손님들이 늘긴 했었다.
오랜만에 얼굴에 미소를 찾은 이준형이 홀에서 식사를 하는 손님들을 둘러보고 있었다.
“역시 투자가 답이야.”
“무슨 소리냐?”
“제시카 씨의 인테리어 덕분에 가게를 찾는 손님이 늘었잖냐? 역시 외모나 실력이나 능력자야.”
“흥!”
어디서 콧바람이 크게 일어 쳐다보니, 정다운이 입술 끝을 올린 채 이준형을 노려보고 있었다.
괜히 헛기침을 하고 난 이준형이 식사를 마치고 나가는 손님을 따라 카운터로 움직였다.
“맛있게 드셨어요?”
“뭐 여기야 맨날 맛있지. 어떻게 예전 [서풍]맛을 그대로 내는지 모르겄어. 참말로 신기하당께.”
“아들이 한다자녀. 손맛을 타고난 거여.”
“그런데 왜 자네 아들은 손재주가 없댜? 자네 재주 닮았으면 못 고치는 게 없을텐디.”
“아, 갸는 문과여.”
“그런 거여?”
계산하며 아저씨 둘이 나누는 얘기가 재미있었다.
“다음에 또 오세요. 안녕히 가세요.”
입구까지 쫓아나가 큰소리로 인사를 하는 이준형을 보니 이제 좀 신이 나나 싶었다.
영상이 퍼진 후로 손님이 뚝 끊어지자 세상 다 잃은 표정이더니...
결국 영상에 등장했던 남자는 찾지 못했다.
몇몇 모자를 쓴 손님이 있긴 했는데, 분위기는 완전 달랐다.
저녁 장사까지 쉬는 시간이 되자 허리를 쭉 펴며 스트레칭을 하고 있던 서인우의 핸드폰이 급하게 울어댔다.
“여보세요?”
-월세 총각 맞지?
“아, 네. 어르신.”
-장사는 잘 되고 있수? 이 음식 장사라는게 보통 힘든 게 아닌데...
“네, 열심히 하고 있습니다. 어르신도 잘 계시는 거죠?”
작은 체구지만 쩌렁쩌렁한 음성을 가지고 있던 주인 할머니의 목소리가 전처럼 크게 나오지 않았다.
“무슨 일 있으신가요?”
-아니, 별일 없어. 그냥 몇 개월 지났는데, 잘하고 있나 궁금해서...
“감사합니다. 덕분에 장사 잘하고 있습니다.”
-알았어. 그럼 끊어.
“네, 건강 잘 챙기세요.”
통화를 마친 서인우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멍하니 서 있었다.
“무슨 전화인데 그러냐?”
“여기 가게 주인 할머니.”
“왜요? 월세 올린다고 그래요?”
“아니, 그냥 장사 잘하고 있나 궁금해서 전화하셨다네.”
“놀랐잖아, 인마. 그런데, 네 표정이 왜 그래?”
뭔가 생각에 잠긴 듯 서인우가 여전히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또 갸웃거렸다.
“할머니 목소리가 별로 안 좋아서. 그리고, 갑자기 전화해서 가게 잘되는지 묻는 것도 좀 이상하고.”
“넌 별게 다 이상하다. 연세 많으시니까 목소리야 안 좋으실 수도 있고, 장사 시작한 지 좀 됐으니까 궁금할 수도 있지.”
“그런가?”
정다운이 팔을 걷어붙이는 걸 힐끗 본 이준형이 급하게 앞치마를 벗었다.
“오늘은 내가 나가서 햄버거 사 올게. 나 며칠 전부터 너무 먹고 싶었어.”
“내가 요리하려고 그랬는데...”
“미안하지만 다운 씨, 오늘은 양보 좀 해줘. 나 오늘도 못 먹으면 꿈에 햄버거가 날아다닐 거야.”
정다운의 얼굴이 살짝 고민하는 듯 보였다.
“다운 씨. 생각 너무 깊게 하지 마. 가끔 햄버거도 먹어주고, 김밥도 먹어주고 해야지. 혹시 알아? 그런 음식 먹다가 또 새로운 메뉴가 팍 떠오를지.”
“알았어요. 그럼 오늘은 햄버거로 정하죠.”
조심했어야 했는데, 이준형의 입에서 안도의 숨소리가 너무 크게 터져 나왔다.
“이건 무슨 의미죠?”
“응?”
“아, 드디어 햄버거를 먹게 됐다는 환희에 찬 소리지.”
흰자위를 들어내 말아 고민하는 듯했던 정다운의 눈이 다행히 뒤집히지 않았다.
이준형이 잽싸게 핸드폰에 깔린 앱으로 햄버거를 고르라고 들이밀었다.
이것저것 담고 있는데, 가게 문이 드르륵 열렸다.
“선배님, 안녕하세요?”
마영준이었다.
“쉬는 시간에 잠시 들렀어.”
“우리 햄버거 먹으려고 하는데, 하나 드세요. 뭐 좋아하세요?”
“오늘 특별식이야? 좋지.”
주문을 마친 이준형이 햄버거를 찾아온다고 가게를 나섰다.
자리에 앉은 마영준이 가게를 꼼꼼하게 둘러보았다.
“방송 봤어. 서인우는 역시 서인우다 라는 방송이던데?”
“네?”
“화면을 통해서도 얼마나 실력이 출중하고, 또 요리를 대하는 자세가 누구보다 진심이라는 게 느껴져서 너무 좋았어. 모든 시청자가 나와 같은 생각을 했을 거야.”
“감사합니다.”
“말도 안 되는 영상을 퍼트린 그 남자는 찾았어? 여기 왔던 손님이 맞긴 한 거야?”
서인우가 CCTV를 빤히 쳐다봤다.
“손님이 거짓말을 했을 리는 없으니까 오긴 했을 겁니다. 그런데, 며칠 밤새우며 찾았는데, 결국 못 찾았어요.”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마영준이 가벼운 웃음을 내보였다.
“그 일은 잊어버리고 전보다 더 열심히 하면 되는 거야. 분명 손님들이 결국 다 알게 돼. 뭐가 진실인지.”
“네, 그럴 거라 믿고 더 최선을 다하려고 합니다.”
가게에 들어오면서부터 입구를 유심히 살피던 마영준이 그곳을 눈짓하며 물었다.
“그런데, 인테리어는 언제 한 거야? 시간도 없었을텐데...”
“방송 잡히고 급하게 했어요.”
“저기가 원래 저렇게 근사했었나? 멀리서 보면 무슨 테마있는 카페 같은 분위기야. 아주 멋있어.”
“이번 작업 맡아주신 인테리어 사장님이 감각이 뛰어나신 것 같아요. 저희도 모두 만족하고 있습니다.”
마영준이 정다운에게 시선을 주자 동의한다는 뜻의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표정이 밝지는 않았다.
“방송에서는 더 근사하게 나오던데? 그래서 말이야...”
드르륵.
이준형이 주문한 햄버거와 음료를 들고 들어왔다.
“주문하신 버거 대령이요.”
햄버거를 먹게 돼서 신난 건지, 정다운이 요리하려는 걸 막아서 기쁜 건지 이준형이 실실 웃으며 다가왔다.
햄버거를 앞에 놓고 앉은 마영준이 다시 말을 꺼내기 시작했다.
“그래서 말이야...”